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했다.
그런 표현으로 밖에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처음 보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그가 잊혀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의 외모가 유달리 눈에 띄었기 때문에 잔상처럼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그가 있을 법한 자리에서 그를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라던가, 혹은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당황하게 되었다.
마음을 자각하는 것은 쉬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품어본 것은 처음이라 계속해서 방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대하는 마음도 처음과 끝이 매번 달라졌다.
다정하게 대해주었다가도 거리를 두는 것처럼 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스자쿠 자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마음이 자꾸 커지고, 그가 자꾸 다른 곳을 볼 때마다 마음은 뒤틀려 갔으니까. 자존심 같은 것이 상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의 밑바닥을 게속해서 드러내게 된다는 자체가 싫었다. 추한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괴로워졌다.
지금까지 해온 연애는 사랑이 아니었구나.
진짜 사랑은 할 게 못되는구나.
쿠루루기 스자쿠가 결국에 벅차오르는 사랑을 어찌하지 못하고 접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다가온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의 고백은 담담하고 간단명료했다.
‘좋아해, 너를 좋아해, 스자쿠.’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채로 평소와 같은 그 모습은 점심 메뉴를 말하는 것 같은 평온함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그의 말이 장난처럼 느껴지다가도, 자신이 좋아하는 그라면 이런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그 고백에 답했다.
‘나도 좋아해.’
‘…….’
‘그럼, 우리… 사귀는 건가?’
그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스자쿠의 대답을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그런 모습이 어딘가 순진해보여서 스자쿠는 괜히 가슴이 간지러웠다. 연애해보는 게 내가 처음인가? 스자쿠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자쿠의 손을 꽉 잡아오는 그의 손은 긴장한 탓에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처음일 리가 없지.
‘나 람페르지랑 같은 학교 나왔거든.’
‘설마 를르슈 람페르지?’
‘그래. 그 람페르지 말고 더 있어? 걔, 고등부 시절에는 제법 위험한 짓 많이 하고 다녔다고. 아마 그런 사이에 남자들이랑도….’
‘뭐?!’
‘그래서 여자친구가 없는 거야.’
‘우와, 완전 깨는데.’
스자쿠의 남자친구는 그 미모로 여러모로 각광받는 존재였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화젯거리였다. 그래서 어딜 가서도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분위기였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좀처럼 잘 하지 않는다. 사귀고 나서 일주일이 되어서야 그에게 쌍둥이 동생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둘을 무척이나 각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에게 조금 다가선 기분이 들어서 무척이나 기뻤다. 그에게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하염없이 기뻐지는데, 이런 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게 뭐야. 위험한 짓을 많이 하고 다닌 거랑 남자들이랑, 뭔 상관인데.
스자쿠는 불만스러운 눈을 내리깔면서 술잔에 술을 들이부었다. 알싸하게 취기가 올라오는 감각은 기분이 나빴다.
‘그러니까 쿠루루기, 너도 조심해. 람페르지랑 친하게 지내면 이상한 소문이나 난다고.’
갑자기 스자쿠에게 돌아오는 화젯거리의 전환에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렸다.
남이사. 이상한 소문이 나든 상관 없어. 나는 를르슈와 사귀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스자쿠는 일언의 대꾸도 하지 않은 채로 술만 비울 뿐이었다. 어딘가 어두운 스자쿠의 분위기에 다들 다시 다른 이야기로 돌아갔다. 한 차례 술을 더 주문하고 나서 사람들은 취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사람들 무리에 같이 섞여 나온 스자쿠는 담배 한 대를 빌려피웠다. 하얗게 번져가는 연기 속에서 스자쿠는 찌푸려진 미간을 펼 줄 몰랐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기분이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자쿠는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속이 좁은 사람인 줄을 몰랐다.
를르슈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건 나였으면 좋겠어.
“를르슈.”
“응?”
“를르슈는 고등학생 때 어땠어?”
“어…? 글쎄. 그냥 그랬던 것 같은데.”
거짓말. 위험한 짓을 하고 다녔다며. 그것도 많이.
스자쿠는 그런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남에게 들은 말을 연인 본인에게 전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그 녀석들이 했던 말들은 스자쿠의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디론가 게워내고 싶은 마음으로, 스자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를르슈가 나한테 먼저 고백했잖아.”
“아, 그렇지.”
“그럼 다른 남자랑도 사귄 적 있는 거야?”
“……응?”
“보통 남자한테 고백할 생각은 안 하니까. 를르슈, 다른 남자랑 사귄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런 말을 하면 안되는데.
하지만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더 화나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 를르슈였다. 조금이라도 당황하고 어이없어 하면서 스자쿠의 말을 잘라주기를 바랐는데.
“어차피 를르슈는 처녀 아니지?”
이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를르슈의 표정은 일순 굳었다.
이런 말을 하는 나를 원망해. 얼른 나한테 화를 내. 스자쿠는 그렇게 빌었다. 하지만 를르슈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마치 진실을 들켜 당황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화가 났다.
화가 난 채로 하는 섹스는 무슨 기분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를르슈와 섹스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기분으로 그를 처음 안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누구와 경험이 있던 간에 지금 사귀고 있는 건 스자쿠 자신이니까. 그의 과거에 대해서 탓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의 처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섭섭할 수는 있어도 그걸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생각으로는 화가 날 구석이 없었음에도, 를르슈의 위에 올라탄 순간 모든 것이 화가 났다.
제 아래에 있는 이 몸을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기분이 나빴다. 가고 있을 때의 그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이 자기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최악이었다.
몸은 흥분하고 있지만 머리 한 쪽은 차게 식어있었다. 울고 있는 를르슈를 보고 있어도 달래주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 더 엉망으로 그를 울려버리고 싶기도 하면서, 다른 곳을 더 볼 수 없게 망쳐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런 기분으로 하는 섹스는 정말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