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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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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가 되어도 완결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글들을 모아보았습니다. ㅠㅠ 

 

1. 전학생 스자쿠와 중2병 를르슈의 환생물 스자루루

쿠루루기 스자쿠는 애쉬포드 학원에서 보기 드문 전학생이었다. 정치가 집안인 쿠루루기 가문에서 국제 교류가 활발한 애쉬포드 학원에 진학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는 소위 말하는 ‘그들만의 리그’ 같은 학원이야 널렸으며, 스자쿠 역시 아버지가 나온 유서 깊은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는 것이 편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루루기 스자쿠는 애쉬포드 학원을 선택했고, 그 반항의 대가를 치른 것처럼 멀쩡한 얼굴에 너덜너덜한 반창고 두어개를 붙이고서 전학생으로서의 자기 소개를 마친 것이다. 

그는 초등부 때부터 에스컬레이터식 진학이 보장된 애쉬포드의 보기 드문 전학생이다. 

1학기 중반이라는 미묘한 시기에 찾아온 정치가 집안의 후계자.

모두가 흥미로운 것을 보듯이 스자쿠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눈을 하고 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는 를르슈 람페르지. 총명한 두뇌와 아름다운 미모, 그러나 그 외관과 다르게 심상치 않은 소리를 하는 것으로 주목받는 이른바 중2병을 앓고 있는 청소년으로, 학급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없으며, 학교의 출석 일수도 간당간당하게 채우는 어리숙한 양아치였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름다운 미소년에 대해서 의아함을 품고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 물었지만, 모두들 ‘람페르지는 중2병이니까….’라는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그와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저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중2병이라니. 

스자쿠는 보수적인 정치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후계자이지만 속세에서 떨어져 자란 것은 아니었기에, 중2병이라는 그 뜻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를르슈 람페르지가 저에게 보낸 사인을 놓치는 것은 당연했다. 

 

사인을 보낸 를르슈는 옥상에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다시 태어난 세상은 만사가 제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실감시켜주고 있었다.  뜻대로 되었다면 저에게 붙은 중2병 딱지부터 당장 떼어내고 싶은 것이 를르슈의 심정이었다. 배신과 배신과 배신에 익숙해져 있지만 믿었던 스자쿠까지 배신한다는 시뮬레이션은 상정 내였지만 그래도 타격이 컸다. 허겁지겁 옥상으로 올라왔지만 기운만 빠졌다. 

앞서 흘리듯 말했지만, 를르슈 람페르지는 다시 태어났다. 즉, 태어난 전적이 있었으며, 보통의 출생도 아니고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시절의 마지막 황제 폐하로 군림하다 제로 레퀴엠이라는 숭고한 의지를 품은 채로 살다 죽었다. 너무 장황하게 살다 죽은 전생에 대해서 를르슈는 아주 어렸을 적에는 현실과 전생을 구별하지 못한 채로 성장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자신의 아이가 하는 생생한 묘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만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를르슈의 어머니였던 마리안느는 대범하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 애는 중2병이야.’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얻은 중2병 진단. 를르슈는 노발대발 화를 냈지만 그래봤자 어린 아들 놈의 같잖은 반항에 마리안느가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다시 태어나도 를르슈의 여동생인 나나리는 환하게 웃으면서 제 오라버니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 말에 당당하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중2병이에요!’

 

상냥한 나나리는 나중에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정말 중2병에 걸린 같은 반 친구를 보고서 그동안 를르슈를 얼마나 오해했던 것인지에 대해서 사과했지만, 를르슈의 마음은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초등부 시절부터 애쉬포드 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그때부터 를르슈의 전생 체험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이 났고, 덩달아 중2병 이야기도 같이 따라다녔다.

중2병이라니, 세상을 구하고 정의를 위해 싸우다 죽었는데! 를르슈는 그렇게 말할 수록 자신이 중2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상처가 안됐다면 거짓말이기 때문에 학교도 눈치껏 빠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는 중2병 양아치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를르슈는 억울했다.

 

“그래도 스자쿠는 기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제로 레퀴엠을 같이 해준 사이니까. 

하지만 오늘 본 스자쿠는 전학생 쿠루루기 스자쿠 말고는 전혀 관심도 없는 것 같았고, 혹시나 해서 목의 옷깃을 당기는 사인을 보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를르슈는 수업종이 울리는 소리에 한숨을 쉬면서 옥상 바닥에 주저 앉았다. 

중2병 양아치의 출석 칸에 결석 한 획이 또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 소용없는 것 같았다.

를르슈 말고도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때마다 전생의 기억이 있냐고 물어보고 다닌 것이 중2병 소문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틀림 없었다. 미레이, 셜리, 리발, 카렌, 니나…. 학생회 사람들 역시 모두 전생의 기억이 없었고, 를르슈만 또 바보가 되는 상황이 몇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때 포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를르슈는 다시 또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인 것은 아직 스자쿠에게 전생의 기억이 있냐고 대놓고 물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다시 친구부터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미 중2병으로 소문난 녀석과 친구를 해줄 거냐는 생각도 뒤따랐다. 제가 알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라면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겠지만, 지금의 스자쿠는 알 수가 없다.

 

“이게 벌이라면 벌인가.”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 전생의 기억을 혼자서 갖고 태어나는 것. 혼자만 알고 있는 이 외로움과 고독이 벌이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할까. 를르슈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대로 얼마나 잠을 잤는지 모른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건드리는 손에 를르슈는 희미한 시야로 눈을 깜빡거렸다. 

 

“아, 일어났다. 저기, 우리 반 가는 길 알지?”

 

눈 앞에는 쿠루루기 스자쿠가 있었다. 를르슈는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 더 선명해진 시야에는 당황하는 스자쿠의 얼굴이 비쳤다. 음악 교과서를 들고 있는 모양을 보아서 아마 전 시간인 음악 시간에 음악실에 들렀다 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옥상까지 올 일은 아니지 않나. 

를르슈는 멍하니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를르슈의 시선에 스자쿠는 어물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잠깐 매점에 다녀온다는 게 길을 잃어서…. 곧장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학교가 의외로 복잡하네.”

 

즉 학교에서 길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을 거치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고 옥상에 올라오는 게….”

“그, 산에 가서 길을 잃으면 내려가기 보다는 올라가는 게! 저, 정답이거든.”

“여긴 산이 아니라 학교다만.”

“산처럼 크잖아…?”

“너 정말.”

 

를르슈는 뭐라고 놀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채로 알겠다고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앞장 서서 걸으면 스자쿠가 금세 따라왔다. 

 

“내가 없었으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흐음, 그때는 옥상에서 뛰어내려도.”

“위험하잖아?”

“괜찮아, 낙법 정도는 배웠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받아치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면 스자쿠가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방금 전에는 왜 수업 안 들었어?”

“수업?”

“응, 1교시부터 계속 없었잖아.”

“…괜찮아. 수업 일수는 체크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대답한 를르슈가 어색하게 웃었다. 옥상 문을 나서면 수업종이 울렸다.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다간 지각인데….”

“전학생이니까 봐주시겠지. 뭐, 길을 잃어서 옥상까지 갔다고 하는 건 안 믿어주시겠지만.”

“그러려나. 아, 근데 너 이름이 뭐야?”

 

를르슈는 그 말에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를르슈 람페르지. 스자쿠는 그 이름을 외우듯이 반복했다. 를르슈 람페르지? 그래. 나는 쿠루루기 스자쿠야. 알아. 쿠루루기는 부르기 힘드니까 스자쿠로 불러줘. 알았어. 나도 를르슈로….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곧 나타난 교실에 스자쿠와 를르슈의 대화는 끝이 났다. 몇 걸음 안 가면 뒷문. 를르슈가 데려다주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 수업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를르슈는 스자쿠만 들여보낼 생각이었다. 등을 떠미는 를르슈의 손에 스자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를르슈는 수업 안 들어?”

“아직까지는 여유로워.”

“아니, 그래도 들어야 하잖아.”

“신경 쓸 거 없어.”

 

를르슈는 뒤돌며 손을 흔들었다. 

기억이 없는 스자쿠에게는 스자쿠의 삶이 있을 것이다. 예전처럼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게 기억이 있느냐 없느냐 따지고 드는 것도 이제 지겨웠다. 혼자서만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에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벌이겠지. 를르슈는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쿠루루기 스자쿠와 멀어지는 듯 했으나, 를르슈는 몇 번이고 스자쿠와 다시 만났다. 정확히는 교내에서 길을 잃은 스자쿠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날은 점심시간이었고, 중등부의 나나리와 함께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날이었다. 중2병 낙인이 찍힌 를르슈가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 나나리의 상냥한 마음씨에 차마 거절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를르슈는 평소보다 기합이 많이 들어간 도시락을 들고서 중등부로 향하던 길이었고, 그 길목에서 이번엔 음악 교과서 대신에 도시락을 들고 있는 스자쿠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 를르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음, 또 길을 잃었다고 해야하나. 잠깐 마실 것 좀 사가지고 오는 길에….”

“저쪽으로 가면 고등부 건물이다.”

“그래? 고마워.”

 

스자쿠가 그대로 멀어지는 듯 했고, 를르슈는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등부 건물과 고등부 건물 그 사이에 있는 교정 쪽으로 다다랐을 때, 등 뒤에서 스자쿠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여기 괜찮다. 햇빛도 좋고.”

“뭐, 뭐야?! 안 갔어?”

“아,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를르슈랑 먹으려고. 혼자서 먹는 거지?”

“혼자서 안 먹어!”

“그럼 누구랑 먹어?”

“누, 누구랑 먹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 말에 스자쿠는 꽤나 상처받은 표정으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시무룩해진 얼굴로 그럼 갈까, 하고서 등을 돌리려는 스자쿠를 보고서 를르슈는 제가 붙잡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스자쿠에게 그런 미련이 필요할까. 정답은 NO다. 를르슈는 그대로 스자쿠를 보내려고 했었다.

 

“어라, 오라버니의 친구 분이신가요?”

 

나나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귀여운 여자애네. 를르슈, 누구야? 여자친구?”

“여자친구가 아니라 여동생이다!”

“안녕하세요, 나나리 람페르지입니다.”

“아아, 여동생이구나. 귀엽네. 나는 쿠루루기 스자쿠. 며칠 전에 전학 왔어. 를르슈랑 같은 반 친구야.”

“친구…요?”

 

나나리는 어딘가 감동받은 듯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아, 정말 싫군. 를르슈는 나나리와 스자쿠가 같이 있는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기분이 나빠졌다. 나나리가 울먹거리는 이유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오라버니에게도 친구가…!”

“응?”

“아, 정말, 이젠 나도 몰라….”

“를르슈 친구 없었어?”

“아, 뭐라고 해야할까요, 오라버니는 다른 분들과 좀 다르셔서, 아니 물론 멋진 의미로 다르니까요, 그래서 친구들과 같이 다니시질 않으셨거든요.”

“친구 같은 건 없어도 됐으니까.”

 

실제로 없어서 불편했던 점은 하나도 없었다. 없는 동안엔 실날 같은 희망을 가졌던 것 뿐이다. 스자쿠는 전생의 기억이 있을 거라는 그런 희망.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지만. 

 

“뭐—. 를르슈의 이런 점을 보면 친구가 없었을 것 같기도 해.”

“쿠루루기 씨는 오라버니의 첫 친구이신거죠!”

“아하하, 스자쿠라고 불러줘.”

“스자쿠 씨!”

 

다정다감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서 를르슈는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스자쿠와 나나리와 함께 하는 점심이라니. 오랜만에 보는 그 광경에 눈물이 조금 고일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하게 밥을 먹었다.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밥을 꾸역꾸역 밀어넣고 나서야 점심시간이 끝이 났다. 나나리를 먼저 중등부 건물에 데려다주고 나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고등부 건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를르슈는 정말 중2병이야?”

“뭐?”

 

꽤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말에 를르슈는 이를 악물며 돌아보았다. 그런 말을 스자쿠에게서 듣게 될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스자쿠가 그렇게 물어보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를르슈는 들고 있는 도시락을 꽉 움켜쥐고서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행동이, 그렇게 보일 지는 알고 있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게 어떤 행동이었는데?”

“네가 알 바 아니야, 그건.”

“……흐음. 우리 친구잖아.”

“그건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 대충 둘러댄 것 뿐이야.”

“너무하네.”

 

너무하긴. 누가 더 너무한데. 

를르슈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스자쿠보다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방 따라잡으며 를르슈의 옆을 따라 걷는 스자쿠를 보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많아지는 복도로 들어가면 이 녀석과 함께 눈에 띄기 십상이 될 것이다. 

 

“너 말이야….”

“정말 중2병이 아닌데 왜 친구가 없었어?”

“내가 친구가 없는 게 뭐가 중요해?”

“이상하잖아.”

“뭐가?”

“이렇게 예쁘고 잘생겼는데…. 아, 뛰지 마, 를르슈!”

 

사람들이 많은 인파 사이로 억지로 몸을 숨기면서 를르슈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친구가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스자쿠가 있으니까 친구 따위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자만했던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스자쿠는 포기하지 않았다. 

 

 

2. 기사황제 기념일에 맞춰서 쓰려고 했으나 실패한 를르슈 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의 를르슈는 왜 자기 이름을 를르슈라고 지었냐고 울면서 어머니 마리안느의 치마폭에 매달리곤 했었다. 그런 나쁜 사람이랑 같은 이름인 건 싫어요. 훌쩍거리는 를르슈에게 마리안느는 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를르슈, 그 황제가 꼭 나쁜 사람인 건 아니야. 자, 들어보렴….”

 

다정한 어머니의 말에 를르슈는 귀를 기울였다. 소곤소곤 전해지는 말들은 를르슈를 놀라게 만들었다. 

 

“사실은 엄청 훌륭한 사람이야. 황족도, 귀족도, 평민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 사람이잖니.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어. 서열에 따라서 사람을 나누지도 않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악역을 자처한거야.”

 

울상을 짓고 있던 를르슈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조금의 위로가 되었지만, 결국 혼자서 쓸쓸하게 죽어버렸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를르슈 황제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브리타니아 제국의 아이들의 잠자리 동화에는 한두번씩 이야기가 나왔다. 

를르슈 역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고, 그 이름 덕분에 같은 황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놀림거리가 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리안느가 기사 출신이라는 점에서 눈에 띄는 데다가, 이름까지 를르슈였으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놀려대거나, 심하면 없는 척 따돌리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결국엔 기사도 없이 죽어버렸잖아요…. 진짜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기사가 한 명 뿐일리가 없어요.”

“그런 큰 뜻을 따라줄 사람이 한 명 밖에 없었던 건 정말 슬픈 일이지. 그때는 그랬던거야.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를르슈는 다른 사람이잖아?”

“…그치만, 이름이 똑같으니까.”

“고작 이름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바보 같은 거야. 오히려 이름 덕분에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름은 를르슈 황제랑 똑같은데, 결과는 정반대라면 더 멋있잖아! 그렇지, 루루?”

“루, 루루가 아니라 를르슈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를르슈!”

 

자, 그럼 얼른 기운 차리자! 등을 두드려주면 를르슈는 아프다고 투덜거리면서 마리안느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유피랑 코우가 놀러온다니까 오늘은 를르슈가 맞이하러 갈래? 마리안느의 말에 를르슈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는 영리하면서도 아직은 어렸기에 단순했고, 그때까지는 마리안느도 별 걱정이 없었다. 

별 것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는 의외로 골이 깊었다. 

정확히는 마리안느가 황실의 음습함을 얕잡아 본 것일 수도 있었고, 반대로 황실의 유치함이 생각보다 심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은 를르슈의 여동생, 나나리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더해갔다. 

 

‘황자 전하는 를르슈에, 황녀 전하는 나나리라니, 마리안느 님도 참 취미가 고약하시죠.’

 

를르슈는 몇번이고 들은 그 험담에 밖으로 외출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아리에스 궁도 어린 저에게 충분히 넓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나리는 투정을 부리며 마리안느와 함께 나가는 일이 잦았다. 를르슈는 노심초사하면서, 그 두 사람이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듣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전부였다.

 

의기소침해진 를르슈를 궁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무리였다. 마리안느의 부탁에도 를르슈는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딘가 어두워진 오라버니의 얼굴에 나나리도 밖에서 노는 것이 재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사이가 좋은 것도 큰일이 될 수 있구나. 마리안느는 한숨을 쉬면서 두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3. 스자쿠를 짝사랑하는 를르슈 글 

쿠루루기 스자쿠는 학급 내에서는 교우들과 두루두루 친하고, 성적도 나쁜 편이 아니고, 응원하고 싶을 정도로 노력해서 그만큼의 성취를 얻을 줄 아는 노력가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타고난 재능을 적재적소에 잘 발휘할 줄 아는 남자이다. 등교 시간에 교실에 막 들어올 때, 그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스자쿠에게 인사를 한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를르슈는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모두가 스자쿠에게 인사를 하지만 를르슈가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딱히 스자쿠가 싫어서가 아니어다. 

오히려 좋아한다. 강아지처럼 사람에게 살갑게 구는 스자쿠를 보고 있으면 저도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고 친하게 지내고 싶고, 그 옆에서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런 마음이 너무 전해지면 스자쿠가 곤란해질 것이 뻔해서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마음만 앞서가는 것. 를르슈는 자신의 짝사랑을 그렇게 정의했다. 짝사랑. 귀엽고 부드러운 단어이지만 를르슈에게는 차가운 현실을 가르치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