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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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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잉 리퀘스트

DOZI 2021.03.28 17:10 read.431 /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다는 것은 어디에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지만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지 알 수 없는 L.L.의 삶은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 것의 반복이었다. 기어스의 조각을 찾는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기어스라는 힘 자체가 기적인 만큼 조각을 찾을 확률은 극악에 가까웠다.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많았고, 웃는 날보다 힘든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 속에서도 L.L.는 외롭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늘 C.C.가 있었다는 것도 정답이 될 수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세상 덕분이었다.

제로와 나나리의 소식은 어느 곳을 가서라도, 아주 작은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 평화로운 세상에 위험은 언제든지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두 사람은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었다. L.L.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물론 자기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쪽만 일방적으로 그들의 소식을 알고 있고, 그들이 원하는 를르슈와 C.C.의 소식을 전하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았다. 하지만 L.L.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를르슈는 없으니까.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을 살아갈 수 없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이별. 그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서히

아주 천천히

눈에 띄지 않을만큼 조금씩 

 

L.L.는 를르슈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제로와 나나리의 소식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했다. 시간은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고, 변하지 않는 자신과 다르게 둘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의 시계도 언젠가 멈춰버리고 말 것이다. 

공식적으로 제로와 나나리의 은퇴가 발표하고 나서부터, 그들의 소식을 이제 더 이상 쉽게 접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L.L.는 자기 자신의 미련을 놔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진짜 벌의 시간이 온다고 생각했다. 작은 위안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다.

L.L.는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한 번 정도는 보러가도 되잖아.”

“됐어.”

 

짐 정리를 하면서 C.C.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L.L.는 많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됐다는 한 마디로 일축시켰다. 필요가 없어서 버릴 것과 다시 챙길 것을 나누어서 정리하고 있었다. 필요 없는 것에는 드디어 C.C.가 자주 들고 다니던 인형이 제일 먼저 놓여졌다. 그 위에 L.L.는 언젠가 나나리가 챙겨준 휴대폰을 올려두었다. 언제 어디서든 연락해주세요, 오라버니. 그녀의 상냥한 말투가 떠올랐지만 L.L.는 과감하게 그것을 ‘쓸모 없는 것’의 목록에 두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잖아.”

 

C.C.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쓰레기 더미에서 꺼냈다. 나나리는 너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라고 C.C.가 말을 꺼냈을 때, L.L.는 C.C.의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을 낚아챘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새 것에 가까운 휴대폰은 L.L.의 발길질에 아작이 나버렸다. L.L.는 조각난 휴대폰을 다시 쓰레기 쪽으로 내던졌다.

 

“이제 됐어. 다 끝났으니까.”

 

L.L.의 다 끝났다는 말에 C.C.는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다 부서진 휴대폰의 잔해를 쳐다보며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L.L.가 ‘를르슈’의 마지막 물건을 버려버린 것을 보고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L.L.는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봤자 이제 끝난 일이고, 벌어진 일이며,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과거가 되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L.L.와 C.C.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비껴나간 존재였으니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L.L.는 제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차례차례 접해갔다. 누군가는 일찍 지는 꽃이었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사랑을 받다가 떠났다.

나나리가 죽었을 때, L.L.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숙소에 딸려 있는 텔레비전으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흘러나왔다. C.C.가 놀라서 스푼을 떨어뜨렸다. L.L.는 스푼을 닦아서 다시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계속해서 식사를 이어갔다. 고기는 질겼고, 빵은 딱딱하고, 스프는 맹탕이었다. 맛없는 저녁이었지만 L.L.는 꾸역꾸역 그것들을 다 비워갔다.

나나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나리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지, 나나리의 죽음이 얼마나 슬픈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쉼없이 이야기했다. L.L.는 그 사이를 걸어갔다. 검은 옷의 사람들 사이 속을 헤쳐나갔다.

 

“를르슈.”

 

L.L.가 를르슈라고 불리는 일은 드물었다. C.C.는 그 이름으로 L.L.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쳐다보고 있으면 C.C.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고물에 가까운 휴대폰이었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죽었대.”

 

L.L.는 휴대폰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귀에 가져가지 않고서, 빨간 불빛이 깜빡거리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바닥으로 내던졌다. 집어던진 힘만큼 휴대폰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박살난 휴대폰을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다. C.C.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잖아!”

“이렇게까지 해야 알아먹을 거 아니야?! 난 이제 를르슈가 아니야, 그러니까 쿠루루기 스자쿠가 누구인지 살던지 죽던지 관심 없어!”

“를르슈!”

 

C.C.가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이제 됐어, 그만할래. 지쳤어.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어. C.C.의 울음 사이로 새는 말에 L.L.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로는 정말로 죽은 모양이었다. 나나리의 죽음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검은 옷의 행렬은 다시 이어졌다. 가면을 쓴 사람들의 틈을 지나가면서, L.L.는 C.C.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거꾸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분이었다.

장례식장이 어디인지, 그의 시체가 어디에 있게 될 것인지 그런 이야기는 귀를 닫고 있어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 L.L.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흑의 기사단은 제로가 활동했던 일본에 묘를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L.L.는 일본의 꿈을 많이 꾸었다. 를르슈가 되어서 쿠루루기 스자쿠와 만났던 꿈, 나나리와 함께 셋이서 바닷가에 갔던 꿈, 해바라기 밭, 애쉬포드 학원, 서로 가면을 쓴 채로 만났던 전장, 마지막까지. 자고 일어나면 땀에 흠뻑 젖어있었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L.L.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L.L.는 를르슈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것이 좋은 의미가 되었는지, L.L.의 긴 시간 속에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 시간 속에서 확실한 것은 L.L.는 자기 생각보다 정이 많았고, 미련이 깊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제로와 나나리의 흔적을 꿈에서 찾아 쫓았다.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뒤늦게서야 후회하는 것은 L.L.가 자주 하는 일이었다. 자주 하는 일인 만큼 익숙하기도 했었다.

 

그날은 겨울이 몹시 추운 대륙의 땅을 걷고 있을 때였다. L.L.와 C.C.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끌어안은 채로 겨우 숙소를 잡았다. 숙소는 낡아빠진 모양과 다르게 난방이 잘 되어있어 공기는 훈훈했다. 찬바람을 잔뜩 맞은 탓에 지쳐있던 L.L.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었다. 널부러진 짐 사이로 C.C.가 먼저 잠들었다. 그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L.L.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지쳐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쉬기 위해서는 정리가 필요했다. 엉망으로 내팽개친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어디선가 찬 바람이 들어왔다. 창문을 고쳐 닫기 위해서 문가로 다가갔다. 반쯤 덜렁거리는 유리창 밖에는 눈보라가 그쳤지만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사이로 걸어가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한참이나 작은 아이가 황량하게 바람이 부는 그 사이로 걷고 있었다. 어둑한 불빛으로도 보이는 곱슬머리는 어딘가 낯이 익은 기분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L.L.는 그 아이가 하는 것을 보았다. 우물로 보이는 곳에 가서 물을 한참이나 긷더니 몸의 절반만한 물통을 가득 채우고서 다시 숙소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리 하인이래도, 저렇게 어린애한테…? L.L.는 너무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람들의 일에 제가 끼어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창문을 고쳐 닫고 커텐을 내리고 나서 L.L.는 침대로 돌아왔다. 이불을 덮지 않고 자는 C.C.에게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서 저도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었다. 숙소에서는 아침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L.L.와 C.C.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카운터에 기대 앉아 졸고 있는 주인에게 가까운 시장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하던 때였다. 주인은 장이 서긴 할테지만 오늘은 너무 추워서 상인도 몇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거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배가 고픈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현관 근처에, 어제 L.L.가 보았던 작은 소년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가만히 움직이지도 않는 그 모습에 처음엔 죽었나 싶었지만 꼼지락거리는 두 손에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L.L.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것에 C.C.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금방 떠날 것 같은 손님들이 아직도 현관 앞에 있는 것에 의아해한 주인이 금방 나와보더니, 소년의 모습을 보고서 그를 걷어차며 소리를 내질렀다.

 

“이 자식, 일하고 있으랬더니 여기서 또 놀고 있어?!”

 

으악, 하고서 소년이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동양인이었다. 그리고 그 소년의 얼굴을 보자마자 L.L.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C.C.가 더 말릴 새도 없이 L.L.의 몸이 튀어나갔다. 방금 전 걷어차인 소년은 저를 감싸고 드는 L.L.의 품에 버둥거렸다.

L.L.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년을 알아본 것은 C.C.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년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얼굴은 잊혀질 수 없는 그 두 사람의 공범자의 것이었다. 

 

“쿠루루기, 스자쿠…?”

 

L.L.가 소년—그에게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하자, 주인은 어째서 ‘그 자식’을 데리고 가겠냐고 물었다. 이름은 그것이냐고 묻자, 주인은 떨떠름하게 딱히 이름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L.L.가 소년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어, 없어요.”

“…….”

“저, 정말, 로, 없… 없어요.”

 

말을 더듬거리면서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소년의 모습에, L.L.는 이를 악물었다. 넝마와 같은 옷차림 아래에는 상처와 멍이 잔뜩 있었다. 방금 전에 걷어차는 것을 보면 소년은 맞고 자란 것이 분명했다. 학대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평생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L.L.는 소년의 손을 잡은 것에 힘을 주었다.

소년의 옷을 사러 나갔다 온 C.C.는 L.L.의 선언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은 스자쿠고, 우리랑 함께 갈 거야. L.L.는 C.C.의 손에 들려 있는 옷가지들을 빼앗으며 깨끗하게 씻긴 스자쿠의 몸에 정성스럽게 입혀주기 시작했다.

 

“스자쿠라니, 그런 이름으로 어떻게 여행을 해?”

“스자쿠에게는 스자쿠 말고 다른 이름은 필요 없어.”

“그 애가 쿠루루기 스자쿠도 아닌데….”

“스자쿠라고! 내가 알아, 스자쿠라는 걸!”

 

L.L.가 버럭 화를 내자, 스자쿠는 고개를 움츠렸다. 겁에 질린 스자쿠의 모습에 L.L.는 금방 사과했다.

 

“미안, 스자쿠. 너한테 화낸 건 아니야.”

“괘, 괜찮, 아, 요.”

“나는 L.L.야. 쟤는 C.C.라고 하고.”

“……L.L.?”

 

스자쿠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준 L.L.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L.L.라고 해. 이상한 이름이지? L.L.가 나긋하게 웃으며 물어오는 것에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앞으로 스자쿠라고 부를 거야. 스자쿠, 괜찮지?”

“…스, 스자쿠.”

“그래. 착하지. 앞으로 같이 여행을 할 거야.”

“여, 행.”

 

L.L.의 말을 조심스럽게 따라하는 스자쿠는 그 뜻을 모르는 것 같았다. L.L.는 그것에 마음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같이 여기를 떠날 거야. 뜻을 설명해주면 스자쿠는 금방 알아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C.C.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나머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스자쿠를 사기 위해서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었기 때문에 또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앞으로 입이 하나 더 늘었기 때문에 어떻게 될 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한한 시간을 가진 L.L.와 C.C.에게는 그런 것은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아서, C.C.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두, 두 사람은 계속 여행을 해, 왔던, 거에, 요?”

 

여행의 한창 중이었다.

스자쿠는 어눌한 말투였지만 두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겁을 내지 않았다. 스자쿠는 제 몫의 짐가방-아마 처음으로 자기 몫의 물건을 가져본 듯하여 들고 있는 것도 낯선 듯 했다.-을 들고서 부지런히 L.L.의 뒤를 쫓아다녔다. L.L.는 스자쿠와 손을 잡은 채로 걸었다.

 

“그래. 스자쿠도 이제 같이 여행할 거야.”

“…왜, 왜 여행 해요?”

“찾는 게 있어.”

“무…물건?”

 

스스로의 어휘가 아직 부족한 것에 스자쿠는 답답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L.L.에게 물었다. 그래도 L.L.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원래대로의 그 다채로운 표정을 감추지 않는 것이 좋았다.

 

“물건이라고도 할 수 있고, 정확히는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군.”

“어려, 워요?”

“찾는 게 쉽지 않아. 그래서 계속해서 여행하게 될 거야.”

“…….”

“힘들 거 같아?”

“괘, 괜찮, 아, 요. 할 수, 있어요. 거기, 보, 보단, 좋아요.”

 

거기라고 말하는 것이면 그때의 숙소를 말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스자쿠는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 것에 비해, L.L.는 그 숙소에서의 스자쿠를 떠올리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가 났다. 전생인지 환생인지, 그런 것과 떠나서 스자쿠는 스자쿠였고, 스자쿠는 행복해야만 했다. 그것이 과거의 스자쿠가 자신의 행복을 바쳐 정의로써 살아가 죽었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L.L. 스스로 남겨둔 미련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L.L.는, 조, 좋아요.”

“내가 좋아?”

“자, 잘해, 주니까…. 그리고 예, 예, 예뻐서.”

 

예쁘다고 말하는 스자쿠의 뺨은 붉어졌다. L.L.는 그것에 희미하게 웃으면서 스자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머리가 엉망이 된다고 스자쿠가 고개를 살짝 빼냈지만 그것조차 싫지 않은 얼굴이라서 L.L.는 더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남자한테 예쁘다고 해봤자 칭찬이 아니야.”

“그, 그렇지, 만, L.L.는, 정, 정말, 예쁜데.”

 

우물쭈물거리면서 C.C.를 힐끔 쳐다보다가 L.L.를 보던 스자쿠는 고개를 다부지게 끄덕거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C.C.가 허, 하고서 혀를 찼다. C.C.가 삐지겠어, 스자쿠. L.L.의 말에 스자쿠는 그래도 말을 바꿀 생각은 없어보였다. 날 때부터의 그 고집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L.L.는 스자쿠의 ‘스자쿠다움’을 찾아낼 때마다 솔직하게 기뻐했다. 그가 어느 순간 말을 더듬지 않고, 또박또박하게 제 의사를 전달할 때에도, 스자쿠가 여행하는 어딘가에서 L.L.와 말다툼을 할 때에도, 그는 매 순간마다 기뻐했다.

 

 

스자쿠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열네 살이 될 무렵이었다. 그의 변화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C.C.였다. 늘 L.L.의 옆을 시종일관 지키고 있던 스자쿠는 어느날부터인가 L.L.에게서 두세 걸음의 거리를 두게 되었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절대로 L.L.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미묘한 거리를 알아차리고서 L.L.와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C.C.는 L.L.에게 말했다.

 

“요새 스자쿠가 이상해. 너를 되게 의식하고 있어.”

 

스자쿠가 거리를 두는 의미를 그것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관계 없이 C.C.는 ‘의식한다’고 명명했다. L.L.는 별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얼굴로 휘젓고 있는 스프를 국자로 퍼내었다. 가장 고기가 많이 들어있는 첫 국자는 스자쿠의 몫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스자쿠 나이 쯤 되면 사춘기도 오니까. 여자인 너도 있고 의식할 게 많지 않아?”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게 아니야. 스자쿠는….”

“나 왔어!”

 

L.L.가 맡겼던 심부름을 그새 해내고 온 스자쿠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훌쩍 큰 키의 스자쿠는 L.L.의 곁에 바짝 붙어있는 C.C.를 보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C.C.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아이 특유의 질투라고 하기에는 더 강렬하고, 더 깊은 것이었다.

 

“C.C.랑 뭐하고 있었어?”

“네 얘기. 별 거 아니었지만.”

“무슨 이야기였는데?”

“네가 너무 많이 먹어서 고민이라고.”

“그렇지만 언제나 많이 먹으라고 하는 건 L.L.잖아! 내 탓만 할 거야?”

“그래, 농담이야.”

 

L.L.보다 한 뼘 작은 스자쿠는 부지런히 먹이는 보람이 있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한동안 성장통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서 L.L.의 뒤를 따라다니며 기다시피 걸었다. 그런 스자쿠의 모습에 보다 못한 L.L.가 비싼 숙박비를 대고서 호텔에서 머문 적도 있었다.

여러모로 서로에게 지극정성인 두 사람의 모습에 C.C.는 또 다시 할 말을 잃고서 대화로부터 멀어졌다. 스자쿠가 사온 빵은 언제나 L.L. 앞에 놓여져 있었다. C.C.는 제 몫의 그릇을 바라보며 스자쿠와 L.L.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 밤에는 C.C.랑 잠깐 나갔다 올 거니까, 스자쿠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해.”

“뭐? 싫어, 나도 갈래!”

“안 돼. 위험하니까. 그렇지, C.C.?”

“…그래, 어린애는 집이나 봐.”

 

C.C.의 말에 스자쿠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린애라는 말이 그렇게 심기에 거슬렸을까. L.L.는 두 사람 사이에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 어색하게 웃으면서 스자쿠의 등을 쓸어주었다.

 

“위험하다고 하면 위험한 거야. 우리 둘만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너까지 오면 챙겨줄 여력이 없어.”

“내가 L.L.보다 더 힘도 세고 달리기도 빠른데, 왜 날 챙겨줘?”

“그런 걸로는 안 돼. 아무튼 넌 여기에 있어.”

“그렇게 말하고 나를 버리고 가는 거야?”

 

스자쿠의 낮아지는 목소리에 L.L.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버리고 간다’는 말에 L.L.는 귀를 의심했다. 스자쿠를 만나고 나서부터 단 한 순간이라도 그에게 애정을 퍼붓지 않았던 날들이 없었다. 스자쿠가 제 마음을 의심하는 날이 올 줄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버리고 갈 거잖아. 왜 C.C.만 데리고 가는데!”

“위, 위험하니까… 스자쿠, 버리고 가는 게 아니라 너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에 있으라고—“

“L.L.가 위험해져서 안 돌아오면 나는 또 혼자잖아! 네가 날 데려왔으니까 끝까지 같이 가야하는 거 아니야?! 왜 C.C.만…!”

 

결국 스자쿠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식탁 앞에서 우는 것에 L.L.는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 오늘은 안 갈게. 오늘만 안 가는 게 아니라, 계속 같이 있어. 다른 날에 갈거면 나도 데려가. 스자쿠의 우는 소리에 L.L.는 어쩔 줄 몰라하며 스자쿠를 끌어안은 채로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C.C.만이 그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참으며 스프를 들이켰다.

 

“당분간 스자쿠 곁에 붙어있어. 그놈의 애정 결핍이 다 나을 때 까지는.”

“애정 결핍이라니, 스자쿠를 뭐로 보고….”

“네가 그렇게 키웠으니까, 끝까지 책임지라는 말이야.”

 

스자쿠는 침대 위에서 L.L. 쪽으로 몸을 돌리고서 잠을 자고 있었다. 스자쿠가 꼭 붙잡고 있는 손을 놓아주지 않는 것에 L.L.가 옅게 웃고 있는 것에, C.C.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기어스의 조각을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고, 스자쿠가 붙어다니면서 속도는 더 늦어지고 있었다. C.C.의 초조함에 대해서 L.L.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더 있다가는 열이 뻗쳐서 L.L.에게 악을 쓸 기분이라 C.C.는 숙소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불로불사의 몸, 어둠이 무섭다고 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기어스의 조각의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있던 안쪽 숲을 향해 C.C. 혼자 걸어나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L.L.는 기어스를 빼고서 전력에 있어서는 쓸모가 없었고, 스자쿠는 말 그대로 짐덩어리였다. 이러는 거면 혼자 하는 여행이 훨씬 더 속이 편할 지도. C.C.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C.C.가 혼자서 숲을 헤매는 동안, L.L.는 더 어두워지는 밖을 보며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창문을 닫았다. 전기가 금방 끊겼던 탓에 창문을 닫고 커텐을 치고 나면 방 안은 새카맣게 어두워졌다. 아직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눈으로 더듬거리며 스자쿠의 옆에 누웠다.

 

“L.L.…?”

“미안, 깼어?”

“아니. 괜찮아. L.L.만 있어?”

“응.”

“C.C.는?”

“모르겠어. 그 바보, 혼자서 또 어딜 갔는지.”

“…안 찾아도 돼?”

“알아서 돌아오겠지. 걔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

“…….”

 

스자쿠는 L.L.의 옆에 꼭 붙어왔다. L.L.의 품에 몸을 기댄 스자쿠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나도 L.L.가 있는 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데…. L.L.는 내가 어디로 가버리면, 찾아줄 거야?”

“…어디 가고 싶은 데가 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L.L.는 어떻게 할 거야?”

 

L.L.의 허리를 꼭 붙들고서 스자쿠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갖다댔다. L.L.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스자쿠는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옷자락이 젖는 것에 L.L.는 스자쿠의 어리광이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등을 끌어안으면서 대답했다.

 

“스자쿠가 어디로 가든 괜찮아, 어디든 찾으러 갈 거니까.”

“정말?”

“응.”

“왜?”

“…응?”

 

스자쿠는 울음소리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L.L.는 내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면서… 나랑 계속 같이 있어주는 이유가 뭐야?”

“……그, 건.”

“이유가 늘 궁금했어. C.C.랑은 왜 같이 있는 거고, 나랑은 왜 같이 있는 건지.”

“…스자쿠.”

“나랑 왜 같이 있어?”

 

좋아해, L.L.가 좋아. 스자쿠의 작은 목소리가 L.L.에게 닿았다. 스자쿠는 L.L.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피부에 와닿는 느낌에 L.L.는 몸을 움츠렸다. 작게 반응하는 L.L.의 모습에 스자쿠는 더욱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다리를 더 깊게 얽고, 손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C.C.랑 같이 있지 마. 싫어.”

 

L.L.의 웃옷 사이에 손을 밀어 넣은 스자쿠가 그의 등골을 훑으며 말했다. 싫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아직 소년의 것이 분명한데도, 스자쿠의 손은 분명히 L.L.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안 돼, 스자쿠.”

“L.L.가 왜 계속 나한테 잘해주는지 생각했어. 내 가족도 아니면서, 왜 같이 있는지도.”

“…으읏, 스, 스자쿠.”

“나는 L.L.랑 같이 있고 싶어. 근데 엄마나 아빠를 바라는 건 아니야.”

“아, 으응…!”

“나 좋아해, L.L.?”

 

가슴을 지분거리는 손에 L.L.는 어쩔 줄 모르며, 그러면서도 스자쿠의 질문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자쿠에 대한 애정은 늘 아낌 없이 베풀고, 숨김 없이 드러냈다.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솔직하게 그에게 전했다. L.L.의 끄덕거림에 스자쿠는 입술을 당겨 웃으며 그에게 키스했다. 부드럽게 닿는 스자쿠의 입술에 L.L.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졌다.

 

“L.L.는 나랑 같이 있고, 또 나를 좋아하니까… 내 아내가 되어도 좋아?”

“아, 아내?”

“L.L.가 내 아내면 좋겠어. 아내가 되어줄 거지?”

 

스자쿠는 어느새 L.L.의 몸 위에 올라탄 채였다. 이제 어둠 속에 익숙해진 눈은 스자쿠의 녹색 눈동자가 저를 원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L.L.가 입고 있는 옷을 서서히 벗기고 드는 손에 거부할 수가 없었다.

C.C.가 올 지도 모르는데, 이런 곳에서 스자쿠에게 저를 내어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L.L.는 스자쿠가 제 몸을 더듬는 것에 반항하지 않았다.

저를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스자쿠는 L.L.가 줄곧 원했던 이상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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