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득한 저녁 전철이었다. 부 활동이 생각보다 늦게 끝난 스자쿠는 저녁을 먹을 타이밍을 애매하게 놓쳤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무언가를 먹고 들어가야 한다. 뭘 먹을까. 점점 들이차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스자쿠는 오늘의 저녁 메뉴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 역은 환승역이었다. 내릴 사람도 많고, 탈 사람도 많다. 스자쿠는 우르르 내렸다가 다시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교복을 보았다. 그리고 유명한 그 얼굴도 보았다. 를르슈 람페르지. 학생회 부회장. 검도부의 예산 문제로 몇번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조금 선을 긋듯이, 하지만 결론은 유도리 있게 해결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를르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다가 스자쿠의 근처까지 흘러들어오듯 서게 되었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바로 옆에 붙는 것에 조금 긴장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가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옆에 선 를르슈에게는 좋은 냄새가 났다. 부드럽지만, 그렇게 자극적이지 않은 향. 우와, 냄새를 맡고 있다니, 변태 같잖아. 스자쿠는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녕.”
스자쿠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옆에서 들린 소리인가 싶어서 보고 있으면 를르슈와 시선이 맞았다. 응, 안녕. 스자쿠도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를르슈는 날카로운 눈매를 서글서글하게 무너뜨리며 웃었다.
“이제 집에 가는 건가? 부 활동?”
“응. 람페르지도 이제 가는 거야?”
“아아…. 회장이 이번에 시장조사 할 게 있다고 해서 거기 다녀오느라.”
“또 뭔가 하는 거야? 부비 두 배 이벤트?”
“또 했다가는 계산이 골치 아파져. 최대한 안 하는 방향으로 하고 싶다만…. 미레이 회장이니까, 뭐.”
늘상 허리에 손을 얹고서 의기양양하게 기상천외한 이벤트를 여는 학생회장을 떠올린 스자쿠는 웃음이 났다. 스자쿠의 웃음에 를르슈는 웃을 일이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쿠루루기는 이런 이벤트에 자주 참여하는 편은 아니지 않나?”
“검도부는 지원이 좀 탄탄한 편이라…. 부비를 더 받으면 좋기야 하겠지. 그건 매니저가 잘 알 거야.”
“부장은 너 아니던가?”
“나는 무늬만.”
끼익. 열차가 멈추는 속도에 따라서 스자쿠와 를르슈도 한 방향으로 쏠리듯 밀렸다. 를르슈의 어깨가 스자쿠의 어깨 쪽으로 가볍게 부딪혔다. 미안. 를르슈의 사과에 스자쿠는 괜찮다고 말했다.
“하긴. 쿠루루기가 노린다면 금방 1등 정도는 하겠지.”
“전교생을 상대로 하기엔 좀 무리이지 않을까…?”
“패기가 없군.”
“근데 부비 두 배 업 이벤트 보다 더 좋은 부상이 있잖아? 학생회 멤버들의 키스 같은 거.”
“…으.”
“하하.”
질색하는 를르슈의 얼굴에 스자쿠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 키스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내 친구는 엄청 진심이거든. 아, 말하기는 힘들지만 학생회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부 활동도 안하면서 매번 필사적이야.”
“회장의 연애론에 놀아나는 거지. 나로써는 끔찍하기 짝이 없고.”
“람페르지를 노리는 애들도 많았지. 우리 반에도 몇명 있고.”
“너도 인기 많잖아.”
금시초문은 아니지만, 를르슈의 입에서 들으니 낯선 내용이었다. 를르슈는 시선을 피하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지난 번에도 여자 테니스부 부장이 고백했잖아.”
“어, 어떻게 알아?”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던데. 그 여자애가 점심시간에 울면서 교실에 들어왔거든.”
“……너네 반이었구나. 근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귈 순 없잖아.”
“알아가며 사귀는 거겠지…. 요즘 애들 사이에서는.”
“람페르지도 요즘 애들이면서.”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대답 대신에 느슨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알아가면서 사귀는 게 좋은 걸까. 를르슈를 보고 있으면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자쿠는 방금 전까지의 대화를 곱씹어 보다가, 복잡해지는 머리에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픈데, 더 고파질 지도 모른다. 여기서 꼬르륵 소리라도 났다간 좀 창피할지도.
“내 친구가, 쿠루루기를 좋아하는데.”
스자쿠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에, 를르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잠겨있는 듯한 목소리에 스자쿠는 처음엔 자기가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스자쿠의 반응이 어떠하든 관계 없이 를르슈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오늘 너랑 이렇게 이야기 한 걸 말해주면 좋아할 지도 모르겠군.”
“나랑 이야기 한 건 람페르지인데, 그 친구가 왜 좋아해?”
“…그 정도의 접점도 없거든.”
“누군데?”
“있어, 내 친구.”
새침하게 대답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눈 하나 깜빡 안하는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뭐라고 더 물어봐야하는 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뭔가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제대로 된 질문을 안 하는 게 나을지도. 스자쿠는 막 내뱉듯이 물어보았다.
“그 친구, 예뻐?”
“나쁘지 않아.”
“성격은?”
“그렇게…썩 좋은 편은 아니야.”
“운동 같은 거 좋아해?”
“전혀.”
“취미는?”
“체스.”
“왠지 공부 잘할 것 같아.”
“뭐,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니까.”
를르슈는 그 말을 하며 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스자쿠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가?”
“누구겠어? 내 친구지.”
하지만 를르슈는 빈틈이 없었다. 이번 역은—. 벌써 강을 건너버린 전철은 스자쿠가 내려야할 역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람페르지는 연애 한 번도 안해봤지?”
“그게 뭐야, 갑자기.”
“고백만 받아보고 사귄 적은 한 번도 없지?”
를르슈가 몸을 빼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설 때, 스자쿠는 역에 도착한 반동으로 살짝 흔들렸다. 를르슈에게 뻗으려고 했던 손이 어중간하게 허공에 남아있다 내려갔다. 를르슈를 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손잡이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스자쿠는 그 뻔뻔한 모습이 왠지 우스우면서도 귀여웠다. 멀어진 를르슈의 옆에 다시 다가갔다. 내릴 것 같았던 스자쿠가 다가오는 모습에 를르슈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쿠루루기, 너 여기서 내려야하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
다가오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의 빨갛게 익어버린 귀를 보면서 스자쿠는 깨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배고파서 미쳐버린 걸지도. 하지만 람페르지, 너무 맛있어 보이는데. 그런 스자쿠의 속을 모르는 를르슈는 계속 빨개진 귀만 내보이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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