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었다.
묵혀두었던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꺼내어 더위를 달래는 계절이 온 것이다. 잠옷도 좀 더 얇고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옷장의 옷들도 여름용으로 바꾸었다. 하루 종일 여름 맞이에 신경을 쓰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었다. 아직 에어컨을 틀기에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기에, 에어컨을 트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며 그럭저럭 버티고 있을 때였다.
를르슈가 겨울과 봄 옷을 정리하고 스자쿠가 빈 공간에 여름 옷들을 채워넣는 작업은 서서히 끝이 나가고 있었다. 를르슈는 올 겨울동안 스자쿠가 사놓고 입지 않은 스웨터니 그런 옷가지들을 헌옷 부류에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엔 입는 옷만 입게 되니까, 안 입는 건 과감하게 정리해.”
“그래도 아깝잖아. 한 번도 안 입었고.”
“계속 공간 차지하고 있는 것보단 나아.”
“그런가…….”
마지막 티셔츠 한 장을 스자쿠가 거는 것으로 정리는 끝이 났다.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여차저차 하는 사이에 언제나 여름은 오고, 그 계절의 흐름에 휩쓸려 정리는 늘 어영부영, 되다 만 듯한 그림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작정을 하고 여름 준비를 한 를르슈는 뿌듯한 기분으로 집안을 돌아보았다.
“더우니까 샤워나 할까….”
“같이 하자, 를르슈!”
“싫어.”
“왜? 같이 하면 더 빨리 하고 좋잖아.”
“샤워만 할 게 아니니까 그래.”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샤워만 할 거야! 다른 건 안해!”
이번엔 를르슈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다른 게 하고 싶어지니까 안 된다고!”
아, 정말.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얼굴을 감싸면서 중얼거렸다. 다른게 하고 싶어지니까 안 된다는 말이 이렇게 귀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를르슈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면서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너는 들어오지 마! 으름장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에 같이 맞이하는 휴일에 욕실 섹스로 하루를 빨리 끝내고 싶진 않았다. 샤워도 하고 나면 밖에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가볍게 드라이브도 하면서 데이트도 하고 싶었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씻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크게 육체 노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잘하게 신경을 써가면서 한 정리 작업에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잠깐 눈 좀 붙일까. 스자쿠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두 눈두덩이를 손으로 덮었다. 어두워지는 시야에 졸음은 금세 몰려들어왔다.
“스자쿠, 자?”
씻고 나온 를르슈는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스자쿠의 모습에 그에게 물었다. 대답이 없는 스자쿠는 꿈나라 중이었다.
그 사이에 잔단 말이야? 를르슈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스자쿠의 옆에 걸터앉으면서 그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잘생긴 이마가 드러나면서, 그 특유의 소년 같은 인상은 더 어려보였다. 를르슈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운 놈. 그런 의미에서 이마를 쓱 쓸어주면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결에도 를르슈의 기척을 쫓는 것이 스자쿠다웠다.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쉴까…….”
밖은 날씨가 낮에는 더우면서도 밤에는 쌀쌀하다. 코트는 너무 덥고 가디건은 춥다. 어차피 차를 타고 움직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엇을 입어야할지 애매하다. 이런 날에는 감기에 걸리기 쉽고, 몸은 더 쉽게 지치기 마련이다.
집에 있는 게 제일 좋을 지도.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자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퍽 피곤했던 모양인지 스자쿠는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성미에 맞지 않게 앉아서 하루 종일 꼼지락거리는 일이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정리는 빨리 끝났다.
언제라도 여름을 맞이할 준비가 된 집은 만족스러웠다. 를르슈도 스자쿠의 옆에 누워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고 있는 스자쿠의 얼굴은 재미있다. 벌써 몇 년째 이 얼굴과 함꼐 하고 있지만 어디 하나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의 눈썹 근처를 손끝으로 문지르면 스자쿠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미간 사이를 또 만지면 굳었던 표정은 다시 펴졌다. 그런 스자쿠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를르슈도 금방 잠에 빠졌다.
를르슈가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이었다.
눈을 뜨게 된 것은 입술에 남는 간지러운 느낌 때문이었다. 스자쿠가 키스라도 한 모양인데. 를르슈는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 느낌이 멀어지고 나서야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뜬 를르슈의 앞에는 스자쿠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키스하니까 일어났네. 공주님이야?”
“그럴 리가 있나.”
“하긴 공주님이 아니라 왕자님이지.”
“왕자를 키스로 깨워서 어쩌려고?”
“같이 저녁이나 먹으려고.”
“그 저녁은 내가 만들고?”
“내 왕자님은 요리를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
밥 달라는 소리를 꽤나 낭만적으로 둘러대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헛웃음이 나왔다. 누워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결에 멍한 머리로 냉장고 속에 있는 것들을 떠올리고 있는 와중에 스자쿠가 웃으면서 말했다.
“장난이야. 나가서 먹자. 조금 늦었지만 데이트도 하고.”
“이 시간에?”
“싫어?”
“아니, 뭐… 상관은 없는데.”
를르슈의 미적지근한 대답에 스자쿠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면서 중얼거렸다. 데이트 하자는데 왜 시큰둥해, 사랑이 식었어? 그의 어리광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그를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