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루루기 스자쿠와 를르슈 람페르지의 만남은 이른 아침의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시작되었다.
승객들은 주말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월요일을 맞이했다. 그 사이에서 스자쿠는 손잡이를 잡은 채로 길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스자쿠는 새로 입부한 검도부의 연습 때문에 주말 내내 시달렸던지라 근육통으로 온몸이 나른했다. 걸어서 코앞이었던 중학교 시절과 다르게 스포츠 추천으로 들어간 고등학교는 꽤나 명문으로 소문난 학교지만, 지하철로 열두 정거장이나 가야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스자쿠는 휴대폰을 보는 것도 지루한 찰나였기 때문에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바로 뒤에서 를르슈 람페르지가 있었다. 중학생이 된 것이 지난주였던 를르슈는 새 교복이 어색했지만 그럭저럭 익숙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옷이 불편해서 느껴지는 불편함인 줄 알았다. 그 다음은 사람 손이 스치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엉덩이를 기분 나쁘게 더듬는 손길이 더 노골적으로 느껴질 무렵이 되자 를르슈는 자신이 치한에게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를르슈로서는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애초에 남자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를 성추행하는 변태와 맞닥뜨릴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를르슈는 제가 어머니를 닮은 얼굴이라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키는 나름 큰 편에 속하고, 어딜 보아도 남자의 뼈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제가 여자로 보일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엉덩이의 둔덕을 매만지는 손길과 함께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를르슈는 어깨를 움츠렸다.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릴 것 같아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은 아프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달리는 지하철의 밖을 보려고 해도 저절로 바닥으로 시선이 떨어졌다.
기분 나빠.
입술을 깨물고서 수치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평소처럼 잘난 언변으로 이 변태를 처단해야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고개를 돌려서 그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였다. 를르슈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리를 내지 않고 이 지하철이 빨리 역에 도착하길 바라는 것 뿐이었다. 도망치는 것은 억울했지만 전략상 후퇴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것을 쿠루루기 스자쿠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뒤에서 느껴지는 손길이 거추장스러워서 비키려는 찰나에, 남학생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하고 있는 사람은 귀가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라면 치한 정도는 알아서 처리하라고. 스자쿠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 소년에게 시선을 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소년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로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스자쿠는 아직 강가를 달리고 있는 지하철 밖과 앞으로 얼마나 가야 역에 도착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때까지 그 소년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면서 오랜만에 변태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여기 변태가 있어요! 지금 제 엉덩이를 만졌습니다!”
소년의 몸에서 떨어지려는 팔을 낚아채서 사람들이 다 보게 들어올렸다. 스자쿠는 다시 한 번 크게 외쳤다. 이 사람이 치한입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팔의 주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화를 벌컥 냈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사람 잘 못 본거야! 변태들이 하는 뻔한 대사였다.
스자쿠는 빠져나가려는 남자의 팔을 뒤로 꺾어버렸다. 비명을 내지르는 남자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지하철은 역에 도착했다. 스자쿠는 그대로 남자를 붙잡고 내리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자쿠 쪽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스자쿠는 그 소년이 신경쓰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도 진정이 안된 눈으로 스자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스자쿠는 눈을 맞추면서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스자쿠는 남자를 끌고 내렸다. 치한을 당한 것은 스자쿠가 아니었기 때문에 역무원을 부르기도 애매했지만 정의의 응징을 하고자 꺾은 팔에 힘을 바짝 주었다. 아악! 또 비명이 들렸다.
이제 놔줄까, 하는 마음으로 스자쿠는 남자를 풀어주려고 했지만 멀리서 역무원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역무원의 옆에는 그 소년이 있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역무원은 남자와 스자쿠, 소년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간단한 조사가 있었다. 곧 이어 경찰이 왔고, 두 사람은 풀려났다. 다시 지하철을 타려고 선 스자쿠는 그때서야 시계를 보았다.
“지각인가요?”
소년의 목소리가 스자쿠를 향했다. 스자쿠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정리된 뒤에 소년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본 것이었다. 훌륭한 미인이었다. 나쁜 말을 보태면 치한이 왜 그를 타겟으로 잡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지각이지?”
조사를 받을 때 소년이 스자쿠보다 훨씬 어린 중학교 1학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자쿠의 반말에 소년은 ‘네’ 하고 조용히 스자쿠의 옆에 섰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였다면 아무것도 못했을 거예요.”
“별 거 아냐, 나도 어렸을 땐 그런 변태들 많이 당해봐서 알아. 놀랐지?”
“네?”
스자쿠는 놀란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소년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자쿠가 를르슈 정도 나이였을 때, 지금보다 얼굴은 더 어려보여서 못된 놈들이 그렇게 엉덩이를 주물러댔다. 그때마다 고간을 걷어차고 소리를 내질렀다가 과잉방어 문제로 한 번 집안을 뒤집어 놓았다가, 나름의 요령을 터득하고서 치한을 퇴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후에는 운동하느라 키가 훌쩍 크고 성장을 하면서 완전히 그런 녀석들과 안 얽히게 되었다는 결말에 소년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운동이요?”
“응. 나 검도하거든.”
“저는 운동을 못해서….”
스자쿠는 소년을 힐끔 쳐다보았다. 확실히 팔다리는 늘씬하지만 신체단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노력하면 될거야. 스자쿠는 조금 건성으로 말했다. 지하철이 오려면 아직 2분이나 남았다.
“애쉬포드 다니시죠?”
“나?”
“네.”
“응. 어떻게 알았어?”
소년은 대답 대신에 제 목 옷깃을 가리켰다. 스자쿠의 교복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아, 그렇구나. 스자쿠는 중얼거렸다.
“중등부에 다니고 있어요.”
“아, 나는 고등부. 중간에 들어온 거라 잘 몰랐어.”
“검도로 애쉬포드에 온 거면 스포츠 추천인거죠?”
“응. 근데 입학시험도 다시 봐야해서 공부도 했어. 별로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대단하네요.”
“뭐, 노력했으니까.”
소년은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나가는 힘이 있었다. 스자쿠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가 소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자쿠와 시선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는 그 당당함이 나름대로 귀여웠다.
“를르슈 람페르지라고 했었나? 브리타니아에서 왔어?”
“네. 맞아요. 쿠루루기 스자쿠 씨.”
이름을 부르자 이름으로 대답한다. 대답에도 센스가 있었다. 스자쿠는 그렇구나, 하고 소년을—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를르슈가 이름을 부르고 나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발음한 제 이름을 멍하니 곱씹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있잖아, 라고 운을 떼자마자 시끄러운 전차의 도착 안내 소리가 울렸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윽고 쏟아지는 기계 소리에 스자쿠는 말하려던 것을 잊어버렸다. 문이 열리고, 를르슈가 먼저 지하철에 올랐고, 스자쿠는 얼떨결에 타는 사람처럼 문이 닫힐 쯤에 겨우 탈 수 있었다.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네.”
“까먹었네.”
스자쿠의 어딘가 나사 빠진 말에 를르슈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남자애도 꽃처럼 웃는구나. 스자쿠는 문학적인 표현을 떠올리며 를르슈의 옆에 섰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를르슈가 알려달라고 했지만 스자쿠는 나중에 기억나면 말해주겠다고 미루었다.
“언제요?”
“응?”
“나중에 말해줄 거면, 언제가 그 나중이 되냐구요.”
“뭐……. 또 만나면?”
말꼬리가 올라간 의문문에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만나면 그땐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 스자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말요? 를르슈의 재차 묻는 말에 스자쿠는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약속.”
“…초등학생이에요?”
“확실하게 하는 게 좋잖아?”
스자쿠의 새끼 손가락에 를르슈가 제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거짓말 하면—. 를르슈의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스자쿠도 엮인 손가락을 흔들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바늘 천 개—약속! 손가락을 풀고 나면 지하철은 곧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애쉬포드 학원까지 걸어가면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늘 천 개 먹는 건 너무하지 않아? 약속을 지키면 그럴 일도 없죠. 그렇기야 하지만…. 중등부 건물 앞에서 를르슈와 헤어지는 와중에 수업 종이 길게 울렸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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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1 22:02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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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자쿠가 답지 않게 지각을 했지만 사정을 말하면 선생님들은 유하게 넘어가주었다. 하루를 보내다보면 스자쿠는 를르슈와 만났다는 사실도 어느새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또 같은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게 되었을 때였다.
사람들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고서 버티고 있던 스자쿠의 옆에 서게 된 를르슈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안녕. 스자쿠는 떨떠름하게 인사를 하며 를르슈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도 사람 많네요.”
“그러게.”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먼저 말을 걸어왔던 것과 달리 를르슈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문고판 책. 제목은 조금 따분해 보이는 소설이었다. 스자쿠는 책장을 넘기는 를르슈의 손끝을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뭔가의 어색함에 스자쿠가 시선을 피하면 를르슈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책을 덮고선 스자쿠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책 좋아하세요?”
“자주 읽는 편은 아닌데, 필요할 땐 읽지.”
“소설은?”
“별로 안 좋아해.”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보이나. 스자쿠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고 앞을 바라보는 를르슈의 곧은 모습에, 스자쿠는 뭔가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에 홀리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하얀 손끝이 책등을 감싸고 있는 것에 시선을 두다가 저도 모르게 그를 다시 불렀다.
“람페르지.”
“네?”
“브리타니아에서 왔다고 그랬지?”
“태어나기만 거기서 태어난 수준이에요. 물론 다른 가족들도 거기에 살고 있긴 하지만.”
“아, 여기서 혼자 사는 거야?”
“아뇨. 어머니랑 동생들이랑.”
“그렇구나.”
“쿠루루기 씨는?”
“나도 부모님이랑 살아.”
“외동이에요?”
“그럴 거 같아?”
“외동이군요.”
를르슈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이번엔 스자쿠가 웃었다. 맞아, 외동이야. 를르슈는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았다는 말을 했다.
“사실 외동 아니면 동생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감이죠.”
“흐음…….”
이야기가 더 이어지기 전에 지하철은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다. 학원까지 가는 길은 같았지만 중등부 건물은 금방 나오기 때문에 사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검도부 아침 연습 시간까지 아슬아슬했기에 스자쿠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를르슈를 앞지르는 걸음으로 스자쿠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잘 가, 람페르지. 를르슈도 그에게 인사를 했다. 내일 봐요, 쿠루루기 씨.
스자쿠는 를르슈의 ‘내일 봐요’라는 말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를르슈는 내일을 약속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것은 곧 를르슈의 스자쿠를 향한 첫사랑이자 짝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