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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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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에 걸린 스자쿠 下

DOZI 2021.11.07 02:57 read.471 /

그 후로, 매일 밤마다 스자쿠가 찾아온다. 그는 매번 를르슈에게 섹스를 조르지는 않았다.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거나, 아니면 를르슈를 애무하며 길들인다. 를르슈는 자신을 ‘길들이는’ 스자쿠의 손에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의 아래에서 울다가 잠이 들었다. 를르슈를 자신의 입맛대로 만들어나가는 스자쿠는 욕망 속에서 희미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러다보면 몸 상태는 늘 최악이었다. 자지 않은 채로 스자쿠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스자쿠의 손에서 허덕거리다가 기절하듯 잠에 빠지고, 그 이후의 기상은 늘 끔찍했다. 가장 싫은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아침의 스자쿠였다. 밤에는 를르슈에게 끊임없는 정담을 속삭이고 그를 원했으면서, 낮이 되면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인 것처럼 기사의 얼굴로 돌아오는 스자쿠가 싫었다.

를르슈가 지나온 밤마다 반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총을 들이밀고 싶기도 했고, 스자쿠를 물어 뜯고 싶기도 했지만, 스자쿠가 속삭이는 좋아한다는 말에 늘 흠뻑 젖어 사정하고 울면서 그를 끌어안다가 잠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섹스로 한껏 지친 몸으로 잠깐 잠을 자고 나서 일어나는 것의 반복은 곧 체력을 회복하기가 어려움을 의미했다.

처음엔 가벼운 빈혈이었다가, 나중에는 저도 모르게 신음하면 앓는 소리를 내는 두통으로 를르슈는 낮동안 고통을 호소했다.

오늘도 진통제를 서너 알씩 먹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기분이 상한 듯 입을 열었다. 

 

“전하, 아무래도 오늘 공무는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정대로 진행해. 피곤하다고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안 그래도 슈나이젤 형님이….”

“재상 각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내 명령에 불복종하겠다는건가?”

“주군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것 뿐입니다.”

“그 우선순위는 잘못됐다. 제국의 공무가 우선이다. 너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를르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팔목을 붙잡고 그를 돌려세웠다. 오랜만에, 낮의 스자쿠와 마주한 눈은 맑고 푸른 녹색빛이었다. 정욕으로 물든 깊고 음울한 그 색이 아니었다. 그 눈빛이 별로였다. 를르슈는 신경질적으로 스자쿠의 손을 뿌리쳤다. 스자쿠는 그것에 당황한 듯 손을 허공에 내버려두었다가, 마지막엔 희미하게 신음하듯 말을 꺼냈다. 

 

“를르슈,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숨기는 건 없어.”

“거짓말 하지마. 이렇게 말라가고, 잠도 못자고 있는데….”

“네가…!”

 

네가 그랬잖아, 라고 말을 하려다가 를르슈는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고를 수 있는 단어는 한정적이었고, 밤의 스자쿠에 대해서 이야기를 섣부르게 꺼냈다가는 돌이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입술을 꾹 깨문 를르슈는 몸을 돌리고선 다시 서류를 팔랑거리며 서명을 갈겨대기 시작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그런 를르슈의 앞에 선 스자쿠는 그림자가 진 얼굴로 를르슈에게 말을 걸었다. 어두운 음영으로 물든 스자쿠의 얼굴은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를르슈는 아니다, 라고 말을 하려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는 스자쿠의 모습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너, 우는 거야?”

“그치만, 를르슈가… 계속 말을 해주지 않으니까. 기사로서도 의지가 안되고, 친구로서도 의지가 안되는 거라면. 여기에 내가 있는 의미가 없잖아.”

“그렇다고 고작 이런 거로.”

“고작이 아니야.”

“…….”

“고작이 아니라고. 나한테는.”

 

를르슈는 스스로 눈물을 거칠게 닦는 스자쿠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서 그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스자쿠는 훌쩍거리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고선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

 

워낙에 눈물이 헤픈 녀석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로 울어버릴 줄은 몰랐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대답을 재촉하는 말에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완고한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굳이… 캐내고 싶지도 않아.”

“…….”

“그래도 제대로 자고, 제대로 먹어. 네가 쓰러지면 나나리도 걱정하니까.”

 

를르슈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에 스자쿠는 부은 눈가를 만지작거리면서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한숨을 쉴 사람은 이쪽인데, 왜 네가…. 를르슈는 오만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드는 머리를 털어내며 펜을 고쳐쥐었다.

스자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를르슈는 울었던 스자쿠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를르슈의 간지러운 시선에도 스자쿠는 시종일관 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스자쿠, 넌 요즘… 이상한 꿈 같은 건 안 꾸는 건가?”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더니 조금의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꿈은 이제 괜찮습니다.”

 

완전히 기사의 말투로 딱딱하게 대하는 것이, 스자쿠 자신도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를르슈는 그의 태도보다 대답에 놀랐다. 잠에 취한 스자쿠가 자신을 찾아와 밤마다 애정을 쏟아내는 행위에 대해서 조금의 낌새도 느끼지 않는 것 같은 그 대답이, 마음 한 구석을 시리게 만들었다.

밤의 네가 진짜야, 아니면 낮의 네가 진짜야? 어느 쪽이 너야? 를르슈는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것을 참았다. 만약 그것을 묻게 된다면, 이제껏 기사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왜 다리를 벌리고 사정을 허락하게 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의 입으로 말을 해줘야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하얘졌다.

사고의 결말이 그곳으로 튀자, 를르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입술을 틀어막았다. 

 

—왜 나는 스자쿠에게 나를 허락했을까?

 

스자쿠는 기사니까, 친구니까, 그런 짓을 함께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니까. 하지만 스자쿠는 연인처럼 를르슈를 찾아와 밤마다 이름을 불러달라고 조르고 애욕으로 젖게 만든다. 밤의 스자쿠는 를르슈를 열렬하게 사모한다.

하지만 낮의 스자쿠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를르슈는 오로지 주군이자 친구일 뿐이다. 알 수 없는 딜레마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를르슈는 울렁거리는 속이 점점 미식거리는 것을 느꼈다. 르, 를르슈? 스자쿠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를르슈를 불렀다.

하얗게 질린 를르슈의 얼굴을 보자 스자쿠는 빠르게 자리에서 움직여 를르슈의 휘청거리는 몸을 붙잡았다. 를르슈는 몸이 바로 잡히면서 두통과 함께 느껴지는 구토감에 아랫입술을 깨물려고 하는 순간, 속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나를 좋아하는 스자쿠에게만 나를 허락하는 거야,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스자쿠는

 

“를르슈?!”

 

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는 아침 내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냈다. 스자쿠는 바닥에 쓰러지려고 하는 를르슈의 몸을 붙잡았다. 토사물이 하얀 기사복에 묻었지만 스자쿠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런 다정함이 싫은 거야. 낮의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이름을 불러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는 주제에….

를르슈는 생리적인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감정적인 이유에서인지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참지 않고 마음껏 흘렸다. 눈물 범벅으로 적셔지는 를르슈의 얼굴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야, 밤의 너는 좀 더, 좀 더….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다 토해낸 직후의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에 눈을 감고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 * *

 

입술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를르슈는 어두운 방에서 눈을 떴다. 그 어둠은 밤 특유의 것이었다. 빛으로 밝혀도 한없이 까맣게 느껴지는 어둠. 그 사이에서 스자쿠는 를르슈를 보고 있었다. 녹색의 눈동자는 정욕도 우울도 느껴지지 않았다. 를르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자쿠에게 손짓했다. 를르슈의 가까이 오라는 손에 스자쿠는 기꺼이 그의 침대 곁에 다가갔다.

 

“나한테 키스해, 스자쿠.”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명령했다. 밤의 스자쿠라면 기꺼이 입을 맞춰줄 것이다. 평소처럼 다시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꿈에 취해 있는 목소리로 아쉬워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를르슈는 눈을 감았다. 입술에 닿을 따뜻한 그 온기를 기다렸다. 부드럽게 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올 혀가 민감한 부분을 문지르며 저를 가볍게 흥분시키는 그 키스를, 를르슈는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 키스를 한다면 이 상처 받은 마음이 어딘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스자쿠는 키스를 하지 않았다. 를르슈는 한참을 기다려도 스자쿠가 다가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답답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뜨면, 눈앞에 있는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 녹색빛을 알고 있다. 투명하고 올곧은, 어디까지나 기사이자 친구의 눈. 지금은 밤이었지만, 그는 낮의 스자쿠였다. 를르슈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을 눈치챈 스자쿠는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를르슈의 손을 붙잡았다.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를르슈.”

 

스자쿠가 겨우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를르슈는 자신의 피부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랗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이 차게 굳어갔다.

 

“나는, 꿈인 줄 알았어. 너무 현실감이 없고… 또 진짜 같아서, 너무….”

“…….”

“를르슈가 나를 받아주는 일은, 꿈에서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스자쿠는 우는 것 같기도 하면서도, 웃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를르슈는 붙잡힌 자기 손까지 떨리는 스자쿠의 진동에 그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울고 있기도 했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를르슈와 시선을 맞춰서 웃고 있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허탈하게 웃음이 났다.

 

“뭘 잘했다고 웃어, 너.”

“…그치만, 를르슈가.”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붙잡고서 자신의 뺨에 부볐다. 좋아, 좋아해, 를르슈. 계속 좋아했어. 너를 너무 갖고 싶어서, 너무 많은 꿈을 꿨어. 아니, 꿈이 아니라… 그건. 를르슈는 스자쿠의 열렬한 고백 끝에 나온 현실 속의 이야기에 그에게 붙들린 손을 빼내었다. 됐어, 말하지 마. 를르슈의 차디찬 반응에도 스자쿠는 굴하지 않았다.

 

“나에게 숨길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알고 나니까 속이 후련해.”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마.”

“그럼 말해줄 수 있어? 를르슈, 왜 나한테 바로 물어보지 않았어? 밤마다 나랑 섹스한 이유가 뭐야?”

 

를르슈는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그건 쓰러질 정도의 충격을 불러일으킨 사실이었다.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토할 정도였으니까, 를르슈는 그 답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한정없이 흘렀던 눈물이 왜 났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사실대로 말해주는 것은 어딘가 손해보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말해주고 싶었다. 그 손해를 무릅쓰고, 앞으로 얻게 될 이익이 반으로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를르슈는 말하고 싶었다.

 

“왜일 것 같아?”

“를르슈는….”

“나는?”

“나랑 키스하는 게 좋았고.”

“…또?”

“섹스하는 게 좋았고, 그리고.”

“…….”

“내가 좋아서.”

 

스자쿠와의 체스에서 를르슈는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다. 체크 메이트를 외치는 것은 항상 를르슈였다. 하지만 이번 순간만큼은 를르슈의 패배였다. 그는 완벽하게 함락당했으며, 킹의 자리에서 떨어졌다. 자신의 기사의 품으로 완벽한 착지를 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목을 끌어안고서 그에게서 배운 키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