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이게 어케 완결이 나긴 나네요 ~~ ^^
마무리의 3편입니다 :)
평소보다 긴 외출을 하고 돌아온 나나리는 힘이 없어보였다. 저녁 노을이 한창 지고 있고, 오늘따라 낮잠을 자지 않은 아이는 평소보다 더 칭얼거리고 있었다. 아이를 달래다가 나나리와 눈이 마주치면, 나나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를르슈는 그런 그녀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는 나나리의 그런 모습에 오늘이야말로 그 이야기를 해야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그녀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라버니가 나간다뇨, 왜요?”
“…이제 나 혼자 아이를 키워야하잖아. 그거에 익숙해져야 돼.”
“무슨 소리에요, 우리는 가족인데! 어떻게 따로 살아요?”
“나나리가 있으면 힘이 되지만, 그 힘에 언제까지 매달릴 수는 없어. 너도… 네 생활이 있을 거 아니야.”
“오라버니!”
나나리는 방 건너편에 아이가 자고 있는 것을 잊을 정도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를르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나리는 이런 상황을 예전에도 겪은 적이 있었다. 를르슈가 아이를 낳겠다고 했을 때, 그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를르슈가 아이를 데리고 나나리의 아파트를 떠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나나리가 아무리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나리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오라버니까지 그러시면….”
“미안해, 나나리.”
“어디로 가시는지는 꼭 알려주셔야 돼요. 계속 연락해야 하고요.”
“물론이지.”
“저는 오라버니의 편이에요.”
나나리는 를르슈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를르슈는 차가운 제 손을 따뜻하게 감싸오는 나나리의 손에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할 뿐이었다. 나나리는 고작 손을 잡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 제 오라버니의 품에서 결국 울어버리고 말았다.
*
를르슈는 까다로운 조건을 달고서 아이를 데리고 살 집을 구했다. 혹시 모를 일 때문에 큰 병원이 있는 도시에, 그리고 어디든 쉽게 갈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곳, 쇼핑을 하기 편한 곳, 그 외의 치안이 나쁘지 않은 곳. 그런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은 꽤나 비싼 값을 불렀지만 를르슈는 매물을 찾아낸 순간 망설이지 않았다.
임신하기 이전부터 벌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면에서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를르슈는 지어진지 얼마 안 된 맨션으로 이사했다. 이사할 집에 제일 먼저 들린 나나리는 ‘이 정도면 안심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맨션으로 처음 이사를 한 날에는 나나리도 와서 자고 갔다. 이삿짐을 다 풀기 전까지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를르슈는 몇없는 가구와 앞으로 채워넣을 것들을 고려하며 짐을 풀었다. 짐을 푸는 데에는 하루면 충분했다. 더 있겠다고 주장한 나나리를 겨우 돌려보내고, 를르슈는 이제부터 아이와 단 둘인 생활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부터는 생각했던 대로의 삶이었다. 아이와 단 둘이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부모로서의 삶이 를르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를르슈는 잘 자고 있는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혼자서 되뇌이다가 그렇게 까무룩 잠에 들고 말았다.
*
한편 쿠루루기 스자쿠는 제 대학에서 지하철로 두 시간이나 걸리는 곳까지 무슨 생각으로 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곳까지 간 이유는, 거기에 있는 여대에 나나리가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나리를 만나러 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를르슈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스자쿠가 를르슈의 단서를 찾아내기에는 이미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고, 다들 자퇴한 를르슈에 대해서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좀 친하게 지냈던 녀석들도 그저 가십거리로 를르슈의 묘연한 행방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때 나나리가 찾아와주었던 것이 유일한 단서였다. 하지만 스자쿠는 나나리가 저를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라버니를 닮아 고집이 셌고, 말하는 바 약속은 꼭 지키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자쿠는 일전에 를르슈에게 그녀를 처음 소개 받았을 때 들었던 학교 이름을 떠올리며 막무가내로 그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무턱대고 찾아갔으니 나나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스자쿠는 교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면서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몇몇 여자들이 스자쿠를 보고서 말을 걸어왔지만 스자쿠는 그런 그녀들 사이에서 나나리를 놓칠까봐 전전긍긍해하며 겨우 사람들을 물리쳤다. 그러다가 한 무리의 여학생들 사이에 있는 나나리를 찾아냈다. 운이 좋았다.
“나나리!”
“스자쿠 씨? 왜 여기에….”
나나리는 학교 앞까지 찾아온 스자쿠를 보고서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제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스자쿠를 향해 걸어왔다. 다가오는 그녀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있었다.
하긴, 내가 무슨 염치로…. 스자쿠는 나나리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나나리는 스자쿠를 보자마자 손을 들었다. 저보다 키가 큰 스자쿠를 향해서 달려드는 손은 피할 수 있었지만 스자쿠는 피하는 대신에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나나리의 작은 손은 너무나도 쉽게 스자쿠의 손에 붙들렸다.
“갑자기 와서 미안. 그래도 를르슈를 만나야 할 것 같아서.”
“…이제 와서요?”
나나리는 스자쿠에게 붙들린 손을 빼내면서 물었다. 되묻는 질문에 날이 서있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스자쿠는 그녀에게 져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만나야 돼.”
“왜요?”
“…왜냐면, 를르슈가.”
“스자쿠 씨 모르게 아이를 낳았으니까요? 그건 한참도 더 된 이야기에요. 이제 와서 찾아올 이유는 없어요. 오라버니가 스자쿠 씨를 만날 이유도 없고요.”
“나나리, 화난 건 알겠지만 이건 나랑 를르슈 사이의 문제야.”
“그러니까 더 안 돼요.”
계속되는 거절에 스자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에 나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스자쿠 씨는 오라버니를 사랑하지도 않잖아요.”
“…뭐?”
“제가 틀린 말 했나요?”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제껏 찾아오지도 않은 거고요. 나나리의 말에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치졸한 변명 같은 말이었다.
“나도 나 나름대로 를르슈를 아끼고 있었어.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야.”
“아끼는 사람을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내버려두는 게 스자쿠 씨 나름대로의 방식인가요?”
스자쿠는 그 말에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나리는 대답을 하지 않는 스자쿠의 모습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음만 같았으면 때려주고 싶었지만 이 겁쟁이에게는 그것 마저도 사치였다. 오히려 때린 것을 빌미로 를르슈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는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를르슈가 이사를 서두른 것은 천운이 도운 듯 싶었다. 나나리는 더는 말하지 않는 스자쿠의 어깨를 밀치며 제 갈 길을 찾아 걸었다. 스자쿠는 더 이상 나나리를 붙잡지 않았다.
그때 나나리를 붙잡지 않았다고 해서, 스자쿠가 를르슈를 만나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스자쿠는 다음날도 다시 나나리를 찾아갔다. 교문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스자쿠의 모습에 나나리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기에, 이번엔 스자쿠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나리, 할 말이 있어.”
“……저는 없어요.”
“잠깐이면 돼.”
대답조차 하지 않는 나나리가 멀어져가는 것에, 스자쿠는 어쩔 수 없이 ‘그 방법’을 쓰게 되었다. 나나리는 스자쿠의 ‘그 방법’에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스자쿠가 말한 것은 어느 집의 주소 하나 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스자쿠 답지 않은 비겁한 방식으로 얻어낸 를르슈의 맨션 주소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나나리의 시선에, 스자쿠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말했다.
“이래보여도, ‘쿠루루기’ 스자쿠니까.”
“비겁하네요, 정말.”
“알고 있어.”
나나리는 스자쿠를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오라버니를 찾아가면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래도 상관 없어. 난 를르슈를 만나야 돼.”
스자쿠는 나나리에게 말했다.
“내일 만나러 갈 거야. 그거 이야기하러 왔어.”
“지금 제가 한 말 못 들으셨나요?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저.”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는 스자쿠는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나나리는 그런 그의 모습에 제가 더 당황하며 스자쿠를 붙잡았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자기 맘대로인거죠, 스자쿠 씨는. 오라버니는, 정말, 너무 힘들어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그런 말들이 목구멍 안까지 차올랐다가 모두 가라앉고 말았다.
가라앉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나나리에게, 스자쿠는 그동안 미안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
어서 와, 나나리—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나나리의 뒤에 있는 스자쿠 때문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를르슈는 아이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잔뜩 주며, 떨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동안 를르슈는 스자쿠에 대한 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을 마주하는 순간, 그 ‘정리’는 뒤죽박죽이 되어서 를르슈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완전히 굳어버린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게 되었다. 나나리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서는 를르슈의 곁으로 다가가 아이를 받았다.
“스자쿠 씨가 할 말이 있다고 그래서…. 오라버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셨어요.”
“……나한테, 무슨 할 말?”
를르슈는 나나리에게 내어준 아이 때문에 텅 비어버린 팔을 등 뒤로 감추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스자쿠와 시선을 마주하면, 오히려 닥쳐들어온 스자쿠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를르슈는 코트를 챙겨 들고서는 스자쿠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이야기 해.”
“오라버니, 그래도 집에서…!”
“내 집에 저 자식 들일 생각 없어.”
나나리의 애원을 말로써 일축시킨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따라오라고 하듯이 그의 앞에 섰다. 스자쿠는 별 말 없이 를르슈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고, 를르슈의 머리는 상황에 대한 한게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맨션 앞까지 나오고 나면, 를르슈는 그제서야 스자쿠를 돌아보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설마 나나리를.”
“아니, 나나리는 알려주지 않았어. 내가 아버지를 통해서….”
“뭐? 이 비겁한 놈.”
“그거에 대해선 할 말 없어.”
“…….”
“그만큼 를르슈를 만나고 싶었어. 해야할 말이 있어서.”
를르슈는 할 말이 있다는 말에 긴장하고 말았다.
“아이, 낳았다면서.”
“…네 아이가 아니야. 너도 그랬잖아.”
“아니, 내 아이겠지. 를르슈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잔 적 없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를르슈는 날 좋아하잖아.”
그래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안 잤을 거야. 스자쿠의 단언하는 말에 를르슈는 시선을 피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고, 그것을 부정하는 거짓말은 늘어놓아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자쿠는 대답 없는 를르슈의 모습에 소리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를르슈 같은 사람이 나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
“더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근데 나를 왜 좋아해?”
이야기를 듣던 를르슈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호하게 물어보는 듯한 스자쿠의 말끝은 떨리고 있었다. 스자쿠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남자는 꼴사나워 보이는 게 당연한데, 를르슈는 울고 있는 스자쿠를 보고서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나를 왜 좋아해, 왜 나한테 다정하게 대해줘? 스자쿠의 울음으로 끊어지는 숨 사이로 비수 같은 말이 쏟아졌다. 를르슈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스자쿠를 보면 기대하게 된다. 이번에 찾아온 것도, 어쩌면 상상 속의 그처럼 아이를 안아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기대하고 말았다. 하지만 스자쿠는 여전히 자기 감정에 휘둘린 채로 를르슈의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꼴사나운 남자. 자존심도 없고, 자존감은 더 없는, 보기 흉한 놈.
그런 욕을 퍼부으면서도 를르슈는 스자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욕을 퍼부어도 시원찮을 마당에 달래주자니 저도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나 같은 사람이 뭔데?”
“…를르슈는, 왕자님이잖아. 공주님이랑 행복하게 살아야 돼.”
“뭐야, 그게.”
“아무튼 나랑 있으면 안 돼. 안 행복하니까.”
“…….”
“하나도 안 행복해. 나랑 있으면.”
를르슈의 손을 밀어내고, 제 손으로 눈물을 다 훔쳐낸 스자쿠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건 그거야. 왜 나를 좋아하는지…. 그거만 궁금해서 왔어.”
“…내가 대답해주면?”
“듣고 갈 거야.”
“간다고?”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 거야. 나나리한테도 맹세할게.”
잠자코 듣고 있던 를르슈는 그대로 주먹을 들어 스자쿠의 뺨에 내던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스자쿠가 비틀거렸다. 그 다음은 반대쪽 주먹으로 때렸다. 이번엔 스자쿠가 완전히 무너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로 올라탄 를르슈는 스자쿠의 멱살을 잡고서 외쳤다.
“너는 할 말이 그거 밖에 없어?!”
“르, 를르슈?!”
“이 바보! 멍청아!”
를르슈는 그의 뺨을 몇 대 더 때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체력 바보를 두들겨 패봤자 손해는 자기라는 것을 그 짧은 순간에 깨달았다.
“바보인 것도 알고 있었고, 멍청한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수준 이하잖아….”
를르슈는 중얼거리면서 스자쿠의 멱살을 쥔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깔고 앉았던 스자쿠에게 손을 내밀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는 너는? 여기까지 와서 그런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이유가 뭐야?”
“…….”
“내가 낳은 네 아이는 궁금하지도 않고, 네 멋대로 왔다가 갈 생각이라면 대답 따위 중요하지도 않잖아.”
“중요해.”
“왜?”
“왜, 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중요해.”
아이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스자쿠의 작아지는 목소리에 를르슈는 한숨을 삼켰다. 다시 마주 보고 나면 엉망이 된 스자쿠의 얼굴이 보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더 이상 비웃지 말고 그에게 정답을 가르쳐줘야할 때인 것 같았다.
“너니까 좋아하는 거야, 스자쿠.”
정답을 들려주면, 스자쿠는 를르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바람이 몇차례 둘 사이를 흔들고 가고 나서야 스자쿠는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날 좋아해?”
“그래, 아직도.”
“……나는 를르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데.”
“내 행복은 내가 알아서 찾아.”
“그래도.”
그래도 안 되는데. 스자쿠의 목소리는 거의 잠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떨어진 거리만큼 를르슈는 걸어갔다. 를르슈의 그림자가 저를 덮쳐오는 것에 스자쿠는 피하지 않았다. 그로써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피하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래, 너로써는 최선이겠지.
“여기까지 왔는데, 또 도망칠 생각은 없겠지. 스자쿠.”
“……를르슈야말로, 지금 도망가. 더 멀리, 내가 못 찾게. 그래야.”
“나는 너랑 행복해지고 싶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눈을 깜빡였다. 깜빡이는 속눈썹을 따라 눈물이 똑, 떨어졌다. 이 울보 자식. 언제까지 우는 거야. 를르슈는 스자쿠의 젖은 뺨을 닦아주며 말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
손을 잡고 돌아온 스자쿠와 를르슈를 보고서 나나리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퉁퉁 부어버린 스자쿠의 얼굴을 보고서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를르슈가 금방 약을 발라주는 것에 안심했다. 그 사이에 잠들어버린 아이의 얼굴을 보여주려고 를르슈가 침실의 문을 열었을 때, 스자쿠는 더는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바보 같긴, 하고 달래주는 를르슈를 끌어안고 스자쿠는 한참이나 울었다.
‘죽으려고 했었어.’
‘뭐?’
‘오늘, 죽으려고 했었다고.’
‘…무슨 이야기야, 그게.’
‘를르슈랑 만나고 나서 이제 더는 여한이 없을 거 같아서…. 으악!’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으음…. 응.’
‘두 번 다시 그런 말, 농담이라도 용서 못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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