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8시 30분, 를르슈 람페르지는 지금 시끌벅적한 술집이었다. 평소라면 사랑하는 동생들과의 주말을 보내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집안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동생들 수발 들지 말고 청춘을 즐겨라!’라는 어머니 마리안느의 명에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를르슈는 평소에 자신이 나름 청춘을 즐기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마리안느는 단호했다.
‘그래서, 이번 달에 나간 데이트 횟수는?’
‘데이트할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미팅 횟수는?’
‘그것도….’
‘하아, 이래가지고 내 아들이라고 하겠어?! 를르슈, 너는 말이야, 부인을 108명 둔 남자의 아들이야!’
‘싫어도 알고 있어요, 그건!’
‘그런 남자의 아들인데 이렇게 금욕적일 수가!’
‘아들한테 금욕적이라는 말을 하는 어머니가 어디 있어요!’
여차저차, 그런 과정을 통해서, 를르슈는 ‘이번주 내로 여자친구를 사귀어 올 것!’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게 말처럼 되나요? 그럼에도 를르슈의 반항은 거의 먹히지 않았다. 평일 내내 우울했던 를르슈의 사정을 전해 들은 리발은 한 차례 크게 웃은 다음에 를르슈에게 ‘그럼 미팅이라도 나와.’라는 말을 꺼냈다.
미팅? 를르슈는 미팅의 개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리발은 잡히는 미팅마다 곧장 나가면서 한 번도 그 다음의 약속을 잡아본 적이 없다고 토로한 적이 많았다. 나라는 남자의 매력에 대해서 다들 모르는 거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는 리발의 모습에 를르슈는 미팅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 만나서 술이나 마시고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진지한 관계를 찾겠다고 하는 그 허황된 망상들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청춘을 즐기는 일면이라면 이쪽에서 사절이다!—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를르슈가 미팅에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동생들이 대학교 생활의 꽃이 미팅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왔고, 그것에 대해서 를르슈가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형은 미팅 같은 데 자주 나가?’
‘그렇겠죠, 오라버니는 멋지니까요! 모두가 좋아하죠?’
‘아아….’
차마 ‘난 한 번도 미팅을 나간 적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었던 를르슈는, 그날로 제의가 들어온 리발의 미팅 자리에 참석하겠다고 뜻을 밝혔다. 리발은 를르슈의 등판으로 미팅의 레벨이 올라갈 것 같다고 말하며 기뻐했다. 레벨? 랭킹 같은 게 있어? 를르슈의 순진한 질문에 리발은 웃어대기만 했다.
미팅은 4 대 4, 남자 넷에 여자 넷이라는 다소 많은 인원이었지만, 리발은 웃으면서 희대의 라인업이라고 말했다. 우선 비주얼 중심으로 뽑았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리발을 제외하고서 처음 보는 남자들의 얼굴이 꽤나 반반하다고 느꼈다. 여자들도 나나리 만큼은 아니지만 귀엽고 예쁜 편에 속했다. 이게 바로 ‘레벨이 올라간’ 미팅?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어느새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를르슈는 다들 술기운에 취해서 붉어진 얼굴로 서로 자리를 바꿔서 앉는 것에 휩쓸리고 있었다. 를르슈의 앞에는 술병이 수북했고, 술잔은 비워질 때마다 바로바로 채워졌다.
“너무 빨리 마시는 거 아니야?”
“응…?”
이번에도 마셔볼까, 하는 마음으로 술잔을 잡고 있을 때였다. 옆에 앉은 남자가 말을 걸었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조금 붉어진 남자는 커다란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리고 웃는 얼굴이 무엇보다 무해해보이는— 이 미팅 자리에서 가장 순진해보이는 얼굴이었다. 하긴, 모두가 여자를 노리고 있는 와중에 술에 취해가는 를르슈를 챙길 정도로 순진한 짓을 하고 있다. 그는 대답 없는 를르슈가 취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취한 거 같은데, 조금 쉬었다가 마셔.”
“아냐, 괜찮아.”
이름은 뭐였더라? 를르슈는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을 빼냈다. 다시 한 잔을 들이킨 를르슈의 모습에, 남자는 불만스러운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빨리 마시면 위험해.”
“알콜 중독? 아니면 술 주정?”
“그런 것도 있지만, 이것 저것….”
“이것 저것?”
를르슈의 질문에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뭐야, 사람 앞에서 한숨이나 쉬고. 를르슈가 미간을 좁히며 그를 노려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저런 사고가 일어날까봐. 술에 취한 사람한테 나쁜 일 일어날 수도 있고.”
“그런 일은 없어, 이제껏.”
“혹시 모르잖아. 그러고 보니, 계속 술만 마시네. 안주는?”
“적당히 먹고 있으니까….”
“이거 맛있어, 이 가게에서 제일 잘 나가는 건데.”
를르슈의 앞에 양념이 잘 발린 칵테일 새우구이를 내민 남자는 를르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 녀석, 챙겨야할 파트너는 없는건가. 왜 같은 남자인 나한테 신경을 쓰는거지? 를르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가 추천한 새우를 낼름 집어 먹었다. 그의 말대로 맛있었다.
“맛있지?”
“응.”
“너는 이런 자리, 처음이야?”
“이런 자리라면 미팅? 그렇다면 처음이다.”
“역시, 그런 것 같더라.”
그는 쿡쿡 웃으면서 자기 술잔을 비웠다. 를르슈는 웃는 그의 모습이 신경 쓰여서 바로 물었다.
“처음인 게 티가 났어?”
“아무래도? 익숙한 것 같진 않아서.”
“내가 뭔가… 분위기를 깨고 그랬나?”
“에이,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남자는 술잔을 내려놓고서 를르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귀를 가까이 대라는 듯한 제스처에 를르슈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딘가 더운 숨결이 를르슈의 귓가에 닿으면서, 그의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여기 재미 없지?”
를르슈는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재미는 없었다. 술에 취하는 느낌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일도 별로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오붓한 느낌을 즐기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우리끼리 나갈까?”
남자는 끄덕이는 를르슈에게 다시 말했다. 여기서 나가게 해준다니, 를르슈는 그 말에 잠깐 흔들렸다. 이 술자리는 솔직히 이제 지겨웠다. 미팅 참석이라는 목적도 달성했고, 반복되는 화젯거리도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를르슈가 머뭇거리는 것에 남자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방법이 있어.”
남자는 자신의 외투와 를르슈의 외투를 손에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를르슈의 손을 잡고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손을 잡은 채로 남자는 현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를르슈는 대놓고 빠지려는 그 모습에 어쩔 줄 모르는 채로 끌려갔다. 옆자리의 여자와 시시덕거리던 리발이 나가려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당황한 것처럼 바로 말을 걸었다.
“를르슈, 스자쿠! 어디 가? 벌써 빠지는 거야?”
“속이 별로 안 좋아서, 둘이서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래? 곧 있으면 2차 갈 거니까, 노래방 괜찮지?”
“응. 괜찮아.”
를르슈는 자기를 빼내준다고 말해놓고서 태연하게 2차를 이야기하는 남자—스자쿠를 바라보았다. 그럼 밖으로 나가자, 하고서 를르슈의 어깨까지 감싸고 나간 스자쿠는 복도에서 마주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를르슈의 파트너에게도 태연하게 말했다.
“어디 가?”
“아, 속이 안 좋아서 잠깐 바람 쐬러.”
“아아, 어쩐지. 두 사람 다 빨리 마시더라.”
“분위기가 좋아서 무리한 거 같아. 아, 2차로 노래방 간대.”
“진짜? 둘 다 가는거지?”
“응.”
그렇게 손까지 흔들어준 스자쿠는 가게의 현관까지 막힘없이 걸어갔다. 를르슈는 그의 뻔뻔한 거짓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나서면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외투를 입혀주면서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제 가자.”
“2차 간다고 했잖아, 너.”
“속이 안 좋아서 못 간다고 하면 돼.”
“…그래도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괜찮아, 나중에 또 만나자고 하면 되니까.”
“그렇게 적당히…?”
“너 정말 이런 자리 처음이구나. 이렇게 적당히 빠져나가는 방법도 있어.”
그리고 다들 눈치를 채는 거야, 라고 속삭인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붙잡고 거리로 향했다. 계, 계산은? 나중에 리발한테 주면 돼! 나중에? 그 말을 그렇게 남용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따라가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뒤섞이면서도,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놓치지 않겠다는 듯지 깍지까지 껴왔다.
“저기… 손 좀 놓으면 안 될까?”
“아, 미안. 습관적으로.”
“습관적으로?”
스자쿠는 미묘하게 웃으면서 를르슈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놓으라니까?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헤헤, 하고 웃으면서 깍지 낀 손을 흔들어댔다.
“사람들 이렇게 많은데. 너, 여기 처음이지? 길 잃으면 위험할걸.”
“휴대폰 있으니까 괜찮아.”
“안 돼. 술에 취했으니까. 길 가다가 휴대폰 하면 떨어뜨릴 수도 있잖아?”
“그런 짓 안 해.”
“혹시 모르니까, 그냥 잡자.”
“아니….”
“아니면 나랑 손 잡는 거 싫어?”
그 마지막 말에 를르슈는 할 말을 잃었다. 대신에 빼내려고 했던 손의 힘을 풀면서, 스자쿠에게 제 오른손을 그대로 내주었다.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의 모습에 귀여운 얼굴로 웃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를르슈?”
“추울 텐데.”
“추우니까 정신도 바짝 들고, 술도 깨고.”
“…그럼 딸기맛.”
“좋아, 내가 사줄게.”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골목길 앞, 스자쿠와 를르슈는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하면서 그 틈바구니에 있었다. 스자쿠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를르슈는 그의 입술 끝에서 나오는 자기 이름이 꽤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사주는 아이스크림이 차갑지만 그의 말대로 정신도 바짝 들고, 술도 깨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손과 반대로 비어있는 손을 서로 꼭 잡으면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공원까지 걸었다. 리발이 스자쿠에게 어디냐고 전화를 걸 때까지, 를르슈에게 그 사이의 시간은 왠지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새콤달콤하고,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하고, 짜릿하고.
이게 뭘까, 라고 스자쿠에게 물어봐주면 그는 뭐라고 답해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야, 아직도 취해있나? 를르슈는 스스로에게 자문자답을 하면서 스자쿠와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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