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마감이 닥치면 뭐든지 하기 마련이다.
스자쿠는 그 말을 믿고서 이제까지 과제를 미룬 제 자신을 탓했다. 제출 기한은 오늘 자정까지였고, 지금은 오후 10시 30분의 분침이 막 돌고 있던 참이었다. 정말 끝나지 않는다. 켜놓은 워드 창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자쿠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졌다. 지금은 막판 스퍼트를 올려야 할 때임을 알면서도, 몸은 나태해지고 있었다.
“스자쿠, 다 했어?”
“그럴 리가.”
“그럼 빨리 해.”
“…….”
커피 한 잔을 가지고 온 를르슈는 스자쿠와 마주보며 앉았다. 빨리. 손끝으로 식탁 위를 툭툭 두드리는 소리에 스자쿠는 기계적으로 손을 올렸다. 무어라 문장을 쓰고 있긴 하지만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멍하니 바이트를 낭비하고 있던 스자쿠는 결국 지금까지 썼던 문장을 삭제했다.
“람페르지 씨. 정말 큰일 났습니다.”
“말 안해도 그래보이니까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라니, 그런 매정한 말을….”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 게 쿠루루기 씨의 모토 아니었나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개인의 모토보다 집단지성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커피를 들이키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를르슈의 침묵에 스자쿠는 소리없이 절규했다. 다시 스자쿠의 손가락이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와 를르슈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시간은 11시 30분. 스자쿠는 기지개를 켜며 후련하게 외쳤다. 다—했—다! 그 말에 를르슈는 짧게 박수를 쳐주었다. 짝짝짝. 조촐한 박수 소리에도 스자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된 그의 몸짓에 를르슈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자러 갈까? 그래야지. 늦었으니까 얼른 자자. 내일은 1교시니까. 두 사람은 차례로 씻고 나오면서 잘 준비를 마쳤다. 침대 위에 누워서 손을 꼭 잡는 것은 습관이었다.
“를르슈는 많이 변했어.”
“뭐가?”
“예전엔 과제 못하겠다고 하면 바로 도와줬는데.”
“그건 고등학생 때나 먹히는거지. 대학생씩이나 됐으면 알아서 해.”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지?”
“귀찮아.”
“사랑이 식었어….”
스자쿠의 시무룩해진 목소리에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말 조심해라, 너. 를르슈의 박력에 스자쿠는 이불을 그러쥐며 눈을 반짝거렸다.
“를르슈 지금 조금 박력 있었어.”
“알면 됐어.”
“그래도 오늘 과제 안 도와준 건 너무했어.”
“…네 참고문헌 목록은 누가 짜줬는지 생각이 안 나나봐?”
“아…. 생각이 납니다.”
“누구지?”
“람페르지 씨죠.”
“그런데도 내가 안 도와줬다고?”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죠….”
어딘가 비꼬는 듯한 말투에도 를르슈는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기로 했다. 를르슈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스자쿠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사랑이 식었어. 두 번 듣는 그 소리에 를르슈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사랑이 식으면 지금 너랑 이러고 자겠어?”
“손만 잡고 자잖아.”
“아니 그럼…맨날 침대에 같이 누우면 무조건 섹스하고 싶어?”
“음. 그건 아니지만 바람직한 거 같긴 해.”
“우리가 짐승이야? 맨날 그러게?”
“그래도 예전보단 조금 하잖아.”
“조금? 어느 기준에서 조금이야? 빈도가 줄었다고 해서 네가 하는 짓의 본질은 변하진 않았어.”
그리고 난 그 조금도 벅차!
를르슈는 쏘아붙이면서 몸을 반대방향으로 돌렸다. 스자쿠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를르슈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를르슈, 화났어?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에 를르슈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지만 날이 서진 않았다. 스자쿠는 안심하며 매달리기로 했다. 를르슈의 허리까지 팔을 두르면 를르슈는 얌전히 안겨 있었다.
“나랑 섹스하는 거 아직도 힘들어?”
“어.”
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스자쿠는 조금 상처받았다. 어느 면에서…? 소리내지 않고 마음으로 물어보았음에도 를르슈는 대답해주었다.
“힘들어서 싫은 게 아니라…. 기분은 좋은데, 너무 좋아서 서로 자제가 안 되잖아.”
“응.”
“사람이면 사람답게 이성을 가졌으면 좋겠어.”
“이성을 잃은 를르슈 보는 게 좋아.”
“넌 정말 반성의 여지가 없구나.”
“조금 반성해서 빈도는 줄였잖아…. 오늘도 손만 잡고 잘 거야.”
“조금 반성으로 되겠어?”
그리고 이게 어디가 손만 잡고 자는 거야, 이 변태야. 를르슈의 젖꼭지를 살짝 만지려고 있던 손이 따끔하게 꼬집혔다. 스자쿠는 아쉬운대로 그의 허리를 다시 끌어안았다.
“과제 하나 안 도와줬다고 이렇게 투정 부리는 것도 정도껏이지.”
“나 은근히 이런 부분에서 속 좁으니까 이해 부탁할게.”
“내가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니까.”
“웃기는군. 사랑하면 네 의심하는 버릇이나 고쳐.”
“내가 뭘 의심하는데?”
“내 사랑.”
“…….”
자꾸 손이 올라온다, 너. 그 말에 를르슈의 가슴팍으로 올라가려던 스자쿠의 손은 다시 허리로 내려갔다. 스자쿠는 한숨을 달게 내뱉으면서 중얼거렸다.
“를르슈 방금 전에 멋있었어.”
“알겠으니까 이제 잠 좀 자자.”
“필로토크 하자.”
“섹스도 안했는데 무슨.”
“할까?”
“너 지금까지 뭘 들었어?”
“날 향한 너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멋진 말.”
“그 전에.”
“과제는 알아서 하라는 말?”
를르슈는 몸을 다시 돌려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앗, 젖꼭지가 눈앞에. 스자쿠의 불경한 말을 하는 입을 한 대 때려줄까 하다가 겨우 참았다. 잠 좀 자자고. 스자쿠의 얼굴을 가슴팍으로 꽉 끌어안으면, 스자쿠가 웃음을 터뜨리며 를르슈의 몸을 바짝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을 웃던 스자쿠와 덩달아서 같이 웃음이 터진 를르슈는 이내 호흡이 잦아들고 나서 침대에 다시 바로 누웠다.
“를르슈.”
“응.”
“사람은 변하는데, 사랑도 변할까?”
“…응?”
“우리 사랑도 변할까?”
대뜸 튀어나오는 철학적인 질문에 를르슈는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정작 질문을 한 스자쿠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평온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도 변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 나쁜 의미가 아니라. 우리 사랑도 변하겠지. 아마 지금보다 난 널 더 사랑하게 될 거야.”
“…….”
주먹이 꽉 쥐어질 정도로 느끼한 대사였지만 를르슈는 굳이 그것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를르슈는? 하지만 스자쿠는 를르슈의 대답을 재촉했다. 느끼한 자식. 낯짝도 두껍지. 어떻게 저런 말을 자기 직전에 하는거지? 심장 터질 거 같게…. 를르슈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제발 잠이나 자.”
스자쿠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를르슈는 더 이상 반응해주지 않기로 했다. 눈을 감고서 양을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세기 시작한 를르슈의 속을 모르는 스자쿠는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며 칭얼거렸지만 를르슈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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