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략결혼은 아직도 그 쓸모가 유효하다. 그 증거로 지금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일본에 있는 것이다. 를르슈는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제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이름으로만 들었던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그는 이 지루한 자리에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를르슈와 동갑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어려보이는 듯한 얼굴로, 시선을 영 마주치지 못하는 어리숙한 모습이 더 그를 앳되보이게 만들었다.
그도 를르슈도 불행한 운명이다. 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에 남자와 남자가 약혼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를르슈는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그런 정략결혼에 내팔린 것을 떠올렸다. 가깝게는 브리타니아 내부의 귀족들에게, 멀리는 를르슈처럼 먼 일본까지 오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를르슈가 일본에 온 것은 그리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사쿠라다이트의 최대 생산지였다. KMF 사업에 주력하고 있는 브리타니아에게는 중요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 내민 약혼자가 여자가 아닌 남자, 그것도 허울 뿐인 황자가 아닌 브리타니아 안에서도 핵심 인물이었던 를르슈를 내민 것은 브리타니아의 전략이었다. 보통 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매개로 하는 평화가 아닌, 를르슈의 지략과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강압적인 외교 정책 중에 하나였다. 브리타니아는 일본을 그만큼 주시하고 있고, 를르슈를 약혼자로 내세운 것은 일본의 사정을 정찰까지 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를르슈와 다르게, 일본의 쿠루루기 스자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를르슈와 눈이 마주치면 조금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상한 녀석. 속도 없나.
약혼에 대한 서류까지 모두 작성하고 나면, 를르슈와 스자쿠는 할 일이 없어졌다. 어른들끼리의 이야기에 를르슈가 끼려면 얼마든지 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늘 하루 정도는 거를 생각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아이’의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중요했다.
쿠루루기 저택에서 이루어진 약혼식은 조촐했지만, 브리타니아 황실에서 온 사람들과 쿠루루기 가문을 비롯한 교토 6가의 사람들이 모여있어, 그 위압감은 상당히 무거웠다. 그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를르슈도 지쳐있었다. 한숨을 돌리려고, 를르슈는 잠시 바깥에 나가있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호위를 맡은 제레미아가 금방 따라나오려고 했지만, 를르슈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정원을 가리켰다. 이쯤에서 쉬고 있을 테니, 호위는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눈치가 빠른 그는 를르슈가 홀로 쉬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를르슈는 신발을 신고서 잉어가 헤엄을 치는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꺠끗한 물과 아름다운 붉은색 물고기가 어우러진 모습은 보기가 좋았다. 한편으로는 연못에 갇혀 있는 것이 불쌍해보이기도 했다. 를르슈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그 근처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말을 건 것은.
“같이 있어도 될까?”
깔끔한 억양의 브리타니아어였다. 조심스럽게 옆에 서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일본어로 대꾸했다.
“마음대로.”
이번엔 를르슈의 일본어에 스자쿠가 놀란 듯이 쳐다보았다. 를르슈는 연못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중얼거렸다.
“예전에 일본에서 유학했으니까. 일본어로 말해도 돼.”
“그래? 그럼 일본어로 말해도 되나.”
“브리타니아어가 편하면 어느 쪽도.”
“하하, 그럼 일본어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를르슈가 보고 있던 잔잔한 수면 위로 물고기들이 입술을 뻐끔거리며 들락날락 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일본에서 뭐 공부했어?”
“사쿠라다이트 정제 기술 연구.”
“왕자님인데 그런 걸 하는 거야?”
“브리타니아의 핵심 사업 중에 하나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난 모르는데. 스자쿠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조금 질릴 것 같았다.
“넌 정말 나랑 결혼하고 싶어?”
이젠 철없는 소리까지 하고 있다. 그런 스자쿠의 질문에 를르슈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녹색 눈동자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담겨져 있었다. 정말, 나랑 결혼하고 싶어? 다시 되묻는 듯한 그 시선에 를르슈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 와서 무르고 싶어진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를르슈는 브리타니아에서 되게 중요한 사람이라며? 근데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랑 결혼해도 괜찮을까 싶어서.”
“글쎄. 개인적으로 너는 평범할지는 몰라도, 네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나로써는 오히려 득이 되는 결혼이다만.”
“득?”
“너도 알다시피, 이건 정략결혼이니까.”
를르슈는 스자쿠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나는 네 개인의 취향이나 인간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터치하지 않을거야. 애인을 만들어도 좋고 정부를 만들어도 좋아. 내가 원하는 건 네 배경, 그거 하나 뿐이니까.”
“내 배경….”
“그래.”
조금 매정하게 말했나 싶었지만, 스자쿠 같은 타입에게는 돌려서 말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를르슈는 자리에서 돌아나오려고 했다. 슬슬 자기 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스자쿠와의 영양가 없는 대화도 여기까지로 만들고 싶기도 했었다.
“저기...!”
쿠루루기 스자쿠는 쓸데 없는 타이밍을 잘 잡는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자꾸 늘어놓는다.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를 부른 스자쿠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를르슈를 부른 스자쿠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길어질 무렵에 를르슈가 돌아가려고 하자, 스자쿠는 이번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이야기 할 게 있으면 빨리 해.”
“난 우리가 결혼할 사이니까…. 좀 더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어린 아이 같은 투정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을 뿌리쳤다.
“못 들었어? 이건 정략결혼이라고.”
그리고 를르슈는 스자쿠를 내버려두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야기는 전부 다 끝나 있었고, 두 사람이 성인이 되는 내년에 식을 올린다는 결론이 를르슈와 스자쿠를 기다리고 있었다. 를르슈는 얌전을 빼고 자리를 떴다. 빨리 브리타니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는 쿠루루기 스자쿠가 홀로 남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2.
집으로 돌아오면 여자 구두가 있었다. 높은 힐이 단정하게 놓여져 있는 것을 보면서, 를르슈는 마른 세수를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젠 여자 신음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잠기지 않은 문 사이로 쿠루루기 스자쿠의 헐벗은 몸이 보였다. 여자의 높은 목소리는 절정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렸다. 스자쿠의 짧게 호흡하는 숨소리도 섞여서 들렸다. 를르슈는 두 남녀가 섹스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내일 있을 연설 원고의 최종본이었다.
소리가 잦아들고 나서는 바지만 대충 입고 나온 스자쿠와 마주쳤다. 를르슈는 눈 인사를 했다. 그러나 스자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를르슈를 스쳐지나갔다.
“스자쿠.”
“왜?”
“여자를 데려오는 건 좋지만, 할 때는 문을 닫고 하는 게 매너 아니겠어?”
“내 집에서 내가 하는 건데,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내 집이기도 해.”
“아하, 그러셔.”
완전히 비꼬는 그 말투에 를르슈도 빈정이 상해버렸다. 물 한 잔을 마신 스자쿠는 침실로 다시 들어갔다. 곧 이어 여자가 나왔다. 옷을 겨우 끼워입은 듯한 여자는 어정쩡한 폼으로 스자쿠의 손이 이끌려서 나가고 있었다. 를르슈를 보고서 인사라도 할 생각이었던지, 그녀가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스자쿠가 ‘됐어’라는 말과 함께 그녀를 끌고 나갔다.
그녀의 얼굴을 본 를르슈는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번에 본 여자와 또 다른 여자였다. 남자의 바람은 능력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쿠루루기 스자쿠는 거의 초능력자 수준이었다. 볼때마다 여자가 바뀌어 있었으니까.
스자쿠가 여자를 데리고 문 밖을 나가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꼴을 대체 몇 번씩이나 봐야하는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그러면서도 왜 이런 걸로 비참함을 느껴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따.
‘처음 봤을 때는 안 그랬는데.’
를르슈는 화면이 꺼진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약혼을 하고 나서 근 일 년 사이에, 스자쿠는 많이 변해있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말과 다르게 를르슈에게 쌀쌀맞게 대했으며, 합가를 한 처음 일주일은 냉랭하게 굴더니, 한 달 내내 들어오지 않았다가, 나중에 들어올 때는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었다.
를르슈는 여자와 같이 있는 스자쿠를 보자마자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애인을 만들어도 좋고 정부를 만들어도 좋아.’
그래서 쿠루루기 스자쿠는 보란듯이 그 말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치해.’
어린애 같은 점은 알고 있었는데, 대체 이래서 얻는 이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부부 사이가 안 좋다는 걸 과시해서 좋은 게 뭔데. 남자끼리의 결혼이 불완전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자쿠의 외도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에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부부가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모양새가 되었다.
정말, 이러려는 건 아니었는데.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일본에 있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골이 깊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피곤하고, 를르슈의 장르가 아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끝이 없었다. 를르슈는 제 서재로 들어갔다. 아직 남은 일들을 해야만 했다. 스자쿠는 아직 대학생이지만, 를르슈는 대학을 다니지 않고 황족의 의무를 다하며, 일본에서도 맡은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굳이 스자쿠가 아니어도 생각할 일들은 많았으니, 를르슈는 그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다른 일들을 꾸역꾸역 처리하기 시작했다.
3.
여자를 택시에 태워보낸 스자쿠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짓거리도 벌써 몇 번째인지 세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두기는 싫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를르슈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유치한 짓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이 방법 이상으로 효율이 좋은 것은 없었다.
일 년 전, 쿠루루기 스자쿠는 를르슈와 약혼을 했다. 정략결혼의 첫 단계였다. 당시 수험생이던 스자쿠는 갑자기 입혀지는 수트와 억지로 끌려간 자리에서 제 인생의 약혼자를 만나게 되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저와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브리타니아 황실 안에서도 입지를 굳히고 있는 남자.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예쁜 얼굴. 그 얼굴에 첫눈에 반해버렸다. 남자라면 가능할지도, 라는 마음이 드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자쿠의 호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진 못한 것 같았다. 오히려 적대적이었다. 애인이든 정부든 만들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그의 무신경한 말투에서 스자쿠는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말 뿐인 약혼이 끝나고 정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을 때, 그 상처는 한 번 더 후벼파졌다.
결혼식은 브리타니아식으로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던 날과 비슷한 모양새의 웨딩 수트를 입고서 버진 로드를 함께 걸었다. 가족들과 친지들만 참석한 비공개 결혼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는 많은 이목을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동성 결혼에 대해서 보수적인 일본에서 일어나는, 총리 아들의 동성 결혼식이었다. 그것도 브리타니아 황자와의 정략결혼.
맹세의 키스도 없이 건조하게 반지를 서로 끼워주는 것으로 식의 대부분이 끝이 났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그간 잘 지냈냐고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였다. 식을 마치고, 신혼 집—이지만 쿠루루기 저택과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사스러운 아파트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샤워를 먼저 마친 스자쿠는 오늘 밤부터 를르슈와 함께 지낸다는 사실에 조금 설레고 있었다. 그에게서 차디찬 냉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스자쿠에게는 지지 않는 사교성이 있었다. 그래서 를르슈와 잘 지내고 싶었다.
“…항상 사랑하고 있어. 그럼 좋은 꿈 꿔.”
하지만 세상 달콤한 목소리로 그렇게 전화를 하는 를르슈의 모습을 보면서 배신감을 느꼈다. 그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스자쿠에게 그렇게 매섭게 대했던 것이고.
스자쿠는 괜히 잘 지내보려고 했던 제 자신이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를르슈와의 관계는 그날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괜히 더 매달리고 싶어지고, 그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은 계속 들었다.
이해불가능. 이율배반적. 표리부동. 그런 모든 불일치의 단어들이 스자쿠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처음 일주일은 를르슈에 대한 분노로 그와 한 번도 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 여자 저 여자 집을 전전하다가, 아니면 원래 살던 집에서 한참을 있기도 했었다. 주변에서는 정략결혼으로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혀 그게 아닌데, 를르슈의 마음에 제가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 괴로워서 그랬을 뿐인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갈 때에는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 를르슈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스자쿠를 보는 눈에, 스자쿠는 짜릿함을 느낀 것이었다.
그에게 그 순간에 충격을 줄 수 있다면, 한 순간이라도 그 시선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이는 유치한 심리전이다. 스자쿠는 아파트의 반짝이는 불빛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를르슈는 결혼식 첫날 밤부터 찾았던 그 애인과의 전화를 늘 하고 있다. 스자쿠는 조용해진 밤이면 를르슈의 전화소리를 엿들었다. 상대는 브리타니아 사람인 것 같았다. 를르슈는 다정한 말투로 상대방이 놓치지 않게 조곤조곤 전화통화를 이어갔다.
스자쿠에게는 애인이나 정부를 만들어도 괜찮다고 말했던 그 날이 선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여자의 향수 냄새가 베어있는 침대 시트를 뒤집어 쓴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4.
“이제 좀 적당히 할 수 없겠어?”
를르슈가 스자쿠에게 드디어 그 말을 꺼낸 것은, 스자쿠가 데리고 온 여자가 쿠루루기 총리의 수석 비서라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정치적으로 그녀와는 낯이 익은 사이였는데, 나이도 제법 있을 여자가 한참이나 어릴 쿠루루기 스자쿠와 함께 뒹군다는 사실에 를르슈는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자쿠가 이제껏 데리고 왔던 여자들은 대체로 그의 나이 또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를르슈도 알고 있는, 를르슈와 관련된 사람이었다. 여자를 보내고 들어온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무슨 뜻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로 해. 이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고.”
“너한테 시위할 게 뭐가 있겠어?”
“그럼 대체 왜 이러는데.”
결혼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나누는 첫 대화였다. 를르슈는 주먹을 불끈 쥔 채로, 금방이라도 날리지 않으려 겨우 참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하는 어떤 일에도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오늘 일은 나한테도 문제가 생길 뻔 했잖아.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 줄 알고서…!”
“알아. 아버지랑 관련된 중요한 사람 아니야?”
“알면서 그래?!”
“그게 뭔 상관인데. 너는 내 배경에만 집중하고 있는 거 아니였어?”
스자쿠의 심드렁한 대꾸에 를르슈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스자쿠가 밖으로 나도는 일이 흔하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비서와 배가 맞았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그러면 를르슈의 일에도 지장이 생긴다.
“취소할게.”
를르슈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취소해?”
“네가 뭘 하고 다니던 신경 안 쓴다는 말, 취소한다고.”
“…네가 무슨 권리로? 그리고 이제 와서 뭘.”
스자쿠의 이어지는 말에 를르슈는 폭발하고 말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태블릿부터 집어던졌다. 스자쿠는 악소리도 내지 않고서 놀란 눈으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그 옆에 있던 쿠션도 집어 던졌다. 그 다음은 신문, 그 다음은 잡지, 그 다음은 식은 커피가 들어있던 머그컵. 커피를 뒤집어 쓴 스자쿠가 머그컵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의 몸을 붙잡았다.
“르, 를르슈, 갑자기 왜 이러는데?”
“네가 열받게 했으니까!”
“너가 먼저 나한테…!”
“내가 뭘!”
“난 너랑 잘 지내고 싶었는데!”
를르슈는 스자쿠의 마지막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냐는 식으로 물어보면 스자쿠는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너랑 잘 지내고 싶었는데, 를르슈가 먼저…싫어했잖아.”
“뭐야, 그게….”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스자쿠를 먼저 밀어낸 것은 를르슈였다. 하지만 정략결혼에는 사사로운 감정 같은 것은 귀찮은 것이었다. 스자쿠는 스자쿠대로 겉돌아도 상관 없었고, 오늘 같은 일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난 너랑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냥 내 일만 하고 싶어.”
“…일만 해서 어떻게 하게?”
“적당한 때가 되면 너랑 이혼하고 브리타니아로 돌아갈 거야.”
“이혼?”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를르슈도 자신의 계획을 입밖으로 내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브리타니아에서 일본으로 올 때부터 를르슈의 안에서 정해진 결정사항이었다. 이 일본에서 를르슈는 삶을 마칠 생각은 없었다. 일본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사쿠라다이트와 관련된 문제가 해결만 된다면 쿠루루기 스자쿠와의 결혼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사쿠라다이트의 총권을 쥐고 있는 쿠루루기 겐부의 신임만 살 수 있으면 되었다.
그게 를르슈의 일본 생활의 목적이자 목표였다. 이 철부지 도련님의 바람기만 적당했다면 를르슈는 이렇게까지 열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혼이라니, 그런 이야긴 처음 듣는데.”
“너도 여자가 좋잖아, 이혼하고 싶어하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여자들을 데리고 온거잖아.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턱을 따라 흐르는 커피 방울에 를르슈는 혀를 차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를르슈는 브리타니아로 돌아갈 거야?”
“그래.”
“…애인이 거기 있으니까?”
스자쿠는 그 손수건으로 뺨을 닦으면서 무심코 말을 해버렸다. 를르슈는 그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인? 일이 애인이라면 애인이다만. 그건 일본식 농담 아니던가.”
“아니, 그게 아니라. 를르슈, 매일 밤마다 전화하는 애인이….”
“뭐?”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의기소침해진 스자쿠는 처음 보았던 날의 그 어리숙하고 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를르슈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허탈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깨진 머그컵의 조각들을 보고서 를르슈는 귀찮은 듯이 소파에 주저 앉았다. 난장판이 된 거실 한 구석에 서있던 스자쿠도 그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왠지 연못 속의 잉어를 보았던 그때가 생각났다. 를르슈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밤마다 전화하는 건 여동생이야.”
“…응?”
“여동생이라고. 애인이 아니라.”
5.
를르슈는 여동생 때문에 스자쿠와 이혼을 하고서 브리타니아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스자쿠는 그 믿기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 며칠동안 고민했다. 사실을 밝힌 를르슈는 깨진 머그컵을 솜씨 좋게 피해가서 서재에 들어가서 틀어박혔다. 그리고 며칠동안 바쁜 일이 있어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머그컵은 스자쿠가 치웠다. 왜인지 그렇게 되었다.) 그가 혹시 외도를 하는 것은 아닌지, 스자쿠는 조금 뒤를 밟아보려고 했지만 텔레비전을 틀면 를르슈의 소식이 나왔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만 하는 중이었다.
여동생 때문에 이혼을 한다고. 그런 일이 있긴 한가.
를르슈의 여동생에 대한 사랑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보다 조금 유난인 것 같기도 했다. 이혼을 할 정도면 말을 다 한 게 아닐까.
스자쿠는 를르슈의 여동생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다. 를르슈가 황자였으니, 그녀는 황녀, 즉 공주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를르슈와 같은 ‘비’ 가문의 공주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소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를르슈의 말로만 있을 뿐이었다.
정말 그녀는 실제로 있긴 하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은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 나이는 우리보다 세 살 어려.”
사흘 간의 출장에서 돌아온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사진 한 장을 내보이며 말했다. 꽃밭을 등지고 서있는 귀여운 소녀가 있는 사진이었다. 해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를르슈와 닮은 듯 하면서도 달라보였다.
“생각해보니 나나리에 대해서 이야기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나나리가, 그 밤마다 전화하는 여동생이야?”
“응.”
“…너랑 안 닮았네.”
결국 솔직한 감상을 전하면 를르슈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알고 있어, 하고 덧붙이는 말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원래대로라면 너와의 결혼은 나나리가 했어야 하는 거였지만, 브리타니아 사정도 그렇고, 나도 그런 건 용납하지 않아. 네가 어떤 녀석일 줄 알고 나나리와….”
실제로 여자를 매일 갈아치우는 개차반 같은 짓을 하고 다녔으니 를르슈의 안에서 스자쿠는 최악이었다. 스자쿠는 ‘어떤 녀석’이 되어버린 제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여동생 때문에 나랑 이혼할 생각이야?”
“그래. 너도 이혼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꾸준히 그럴 수 있었을까, 나로서는 의문인데.”
스자쿠는 사진을 돌려주며 말했다.
“나는 너랑 잘 지내고 싶었어. 처음부터.”
“…나는 내 일만 할 수 있으면 돼.”
“그런 게 싫어.”
“너도 네 일에 간섭 안하는 내가 좋았잖아?”
“아냐.”
“…아냐?”
고개를 끄덕이는 스자쿠를 보고서 를르슈는 그의 심리를 알 수 없었다.
“네가 어떤 이유에서 나한테 유치하게 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려줄게.”
“…왜 그랬는데?”
“를르슈한테 관심 받고 싶어서, 아마도.”
아마도, 라고 말을 덧붙인 것은 부끄러워서였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확실하게 말해두자면, 난 너랑 이혼할 생각 없어. 네가 브리타니아에 돌아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
“…네가 뭔데.”
“그리고 를르슈, 너는 내 배경만 보고 결혼한거라고는 하지만, 결국 너랑 결혼한 사람은 나야.”
적어도 이 관계 안에서는 우리는 동등해. 어느 한쪽이 누구의 말을 들어야하는 것도 아니라고.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뜻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혼을 해주지 않을 거라면 이쪽도 무기가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말을 하려는데 스자쿠가 당황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니까 싸우자는 게 아니야.”
“그럼 뭐야?”
“조금, 사이좋게 지내자는 거야.”
“사이좋게…. 이제 와서?”
“나도 이제 더 이상 안 그럴테니까, 를르슈도 나한테 그러지 말고.”
“…….”
사이좋은 부부가 되어보자, 라고 스자쿠가 말하자마자 를르슈는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를 그렸다. 사이좋은 부부라니, 그런 것은 브리타니아 황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애초에 황비가 108명 있는 나라다. 형제 자매의 반 이상은 적인 세상에서 살다온 를르슈에게는 ‘사이좋은’과 ‘부부’는 함께할 수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스자쿠가 건네는 말 속에서는 그것이 꼭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사이좋은 부부가 되는데?”
“…우선, 지금 우리처럼 이러진 않겠지.”
스자쿠의 미지근한 대답에 를르슈는 웃음이 터졌다. 뭐야, 그게. 스자쿠도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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