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 듯 했다. 그런 말이 어디있나 싶으면서도 그 산증인이 바로 옆에 늘 붙어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 올해로 17살로, 를르슈와 알고 지낸지 벌써 7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소꿉친구였다. 그 알고 지낸 7년동안 를르슈는 스자쿠가 작은 감기에도 걸리지 않은 것을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스자쿠는 건강하고, 또 바보였기 때문이다. 합쳐서 그를 체력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일상이었지만, 스자쿠는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를르슈에 비하면 나는 바보도 맞고 체력도 있으니까! 알 수 없는 곳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여서 기분이 나쁜 것은 덤이다.
아무튼 등굣길에 만난 그 산증인은 어딘가 기분이 나빠보였다. 정확히는 안색이 나빠보였다.
“스자쿠…. 너 어제 뭐 했어?”
“으응?”
어딘가 늘어지는 말투와 함께 시선이 맞지 않고 헤매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이 스자쿠는 평소의 스자쿠와 달랐다. 가까이 가면 평소의 운동신경이 살아있는 스자쿠라면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뒤로 물러설 것이 분명했지만, 를르슈가 다가가도 스자쿠는 멍하니 서있기만 했었다.
“를르슈, 얼굴이 커졌어. 커져도 예쁘네.”
“멍청아, 가까워진거다. 너 말이야….”
“응?”
“열 나잖아.”
다가가면 평소보다 맥이 없어보이는 눈동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는 듯 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렸을 때부터 열이 곧잘 나던 나나리 덕분에 미열 정도는 체크할 수 있었다.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열은 아직까지는 괜찮았지만 사람 몸이란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쉬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둔한 자식은 자기가 감기인 것도 모르고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네, 정도로만 여기고서 교복을 꿰어입고 등굣길에 나섰을 것이다. 옆집의 람페르지 남매만 믿고 스자쿠를 맡긴 쿠루루기 부부에게 죄책감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면서 ‘시원해~’ 같은 소리를 하며 속을 뒤집어 놓았다.
“스자쿠, 오늘은 집에서 쉬어.”
“싫어…. 학교 갈거야.”
“지금 학교 가면 더 안 낫는다.”
“학교 가서 를르슈 도시락 먹고…. 농구하고, 축구하고, 검도하고, 학생회…. ”
그 와중에 공부는 넣지 않는 것이 스자쿠다웠다. 를르슈는 혀를 차며 스자쿠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받쳐주던 를르슈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스자쿠의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키는 를르슈가 더 크지만, 무게는 스자쿠가 훨씬 나간다. 갑자기 쏟아지는 체중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몸을 거의 반쯤 끌어안은 채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 몸으로 뭘 해볼 생각하지 말고 쉬라고!”
“를르슈, 시원해.”
“집에 가서 쉬어. 집까지 데려다줄게.”
“집에 가?”
“그래.”
“나 혼자 가?”
“데려다준다니까.”
“…같이 있어줄거야?”
를르슈는 어딘가 울먹이는 것 같은 스자쿠의 눈빛에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저게 열일곱 먹은 놈이 할 짓인가. 어딘가 가련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 스자쿠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지만 를르슈는 소꿉친구를 길바닥에 버려두고 갈 정도로 매정하진 못했다. 우선 스자쿠를 스자쿠 집에 데려다 주고 학교에 가야겠다. 를르슈는 스자쿠를 그의 집앞에 버려둘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까지는 같이 가줄게.”
“으응…? 를르슈, 나 머리가 아픈 거 같아.”
“그래, 너 열 난다니까.”
“열, 나면… 병원 가야하나?”
병원.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스자쿠와 병원 만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있을까. 스자쿠 정도면 약을 먹으면 낫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스자쿠니까 약으로도 해결되지 않는걸까.
를르슈는 고민을 하며 스자쿠를 부축했다. 를르슈에게 반쯤 기대어 걷는 스자쿠는 병원에 가기 싫다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무거운 스자쿠를 끌고 가느라 대꾸해주지 못했다. 반응이 없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생떼를 쓰기 시작했고, 곧 대로변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병원에 가기 싫다고 훌쩍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 안 가면 되잖아! 그만 울어!”
“약만 먹어도 나을 수 있을까…?”
“제대로 먹고 자고 쉬면 나을 거야. 너 같은 체력 바보는 열두 시간만 쉬어도 바로….”
“정말로?”
“내가 틀린 말 하는 거 봤어?”
“틀린 말은 안해도 거짓말은 하잖아.”
“너 입은 멀쩡한거 보니까 덜 아프구나.”
“엄청 아파.”
를르슈, 나 진짜 아파.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물에 젖은 눈가를 쓱 문질렀다. 좀 괜찮아진 거 같아. 스자쿠는 를르슈에게서 팔을 떼어내고 위태위태하지만 그래도 제 발로 걷기 시작했다. 스자쿠의 가방을 들고 있던 를르슈는 한숨을 쉬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정말 ‘좀’ 괜찮아진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 집 앞의 골목길에서 반대방향으로 자신만만하게 꺾어버리는 스자쿠를 보고서 다시 그를 부축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자쿠의 집까지 오는 길은 험난했다. 2층에 있는 스자쿠 방까지 여차저차 잘 끌고 온 를르슈는 스자쿠와 함께 학교를 쉬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결석한 날짜가 제법 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 쉬기 위해서는 오늘은 빼먹지 말아야하는 날이었다. 지각을 해서든 학교를 가야하는 날에 스자쿠가 감기에 걸리다니. 게다가 집안까지 들어오고 나니 내팽개치고 나가기도 뭣해졌다.
손이 가는 번거로운 자식.
를르슈가 속으로 제 욕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자쿠는 침대 위에 널부러져 짧은 숨을 연달아 내쉬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자켓을 벗기며 말했다.
“천천히 심호흡해. 하나, 둘, 하나, 둘…. 안 그러면 과호흡 온다.”
“하나에 마시고?”
“둘에 내쉬고. 그래, 하나, 둘, 하나, 둘.”
를르슈의 박자를 세는 것에 맞춰서 스자쿠의 호흡이 차차 제 박자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를르슈는 자켓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나서 스자쿠의 이마에 손을 댔다. 방금 전보다 더 뜨거워졌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약을 먹으면 금방 낫겠지.
“감기약 어디 있어?”
이 소꿉친구의 집에 몇번이고 놀러왔지만 한 번도 찾을 일이 없었던 감기약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스자쿠는 감기약이라는 말을 몇번 되뇌더니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하긴, 감기로 아픈 네가 뭘 알겠어. 를르슈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어디 가는데?”
“우리집. 가서 약 가지고 올게.”
“…진짜 올거지? 나 혼자 두면 안 돼. 아파서 죽어버리면 를르슈 탓이야.”
그게 왜 내 탓이야. 를르슈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알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바로 옆집인 자기 집으로 가는 중에 나오고 있던 나나리와 마주쳤다. 한참 전에 나갔던 오빠를 다시 본 나나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자쿠가 아파서, 다시 집에 돌려보냈어.”
“어머, 스자쿠 씨가요? 감기인가요?”
“응, 아마 약 먹으면 낫겠지.”
“어쩌다가 감기에…. 그나저나 스자쿠 씨도 감기에 걸리긴 하는군요.”
“나도 그 바보가 걸릴 줄은 몰랐어.”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나리와 같이 학교를 가는 친구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지각하지 마, 나나리. 를르슈의 말에 나나리는 웃으면서 그대로 를르슈에게 돌려주었다. 오라버니야말로 지각하지 마세요, 스자쿠 씨 핑계로 결석하면 제가 혼낼거예요! 그러면서 활기차게 나가는 나나리의 뒷모습에 를르슈는 오늘도 세상에게 감사했다. 나나리는 삶의 치유이자 회복이자 구원이다.
스자쿠는 약으로 치유를 하든지 말든지…. 를르슈는 곧 약 서랍에서 종합감기약과 해열제를 찾아서 스자쿠의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 물과 함께 약을 들고 오면 스자쿠가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를르슈, 나 죽을 거 같아, 진짜로….”
“안 죽는다니까.”
“근데 머리가 엄청 어지럽고, 으, 또, 빙글빙글하고. 열 다시 재줘.”
“알았어.”
를르슈는 스자쿠의 소원대로 열을 재주었다. 다행히도 방금 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온도였다. 스자쿠라서 이 정도인걸까. 를르슈의 손길이 떨어지자 스자쿠는 맥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몇 도 같아?”
“글쎄, 위험하네. 한 100도 되는 거 같은데.”
“죽는거야…?”
“네 이마 위에 물컵 올리면 수증기 나올 정도야. 별 거 아냐. 약 먹게 좀 일어나봐.”
“를르슈우, 나 죽으며언….”
“안 죽는다고. 약 좀 먹게 일어나봐. 누워서 먹으면 기도에 걸려서 숨막혀 죽는다.”
그러니까 좀 일어나! 를르슈의 커진 목소리에 스자쿠는 입술을 삐죽이며 상체를 일으켰다. 약과 물컵을 받은 스자쿠는 한입에 털어넣고서는 꿀꺽 삼켰다. 텅 빈 손을 확인하고는 물컵을 다 비울 때까지 를르슈는 옆에 있었다. 약을 먹었으니까 좀 낫겠지.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남은 약들과 물병에 대해 설명했지만 스자쿠는 듣는둥 마는둥 천장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알겠어? 점심 먹을 쯤에 일어나서 약을 한 번 더 먹고.”
“응.”
“정말 아는거야?”
“응.”
“너 말이야.”
“응.”
스자쿠의 멍한 대답에 를르슈는 그의 볼을 꼬집으며 흔들었다. 정신 차리고 들어, 라는 말로 시작하여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또 반복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다시 이해했느냐고 물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를르슈가 했던 말 또 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야.”
“그렇지?”
“그럼 됐어. 난 간다.”
“언제 와?”
“수업 끝나고.”
“일찍 오면 안 돼?”
“…오늘 결석하면 안 돼.”
“왜?”
“…….”
평소 스자쿠라면 학교에서 결석하면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를르슈에 설득할 정도지만, 아픈 스자쿠는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잖아. 를르슈는 진부한 말을 내뱉으며 가방을 들고 스자쿠의 방을 나서기로 했다. 를르슈가 한 발자국만 나서면 멀어지는 거리에서, 스자쿠는 를르슈를 불렀다.
“를르슈.”
“뭐야, 또.”
“잘 다녀와.”
부모님도 아니고 스자쿠에게 듣는 다녀오라는 인사는 어딘가 낯간지러웠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시선을 피하면서 잘 다녀오겠다고 했다.
스자쿠 주제에, 그렇게 불쌍하게 인사하면 어쩌라고. 스자쿠의 집을 나서면 를르슈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누군가 건드리면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지만, 시계를 보니 지각할 위기라서 또 금방 잊고 말았다. 1교시 수업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들어온 를르슈는 늘상 그랬듯 수업을 한귀로 흘려들었다.
혼자 있을 스자쿠에 대해서 조금 걱정을 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면 리발이 다가와, 오늘은 혼자 온 를르슈에게 의아해했다.
“를르슈, 스자쿠는? 오늘 농구할 때 팀 짜려고 하는데.”
“오늘 아파서 못 온대.”
“스자쿠가 아프다고? 놀랍네. 그 녀석도 사람이구나.”
“뭘로 생각한거야, 그럼.”
“뭐, 체육시간에 날아다니는 거만 봐도…. 아무튼. 우리 병문안 같은 거 가야 되나?”
“아니, 감기는 쉬어야 낫는거야. 그리고 병문안 올 정도는 아니고.”
“흐음…. 그래.”
리발은 손에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바닥에 퉁퉁 튕기면서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그 눈은.”
“아, 아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데려다주고 왔으니까.”
“스자쿠를?”
“그래.”
“를르슈가?”
“어.”
“……놀랍군요. 람페르지 군. 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하셨다고.”
리발의 놀리는 말투에 를르슈가 벌떡 일어서면, 리발은 또 장난스레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한두걸음 뒤로 물러섰다.
“근데 둘이 정말 사이 좋네.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잖아.”
“뭐가?”
“친구가 감기 걸렸다고 집까지 데려다주거나…. 귀찮잖아?”
“귀찮아.”
“근데 스자쿠는 안 귀찮아?”
를르슈는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은 게 당연하잖아. 스자쿠니까 참는거야.”
“보통은 안 참잖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나와 스자쿠는 보통이 아니라고?
를르슈는 그런 말을 했을 때 리발이 대꾸할 말들을 떠올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바보한테 신경 쓰고 있다간 하루가 헛되이 흘러간다. 그럴 시간에 스자쿠의 영양 보충 식사를 생각하는 편이 더 이득이다. 리발은 를르슈가 무시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왁자지껄한 남자애들 무리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간 를르슈 역시, 별 다른 이유 없이 혼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스자쿠의 생각을 했다. 혼자서 있을 스자쿠를 생각하니까 왠지 또 코끝이 찡해졌다.
‘환절기가 유난이군. 없던 알레르기라도 생겼나?’
서서히 추워지고 있는 계절 탓에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를르슈는 빨리 오늘의 시간이 흘러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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