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 황자가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홀딱 빠져있다는 것은 아마 브리타니아 황궁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일 것이다. 처음 만났던 열 살 때부터, 를르슈는 저에게 무릎을 굽혀 손등에 키스를 하는 그 기사에게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였다. 그 설레는 연정은 칠 년이 지난 지금도, 열일곱 살의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애타게 만들었다.
브리타니아에서는 성인으로 인정받는 열여덟이 되어야지 어린 아이로서의 취급이 덜해진다. 황족을 비롯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무외 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무게를 실감하는 때가 오고, 그를 모시는 사람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다지게 된다. 를르슈는 성인식까지 앞으로 일 년이 딱 남은 지금, 모든 것이 다 제약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원정을 마치고 리 가문의 야회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를르슈는 입술이 퉁퉁 부을 때까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 가문은 가주인 를르슈의 어머니 마리안느가 지금 연방 순회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허락 없이 를르슈가 나설 수도 없었다. 리 가문과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가주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드나들 정도로 막역하진 않았기에 를르슈는 아쉬운대로 아리에스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모처럼 스자쿠가 본국에 와있는데, 왜 만날 수 없는 거야. 를르슈는 반 년 가까이 자리를 비우고 있는 제 어머니가 그날따라 더 미울 수가 없었다. 야회가 열리고 있을 리 가문의 별궁 쪽을 바라보며 를르슈는 스자쿠의 이름을 소리내어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며칠을 부루퉁한 기분으로 보내고 나면 를르슈의 기분은 그럭저럭 원래대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고 하면, 다시 나이트 오브 세븐이 어디로 한동안 멀리 원정을 떠난다거나, 황궁에서 벗어난 파견근무를 나간다거나, 그런 이야기로 본국을 떠나는 걸로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아리에스에 곧잘 놀러왔는데, 최근엔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자주 활동하면서 다른 황족이나 귀족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난 나이트 오브 세븐의 행보에 를르슈는 불만이었고, 또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대로 스자쿠에게 잊혀지면 어떡하지.
성인이 되려면 아직 일 년이라는 시간이 더 남아있었다. 일 년만 지나면 저도 마음대로 스자쿠를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버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기다림을 위로 삼는 제 자신이 조금 비참하게 느껴졌다.
*
“스자쿠, 슬슬 전하한테 얼굴을 비추는 게 어때?”
“전하? 어느 전하?”
스자쿠는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의 내용물을 비웠다. 말끔하게 한 잔을 들이키는 스자쿠의 모습에 지노는 정말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지노의 재촉하는 시선에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거봐, 역시 알고 있어.”
“뭘?”
“를르슈 전하 말이야. 너를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무슨… 그런 이야기 큰 소리로 하지 마.”
시끌벅적한 회장 안에서 지노와 스자쿠는 주역이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따라다니는 시선이 많았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세 명이나 같이 따라나간 대규모의 전투에서 승리를 한 코넬리아 리 브리타니아의 야회는 자리가 화려했다. 원래부터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리 가문의 가주 인맥이 더 빛을 발하는 듯 했다. 스자쿠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얼굴인 사람들 사이에서 지노와 어울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자리는 불편했다.
스자쿠가 좋아하는 분위기는 정원이 바로 보이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다도회 같은 것이었다. 친한 사람들 몇몇이서 모여서 맛있는 것을 나눠먹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실컷 떠들면서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 그런 것을 동경하고 그리워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아리에스에서의 생활 때문이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되기 전에 잠시 아리에스에서의 호위대로 일했던 때는, 스자쿠의 인생에서 몇 안되는 소중한 기억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런 기억에 매달리기엔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서의 삶은 다소 척박했다. 좋든 싫든 파티에 참석해야하는 일은 잦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의무와 관례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스자쿠는 그런 일상 속에서 술에 취해서 잠시 몽롱해진 틈을 타, 여자들의 체온에 몸을 부비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방법을 배웠다.
이런 몸으로 아리에스의 전하를 뵙는 건 불경한 짓이야. 스자쿠는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이 나쁜 짓을 하며 노는 지노야 ‘그것 또한 라운즈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제 속이 편해보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전하의 하얀 얼굴을 생각하면 스자쿠는 아리에스로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지노가 다시 아리에스의 이야기를 꺼낼까봐 안절부절하며 스자쿠는 자리를 구석진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같이 뒤를 따르던 지노는 어디로 가냐며 성큼성큼 걷더니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어라, 유페미아 전하잖아. 벌써 이런 자리에 나오실 때가 되셨나.”
“…유페미아 전하?”
“코넬리아 전하의 여동생 공주님이셔… 가 아니라, 알고 있잖아, 스자쿠. 아리에스에 자주 오시는 공주님 중 한 분.”
“아, 알고는 있었는데 너무 오랜만이라서.”
“오랜만일 게 있나. 오랜만이면 인사라도 드리러 가자! 유페미아 전하!”
분위기에 취한 지노는 어딘가 다루는 것이 골치아프다. 스자쿠는 그의 손에 이끌려서 유페미아의 앞에 서야만 했다. 거의 반 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유페미아는 스자쿠를 보고는 반가운 듯이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지노, 스자쿠! 아리에스가 아닌 곳에서 만나니까 이상해요.”
유페미아는 그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천진난만했다. 항상 를르슈와 같이 있던 모습으로만 기억했기 때문에 그녀는 늘 어린 소녀 같았지만, 야회에 나오기 위해 차려입고 나온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일순 어른스러워보였다. 아마 를르슈 전하도 이보다 더 어른스러워졌겠지. 스자쿠는 유페미아의 모습 속에서도 를르슈를 그리워하는 제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지노와 유페미아가 곧 웃고 떠드는 모습에 스자쿠도 그 옆에서 같이 자리를 지켰다. 유페미아는 여전히 상냥했으며, 세 사람의 공통된 친구인 를르슈와 그의 여동생 나나리에 대한 안부도 짧게나마 전해주었다. 그녀는 를르슈의 이야기를 할 때 스자쿠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스자쿠랑 만났다고 하면 를르슈가 질투할 지도 모르겠네요.”
설마요, 라는 말을 겨우 내뱉으며 스자쿠는 세 사람의 무리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또 튀어나온 를르슈라는 화제에 대해서 저는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더 엮이기 전에 도망치는 게 상책일지도 모른다. 춤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울리자, 스자쿠는 때를 노려 다른 곳으로 발을 옮겼다. 지노와 유페미아는 그 사이를 못 참고 도망친 스자쿠를 보며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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