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로 제가 아이돌 덕질한지 꽤 되어서.. 요즘 시류와 안맞을 수가 있습니다^^ 걍 그러려니 해주세요...
때는 햇살이 반짝이다 못해서 타오르고 있는 여름이었고, 를르슈는 오랜만에 하는 외출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외간남자를 만나러 나간다는 이야기에 반 년 가까이 두문불출 했던 를르슈가 직접 나선 외출이었지만, 그는 곧 그녀를 따라온 것을 후회하고 말았다.
외간남자라고 해봤자, 를르슈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나리가 곧잘 보던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에서 7위라는 어중간한 숫자로 데뷔를 한 남자, 그렇지만 인기는 넘버 원 부럽지 않게 누리고 있는 그 남자의 단독 팬 싸인회의 줄은 이제껏 서보았던 줄 중에서 가장 긴 줄이었다. 나나리의 번호는 거의 앞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부의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바깥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행여 나나리가 햇빛에 닿을까봐 그녀에게 챙겨온 모자를 건네주고 수분 보충을 위해서 물까지 사다준 를르슈는 그 아이돌을 미워하고 있었다.
여동생이 이렇게 빨리 자신의 품을 떠나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정수리를 내리 쬐는 햇볕 때문에 를르슈는 눈앞이 아찔했지만, 그 남자를 향한 분노로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는 하도 많이 연구를 해서 알고 있었다.
강아지 같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라는(를르슈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지만), 동시에 남자다운 면모도 드러내는 점이 갭 모에라는 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를르슈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지만) 그 남자의 이름은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아무리 봐도 그저 그런, 호감형 외모의 남자일 뿐인데, 나나리가 그렇게까지 응원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남자와 단둘이! 만나는 일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에 를르슈는 이를 악물고서 팬 싸인회 추첨권을 따내기 위해 애를 썼다.
결국 암암리에 구한 추첨권은 꽤나 비싼 값을 치러야했지만, 나나리를 혼자 보내는 것보단 나았다고 위로하면서, 를르슈는 그녀와 떨어져 있는 번호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대체 그 남자의 뭐가 좋다고. 를르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약속된 정각이 지나자마자 바로 입장이 시작되었다. 를르슈는 먼저 앞서 들어가는 나나리의 뒤통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맨 앞쪽에는 쿠루루기 스자쿠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뭐라고 마이크에 대고 말했지만, 반 년 만에 하는 외출에, 햇볕 아래에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를 기다린 를르슈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나나리 하나만 바라보며 줄이 빨리 줄어들길 기다렸다.
나나리의 차례는 금방 찾아왔다. 우물쭈물, 하지만 사랑스러운 나나리의 기대에 찬 눈빛은 어느 아이돌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반짝거림을 혼자서 독차지 하고 있을 쿠루루기 스자쿠가 미웠다. 나나리가 수줍게 말하는 것에 쿠루루기 스자쿠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렇게 웃기만 할 게 아니라 황송하게 여기라고…! 를르슈는 이를 부득 갈았지만 그쪽까지 들릴 리가 전무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준비해간 앨범에 금방 싸인을 하고 나서, 나나리와의 이야기도 끝이 났다. 나나리는 아쉬워하면서도 뒷 사람을 위해서 자리를 떠났다. 를르슈가 줄을 서있는 것을 본 나나리는 그에게 손을 흔들면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손짓을 했다.
뭐, 나나리가 끝났으니 를르슈가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그냥 줄 밖으로 이탈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나리는 를르슈가 저를 억지로 따라온 것이라고 눈치챌 것이다. 나름대로 여동생의 취미에 맞춰주는 오빠이고 싶었다. 를르슈는 나나리를 기다리게 하는 그 못된 놈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조금만 더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를르슈의 차례가 왔다. 를르슈는 앞과 옆에서 시끄럽게 들리는 사람들 소리에 질려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뒤에서 거의 밀치듯이 를르슈를 떠밀어대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밀려나온 모습으로, 를르슈는 스자쿠의 앞에 섰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특유의 큰 눈망울을 반짝거리면서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 반짝거린다, 라는 표현이 어울릴까? 하지만 그런 말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를르슈는 울며 겨자먹기로 샀던 앨범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예요?”
“를르슈, 를르슈 람페르지. L-E-L-O-U-C-H.”
“우와, 혹시 브리타니아에서 왔어요?”
“그래.”
“저도 브리타니아에 가본 적 있어요. 그나저나 브리타니아는 여름에 이렇게 덥지 않으니까 힘들겠네요. 일본 여름은 덥기도 하지만 습도가 높아서 푹푹 찌니까.”
“아아, 그래도 나름 익숙해졌어. 여기에 산 지도 벌써 7년째라서.”
“7년씩이나? 대단하네요.”
쿠루루기 스자쿠는 흥미롭다는 듯이 를르슈의 이름 밑에 싸인을 휘갈기면서 말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손과 다르게 그의 표정은 빠르게 변화하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었다.
가족 외의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거의 반 년 만이었다. 낯선 감이 없잖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름만 말하고 그저 나올 생각이었던 를르슈는 그와의 대화가 꽤나 편안한 것에 대해서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이게 바로 아이돌의 친화력? 무섭군.
“그래도 밖에 많이 더웠을 텐데,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딱히, 그러진 않았지만.”
“여동생 때문에 같이 왔죠? 방금 전에… 음, 나나리라는 사람이 말해줬어요. 맞나요?”
“나나리가?”
“오빠가 혼자서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걱정이 된다고 했는데. 왜 걱정이 될까, 싶었는데 이해가 되네요. 이렇게 잘생긴 오빠를 혼자 두는 건 걱정이 안 될리가 없잖아요?”
“…….”
“더 자주 웃었으면 좋겠네요.”
스자쿠는 웃으면서 를르슈에게 싸인을 마친 앨범을 내밀었다. 를르슈는 그것을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생긴 오빠? 더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 그게 무슨 소리지…? 를르슈는 바깥으로 향하는 줄로 가려다가, 문득 유리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이렇게 희미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뭐가 좋다고 더 웃었으면 좋겠다는 거야…? 알 수가 없었다. 왜 웃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나리의 이야기 때문에 웃었을 지도 모른다. 쿠루루기 스자쿠와의 대화에서 웃을 부분은 거기 뿐이었으니까. 아니, 그 이전부터 웃고 있었던 걸까…?
왜 웃었을까. 스스로 그 질문을 몇번이고 곱씹으면서, 를르슈는 나나리와 만나서, 그녀와 함께 음료수를 나눠마시고, 또 나머지 무대를 위해서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더 자주 웃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고 보면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직업인 아이돌이어서 그런 말을 해준 거겠지. 크게 의미를 부여해봤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를르슈는 무대 위의 스자쿠가 했던 말과, 자신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들을 자꾸만 반추했다.
이상하게 그런 말들을 떠올릴 때면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머리도 빙글빙글 돌고,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를르슈는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한 감정의 카테고리를 좀 다른 곳에 포함시켜야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싸인회가 얼마 지나지 않고 나서였다. 스자쿠는 그 사이에 새로운 활동들을 이어갔다. 이전에 했던 팀 활동과 달리 솔로 데뷔를 하고 나서 혼자 만의 스케쥴이 많아져서, 나나리는 바쁘게 그의 영상을 찾아보고 가끔씩은 늦은 밤까지 그것들을 보느라 자지 않았다. 를르슈는 그것이 못마땅하기도 하면서, 그녀가 보고 있는 화면 너머에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한 번씩 눈여겨 보았다.
그는 이전보다 일정이 많아져서, 그래서 그런지 살이 더 빠진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여전한 거 같기도 했다. 그 점이 궁금해서 를르슈는 어느날부터인가 스자쿠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저에게 그런 말을 한 남자가 어쩌다가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호기심. 그러면서 원래부터 어떤 남자였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달콤한 말을 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하는 습관이라서, 스자쿠는 여러모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니까, 를르슈에게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은 그가 하고 있는 아이돌 업무의 연장선에서 했던 말이었던 것이다. 그걸 알고 나서 를르슈는 어딘가 허탈해졌다. 알고 있었잖아, 그런 말은 그냥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거. 마우스를 손끝으로 툭툭 튕기면서, 를르슈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는 스자쿠와 관련된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그의 SNS를 찾아갔다. 하루 하루 쌓이는 사진들이며 짧막하게 올리는 글들을 자꾸 놓치는 것이 불편해서 를르슈는 SNS 계정까지 만들었다. 이런 건 하지 않는데, 정말. 스자쿠는 실물도, 사진도 똑같이 나왔다. 아니, 실물이 더 나은 편인가? 사진은 더 어려보이잖아. 실물은 더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스자쿠의 사진을 저장했다.
그러다가 어느날부터 나나리가 심야프로그램에 스자쿠가 나온다고 하면 그녀에게 자라고 타이르는 것 대신에, 그녀의 옆에 앉아서 스자쿠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자쿠는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도 늘 열심이었고, 매번 부드럽게 웃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모두에게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럴 때마다 싸인회에서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한테도 저렇게 웃어주었던가? 를르슈는 그런 비교를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나나리의 ‘스자쿠 씨는 정말 멋져요!’ 라는 말에 시큰둥해지는 것보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일도 늘어났다.
그냥 아이돌. 텔레비전에 나오고, 춤추고 노래하는 게 일인 아이돌. 그런 아이돌은 흔하게 널렸는데도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특별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딱 한 번 만나봐서 그런 걸까? 오랜만에 만난 타인이라서? 많은 이유를 찾을 수 있었지만 정답이다 싶은 것은 없었다. 스자쿠를 생각하면 괜히 무언가 더 놓친 기분이고, 허전함을 느꼈다.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서 를르슈는 스자쿠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나왔던 경연 프로그램부터 최근에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녹음본까지 모조리 다 정리하고 있으면, 를르슈는 피곤함을 느끼면서도 왜인지 유쾌해졌다.
* * *
를르슈가 대학을 쉬고 두문불출의 생활을 반 년이나 지속한 이유는, 그렇게 해도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이 없다는 것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 사람에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다. 를르슈는 스스로 인정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하지만, 꽤나 훌륭한 미인이었고, 그런 미모를 가졌기 때문에 주어지는 스트레스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그럭저럭 버텨왔다고 생각했다. 짓궃은 놈들의 성추행 같은 장난이 있기도 했지만 를르슈의 악랄한 법적 보복을 한 번 보여주고 나면 모두들 기가 죽어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를르슈는 대학에 가면, 이런 놈들도 머리가 굵어져서 더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다들 머리가 굵어진 만큼 잔머리도 기가 막히게 돌아가서, 를르슈는 보복하는 것이 오히려 더 피곤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그러면 다들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람페르지는 이런 데에 관심이 없나봐, 라고 지껄이면서, 를르슈를 그런 관심사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세상에 대한 배신감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를르슈는 기억도 안나는 어느 술자리에 불려나갔다. 사회 생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참석이라고 생각하면서, 를르슈는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하고, 그렇게 어울렸다. 시간이 늦어지자 여자들은 슬슬 돌아갔고, 를르슈도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늦으면, 나나리가 걱정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택시를 붙잡기 위해 서있는 를르슈를 뒤로 끌어당겼다. 어? 술에 취한 를르슈는 맥없이 끌려갔다. 어두컴컴한 뒷골목에 그림자까지 집어삼켜지고 나서야, 를르슈는 자신의 위에 올라타고 있는 남자들을 볼 수 있었다. 를르슈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 것에 를르슈는 그 손가락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고,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를르슈는 겨우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음에 안도했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놈들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 다음날, 를르슈는 대학에 휴학계를 제출했고, 그후로 반 년간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게 사람들과의 인연도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그것이 아쉽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홀가분해져서, 를르슈는 그 생활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아마 쿠루루기 스자쿠를 만나기 전까지는 부족함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 * *
스자쿠를 또 만나고 싶다.
를르슈는 어느날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건 정말 사소한 일을 하다가 든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면서, 를르슈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번 스위치가 눌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졌다.
스자쿠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또 만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또 싸인회 같은 게 있을까? 그런 비슷한 이벤트를 가야 만날 수 있겠지?
를르슈는 스자쿠에 대한 정보를 모으면서, 그럭저럭 팬들의 문화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팬클럽에 가입하는 것은 뭔가 망설여졌지만, 그곳에만 스자쿠가 쓰는 글을 볼 수가 있다는 말에 덜컥 가입하고 말았다. 나나리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팬클럽에 가입했을 때 주는 굿즈를 받아볼 수 있었다. 그것이 처음 생긴 스자쿠 굿즈였다. 를르슈의 방 어디에도 둘 수 없지만,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든든해졌다. 뭔가 나쁜 버릇이 될 것 같았다.
를르슈는 밖에 나가는 것은 여전히 귀찮고 싫은 일이지만, 스자쿠를 만난다면 나쁘지 않은 외출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자쿠를 만날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음악방송 같은 곳에서 무대 위의 스자쿠를 볼 기회는 종종 있었지만, 를르슈는 그런 것보다 스자쿠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으면 했다.
그때처럼 이야기를 하고 싶어. 좀 더 웃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어.
처음엔 할 말이 없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스자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은 늘어갔다. 그러면서도 를르슈는 오늘의 스자쿠 스케쥴을 확인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쉬지 않고 바쁘기만한 일정 속에서 스자쿠는 언제 쉬는지, 그 몸이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쉬지 않으면 언젠가 피로로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스자쿠를 만날 수가 없어지잖아.
스자쿠를 걱정하면서도, 결국 만나고 싶은 자기 욕심을 알아버린 를르슈는 컴퓨터 앞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이런 거에 원래 관심도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혹시나 놓친 스자쿠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까봐 초조해졌다. 이런 초조함은 불편하면서도, 스자쿠에 대해 알게 되면 무척이나 행복해진다.
진짜 스자쿠를 만나면 이거보다 더 기쁠 텐데.
를르슈는 그렇게 애타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이건 좋아한다는 감정이었다. 조금 더 깊게 말하자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언제나 나나리에게 향하는 감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돌을 향한 사랑은 조금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자쿠를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런 말들을 붙이는 것은 뭔가 부끄럽고 낯간지러웠다. 그냥 보고 싶어. 만나고 싶어. 그러면 좋을 거 같은데, 이런 거도 진짜 ‘좋아’하는 거고, ‘사랑’하는 걸까?
화면 안에 있는 스자쿠에게 괜히 물어보고 싶었다.
* * *
스자쿠는 지치지도 않는지, 새 싱글 앨범을 냈다. 부드러운 선율의 발라드였다. 를르슈는 그다지 즐겨 듣지 않는 장르였지만, 스자쿠가 불렀다고 하니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새 앨범 발매에 맞춰서 악수회가 열린다는 말에 를르슈는 앨범을 박스 채로 한가득 사들였다. 역시 나나리가 학교에 간 틈을 타서 택배를 받았다. 할 수 있는 한 왕창 기회를 쏟아부었고, 하늘은 를르슈의 편을 들어 그 악수회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나리에게는 어쩌다보니 추첨권이 생겼다, 라는 말을 했다. 아직 용돈의 한계가 있는 나나리는 팬클럽 가입도 고사하고, 앨범 한 장을 사는 것도 겨우였기 때문에 를르슈의 말을 순진하게 믿으면서 기뻐했다. 를르슈는 방 한구석에 있는 앨범 박스가 신경쓰였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악수회 이벤트까지 하루가 남았을 때, 나나리는 무슨 옷을 입고 가야할지 모르겠다면서 이 옷 저 옷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 시간, 를르슈는 거울 앞에 서있었다. 눈앞을 길게 가리고 있는 앞머리가 신경쓰였다. 지금 보면 옷이 깔끔해도 음침한 인상이다.
이런 모습의 나에게도 웃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스자쿠에게,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면서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자를까… 아니면 그냥 이대로 갈까. 어차피 스자쿠는 날 기억하고 있지 않을 테니까, 그냥 갈까?
많은 준비를 마치고 나서 마지막 마무리였다. 스자쿠의 손에 닿을 테니까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세니타이저부터 시작해서 혹시 몰라 소독티슈까지 챙겼다. 향수도 골라두었다. 옷은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굴을 보며 하는 말이니까… 결국엔 얼굴을 보여줘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를르슈는 앞에 놓인 가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결의를 다지며 그것을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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