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께서는 정말 재상 각하의 정부가 되시는 겁니까?”
를르슈는 자신의 기사가 저에게 물어오는 말에 눈을 내리깔았다. 기사를 고르는 것은 황족의 특권, 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 말처럼 저보다 나이가 많은 이복 형제들이 자기만의 기사를 고르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나도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나만의 기사를.
그렇지만 를르슈의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피살 당한 어머니, 그 옆에서 습격을 당한 여동생, 혼자 견뎌내야한다는 압박감 속에 홀로 남아버린 자신. 후원을 자처하던 애쉬포드도 귀족 사회의 견제 속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가지고 있는 것은 황족이라는 이름 뿐인 특권 뿐이었다. 를르슈의 아리에스는 그 특권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런 를르슈에게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황족의 특권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 특권을 이용하여 남에게 빌붙는다거나, 또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천박한 선택지들이 줄을 이었지만 를르슈는 그런 것들을 고려해야할 정도로 몰려있었다. 모두가 최악의 패였지만 그 중에 차악이 있었다면 그것이 최선처럼 보이는 법이었다.
슈나이젤이 내민 카드는 최선처럼 느껴졌다. 를르슈는 그가 내미는 손에 자신의 손을 더하는 것을 선택했다. 아리에스의 평화를 얻어내는 대신, 를르슈는 슈나이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위임한다는 맹세를 했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벌써 7년째, 슈나이젤은 영특한 남동생이 자신의 패로 쓰이는 것에 만족스러운 듯 했다. 를르슈는 맹세한 대로 슈나이젤의 명령에서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고, 아리에스는 그날의 테러 이후로 단 한 번의 사건도 없이 평화로웠다. 를르슈는 슈나이젤이 원하는대로 움직였다. 그가 나가라는 파티에, 전장에, 하물며 그에게 기사 임명권을 빼앗겼을 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사로 낙점된 인물이 비록 과거 일본이라는 이름의 에리어11에서 온, 슈나이젤의 밑에 있는 특별파견향도부의 파일럿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를르슈는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를르슈는 자신이 닥치고 있는 것이 아리에스의 평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사에게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를르슈는 흰 눈이 쌓인 아리에스의 정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그러나 기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를르슈는 들고 있던 찻잔을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렸다. 대리석 바닥과 부딪혀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잔을 깨버렸군.”
를르슈는 태연하게 말을 했다. 이내 곧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찻잔은 나나리가 아끼는 세트 중에 하나였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즐겨 쓰던 물건이기도 했지만. 하지만 그런 이유들이 나중에 떠오를 정도로, 기사가 저에게 물어온 말은 듣기가 싫었다.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대답할 여유가 없는 상황을 연출한 자신에게 기가 막혔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기사는 고지식하게 자신의 안위부터 살핀다. 를르슈는 하얗고 말끔한 손을 내보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기사는 곧 통신으로 메이드를 불렀다. 금방 빗자루를 들고 온 메이드가 청소를 하고 사라졌다. 그녀가 치우는 동안, 기사와 를르슈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를르슈는 메이드가 이제 가보겠다고 인사를 했을 때, 슬슬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자쿠.”
“네, 전하.”
“이제 방으로 돌아갈 건데, 너도 쉬도록 해.”
“…….”
스자쿠라고 이름이 불린 기사는 그렇게 도망치려는 를르슈를 보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뜨는 를르슈의 뒤를 따르면서, 그에게 정성을 다해 에스코트를 할 뿐이었다. 이대로 기사의 물음은 답해질 일 없이 일단락 되는 듯 했다.
“전하.”
“응?”
“정말로 슈나이젤 재상 각하의 정부가 되시나요?”
스자쿠는 포기할 줄 모른다. 그런 점이 넘버스인 그를 황족의 기사라는 자리까지 이끌게 한 것일지는 몰라도, 를르슈에게는 그런 점이 불쾌했다.
슈나이젤의 정부. 그것은 를르슈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녔던 또 다른 멸칭이었다. 를르슈는 자신이 그것에 일일이 답할 의무가 없고, 실제로 어떠한 답을 내놓든 간에 그렇게 떠드는 이들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것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이유에는 자신에게 이제껏 정면으로 그것을 물어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를르슈가 슈나이젤의 정부라고 불릴 정도로, 슈나이젤이 그에게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것은 황족들 뿐만 아니라 당연히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사실이었다. 를르슈에게 그런 질문을 해서 그의 배후에 있는 슈나이젤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누구도 를르슈에게 그가 슈나이젤의 정부인지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스자쿠는 다른 것 같았다. 그는 애초에 버려진 말인 넘버스, 이례적인 출세로 슈나이젤의 사람에서 를르슈의 기사가 되었다. 애초부터 슈나이젤 휘하의 사람이고, 또 그렇기에 그에게 버려져도 상관없는 듯했다.
“네가 보기엔 어떨 것 같은데?”
저에게 정면으로 부딪혀오는 스자쿠의 질문에 를르슈는 어떠한 반응을 해야할지 몰랐다. 평소라면 공격적인 자세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적들을 물리치는 것이 를르슈의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겠지만, 스자쿠는 적도 아니고, 자신의 기사이며, 슈나이젤의 명령이 없는 한 계속해서 자신의 기사일 것이다.
“내가 형님의 정부가 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머니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형님과 나는 형제인데?”
“…그렇습니까.”
“납득이 안되는 얼굴이군. 스자쿠는 내가 형님의 정부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스자쿠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를르슈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희미한 겨울 햇살이 들이치는 복도를 지나가면서, 를르슈는 생각에 잠겼다.
슈나이젤과 를르슈는 철저한 계약 관계에 놓여있다. 그 계약은 동등하지 않다. 오로지 를르슈만이 착취 당하고, 슈나이젤은 언젠가 를르슈를 내버릴 말로 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자쿠와 를르슈의 형편은 비슷하다. 언젠가는 버려지는 장기말.
슈나이젤이 를르슈에게 지금까지 원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머리와 처세술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 이상을 원한다면? 천박한 소문처럼 를르슈의 몸까지 원하게 된다면, 정말로 말 그대로의 ‘정부’가 되길 바란다면? 를르슈는 역겨운 것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를르슈 전하. 저는.”
그럴 리가 있을까, 하면서도 흥미에 약한 슈나이젤을 떠올리면 그럴 수도 있겠군, 싶기도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사념에 사로잡혀있는 를르슈를 붙잡은 것은 스자쿠의 목소리였다. 를르슈가 뒤를 돌아보면, 햇살 속에 있는 스자쿠는 결연한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전하께서 각하의 정부가 되는 것을 원하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를르슈의 이어지는 말에 스자쿠는 지금의 희미한 햇살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입꼬리가 겨우 올라가는 것이 보일 정도의 미소였다. 마치 그런 말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열었다.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를 돕겠습니다.”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고? 고작 나 하나 때문에?”
“그러기 위한 전하의 기사가 아닐까요?”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차피 슈나이젤의 끄나풀이다. 슈나이젤 휘하의 말이었다. 그리고 를르슈에게 감시역으로 붙은, 한 마디로 같은 아리에스에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한 번도 신뢰를 내비친 적은 없었기에, 그 역시 를르슈를 믿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냉랭한 상대에게 세상을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할 만큼 도울 생각이 있다는 것이 의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전하를 슈나이젤 각하께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빼앗기다니, 내가 물건도 아니고.”
“…….”
스스로 한 말이지만 자조에 가까운 것이었다. 슈나이젤의 물건이나 다름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지금에, 이제 와서 무엇을 빼앗기지 않았고, 무엇이 남아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데.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그 뜻을 알고 있는 것처럼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형님께는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고 있긴 하지만… 그럴 정도는….”
“…….”
“나에게 정부가 되라고 할까, 설마.”
“를르슈 전하.”
답을 내리는 것은 언제나 슈나이젤의 몫이다. 를르슈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이름을 불렀다. 를르슈는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스자쿠의 흰 장갑을 낀 손이 자신의 얼굴에 다가왔다. 그 손끝이 제 뺨을 문지르는데, 축축하게 젖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인가? 눈물이라니, 내가 울고 있는 거야? 를르슈는 화들짝 놀라며 스자쿠의 손을 떼어냈다. 를르슈의 거절에 스자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를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전하의 기사가 되었습니다.”
“…그거 참, 기사도 정신에 충실하다고 해야 하나.”
“글쎼요, 그런 마음과 다릅니다. 이렇게 손을 잡고 싶다거나, 안아주고 싶다거나.”
“…….”
“키스하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입니다.”
남자가 남자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를르슈에게는 모든 것이 논외였다. 남자가 남자에게, 이전에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여기는 사람이 죽어나가도 다음날 웃을 수 있는 살벌한 황궁이었다. 피바람으로 유명한 브리타니아 황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저에게 손을 잡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키스하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는 온화한 얼굴로 를르슈의 손을 잡아오고 있었다. 이제 손을 잡았으니, 안을 것이고, 또 키스까지 하려나. 를르슈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빼앗기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하에게 사랑도 받고 싶습니다.”
“사랑?”
“바라는 게 많죠?”
“…….”
마치 장난처럼 말하는 그 말에, 를르슈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를르슈는 이제까지 당연한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살아왔다.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여동생 나나리 뿐. 믿을 수 있는 것도 그녀 뿐이다. 황족으로써 누려야할 당연한 특권이었던 기사 임명권을 빼앗겼을 때에도 알게 모르게 속이 상했었다. 그런 것의 설움도 모르는 스자쿠가 바라는 것을 운운하는 것을 보자니 눈앞이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그런 를르슈가 화를 겨우 삭히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스자쿠는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슈나이젤 재상 각하와 내기를 하고 이 기사의 자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기? 무슨 내기?”
“전하께서 저와 사랑에 빠지시게 된다면, 전하와 저는 평생의 자유를 얻을 것이고.”
“…….”
“그럼에도 전하가 슈나이젤 재상 각하를 선택하시면, 저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된다는 내기를 했습니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
하, 하고 를르슈는 혀를 차며 웃었다. 어느 쪽도 를르슈에게는 득이 되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스자쿠가 좋은 게 아닌가. 전자는 평생의 자유, 후자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니. 를르슈가 실소하며 웃는 것에 스자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멍청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에 를르슈는 비웃듯 말했다.
“내가 얻는 게 없잖아. 너와 사랑에 빠지든, 아니면 형님의 편에 서든.”
“…전하는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드시나요?”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드냐고? 그런 호불호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의문을 갖는 순간부터 이 불합리한 생활에 대해서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될 테니까. 애초부터 의문의 싹을 잘라내듯, 그 불씨조차 피우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그것을 이제 와서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는 건, 스자쿠가, 슈나이젤이 자신을 얼마나 얕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웃기는 소리. 그런 농담에 어울려 줄 여유 따윈 없어.”
를르슈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스자쿠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서 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를르슈의 닫히려는 방문을 스자쿠는 힘으로 밀어내며 틈을 만들어냈다. 잠깐 보이는 그 틈 사이로 스자쿠의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부디 저와 사랑을 해주세요, 전하.”
나름의 로맨틱한 말이었으나,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를르슈에게는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를르슈는 닫히지 않는 문을 다시 한 번 힘주어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복도와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부디 저와 사랑을 해주세요.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만약, 제가 스자쿠와 사랑에 빠진다면 평생의 자유, 후자는 이대로의 삶이 주어진다는 건가. 이제까지의 삶이 어때서? 슈나이젤의 도구처럼 쓰이는 것이, 모든 것을 빼앗겨도 아리에스의 평화를 지킬 수만 있다면 좋았다. 이대로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한다면,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과 뭐가 다른거지?
를르슈는 또 다시 고이는 눈물을 닦아냈다. 왜 스자쿠의 앞에서 울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혼자 있는 지금은 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눈물은 자꾸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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