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일상은 평화롭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제국의 황자로써, 이복 형제의 절반은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살벌한 레이스를 달리고 있는 중이지만, 그의 아리에스 생활은 평화로웠다. 의지할 수 있는 어머니, 사랑스러운 여동생과 믿음직스러운 자신만의 기사를 두고 있는 삶은 여느때보다 여유로웠다.
그런 날들의 만족스러운 오후를 보내고 있던 중에, 를르슈는 자신의 기사가 드물게 멍하니 서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를르슈의 이동에 따라 같이 움직여야할 스자쿠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스자쿠? 그의 이름을 한 번 불러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를르슈는 의아한 얼굴로 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스자쿠, 어디 아파?”
그럼에도 멍하니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에, 를르슈는 걱정스럽게 스자쿠의 이마에 손을 대며 물었다. 저에게 닿는 체온에 스자쿠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전하.”
“열은 없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잠깐… 졸았나봐요.”
“졸아? 잠을 못 잤어?”
항상 잘 먹고 잘 자는 스자쿠가 잠을 못 잤다는 말에 를르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면 눈가가 어두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걱정 어린 를르슈의 시선에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요새 뒤숭숭한 꿈을 자꾸 꿔서 그런 거 같습니다.”
“무슨 꿈인데?”
“…기억은 잘 안 나고, 그냥 좋지 않은 꿈이라는 거 밖에.”
“너무 힘들면 오늘 쉬는 게 어때?”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를르슈는 미간을 좁히며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정말 괜찮다고 말하면서 를르슈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곧 일정이 있잖아요, 라고 하면서 를르슈의 스케줄을 줄줄이 읊는 스자쿠는 또 그의 말 그대로 걱정할 것이 없어보이는, 평소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석연치않은 점을 느끼면서도,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대로 짜여진 일정대로의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귀족과의 만찬을 끝으로 아리에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를르슈는 스자쿠가 길게 하품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지간해서 자기 상태를 드러내지 않는 스자쿠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많이 피곤한가, 스자쿠?”
“아뇨, 괜찮습니다.”
“솔직하게.”
“뭐, 이 정도로 졸리면 오늘은 푹 잘 수 있지 않을까요? 전하께서 걱정해주시면 더 부담되서 잠을 못 잘 거 같지만요.”
“너무하군.”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커온 친구이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기사인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단호하게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보이면서, 그가 원하는대로 걱정하지 않는 것이 고작이라는 게 속상했다.
를르슈의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스자쿠는 그의 손을 잡으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정말로 괜찮아요.”
“…힘들면 나한테 의지해도 좋아.”
“그건 좀…. 기사의 프라이드가 있죠, 저에게도.”
“우린 친구잖아? 친구를 의지하는게 뭐가 나빠?”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할 말을 막힌 것처럼 입술만 달싹거렸다. 친구라는 말에 를르슈는 힘주어 발음했다. 저를 의지하라는 를르슈의 말을 곱씹는 듯 하더니, 스자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이럴 땐 친구니까 ‘전하’가 아니지.”
“하하, 알았어, 를르슈. 그래도 너무 신경쓰지 마.”
장난스럽게,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친구로써 말하는 스자쿠를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가 원하는대로 걱정은 여기까지, 라고 생각한 를르슈는 조금 나아진 마음으로 아리에스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스자쿠의 밤 인사를 받고 나서 를르슈는 겨우 누울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유독 길었다. 잘 자고 움직인 를르슈도 피곤한데 잠을 못잔 스자쿠는 오죽할까. 를르슈는 내일도 그가 잠을 자지 못한다면 강제 휴가를 쓰게 해서라도 낮잠을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숙면에 좋은 향이라도 피워줄까? 그건 좀 유난인가.
를르슈는 자신이 어렸을 때, 아주 잠깐 불면증에 시달렸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황궁이 테러로 흉흉한 분위기였다. 아리에스라는 궁을 하사받은 황비이지만, 서민 출신인 어머니는 언제든 타겟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리안느가 총격에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피투성이가 되어 들것에 실려가던 어머니를 본 것은 를르슈의 트라우마였다. 어머니가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를르슈는 그 걱정으로 몇날 며칠을 밤을 샜다. 하얗게 말라가는 를르슈의 모습을 보다 못한 스자쿠는 어느날 밤에 를르슈의 침실에 찾아왔다.
‘네가 잘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 를르슈.’
‘나는 안 잘거야.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마리안느 님은 괜찮아. 오늘 병문안도 다녀왔잖아? 곧 퇴원하실 거라고 했고.’
‘그래도, 또 다시 이런 일이…!’
‘자꾸 그러면 나나리도 걱정해!’
를르슈를 침대까지 끌고 간 스자쿠는 그를 힘으로 침대 위에 눕혀놓고서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주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깨울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자.’
‘그런다고 잠이 올 리가 없잖아.’
‘나를 못 믿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일어나 있을래, 라고 고집스럽게 말하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너를 걱정하고 있어. 계속 이렇게 잠을 안 자면 쓰러질 거야.’
‘……무서워, 스자쿠. 어머니가 그렇게 되고, 만약에 나나리라도 다치게 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범인도 잡혔고, 경비도 늘렸잖아.’
그래도, 라는 말로 를르슈는 불행한 상상을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스자쿠는 를르슈의 이불에 파고들면서 그의 몸을 이불 아래로 깔아뭉갰다. 뭐하는 거야!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를르슈가 안 자면, 나라도 자야지. 나는 널 지켜야하니까.’
‘그럼 네 방에서 자!’
‘네 말대로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려고? 그때를 위해서 옆에 있어줄게.’
‘…….’
‘아니면 나를 믿고 자도 좋아. 그럼 내가 대신 깨어있을게.’
그런 스자쿠가 손을 잡으며 하는 말에, 를르슈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자리에 바로 누웠다. 발 치워, 스자쿠. 그러자 스자쿠가 꾸물거리며 발을 치웠다. 를르슈는 스자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깜빡거리면서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자기 전까지 자면 안 돼.’
‘응. 안 자. 약속할게.’
‘무슨 일 있으면 꼭 깨우는 거야.’
‘응.’
따뜻한 스자쿠의 체온에 를르슈는 기대어 잠을 청했다. 무서운 생각이 자꾸만 들었지만, 스자쿠와 맞잡은 손에 의지하며 를르슈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를르슈의 찌푸려진 미간을 스자쿠가 살살 쓸어주었다. 좋은 꿈 꿔, 를르슈. 스자쿠의 목소리에 를르슈는 으응, 하고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스자쿠는 를르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잠을 자지 않았다. 하암, 하고서 길게 하품하는 스자쿠가 아침이 밝았다고 를르슈를 깨우기 전까지, 를르슈는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거 봐,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어.’
‘…….’
‘그래도 걱정되면,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옆에 있어줄게.’
를르슈는 그 말에 부끄럽지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오는 밤까지 를르슈와 스자쿠는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매일 아침 스자쿠의 인사에 눈을 뜨면서, 를르슈는 자신을 지켜주는 그의 체온에 감사했다.
그런 은혜를 입었는데, 정작 스자쿠가 잠을 못 자는 거에 아무런 힘이 못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속상할 것 같았다. 를르슈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스자쿠를 위한 보양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의 잠이 중요하지. 를르슈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를르슈가 눈을 뜬 것은, 호흡을 막는 무언가의 이물감 때문이었다. 아직 날은 밝지 않아서 어두웠고, 초점이 잡히지 않은 시야로는 무언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제 뺨에 닿는 체온이 조금 뜨겁다는 것과,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무언가가 미끈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흐응, 우으읏…. 를르슈는 제 입 밖으로 흐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제대로 다물리지 않은 입술 사이에서 흐르는 소리는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미묘함을 눈치채고서 입술을 다물려고 하면, 를르슈의 턱을 붙잡고 더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탐욕스럽게 를르슈를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그것은 일어난 를르슈의 혀를 노골적으로 탐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야, 누구야…! 를르슈는 침대 시트를 그러쥐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자신의 몸은 이미 누군가의 체중에 깔려있는지 오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턱을 붙잡아 벌리는 손은 끝이 딱딱했다. 이상하게도 를르슈는 이 손의 느낌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흐아, 아, 으응. 입 안에 가득 찬 것이 치아를 더듬고 천장을 긁고 안쪽을 더 문질러댈수록 신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턱을 붙잡고 있지 않은 손이 를르슈의 가슴팍을 배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키스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를르슈는 자신의 유두를 살살 문지르는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슴 쪽을 찌르르 타고 흐르는 쾌감에 몸을 덜덜 떨면서,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런 를르슈의 반항에 상대도 조금 놀랐는지, 입술을 떼어내고서 그에게서 잠깐 몸을 떨어뜨렸다. 를르슈는 자유로워진 몸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이불로 제 몸을 감쌌다. 하아, 하아. 를르슈와 상대의 숨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을 때였다.
를르슈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자기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느껴졌던 딱딱한 손, 숨소리 사이로 들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 저를 쳐다보는 녹색의 눈동자. 그는 스자쿠였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스자쿠를 쳐다보고 있으면, 스자쿠는 자신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닦아내고서는 를르슈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 * *
친한 친구이자 믿었던 기사로부터 잘 자고 있던 밤에 겁탈을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은 비현실적이었다. 를르슈는 스자쿠를 빤히 바라보았다. 피곤해보였던 어제와 다르게 스자쿠는 평소와 같은 컨디션을 되찾은 듯 했다. 오늘은 반대로 를르슈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렇다고 졸기에는 간밤에 있었던 사건에 를르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제 스자쿠와 키스를 했다. 그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입술끼리 가볍게 맞대는 키스 정도야 를르슈도 해봤다. 하지만 혀를 깊숙하게 섞고 느끼는 연약한 부분까지 모조리 다 맛보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스자쿠는 그런 식으로 키스를 하는구나. 그런 생각까지 들고 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게 느껴졌다. 그런 야한 키스를 하는 스자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상상할 일도 없었고.
를르슈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스자쿠와의 키스를 생각했다. 제 입안을 가득 채우던 스자쿠의 타액을, 그것을 삼켰을 때 흘렀던 자신의 신음을.
“스자쿠.”
“네?”
“어제보다 좀 나아보이네. 잠은 좀 잤어?”
“아아….”
견디다 못한 를르슈가 태연한척 겨우 꺼낸 말에, 스자쿠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자기는 잔 것 같은데, 꿈은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꿈?”
“네.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하잖아요? 이것 저것 생각할 게 많다보니까… 꿈자리가 좀 사나운 거 같아요.”
“……무의식.”
를르슈의 중얼거리는 말에 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래도 잠은 푹 잤어요, 라고 웃으면서 하는 말에 를르슈도 어색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도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체온이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스자쿠에게 ‘왜 어젯밤 나에게 키스했어?’ 같은 말은 할 수 없기에, 를르슈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 * *
“하, 아으, 아, 아앙…!”
를르슈는 망측하게 울리는 자신의 신음에 눈을 떴다. 또 다시 밤이었다. 아직 어두웠지만, 를르슈는 자신의 아래를 감싸고 있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스자쿠였다. 를르슈는 발기한 자신의 페니스를 입에 물고서 천천히 혀끝으로 굴리는 스자쿠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 벗겨진 아래는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느껴지는 입안의 뜨거움 때문에 눈앞이 번쩍번쩍거렸다.
“아, 스, 스자쿠, 응, 으응!”
축축한 소리와 함께 스자쿠가 를르슈의 성기를 핥아올렸다. 스자쿠의 혀끝이 둥글게 튕기면서 귀두 끝을 건드리는 것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스자쿠에게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쾌락으로 가득 찬 머릿속은 아무런 명령도 내릴 수가 없었다.
를르슈의 둥글게 말린 발끝에 스자쿠는 그의 발목을 붙잡고서 다리를 더 깊숙하게 벌렸다. 를르슈의 덜덜 떨리는 허벅지에 손을 얹고서, 그는 페니스부터 테스티클까지 쪽쪽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을 맞추었다.
“아, 그만, 안 돼, 아, 아아!”
스자쿠의 손가락이 제 페니스를 죽죽 훑으면서 위아래로 흔드는 것에 를르슈의 허리는 흔들렸다. 자위를 할 때와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를르슈의 페니스를 가득 물고서 그의 음경을 꽉 조여오는 스자쿠의 입안에 를르슈는 사정하고 말았다.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스자쿠가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싫어, 그런 거….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사정으로 지친 탓에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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