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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튀 스자루루 2

DOZI 2020.08.22 19:40 read.560 /

쿠루루기 스자쿠는 근본부터 글러먹은 남자인 것을 를르슈는 알고 있었을까?

를르슈가 스자쿠의 아파트에서 손찌검을 하고 나서 바로 뛰쳐나간 그 날에 스자쿠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답지 않은 반성이었다.

스자쿠는 태어나면서부터 정치가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스스로도 그런 위치에 있을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꽤나 괴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못 견딜만한 것은 아니었다. 주어지는 의무가 큰 만큼의 보상은 컸고, 깔려진 레일 위를 달리는 기분은 썩 나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살아갈수록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고, 그것은 또 자기혐오로 이어져서 어느 순간에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기에는 끔찍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진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자쿠를 스쳐지나갔던 숱한 인연들을 떠올리며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했다. 를르슈도 아마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제발 그러길 바랐다. 스쳐지나가서, 인연조차 닿지 않을 먼 사람이 되면 스자쿠는 만족할 것 같았다. 

이런 사람에게 를르슈는 과분하고, 를르슈와의 아이도 과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쿠루루기 스자쿠는 겉보기와 다르게 꽤나 많이 뒤틀려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기가 막히게 감추고 있는 이 역겨운 괴리를 를르슈가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랄 뿐이었다. 

 

방학이 끝이 났다. 그 말은 스자쿠를 번민에 빠지게 했던 여름도 끝이 났다는 이야기였다. 

를르슈는 그 사이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애를 지웠다면, 를르슈는 체력이 없으니까 회복이 더딜 지도 모르겠다. 스자쿠는 조금 누그러진 햇살을 받으면서 교정을 걷고 있었다. 를르슈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한 달도 더 된 이야기라 만약에 학교에서 그와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긴장한 채로 학교를 다닌지 보름 정도 지났을 때, 를르슈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여름방학 중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했다. 워낙에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같은 과인 사람을 찾아 물었을 때에 들었던 그의 ‘모른다’는 말에 왠지 모를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비웠다. 를르슈가 저에게 그런 흔적을 남긴 스자쿠를 피하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좌절감 같은 것은 스자쿠가 가져서는 안 되었다. 그는 죄책감이나, 미안함, 죄의식 같은 것을 느껴야만 했다. 

좌절감은 원래 누리고 있던 것을 빼앗겼을 때의 사람이나 누리는,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이라고 스자쿠는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를르슈가 없는 시간은 그가 있던 시간 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늘 그래왔지만, 를르슈가 있을 때보다 더 의미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그렇게 지나가는 하루들을 아쉬워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가끔은 를르슈의 꿈을 꾸기도 했다. 대체로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의 연장선이었다. 그 꿈 안에서의 스자쿠는 어딘가 이상해서, 를르슈가 애를 가졌다고 고백을 하면, 그에게 매정하게 굴지도 않았고, 가끔은 를르슈의 앞에서 울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를르슈의 반응은 달라졌다. 하지만 그것들은 꿈에서 깨어나고 나면 전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느낌만이 달랐다고 어렴풋이 남을 뿐이었다. 그런 꿈들을 꾸고 났을 때에는 밀려드는 죄책감에 스자쿠는 얼굴을 감싸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죽고 싶네….’

‘죽을 용기는 없지만.’

 

그런 그의 앞에 사형선고를 내리러 온 천사가, 어딘가 비장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나리 람페르지는 그녀의 오빠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그의 모든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때만큼은 존중도, 이해도 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키울 거야, 라고 말하는 를르슈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결정 사항이라는 뜻이었다. 나나리가 아무리 고집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를르슈는 그 뜻을 굽힐 리가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상황을 다 듣고서 결론까지 듣고 나면 나나리가 할 말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나나리가 사는 곳까지 찾아온 를르슈의 계획을 들으면서, 나나리는 그와 함께하겠다고 했다. 저래보여도 오라버니는 겁을 먹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상처 받았을 테니까.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안된다는 소리 없이 그저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할 뿐이었다.

 

뱃속의 아이는 순조롭게 커가는 듯 했다. 마치 를르슈의 상황을 알고 있기나 한듯이, 큰 문제 없이, 그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를르슈는 뱃속에 있을 아이가 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조용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면서도, 때로는 고맙기도 했었다. 

나나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켠은 늘 외로웠다.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때부터 상상해온 그림과는 너무 다른 현재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상 속에서는 스자쿠가 늘 함께했다. 

임신했다고 알리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거나, 조금 겁을 먹더라도 솔직하게 저에게 좋다고 말해준다거나, 그런 상상을 해왔던 것이 독이 되었다. 나나리가 자리를 비울 때면 를르슈는 그런 상상 속에 갇혀 있던 제 자신이 떠올라 가끔은 울기도 했었다. 이 또한 언젠가는 지나갈 일이고, 스자쿠와는 더는 인연이 닿지 않을 사람으로 남을테니 이제 혼자에,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두 명에 익숙해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그때마다 외로워서 를르슈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달라질 거야.’

‘그럴 거야.’

 

그렇게 믿어온 것에 상응하기라도 하듯이, 아이가 태어나면서 바빠진 일상에 따라, 스자쿠에 대한 외로움은 옅어졌다. 아이는 를르슈를 닮기도 했으면서, 스자쿠를 닮기도 했었고, 스자쿠와 닮은 구석을 찾을 때면 를르슈는 조금 씁쓸해졌지만, 금방 웃는 아이의 얼굴에 위로를 받았다. 그게 달라지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를르슈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나리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스자쿠 씨, 오랜만이네요.”

 

나나리는 멍하니 굳어버린 스자쿠의 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나나리의 모습에만 익숙해져 있던 스자쿠는 그녀의 악수에 떨떠름하게 손을 맞잡았다. 나나리의 따뜻한 체온과 다르게 말투는 차갑게 느껴졌다. 오랜만이네, 나나리, 하고 입을 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왜 저랑 만나는게 오랜만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나나리와 만나게 된 것도 를르슈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나나리를 안 만나게 된 것도 를르슈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니. 그런 것을 궁금해하면 당연히 를르슈의 안부를 묻게 될 거나 다름 없으니 스자쿠는 말을 아끼며 웃기만 했다. 

 

“스자쿠 씨는 비겁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나나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을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누구한테 들어야 되죠?”

“…를르슈라던가.”

“그걸 알면서 한 번도 찾아오시질 않았잖아요!”

 

떨리는 나나리의 목소리에 스자쿠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잠시 호흡을 골랐다. 나나리는 스자쿠의 아무런 대꾸도 않는 모습에 이를 더 악물 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지 않았나요, 스자쿠 씨?”

“…….”

“왜 오라버니를 혼자 두시는지는, 두 사람의 일이니까 모르지만…. 그래도 자기 아이가 태어났으면 얼굴이라도 비추러 와야하는 거 아닌가요?” 

“…그 애가 태어났어?”

 

그 애, 라고 말하는 스자쿠의 목소리에서는 당황함이 묻어났다. 나나리는 그 겁쟁이 특유의 당황함에 눈물이 나고 말았다. 하나 뿐인 조카가 태어났음에도 아버지도 모르고 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싫었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고생을 하는 오라버니를 보는 것도 싫었다.

스자쿠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라버니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었으니 둘이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제 오라버니의 선택이 얼마나 현명했는 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오라버니는 스자쿠 씨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나나리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됐어요. 스자쿠 씨는 그냥 그대로 사세요. 애는 오라버니와 제가 알아서 키울테니까요. 당신은 그럴 자격도 없고, 이제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

“잠깐만, 나나리! 그 애가, 를르슈가 정말로 낳은 거야?”

“그것도 못 믿나요? 오라버니가 혼자서 키우신다고 했어요! 저는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알 거 같아요. 스자쿠 씨, 당신은, 너무, 겁쟁이에, 자기만 알고….”

 

울먹거리는 나나리의 모습에 스자쿠는 주머니에서 뒤늦게 손수건을 꺼냈지만 나나리는 받지 않았다.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친 나나리는 이제 됐다, 라고 말하면서 스자쿠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에게서 멀어지면서 나나리는 스자쿠의 욕을 속으로 몇번이고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잡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래서 를르슈의 안부를 묻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 만날 수는 있는지, 그런 것을 애타는 목소리로 물어봐주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스자쿠는 나나리를 붙잡지 않았고, 나나리는 더더욱 가라앉은 기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