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는 자신이 스자쿠를 좋아한다고 처음 깨달은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스자쿠가 시험기간이라는 이유로 일찍 끝나고, 오랜만에 를르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피아노 교습에 간 나나리를 혼자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다는 핑계로, 를르슈는 스자쿠와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에 설레고 있었다. 스자쿠의 집에 찾아가면, 교복을 아직 갈아입지 않은 스자쿠가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를르슈, 방에 가서 기다려줄래? 과자 가져갈게. 스자쿠는 다정하게 말했고,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스자쿠의 방으로 올라갔다.
스자쿠의 방은 언제나 를르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스자쿠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스자쿠가 무슨 책을 읽는지, 를르슈는 스자쿠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관심이라고 하기보다는, 그것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주는 행복이 나나리와 같이 있을 때 느껴지는 행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의할 수는 없었다.
스자쿠를 생각하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그와 가까이 있을 때에는 무엇보다 행복하고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무섭기도 했다. 무엇이든 일찍 배우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제일 똑똑한 를르슈지만 이런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는 스자쿠를 의지했다. 스자쿠는 를르슈보다 일곱 살이나 많지만, 가끔은 바보 같고 손이 많이 가는 동생처럼 느껴지지만, 그래도 그는 연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자쿠가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지는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 감정들은 를르슈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두렵고 무섭고 행복하며 즐거운 이 감정들.
그 감정들에 대해서 스자쿠에게 토로하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를르슈는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그런 감정들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스자쿠는 무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를르슈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구나.”
“좋아한다고?”
“응. 그런 걸 ‘좋아한다’고 하는 거야.”
스자쿠는 이내 즉답했다.
를르슈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를르슈의 안에서 좋아한다는 감각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하며,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나리를 좋아해, 라고 말했을 때 드는 따스함이 를르슈의 ‘좋아한다’였다.
“조금 달라, 이건 좀… 좋아하는 것보다는, 기분이 나빠져.”
“왜?”
“불안하고, 또…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이, 기분 나빠.”
“…….”
“내가 꼭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아져. 자꾸 휩쓸려서, 나는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를르슈는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이런 게 ‘좋아한다’라는 거라고? 를르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스자쿠는 제 말을 얌전히 듣고 있는 를르슈에게 말을 했다.
“그래도 를르슈가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거야. 를르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사람도 너를 좋아하게 될 게 틀림 없어. 내가 약속할게.”
“…나를 좋아하게 되면?”
“그럼 사귀게 되겠지. 를르슈와 연인이 될 거야.”
“……연인?”
“응. 뭐, 지금 시점에서는 여자친구 정도가 되려나.”
여자친구, 라는 말에 를르슈는 눈을 깜빡거렸다. 스자쿠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스자쿠도 그런 ‘좋아함’을 전하고서 그 여자친구를 만든 것일까?
“스자쿠도 여자친구를 그렇게 좋아해?”
말을 내뱉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다음 말들은 를르슈의 자학이나 다름 없는 말들이었다.
“좋아하게 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하는 거야?”
“손을 잡거나, 같이 데이트를 하거나… 더 좋아하게 되면 더 많은 걸 함께 하고 싶어질 거야.”
“스자쿠는 뭐를 했어?”
“여자친구랑?”
“응.”
“말했던 것처럼, 손도 잡고, 데이트도 하고.”
모르는 여자와 손을 잡는 스자쿠, 데이트를 하는 스자쿠를 떠올리면 를르슈는 혼란스러워졌다. 더 좋아하게 되면 더 많은 걸 함게 하고 싶어진다, 라는 말을 떠올렸다. 스자쿠와 더 많은 것을 해보고 싶었다. 손을 잡고, 어딘가를 더 많이 놀러다니고, 그리고, 그리고….
“키스도 했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미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를르슈한테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오는구나, 하고 태평하게 말하는 스자쿠가 미웠다. 를르슈는 키스의 다음을 알고 있었다. 같은 반의 남자 아이들이 야한 이야기를 할 때 내뱉던 그 단어를 자기 입으로 말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섹스도?”
를르슈가 섹스라는 단어를 알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모양인지, 스자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긴장으로 굳어있는 를르슈의 얼굴에 스자쿠는 그의 진지함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솔직하게 말했다.
“응, 섹스도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를르슈는 자기 세상이 새카맣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늘 저에게 의지할 수 있는 빛이 되어주던 스자쿠를 잃는 기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스자쿠를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 여자친구에게. 스자쿠가 좋아하고, 스자쿠를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그것을 깨닫고 나면 를르슈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마음이 무너짐과 동시에 인내도 끝이 났다. 감정이 폭발하듯이 터져나가서, 눈물이 뚝뚝 흘러 옷자락을 적셨다. 갑자기 우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당황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를르슈는 눈물을 닦아주는 스자쿠의 팔에 매달리고 싶기도 하면서도, 그를 밀어내고 싶기도 했다.
지금은 끌어안고 있어도 그래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스자쿠는 싫어.
“싫어, 스자쿠.”
“뭐가?”
“스자쿠가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거.”
“…를르슈가 질투하다니, 드문 일이네.”
“정말 싫어.”
“괜찮아, 를르슈. 나는 를르슈 옆에 계속 있을 거니까.”
그 말은 달콤했지만 위로는 될 수 없었다.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스자쿠의 품은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의 체온이 주는 따뜻함에 를르슈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나를 좋아해, 나를 좋아해줘, 나를 선택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를르슈의 등을 토닥이는 스자쿠의 손은 여전히 어른으로써, 형으로써 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것이 싫었다.
“내 옆에 있어도, 다른 사람을 좋아할 거잖아.”
“…….”
“다른 사람이랑 손 잡고, 데이트 하고, 키스하고, 섹스도, 할 거면서.”
“…를르슈.”
“싫어, 스자쿠. 나는… 나는 스자쿠가 좋아.”
를르슈는 그 말을 마치고 나서 매달렸던 스자쿠의 품에서 벗어났다. 멍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스자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키스는 언제나 왕자님이 공주님에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키스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달콤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스자쿠와의 키스는 어딘가 거칠고, 딱딱하면서도, 눈물에 젖어 짠 맛이 났다. 를르슈가 가볍게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다시 제 목에 매달리는 것에 스자쿠는 한참이나 굳어있었다. 그것이 꼭 거절의 의미 같아서 를르슈는 더 서러워졌다. 눈물이 더 넘쳐나면서 를르슈의 울음소리가 스자쿠의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난 스자쿠가 좋아, 정말, 스자쿠가 좋아…. 스자쿠만 생각하면, 계속 이상해질 것 같고, 스자쿠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스자쿠가, 다른 사람이랑, 여자친구랑, 그런 거 하는 거 싫어.”
“를르슈.”
“스자쿠, 나는 스자쿠가—.”
마지막 말은 마저 이어지지 못했다. 를르슈는 자신을 서서히 떼어내는 스자쿠의 팔에 힘없이 밀려났다. 저를 바라보는 스자쿠의 시선과 마주했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았다. 를르슈의 허리를 감싸고, 그가 더는 밀려나지 않게 머리를 끌어안으면서,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를르슈가 했던 키스와는 달랐다. 혀가 닿고, 점막끼리 문질러지면서 를르슈의 흐르는 타액부터 내뱉는 소리까지 모조리 다 삼키는 키스였다. 를르슈는 제 입안에서 뒤섞이는 스자쿠의 혀에 놀라면서도, 지금 스자쿠를 거절하면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얌전히 저의 키스를 받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눈을 가렸다. 를르슈는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스자쿠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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