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번이고 알몸으로 서로를 끌어안았는지 모른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체온에 늘 위로를 받고 안정을 되찾았다. 저보다 낮으면서도 금방 따뜻해지는 그 체온에 구원 같은 것을 받은 것 같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를르슈는 따뜻한 사람이다. 저 같이 더럽고 질척한 무언가로 점철된 하등한 것과 어울리지 말아야한다. 동화책 속의 왕자님은 공주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맞는 것처럼.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 아파트를 찾아오는 를르슈를 내치지 못했다. 왕자님도 지치고 슬플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왕자님을 달래주는 것이 스자쿠의 몫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에 적혀지지 않는 그런 역할이 스자쿠의 역할이다.
어디까지가 를르슈의 세계는 동화책에서, 스자쿠의 세상은 현실에서. 그것이 스자쿠가 그어놓은 선이었다.
를르슈는 이번에도 그 선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날의 를르슈는 어딘가 들뜬 분위기였다. 방학을 했으니 그런걸까.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거실을 내어주고서는 차를 가지고 왔다. 섹스는 조금 있다가 샤워를 하고 나서 하는 게 좋겠지. 요즘은 여름이 되어 습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섹스 전의 샤워가 귀찮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를르슈와의 섹스는 조금이라도 기분 좋은 상태에서 이어졌으면 했다. 그래야 를르슈가 다음에도 또 저를 찾아와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를 내밀고, 적당한 온도로 식을 때까지 서로 말없이 정적을 즐기고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와의 정적을 어색해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적을 이기지 못한 채로 무언가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는 괜한 공허함을 낳았다. 하지만 를르슈는 조용히 입을 다물면서 스자쿠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로도 충분히 스자쿠는 즐거울 수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말을 걸었다. 말끝이 어딘가 떨리고 어색함의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뻣뻣함이 묻어났지만 어떻게든 닿으려고 하는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 임신한 거 같아, 스자쿠.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를르슈 람페르지가 얼마나 정숙한 남자인지 알고 있다. 그는 아무하고나 쉽게 뒹굴 사람이 아니었고, 운이 안 좋게 스자쿠를 상대로 그런 것을 하고 있을 뿐이지, 원래는 섹스 같은 것에도 크게 호기심을 갖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술에 취한 를르슈를 덮친 스자쿠만 아니었다면 그는 쾌락조차 모른 채로 살아갔을 정숙한 남자이다. 그런 그에게 임신을 시킬 상대는 한 명, 즉 스자쿠 본인 밖에 없었다. 를르슈는 대답 없는 스자쿠를 바라보며 불안한 듯이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 또한 이 상황이 처음이겠지.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까.
스자쿠는 입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지금 를르슈에게 다정하게 굴어서는 안된다. 그를 끌어안을 팔을 잘라내는 것이 일순위였다. 를르슈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스자쿠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를르슈는 깨끗하고, 그의 애정은 고결하며, 그러한 사람의 상대로써 스자쿠는 어울리지 않았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쿠루루기 가문의 일원으로써, 그 훗날 가문의 가주가 되는 것이 당연했으며, 그러기 위해서 누려왔던 모든 특혜와 권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것이 의무. 의무만큼 스자쿠를 무섭게 하는 것이 없었다. 쿠루루기 가문의 의무는 스자쿠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무에 를르슈를 함께하게 만든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스자쿠는 새어나가려는 흐느낌 같은 것을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누구 애야?
—…뭐?
—누구 애냐고. 를르슈, 설마 나랑만 잤다고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지?
다음으로 돌아온 것은 따귀였다. 매섭게 뺨을 때리는 손길은 소리만 요란했지만 사실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찰싹 내리치는 소리에 스자쿠는 제 뺨을 어루만지면서 하핫, 하고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를르슈는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왜 때리는 거야, 물어볼 만한 걸 물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너, 사람을 대체 뭘로 보고…!
—를르슈야말로 나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해?
—뭐?
—내가 책임져줄 거라고 생각해? 그게 내 애라고 하는 증거도 없는데.
괜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기분.
스자쿠는 를르슈의 떨리는 손을 보면서 잡아주고 싶으면서도, 잡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너 말고는….
—나는 너 말고도 많아, 를르슈.
—…….
—너 말고도 섹스하는 사람이 많아. 그래서 널 책임지고 싶지 않아.
반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은 틀린 말이다.
스자쿠의 섹스는 를르슈 말고도 하는 사람이 많았고, 대부분 그가 유혹을 당해서 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가 원해서 손을 뻗은 것은 를르슈만이 유일했다.
그 유일을 잘라내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를르슈를 책임지고 싶었지만, 그를 책임지기 위해 져야하는 의무감에 억눌릴 것 같았다. 스스로도 견뎌낼 수 없는 그 의무에 를르슈도 가라앉아버리면 어떡하지, 그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잘라내고 밀어내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알겠다. 이제 연락도 안 하고, 여기도 안 와.
—…그래?
그 애는, 어떻게 할거야?
그런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스자쿠는 빠르게 짐을 챙겨 나가는 를르슈를 바라보며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을 뿐이었다. 현명한 를르슈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것이다. 그 아이는 지워지겠지. 스자쿠가 실수로 남긴 흔적은 빨리 지워져야 했다.
를르슈의 밝은 미래에, 그림책 속 동화 같은 그 미래에 흠을 남겨서는 안 되니까.
그의 낮은 자존감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최악일 줄은 몰랐다. 를르슈는 아직 부풀지도 않은 아랫배를 감싸면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스자쿠의 그런 치욕스러운 말들이 뱃속까지 닿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를르슈가 스자쿠 외의 관계를 한 남자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아마 그가 겁쟁이라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를르슈의 마음은 분노 보다는 슬픔이 더 깊었다. 분노는 그 다음 문제였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를르슈와 스자쿠 사이의 아이가 부정당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 가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스자쿠의 아파트에 다시 가고 싶었다. 달려가서 정말,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지고 들며 그의 멱살을 잡고서 다그치고 싶었다. 그리고 진심을 듣고, 스자쿠를 마음껏 끌어안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를르슈는 그러는 대신에 다른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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