L.L.가 소중하게 여겼던 낡은 구형의 전화기를 갖다 버리게 된 것은 나나리의 죽음으로부터 13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C.C.는 쓰레기 더미에서 그 전화기를 발견했을 때, L.L.에게 정말 버릴 거냐고 두 번이나 물었다. L.L.의 첫 대답은 짜증이었고, 두 번째 대답은 눈물이었다. 버릴거다. 그래서 C.C.도 그것에 미련을 갖지 않고 버렸다.
스자쿠의 죽음은 C.C.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살아라’는 기어스에 걸린 사람치고는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게다가 테러에 의한 죽음이라니, 쿠루루기 스자쿠에게는 제일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기어스는 완벽하지 않지만,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죽음이라는 길을 차단시키는데 가장 극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제로 레퀴엠 직전까지 나이트 오브 제로로써 활약했던 때를 생각하면, L.L.는 그 기어스를 믿고 제로의 자리를 맡긴 것이었다.
지르크스탄에서도, 그 전까지도 쿠루루기 스자쿠의 강제적인 삶은 기어스가 이어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어스 캔슬러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 규칙에 얽매인 스자쿠가 그것을 써서 삶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었다.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낡은 태블릿에서 나오는 뉴스는, 제로가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으며, 그리고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얼마나 의연하게 대처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L.L.는 그날 저녁에 나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물여덟 번의 시도 끝에 이어진 전화였다. 나나리는 지친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했다.
L.L.는 그녀의 ‘괜찮다’는 말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랑한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무엇이 괜찮은지 물어보지 못해서, L.L.가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나나리는 받지 않았다. C.C.는 그때 L.L.도 저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를르슈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인간과 해리(解離)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그리고 그가 그렇게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의 눈물로 알게 되었다. L.L.는 눈물이 많다. 울고 있는 L.L.에게 C.C.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어스를 맹신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하는 것은 를르슈 본인도 익숙할 것이고, 앞으로 L.L.로써 살아갈 길들에는 더 많이 펼쳐질 것이다.
네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될까?
C.C.는 전화를 끌어안고서 나나리, 나나리, 나나리, 하고 우는 L.L.를 보았다. 어린 아이처럼 우는 를르슈의 얼굴은 너무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비참하게 우는 L.L.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그는 세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울었다.
나나리, 스자쿠가 죽었어, 스자쿠가…. 살아줬으면 했는데, 살아야 했는데. 아아아…!
스자쿠의 죽음이 있고 보름 가까이, L.L.는 전화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전화를 걸지도 않았고, 오로지 기다리기만 했다.
태블릿의 방송에서 나나리는 분주해보였지만, 정작 인터뷰가 있거나 연설을 할 때면 어느때보다 차분하고 강인해보였다.
테러는 죄악입니다. 폭력의 방식으로 쟁취한 결과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대화의 테이블을 만들었습니다. 브리타니아 공화국은 테러에 굴하지 않으며, 폭력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제로의 죽음을 애도하되, 그것이 평화와 정의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그가 지켜온 이 평화를 테러로부터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같이 이야기해야합니다.
평소보다 낮게 쉰 나나리의 목소리는 그녀가 얼마나 지치고 피로한지 알게 했으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분노의 힘을 감추진 못했다. 그녀가 나약하게 굴었던 것은 를르슈와 했던 마지막 전화가 끝이었다. 앞으로 그녀는 더 강하게 나아갈 것이며, 끝을 모르는 성장을 계속해서 거듭할 것이다.
오로지 L.L.와 C.C.만이 시간에 갇혀있는 채로, 모두들 한 걸음씩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조차도 나아가지 못한 채로 멈춰있다.
나나리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쿠루루기 스자쿠로부터는 당연하게도 오지 않았다. 그는 죽었으니까. 기어스의 조각을 찾아다니는 일도 멈추었다. L.L.의 영원히 살아있는 것에 대한 공포는 너무 안일했으며, 그 결과 앞으로 해야할 모든 일들의 의미를 잃게 했다. C.C.는 그에게 움직일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L.L.는 시간이 지나면 떠돌아 다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군말 없이 짐을 지고서 발걸음을 뗐다. 그정도면 충분했다.
C.C.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L.L.도 그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나리는 제로가 죽은 뒤 10년이 지나고 죽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비보가 세상에 알려졌다.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제로가 죽고 나서부터 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 그 병을 숨기고 계속해서 일정을 강행했다는 것, 병마와 싸우다가 결국 죽었다는 것. 세 문장으로 축약되는 그녀의 죽음에 C.C.는 놀란 눈으로 L.L.를 쳐다보았다.
L.L.는 그 소식을 들은 이후로부터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마치 죽고 싶은 사람처럼, 시체처럼 굴었다. C.C.는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그렇게 내버려둔 것은 그것 또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줘야만 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저주스러운 삶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스스로 그 공포를 깨달아야만 했다.
죽는 것만이 소원이 되는 비참함을, L.L.는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지 앞으로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왜 나를 살려냈어…?”
L.L.는 오랜만에 를르슈의 이야기를 꺼냈다. 살려냈다, 라는 말에 C.C.는 할 말이 없었지만, 열심히 흩어진 단어를 조합했다. 조잡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외로웠으니까.”
“외로워…?”
“코드가, 불안정하지만 느껴졌고, 너를 살려내는 건 도박이었어. 실제로는 반은 실패했고, 반은 성공했지만….”
“…도박이라고? 도박이라고?!”
일주일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몸은 바싹 말라있지만, 분노로 타오를 땐 말도 안되는 힘을 냈다. 를르슈가 된 L.L.는 절규했다.
“네 그 같잖은 외로움에 내가 왜 살아야하지?! 네 이기심에 내가 왜, 왜…! 네 멋대로!”
“그래서 말했잖아!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너…!”
“네가 멋대로 따라온거야, 네가 버리고 온 거라고, 네가 선택한 일에 대해서 왜 나한테 그래! 좋아서 하는 거라고 말한 건 너잖아!”
“……!”
“누가 더 이기적이지, 를르슈?!”
C.C.의 고함에 를르슈는 이를 악물었다. 바보 같이 마른 얼굴에는 어떻게든 감출 수 없는 어린 아이의 분노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거 하나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C.C.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저를 노려보는 를르슈와 시선을 마주했다.
“너를 살려낸 건 내 잘못이라고 쳐.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사는지, 그건 네가 선택할 일이었어.”
“……그렇다고!”
“네가 좋아서 한다며.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렇게 말해놓고 나서, 이제 와서 내 탓이라고 하면, 나는 어디까지 너를 책임져야하지?”
“…….”
“넌 정말, 최악이고, 재수없어. 네가 따라오지 않았다면 이미 기어스의 조각은 다 모으고도 끝이 났을거야! L.L.? 그런 이름이 쉬워보여?! 를르슈, 너는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한거잖아.”
“…….”
“덕분에 죽기 전에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꼴을 봐버렸으니 여한은 없어. 이제 네 맘대로 살길 바라, 를르슈.”
를르슈, 라고 불리우는 이름에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C.C.는 머물고 있는 숙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들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죽지 않는 몸이다. 닳아도 닳지 않는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은, 끊어진 인연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C.C.는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를르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야할까, 아니면 계속 도망쳐야 할까. 혼자서는 괜찮다고 말한 건 나니까, 를르슈 없이 혼자 움직이는 게 정답인가?
다시 혼자서 그런 여행을 해야한다.
그 결론에 다다르자 C.C.는 거리의 그림자 사이로 숨어들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C.C.에게 남은 사람은 없다. 같은 운명을 타고난 V.V.도,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던 샤를도, 친구라고 여겼던 마리안느도, 모두 없어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그들을 죽인 를르슈 뿐이었다. 그에게 C.C.가 가진 외로움의 원죄를 묻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처럼 그가 되살려낸 이유를 따지게 되면 너야말로 나를 외롭게 만들지 않았냐고 되묻고 싶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진작에 죽었는데. 그렇게 바라던 죽음을 코앞에 두고 나는 너를 선택했어. 네가 나를 고르지 않더라도, 나는 이제 보답받지 못하는 거에 익숙하니까 괜찮을 거라고. C.C.의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훔치는 속도보다 흘러내리는 속도가 빨라졌고, 결국 C.C.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였기 때문에 울음 소리는 더 처량하게 골목을 울렸다.
퉁퉁 부은 눈으로 숙소에 들어갔을 때에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고, 를르슈는 방금 전보다 개운한 얼굴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어서 와.”
를르슈의 말에 C.C.는 고개를 돌렸다.
“다녀왔다는 말, 안 할거야?”
“…다녀오게 된 건가?”
“그런거지. 다시 여기에 돌아왔으니까.”
“…….”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네가 ‘어서 와’라고 했잖아?”
“…아아, 그랬지.”
“그런 말에 대답해줄 의리 정도는 있으니까.”
“……의리.”
“그래.”
의리라는 말은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를르슈는 그것을 의리로 묶으며, 다시 데워온 음식을 내밀었다.
“함께 해야할 의리는 지켜야 돼. 그리고 네가 말했듯이, 나는 좋아서 이러고 있으니까, 그 말을 지키겠어.”
“…성실한 척 하지 마. 어차피 좋을 대로 한 거짓말이었잖아.”
“이제 와서 너에게 거짓말을 하면 뭐가 달라지지, C.C.?”
C.C.는 여유롭게 물어보는 를르슈의 눈가가 부어있다는 것을 보고서 결국 한숨을 쉬었다. C.C.의 패배였다. 세간에서 말하는 아주 흔한 말이 떠올랐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 이러나 저러나 를르슈의 그런 점까지 C.C.는 좋아했다.
하지만 를르슈는 그것을 의리를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은 C.C.는 무언가 저에게 더 이야기할 것이 있는 듯, 를르슈가 제 앞에 있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도 지금부터 서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뭘 할 생각인데?”
“유치한 질문.”
“…….”
를르슈가 내민 수프를 스푼으로 천천히 떠서 먹는다. 묽은 수프는 멀쩡한 재료가 아니었음에도 맛있었다. C.C.가 천천히 음식을 먹는 모습에 를르슈는 안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계약을 하지 않은 사람도, 다시 살려낼 수 있어?”
“……뭘 물어보나 했더니.”
“유치하다고 했잖아.”
“…당연히 안 돼.”
C.C.는 입맛이 떨어져서 스푼을 내려두었다. 정말 뭘 물어보나 했더니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C의 세계가 수복이 되고 나서도 불가능한가?”
“그럴수록 더 불가능하겠지. 그곳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뚜렷하게 해주는 곳이야.”
“…그럼 기어스의 조각을 회수하지 않는다면?”
“네가 기껏 죽어서 만든 평화로운 세계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 돼.”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를르슈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앉아있는 것은 C.C.였음에도,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C.C.가 아니었다. 그것이 무섭고 불안해서 C.C.는 식탁의 구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C의 세계에 순수하게 자기 힘으로 닿을 수 있는 사람은 기어스 계약자와 코드 보유자 밖에 없는 걸로 알아.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이미 유적이 되어버린 방식으로 C의 세계에 접근하겠지만…. 내가 너와 함께 다니면서 찾아본 결과, 지금 세계에는 그런 기어스 유적은 더 이상 없어.”
“다시 만든다면?”
“다시 만드는 사람을 기어스 조각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되겠지.”
“…….”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를르슈.”
언젠가 스스로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오는 것에 를르슈는 눈을 감았다. 아직 하지 못한 말들이 많았다. 인간의 삶은 생각보다 길기 때문에 그것을 믿은 것이 패인이었다. 비극은 어느날 갑자기 닥친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도 뒤틀리지 않았던가.
스자쿠와 나나리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될 사람들이었다. 를르슈의 악의에 의해서 희생된 인생을 더 즐기고, 그 평화를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서 맛보고, 그리고 더 오래 살아야만 했다. 를르슈가 여행에 지쳤을 때, 그들 특유의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맞아주리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며, 사람은 체스 판 위의 말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스자쿠와 나나리는,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겠지.”
“…….”
“그래. 알면서도 물어봤어. 유치하지?”
“누구나 그런 시간을 가져.”
“…그런가?”
“원하지도 않은 일을 당했을 때라던가, 원하는 일이 좌절되었을 때, 그때 기적을 바라게 돼. 게다가 너는 기적을 일으켰던 남자, 제로였으니까, 이런 생각을 가져도 크게 유치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
“네가 여기서 포기해도, 나는 너를 탓하지도 않을 거다. 나에게 의리를 다할 필요는 없어.”
C.C.의 말에 를르슈는 맞장구도 치지 않고 곧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참이나 이어지는 정적 끝에 C.C.는 소리 없이 스푼을 들고 수프를 떠먹었다. 를르슈의 요리는 여전히 맛있고, 그의 레파토리는 빈곤한 재료에도 불구하고 다양했다.
“아까 전은 미안했어.”
“?”
“너를 원망해서 미안하다.”
“…….”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밥맛 떨어지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은 뭔가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 또 다시 식사를 멈춘 C.C.는 대체 무슨 뜻이냐는 의미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이제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계속해서 L.L.로써 살아갈 거야. 그건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살아야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걸 부정하지 않아줬으면 해.”
“…흐음.”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하자면, 만약 C의 세계에서…. 스자쿠와 나나리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다면.”
“만나게 해달라고?”
“……그래.”
를르슈의 부탁은 아마 전이었다면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적으로도 무리인 데다가, 왜인지 모르게 바로 알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답을 머뭇거리는 C.C.의 모습에 를르슈는 무리냐고 물었다. 그 말에 C.C.는 스푼으로 수프를 휘휘 젓다가 대답했다.
“아마도, 무리라고 생각해. C의 세계는 아직도 불안정하고, 우리가 기어스의 조각을 다 회수하고 나서는 이미 그들이 지나간지 한참이 지났을 지도 몰라…. 그런 상황에서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건, 나도, 너도 무리일 거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더 나쁘군.”
를르슈는 식탁에 팔을 괴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어.”
“…위험한 생각이야.”
“그런가?”
“그래. 모처럼 샤를과 마리안느를 죽인 보람이 없어진다.”
“……그러네, 그런 보람이, 없어지겠군.”
우는 것처럼 떨리는 를르슈의 목소리는 어느새 조용해졌다. 소리는 C.C.가 음식을 먹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녀는 수프를 다 먹고, 다른 음식도 접시에 덜어서 다시 데웠고, 그것들을 먹고, 배고팠던 만큼 먹어치웠다.
먹으면서 모든 것을 정리했다. 를르슈는 L.L.가 될 수 없으며,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젠가 또 배신할 생각이기 때문에 미리 배신당할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또, 그가 죽은 스자쿠와 나나리에게 집착하는 만큼, C.C.는 그 애정의 반의 반의 반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살아있는 사람의 것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흔적을 남긴다. C.C.가 아무리 너그럽고 상냥하게 굴어도 죽은 두 사람을 따라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 경쟁에서 C.C.는 완벽한 패자였다.
패인은 를르슈를 살려낸 자기 자신이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기어스의 조각을 찾으러 다니자.”
“…….”
“짐 중에서 안 쓰는 물건도 정리도 하고. 인형은 계속 들고 다닐건가?”
“…버려도 좋아.”
“근처에 고물상이 있으니까 거기에 처분할 것들은 다 내일 아침까지 정리하는건 어때?”
“나쁘지 않아.”
그렇게 몇 번의 짐 줄이기를 하고 나서, 나나리의 전화기를 버린 를르슈는 미련 없이 마지막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조각을 쓰레기더미에 집어 넣었다.
그래서 그는 L.L.이 되었고, C.C.는 이것이 바라던 일이었는지를 떠올리면, 입맛이 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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