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포드 학원의 장점이라고 하면 교사의 넓음이라고 할 수 있다. 를르슈 람페르지는 학생 시절에 이 넓은 교사를 이용하여 학교 수업 중의 땡땡이도 치고 나쁜 일탈도 즐기기도 했으나, 선생이 되어서는 그것들은 모두 추억이 되고 말았다. 람페르지 선생님. 그것이 를르슈의 학원에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람페르지 선생은 사실상 선생은 아니고 애쉬포드 학원의 이사장인 미레이 애쉬포드의 지인으로 수업을 가르친다거나 학생 담당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구교사의 낡은 양호실에서 가끔 클럽 활동 중에 다치는 학생들을 봐준다거나 하는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클럽 활동이 있는 방과후 직전까지는, 그 구교사에서 자신의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애쉬포드 대학부의 로이드 아스플런드 교수와 안면이 제법 있기 때문에, 아스플런드 교수가 나이트메어 프레임 연구 감수를 맡길 때에는 양호실 문을 걸어잠그고 연구에 몰두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어딘가 불량한 양호 선생님으로 통하는 면도 있지만, 그런점이 람페르지 선생의 인기를 올리는 데 한몫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람페르지 선생은 그 다소의 불량함으로 얻은 인기를 아쉬워하지 않은 채로, 성실하게 양호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번 학기부터 애쉬포드 학원 고등부의 체육 선생으로 부임한 쿠루루기 스자쿠 때문이었다.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해서 를르슈 람페르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무려 그와 를르슈는 같은 애쉬포드 학원 고등부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쓰는 것은 오로지 를르슈 뿐이었을 것이다. 쿠루루기 스자쿠와 를르슈의 연결고리는 같은 학교 출신, 그것 말고는 없었고, 를르슈는 그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부를 졸업하고 나서 를르슈의 다 끝맺은 줄 알았던 짝사랑의 심지가 다시 불이 붙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를르슈의 짝사랑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는 없었다. 단상 위에서 ‘쿠루루기 스자쿠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스자쿠를 보고서 안타까워하는 것은 를르슈 밖에 없었다. 스자쿠가 를르슈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친구나 같은 반 급우 수준도 아닌 같은 시기 학생회 부회장 정도였을 것이다.
냉정하고 이지적인 를르슈 람페르지는 그런 것을 모두 파악하고 나서 마음을 다시 접기로 했다.
그 다짐을 무너뜨린 것이 다름 아닌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구교사 양호실이 더 가까워서 이쪽으로 왔는데….”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를르슈의 앞에 나타난 스자쿠는 다 긁힌 오른팔을 들어보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퇴근하시는 거면 본관 양호실로 가보겠습니다. 를르슈에게 존댓말을 하는 스자쿠는 그와 첫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 같았다. 그것이 좀 짝사랑하는 사람으로써는 마음이 쓰린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를르슈는 괜찮다고 하면서 스자쿠를 양호실로 들였다. 소독약과 습윤 밴드 같은 것을 꺼내들고 오면 스자쿠가 스스로 할 수 있으니 먼저 가보셔도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래보여도 양호 선생입니다. 할 일을 못 하게 하면 곤란해지는 건 저라구요.”
“하하, 그럼 부탁드릴게요.”
“클럽 활동하는 애들도 이렇게 다쳐오진 않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다쳐오시다니.”
를르슈는 소독약으로 가볍게 상처를 훑으며 말을 꺼냈다. 말끝이 떨리진 않는지 걱정이 됐지만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뭐, 제가 다치는 게 애들이 다치는 것보단 낫죠.”
“무슨 일 있었나요?”
“부실에 있던 찬장이 무너지면서 애들 대신에 감싸느라….”
“찬장이 무너졌다구요?”
“네, 아, 애들은 안 다쳤어요.”
“아니, 본인이 다쳐왔으면 마이너스죠. 상처는 얕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스자쿠의 오른팔에 습윤밴드를 붙여주고 나면 를르슈는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 물 안 닿게 하시고, 아니 닿아도 괜찮긴 하지만…. 그 밴드는 굳이 따로 갈 필요 없이 상처 나을 때까지 계속 붙여두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람페르지 선생님.”
“조심하세요, 쿠루루기 선생님.”
쿠루루기 선생님, 하고 부르는 말에 스자쿠는 빙긋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를르슈는 난데 없는 미소에 시선을 어물쩡 다른 곳으로 돌렸다.
“람페르지 선생님이 부회장이었죠?”
“네?”
“미모의 부회장. 우리 때 유명했잖아요.”
“…그런 별명으로 불린 적 없는데요.”
“본인은 모를 수도 있겠네요. 음,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지금 이사장님이 학생회장이었을 때, 같이 인기있던 부회장으로. 클럽 활동비 두 배 업 이벤트에서 부상으로 학생회 멤버 키스도 걸리고 그랬던 때에 여자애들이.”
“아, 아, 아! 알겠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이유가 뭐죠?”
를르슈는 스자쿠가 저에 대해서 갑자기 알고 있다는 티를 내는 것에 부끄러워서 얼굴을 감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더 내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기에 쉽다는 걸 알아서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반가워서요.”
“두 번 반갑다가는 정말….”
“쿠루루기 선생님은 발음하기 힘들죠? 스자쿠 선생님도 좋아요.”
스자쿠 선생님?
갑자기 퍼스트 네임을 부르게 하는 스자쿠의 허락에 를르슈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스, 자쿠 선생님…? 를르슈의 어눌하게 따라하는 말투에 스자쿠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웃음에 를르슈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려던 찰나였다.
“애들도 그렇게 부르니까요.”
“…아, 그런가요.”
“람페르지 선생님, 치료 고맙습니다. 저 때문에 늦게 들어가셔서 어떡하죠?”
를르슈는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치워두었던 가방을 어깨에 매고서 괜찮다고 말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도 어쩌다가 듣고…. 를르슈의 힘빠진 목소리는 횡설수설하진 않았지만 어딘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였다.
스자쿠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만, 보내고 싶지 않은 기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놓고 붙잡았다가는 좋아한다는 티가 날까봐 또 몸을 사리는 때일 것 같기도 했다.
“금요일인데 데이트 약속 같은 거 없으세요?”
“애인도 없어요.”
“람페르지 선생님은 애인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요. 연애에 신경 쓸 시간도 없고.”
“흠…. 그래요?”
양호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둘은 본관 현관까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본관에 있는 교무실로 스자쿠가 먼저 들어가고 나면, 를르슈는 본관 현관 너머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짧은 인삿말을 준비해야했다. 를르슈는 어떻게 해야 다음에도 또 인사를 했을 때 어색하지 않게, 또 산뜻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인삿말이 뭐가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람페르지 선생님은 이사장님 때문에 학교에 있는거죠?”
“뭐,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요. 애쉬포드 쪽이랑 집안적으로도 연이 있고…. 여기는 나이트메어 프레임에 대해서 연구하기에 적당히 좋아요.”
“나이트메어 프레임?”
“네, 대학부의 어떤 교수랑 같이 연구하고 있어요.”
“여자?”
“남자에요.”
“아쉽겠네요.”
“뭐가요?”
“음……. 사귄다거나, 그럴 수도 있잖아요. 여자라면.”
“방금 전에도 말했죠, 연애에는 신경 쓸 시간 없다고.”
스자쿠가 상대라면 또 모를까.
를르슈는 본관 앞까지 십 미터 정도 남은 거리를 아쉽게 바라보면서 걸었다.
“그럼 뭐에 관심 있어요? 나이트메어 프레임 말고.”
“딱히, 관심을 둔다거나 하는 건 없네요.”
“그럼 왜 굳이 학교에…?”
“…….”
“아, 너무 캐물었나요?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스자쿠는 앞머리를 슥 넘기면서 말했다. 잘생긴 이마가 살짝 드러났다가 앞머리 사이로 가려지는 것에 를르슈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바닥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여동생이 이쪽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갈 수 있는 직장이 필요해서.”
“여동생?”
“워낙에 귀엽고, 착한데다가 순진하고, 저는 오빠로써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도와주고 싶은데.”
“아아….”
스자쿠의 약간 탄식 같은 소리에 를르슈는 어딘가 구멍을 찾아 그 사이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미레이에게 이런 이유로 애쉬포드 학원 고등부에서, 그것도 구교사에서 일하게 된 계기를 들키게 되었던 것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을까. 를르슈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면서 이제 본관 건물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집어 삼킬 정도로 가까워진 것에 안도하면서도, 또 불안해하기도 했다.
“멋진 오빠네요, 람페르지 선생님.”
“안 놀리시네요.”
“멋지잖아요. 전 외동이라 그런걸 잘 모르지만, 분명 다들 멋진 오빠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 런가요.”
스자쿠는 현관을 앞에 두고서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머뭇거리는 듯이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짐한 것처럼 주먹을 꽉 쥔 채로 를르슈를 쳐다보았다.
“사실은 이사장님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이사장…? 왜요?”
“그러게요. 따로 이유가 있으실 텐데,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네요.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를르슈가 뭐가, 라고 운을 떼려고 하는 순간 스자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를르슈가 치료해준 오른손을 흔들어보이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치료 고맙습니다. 나중에 람페르지 선생님께 맛있는 거 한 턱 쏠게요.”
“예? 아, 별 거 아니었는데.”
“혼자서는 제대로 치료 못했을 거예요. 전 그럼 이제 퇴근 준비하러 가볼게요. 람페르지 선생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스자쿠의 손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바이바이, 하고 아이들이 교정에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면서, 를르슈도 손을 흔들었다.
꼭 서로 친구처럼 대화를 하고 인사도 했다. 별 거 아닌 이야기였지만. 를르슈는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것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달리기를 한참이나 하고 뛰어온 사람처럼 운전석에 앉았을 때에는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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