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세계 정복이면 차라리 쉬울 지도 모르겠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집무실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다. 황제가 되고 나서부터 를르슈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선대부터 행해온 식민지 확장 사업을 그만두고서 그들의 해방을 돕는 일까지 해냈을 때에 그는 남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 되었다. 남들에게는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적의 사나이는 정작 자신의 연애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의욕이 없었다. 기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를르슈는 펜끝을 굴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를르슈에게는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작위는 나이트 오브 제로인 기사가 있다. 그는 선대 황제 샤를 지 브리타니아의 기사로, 나이트 오브 세븐의 자리에 있었던 자였다. 그 이전에는 를르슈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것이 모두 과거형인 이유는 를르슈가 친구로써 그를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를르슈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순간, 스자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거나, 혹은 전해서 성취하거나, 두 가지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했었다.
과거의 를르슈는 지금보다 더 기고만장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에,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고백을 하기로 했었다. 지금의 를르슈라면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다.
그때 쿠루루기 스자쿠는 일본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아리에스 궁에 억류된 인질이었다. 나이도 같고, 아리에스 밖을 나갈 수 없다는 그 공통점은 두 사람의 관계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스자쿠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를, 를르슈에게는 하나 뿐인 연정의 상대로, 두 사람이 서로를 인식한 관계는 달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고백한 후에 를르슈는 차였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를르슈를 그런 존재로 볼 수 없다고 딱잘라 거절했다. 때마침 나이트 오브 세븐의 공석에 스자쿠의 이름이 몇번 거론되던 때였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고백을 거절하고 나서 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되어 아리에스를 떠났다.
홀로 남은 를르슈는 황제가 될 생각도 없이, 사랑에 패배한 얼간이가 되어버린 기분에 멍청하게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유력한 차기 황제 후보였던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의 추천으로—그리고 여러가지 사건을 거쳐서, 지금의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나이트 오브 세븐을 나이트 오브 제로의 자리에 두겠다는 말을 했을 때, 놀란 스자쿠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했다. 사랑의 고백을 거절당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 반, 그래도 받아주었으면 하는 생각 반으로 를르슈는 제안한 것이었다. 스자쿠는 어딘가 석연치않은 구석이 남은 얼굴로, 낮은 목소리로 ‘Yes, Your Majesty’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다다른다.
과거에 를르슈의 고백을 거절 했던 남자는 무슨 마음으로 를르슈의 기사가 되었는지.
그 마음을 알고 싶지만, 물어볼 용기도 없으며, 맨정신으로 그 답을 들을 용기도 없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집무실에서 매일 그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어렸을 적, 치기에 가까웠던 그 고백은 시간을 더해갈수록 흐려지기는커녕 스자쿠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욱 부풀어가고 있었다.
기사가 되어준 때에는 혹시 모를 희망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다음날 마주한 나이트 오브 제로의 차가운 모습에 를르슈는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에 시달렸다. 황제의 명령이고, 스자쿠는 에리어 출신의 벼락 출세를 한 기사였으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를르슈가 아닌 다른 사람이 황제가 되었더라도 그는 나이트 오브 제로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자학에 가까운 생각을 마친 를르슈는 다음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트 오브 제로는 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를르슈의 옆을 굳건히 지킨다.
그런 점에 질릴만도 할텐데, 를르슈는 매번 설레고 말아버리는 것이다.
를르슈가 혼자서 짝사랑에 애가 타들어가는 것은 정말 ‘혼자서’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는 그의 속내를 알 일이 없었다. 를르슈의 친애하는 여동생인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역시 자신의 오빠가 기사를 짝사랑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를르슈는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쿠루루기 스자쿠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폐하가 저를 얼마나 열렬하게 사모하고 있는지.
서류를 주고 받는 손들이 살짝 스칠 때마다 붉어지는 뺨이나, 마주치는 시선이 얼마 못가 어정쩡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 스자쿠가 문을 두드려 입실을 알리면 그때마다 살짝 긴장하고 있는 표정 같은 것들이 그 증거였다.
열일곱 살의 를르슈는 같은 열일곱 살의 스자쿠에게 고백을 했었다. 아리에스에는 를르슈가 일본에서 온 스자쿠가 마음을 달랠 수 있게 심어둔 벚나무가 있었다. 그 아래 흩날리는 벚꽃 사이로, 를르슈는 스자쿠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시절의 스자쿠는 를르슈와 나나리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시달리고 있던 때였다. 를르슈의 기사가 될 것인지, 아니면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어 지금보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에 갈등하고 있었다. 를르슈의 기사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으며, 를르슈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바란다면 이뤄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스자쿠는 겁이 났다.
그의 애정이 얼마낙 깊고 깨끗한지 알고 있다. 를르슈의 나나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을 가끔은 부러워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애정보다 더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저에게 와닿는다고 생각하면, 스자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런 것을 누릴 자격이나 있을까.
스자쿠는 그 다음날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되어 아리에스를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를르슈가 황제가 되어 나이트 오브 제로로 그에게 충성을 요구할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
를르슈에 대한 소문은 아리에스 밖에서는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스자쿠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되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다름 아닌 를르슈에 대한 것이었다. 샤를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인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를 쏙 빼닮은 그 황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의 명석한 두뇌는 얼마나 훌륭한지, 그의 다정함이 얼마나 상냥한지에 대해서. 스자쿠는 를르슈에 대해서 설명할수록 를르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를 깨닫게 되었다.
를르슈 전하, 라는 낯선 이름으로 그를 지칭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그를 낯설게 부르고, 그의 낯익은 면을 설명하는 것은 스자쿠로 하여금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은 를르슈 전하의 취향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누군가가 물어오는 짓궃은 질문에 스자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는 를르슈가 막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며, 또 전쟁터에서는 승전 소식을 한창 알리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가십거리가 어느 연회를 가든 따라다니는 때였다.
한때 스자쿠는 를르슈가 살았던 아리에스에 살았으며, 그와 가까웠던 친구라는 이유로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스자쿠는 자신이 그의 취향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이젠 마주칠 일도 없는 를르슈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은 기분도 아닐 때도 있었다.
를르슈에 대한 기분은 늘 변덕스러웠다.
를르슈는 그때 고백도 다 잊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괜히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도 우습잖아.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이트 오브 세븐의 자리를 지켰다. 를르슈가 차기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기분은 묘했다.
그리고 나이트 오브 제로가 되어달라는 말로 다시 재회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의 눈빛에서 여전한 연정을 느꼈다. 저를 바라보는 간절한 눈동자의 긴장을 읽는 순간, 스자쿠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환호성을 질렀다.
를르슈의 마음이 현재진행형인 채로, 스자쿠는 그것을 모르는 척하며, 지내는 일상은 평화롭다.
누구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착각하는 황제 폐하의 마음을 기만하는 그의 기사는, 그의 애정을 느낄 때마다 승리감에 젖어 기뻐했다.
대국의 황제가 바쁜 것과 별개로, 짝사랑은 순조롭기도 하면서, 순조롭지 않기도 했다. 를르슈는 7월의 달력을 살펴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7월 10일에 마음 속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친 를르슈는 그날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나이트 오브 제로의 생일을 앞두고서 를르슈가 해야할 일은 간단했다. 기사의 생일 연회를 준비하라고 아랫것들에게 명령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트 오브 제로에게 어떻게 보내고 싶냐고 묻는 방법도 있었다. 너는 어떻게 보내고 싶지? 이제까지 스자쿠는 한결 같은 대답으로 돌려주었다. 시국이 바쁜 만큼, 그냥 넘어가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나이트 오브 제로의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미련하다고 생각될지는 몰라도, 를르슈는 매년 그의 생일 선물을 사고 싶어했고, 생일 축하 편지를 보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마음 속으로만 계획을 세울 뿐이었다. 실행할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고, 무엇보다 용기가 없었다.
또 다시 거절 당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번 연회에 대해서도 스자쿠는 듣기 좋은 말로 거절하지 않을까. 를르슈는 7월로 달력을 완전히 넘겨버렸다. 여기서는 조금 단호하게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이트 오브 제로가 되고 나서 한 번도 생일을 챙겨주지 않으면, 주변에서 기사에 대해 각박한 황제에 대한 이야기가 돌지도 모르고…. 를르슈는 말하기 편한 변명거리를 고르면서 다짐했다.
이러니 저러니, 선물이나 편지를 보내진 못하더라도, 스자쿠의 생일을 챙겨주고 싶었다. 여타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말이다.
를르슈가 스자쿠에게 연회에 대한 통보를 했을 때, 스자쿠는 를르슈의 귀여움을 보고서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딱딱한 말투로 대꾸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가 어딘가 기가 죽은 채인 것도 귀여웠다. 그럼 전달하도록 해. 를르슈의 사소한 심술이었다. 스자쿠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나이트 오브 제로의 생일 연회에 대한 명령을 하달하고 나면 다들 의아한 얼굴로 스자쿠를 한 번 바라보다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본인이 본인의 생일에 대해서 챙겨달라고 말하는 것이니 좀 우스운 모양이긴 했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움을 가볍게 이기는 를르슈의 귀여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왔다.
그런 스자쿠의 웃음을 그리워하는 를르슈를 다시 마주하러 간다. 스자쿠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다녀왔다고 말하며 그가 맡겼던 일들에 대한 보고를 했다. 를르슈의 표정 어딘가가 시무룩해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정말 귀엽지 않을 수가 없다.
7월 10일 당일.
스자쿠가 귀여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를르슈는 시름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홀에는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 흐르고 있으며, 경쾌한 춤 솜씨를 뽐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활기가 느껴졌다. 가장 가운데는 나나리와 유페미아의 무대였다. 여동생들의 춤을 즐기는 척, 마음 한 구석이 가라앉은 것을 겨우 감춘 를르슈는 연회를 연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가 주인공인 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원래 나이트 오브 라운즈였던지라, 그의 인맥은 를르슈가 아는 사람이 절반, 모르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그러나 그와 어울리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일면식의 여부와 관계 없이 를르슈는 질투하고 말았다.
기사의 생일이다. 본인이 생일을 즐기면 목적 달성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를르슈는 또 다시 욕심을 내고 말았다. 그는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서 칼 같이 깨닫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스자쿠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괜한 질투로 분위기를 망치게 될 지도 모른다.
심지어 를르슈는 스자쿠의 주군일 뿐, 연인도 뭣도 아닌데 말이다.
정말 쓸 데 없는 질투이다. 추하고 역겹다. 를르슈는 겨우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나나리에게 돌리면서, 그녀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온 나나리가 댄스를 청했다. 기꺼이 어울려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를르슈의 질투를 느낀 스자쿠는 입가에 계속 번지는 웃음을 생일이라는 이유로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편했다.
알던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의 치근덕거림이 귀찮을 법한데도, 를르슈의 가라앉는 기분을 볼 때면 스자쿠는 괜히 반갑게 굴며 너스레를 떨었다. 황제를 기만하는 것은 충분히 경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스자쿠는 그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 왜 이렇게 즐거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를르슈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은 즐겁다. 그의 애정을 한없이 시험할 때면, 스자쿠는 짜릿함을 느꼈다. 지금처럼 스자쿠가 이름도 모르는 레이디의 손등에 입을 맞출 때, 를르슈의 이쪽을 향하던 고개가 바로 거칠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을 때면 그 짜릿함은 쾌감을 불러왔다.
나나리가 있는 곳으로 도망친 를르슈의 뒤를 보면서, 스자쿠는 이제 슬슬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써는 정말 많은 용기를 낸 것이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명령이었지만, 거의 허락을 구하는 수준에 가까웠던 생일 연회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여전한 애정을 느끼게 했다. 를르슈가 저의 눈치를 볼 때면 스자쿠는 짜릿함, 승리감, 그리고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가까이 달라붙는 여자들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스자쿠는 자신의 황제 폐하가 춤을 추고 있는 홀의 가운데로 천천히 향했다.
그 사랑스러움에 대해서 이제 슬슬 말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를르슈의 기특함에 대해서 칭찬을 해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연회는 밤새도록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 말은 스자쿠가 다른 사람과 있는 꼴을 밤새도록 봐야한다는 이야기였다. 스자쿠가 즐기고 있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를르슈는, 그런 불쾌함을 참고서 견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괴로웠다. 나나리와 추고 있던 춤의 마지막 마디가 끝이 나면서, 선율은 부드럽게 흐르며 느릿한 음악으로 바뀌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를르슈는 스자쿠가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들만 북적거렸지 정작 스자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벌써 가버렸을까. 를르슈는 잠시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던 자신에 대해서 이를 악물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는, 어디 있느냐. 소리내어 말하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물어야하는지, 누구에게 답을 들어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약간의 현기증이 를르슈를 덮쳤다.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찾고 있던 사람이 다가왔다.
“폐하, 잠깐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스자쿠.”
“예, 접니다.”
를르슈의 어깨를 가볍게 쥔 스자쿠는 사람이 한적한 발코니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바깥 공기에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휘청거리던 몸을 난간에 겨우 기대고 있으면 스자쿠가 불안한 그의 몸을 붙잡아 저에게 기대게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 상태로 떨어질까봐 걱정입니다.”
“누가 떨어진다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고 나서, 를르슈는 약간 후회했다. 모처럼 단둘이서, 일 이외의 시간으로 같이 보내고 있는 때인데 그렇게 툴툴거리며 대답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노릇이기에 를르슈는 어정쩡하게 스자쿠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스자쿠는 편하게 기대라고 품을 내어준 것이겠지만, 를르슈는 그의 품에 편안히 기댈 수가 없었다. 명색이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의 품이다.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봐 결국 를르슈는 아쉬운 마음을 떨치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제 괜찮아.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고…. 너도 빨리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는 게.”
“제가 불편하십니까?”
“그게 아니야. 이런 데서 시간 낭비 하는 것도 아쉽잖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자쿠의 존댓말은 를르슈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가 선을 긋는 것은 를르슈가 고백을 하고 나서부터 생긴 일이었다. 그의 존댓말, 를르슈 전하, 폐하, 그런 말들은 를르슈의 고백을 떠올리게 하고, 그의 차디찬 거절을 연상시켰다.
그런 것에 수차례 상처받으면서도 그를 옆에 두고 있는 이유는 여전히 하나다. 그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낭비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면서 를르슈는 또 다시 마음이 쓰렸다. 스자쿠와 사적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소중하다. 낭비 따위가 아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왜 그런가요?”
“모처럼,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술에 취한 것인지,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감정에 취한 것인지. 를르슈는 떨어지는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에게 놀랐다. 하지만 듣고 있는 상대—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대꾸했다.
“저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나요?”
이제 굳이 할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았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시선을 피한 채로 홀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스자쿠의 손이 를르슈의 팔을 붙잡았다.
“놔라.”
“아뇨,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신 건 폐하잖아요.”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런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으면서.”
“뭐?”
“계속, 쳐다보고 있었잖아요.”
스자쿠는 를르슈의 얼굴이 경악으로 빨갛게 물들고, 그리고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껏 를르슈의 마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느꼈던 짜릿함 같은 것과 다른 기분이었다. 달빛 아래에서 마주한 를르슈의 눈에는 불안함이 잔뜩 묻어났다.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그가 겁쟁이가 된 원인에는 스자쿠가 있다. 스자쿠는 그 범인으로써 이제 그가 걸린 저주를 풀어주려고 할 때였다.
“쳐다보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소리가 먹먹하게 울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울음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이제껏 를르슈의 많은 얼굴을 보아왔지만 눈물 만큼은 본 적이 없던 스자쿠는 당황했다.
“불쾌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군, 나이트 오브 제로. 아니, 그 자리도 이제 싫다면, 그만둬도 좋아. 그래, 오늘로써 마지막으로 하는 게 어때? 후련한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그리고 를르슈의 눈물과 마주하는 순간, 스자쿠는 이제껏 떠올렸던 모든 말을 잊어버렸다. 하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턱선을 따라 뚝뚝 떨어지며 스자쿠를 괴롭게 만들었다. 를르슈의 마음을 가지고 즐거워했던 때를 반성하라고 꾸짖기라도 하듯이.
“나를 바보 취급하는 건가? 너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나를 막 다뤄도 된다고 생각해?”
를르슈의 입에서 떨어지는 두 번째 고백에 스자쿠는 고개를 내젓지도, 끄덕이지도 못한 채로 멍하니 그것을 듣고만 있었다.
“너를 여전히 좋아하는 내가 만만해?”
이제 됐어, 필요 없어. 나이트 오브 제로 같은 것도 다 필요 없어.
를르슈는 눈물을 거칠게 닦으면서, 스자쿠의 말을 기다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이제 마지막이니 지껄이고 싶은 만큼 지껄여봐. 를르슈의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스자쿠는 지금의 감정을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었다. 를르슈의 첫 고백이었다. 그의 깊고 깨끗한 애정이 오롯이 저를 향했을 때의 그 환희는 공포에 가까울 정도였다. 여전히 그 마음을 가지고서 저에게 부딪혀오는 를르슈를, 스자쿠는 이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를르슈.”
존칭을 빼고 이름만으로 불렸을 때, 를르슈는 그 순간 일말의 희망을 품어버리고 마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적당히 마음을 끊을 줄 모르는 자신이 미련해서 눈물이 또 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마지막인 만큼 더 이상 도망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그의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도 나를 좋아해?”
마음이 아플 정도로 느껴지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뭘까. 를르슈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스자쿠를 좋아하는 마음은 멈추지가 않았다. 그가 나이트 오브 제로를 그만두고 를르슈가 모르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서웠다.
또 다시 거절의 말을 할 것 같은 스자쿠는 예상과 다르게 를르슈의 뺨을 흘렀던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다. 그의 나긋한 손이 떨어지는 것에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 안녕이다. 지긋지긋한 짝사랑, 그리고 첫사랑. 를르슈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고 할 때, 스자쿠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품에 끌어안긴 를르슈는 무슨 짓이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저의 입술을 덮는 스자쿠의 입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어진 입 사이로 들어오는 스자쿠의 혀가 얽히면서, 뻣뻣하게 굳은 를르슈의 것을 빨고 핥는 것이 느껴졌다. 그 적나라한 감각에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정작 키스를 한 스자쿠는 입술을 떼어내고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를르슈의 입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도 를르슈가 좋아.”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망상이 너무 심해서 현실과 구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를르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을 만지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의 소리에 를르슈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으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꿈과 같은 일이었다. 스자쿠가 키스를 해주었고, 스자쿠가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를르슈가 멍하니 저를 쳐다보는 것에, 스자쿠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를르슈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 아파. 를르슈는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프겠지, 꿈이 아니니까. 스자쿠의 말은 현실이었다.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를르슈는 저를 바라보는 스자쿠의 시선이 여느 때보다 부드러운 것에 또 눈물이 나고 말았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나나리 앞에서 보일 수 없다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그의 퇴장을 서둘러 도왔다. 황제의 침실로 돌아가는 길에는 기사로서의 무표정을 갖춘 스자쿠가 있었지만, 를르슈의 비어있던 손을 잡아주는 것도 스자쿠였다. 꿈이 아니구나. 를르슈는 붉어진 뺨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길 바라면서 그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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