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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가자

DOZI 2022.06.26 07:36 read.272 /

스자루루의 소재 멘트는 '천국으로 가자', 키워드는 포옹이야. 아련한 느낌으로 연성해 연성

 

 

1.

세계가 눈으로 십 년동안 하얗게 물드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다. 동시에 세상이 오 년동안 물에 잠겨서 모든 것이 휩쓸려 나가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어느 날은 반나절 동안에 눈이 몰아치고, 어느 날은 남은 반나절에 뜨거운 비가 몰아치고,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죽일 듯한 뙤약볕이 이어지는 것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다. 세상은 이미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도 이제 동정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야할 것은 내일의 자신이 살아있을 수 있는지, 그것 뿐이었다. 모두 자신의 생존 앞에서는 이기적이었다.

 

 

2.

나나리의 심장소리가 멈추었을 때, 를르슈의 세상도 멈추었다. 많은 것들이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나리의 죽음은 불합리했으며 논리적이지 못했다. 그녀가 죽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를르슈는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막으로 지어진 임시 병원에서, 지붕과 벽과 문이 겨우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무너져 가는 집까지. 를르슈는 나나리의 시체를 업고서 걸었다. 평소라면 나나리와 함께 떠들며 오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를르슈는 흘러내리는 시체를 단단히 붙들었다.

똑똑한 를르슈는 죽은 시체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고 있었다. 한편, 죽은 나나리를 집에 데리고 오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 집에 다 왔어, 나나리….”

 

를르슈는 사흘 동안 나나리의 시체와 같이 지냈다. 추운 겨울은 시체가 썩는 것의 시간을 최대한 느리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추위는 를르슈를 이제 이 곳에서 떠나야함을 뜻하기도 했다.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남쪽으로 향해야 한다. 이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제 몫의 살림살이들을 챙겨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동상에 걸려 다리를 저는 노인과 버려진 고아들 뿐이었다. 노인들은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아들은 저들끼리 모여서 무리를 이루어 어떻게든 발악하고 있었다.

조건으로 따지자면 를르슈는 후자에 속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전자와 같은 담담함이었다. 죽은 나나리의 변한 낯빛을 보면서, 를르슈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나나리가 있는 곳에 간다면.

하지만 나흘째에 몰아치는 맹추위에 를르슈는 조촐한 짐을 쌌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나리의 시체에게 자신의 이불을 덮어주었다.

 

“미안해, 나나리.”

 

살고 싶어해서 미안해. 나만 살아서 미안해.

그렇게 를르슈는 나나리와 영원히 이별을 했다. 열 살의 겨울이었다.

 

 

3.

를르슈가 자고 일어났을 때, 옆자리에 누워있는 스자쿠의 온기가 익숙해진 것은 반 년이 겨우 지나서였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없는, 침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이부자리에서 혼자 눈을 뜨는 것이 일상이었다. 혼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언제 깨달아도 몸을 식게 만드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차가워진 몸으로 아침햇살을 쬔다. 그러면 하얗게 질린 손도 어느 정도 사람 체온처럼 따뜻해지고, 그렇게 하루를 억지로 살아갔다.

하지만 스자쿠가 옆자리에 있는 삶은 조금 다르다. 를르슈 쪽으로 돌아보며 자는 스자쿠의 숨소리는 일정한 박자로 이어진다. 그리고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 덕분에, 아직 동이 터오지 않은 새벽인데도 춥지 않다. 를르슈는 해가 뜰 때까지 스자쿠가 자는 것을 지켜본다. 

해가 뜨면서, 기장이 짧은 암막커텐 아래로 햇살이 들기 시작하면 스자쿠가 눈을 뜬다. 그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를르슈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스자쿠가 완벽하게 기상을 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방금 전보다 더 따뜻해지는 옆자리의 온기를 느끼면서, 를르슈는 다시 수마가 찾아오는 것에 숨을 느릿하게 내쉬었다.

일어난 스자쿠는 몸을 일으키고, 옆자리의 를르슈를 살핀다.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넘기는 손길이 간지럽지만, 를르슈는 자는 척을 하고, 그리고 이내 잠에 빠져든다. 멀어지는 스자쿠의 온기가 아쉽지만, 스자쿠가 꼼꼼하게 덮어준 이불을 그러쥐고 있으면 몸은 식지 않는다. 스자쿠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 커텐을 걷는 소리, 창밖을 보며 스자쿠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그런 것들을 들으면서 를르슈는 단잠에 빠지는 것이, 반 년 사이에 만들어진 일상이었다.

 

 

4.

스자쿠와 를르슈의 첫 만남은 두 사람이 열네 살 때였다.

지독한 더위가 보름째 이어지고 있었던 때였다. 더위에 취약한 노인과 아이들이 제일 먼저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더위를 피할 그림자와 갈증을 달랠 식수를 두고서 싸웠다. 그런 과정에서는 다들 각자의 생존방식이 있었다.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스자쿠는 싸워서 쟁취했으며, 를르슈는 빌어서 쟁취했다.

 

스자쿠가 를르슈를 발견한 것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도로 한복판이었다. 햇빛을 피하기 위한 검은 천을 겨우 두르고 있는 를르슈는 바닥에 헐떡거리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죽은 사람인 줄 알고 냅다 달려온 스자쿠는 그것의 정체가 를르슈인 것을 알고서 혀를 찼다. 정액과 땀, 흙먼지로 범벅이 된 를르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를르슈는 저를 돌아서려는 스자쿠를 보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를르슈를 도로에 버려두고서 혼자서 돌아가던 스자쿠는 이내 못참겠다는 듯이 를르슈 쪽으로 뛰어왔다. 그리고 바닥에 무너진 를르슈를 일으켰다. 스자쿠의 부축에 를르슈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뭐야, 너. 죽고 싶어?”

“……아마도, 그런 거 같아.”

 

쉬어버린 를르슈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죽고 싶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스자쿠는 를르슈를 등에 업었다. 스자쿠의 등에 매달린 를르슈는 팔을 떨구면서 말했다.

 

“더러우니까… 버리고 가는 게 좋을걸.”

“뭐가 더러운데?”

“나.”

“알아?”

 

그날따라 를르슈는 형편없는 ‘손님’들을 받았고, 돈이 될 만한 것도 받지 못했다. 그걸로 모자라서 중천에 뜬 태양이 한창 뜨거울 낮에, 뜨거운 아스팔트에 버려졌다. 이대로라면 죽을 지도 모르겠다, 하고서 를르슈는 자신의 생존에 반쯤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아니, 나나리가 싫어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몸은 깨끗한 채로 죽고 싶은데. 를르슈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스자쿠가 나타난 것이었다.

스자쿠는 코끝에 닿는 지저분한 것들의 썩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를르슈를 놓지 않았다. 등에 업힌 를르슈는 소년의 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면서 햇빛이 덜한 쪽으로 를르슈를 업고서 그의 집쪽으로 향했다.

 

“너네 집, 이쪽이지?”

“…응.”

 

도착한 그곳은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빈약한 그늘이었다. 구멍난 천과 나뭇가지로 엮어둔 천막. 두어 개 되는 물동이에는 마실 수 없는 흙탕물이 고작이었다. 그것들을 본 스자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를르슈는 그 사이에 기운이 돌았는지 자기 집 쪽으로 기어들어갔다. 천막 안의 그늘로 사라진 를르슈를 본 스자쿠가 말했다.

 

“그럼 난 이제 간다!”

 

스자쿠가 사라지려고 할 때, 천막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스자쿠가 천막 안을 살피면 를르슈가 천 하나를 뒤집어 쓴 채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뭐하고 있어?”

 

스자쿠의 지적에 를르슈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넘어지면서 구겨진 천을 탁탁 털더니 스자쿠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거, 깨끗한 거야. 한 번도 안 썼어.”

“…그래서?”

“여긴 더우니까, 햇빛 가릴 때 쓰라구….”

“너한테 필요한 거잖아.”

“난 이거 있으니까 괜찮아.”

“괜찮겠냐? 그런 걸로.”

 

스자쿠는 를르슈가 내민 천을 밀어냈다. 를르슈가 뒤집어 쓰고 있던 검은 천은 싸구려에 통풍도 엉망이었다. 그러면서 스자쿠에게 내민 천은 보들보들하고, 정말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듯 했다. 게다가 귀여운 꽃무늬도 아기자기하게 프린팅 되어 있었다. 내다 판다면 어쩌면 나름의 값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몸 같은 거 팔지 말고, 이런 걸 팔아.”

“……못 팔아.”

“그럼 네가 써.”

“나는 못 써.”

“뭐라는 거야?”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그것을 다시 내밀었다. 이거, 꺠끗하고, 비싼 거야. 어딘가 울음기가 묻어나는 를르슈의 목소리에 스자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여동생이… 갖고 싶어했어. 그래서 샀던 거야.”

 

를르슈의 마지막 말에 스자쿠는 이번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집엔 여동생의 흔적 따위 없다. 오빠와 여동생이 사는 곳이 아닌, 몸을 팔러 다니는 소년이 사는 곳이었다. 스자쿠가 조용히 제 집을 돌아보는 것에, 를르슈는 눈을 내리 깔고서 다시 한 번 꽃무늬 천을 내밀었다.

 

“이건 깨끗해.”

 

를르슈의 반복되는 ‘깨끗하다’는 말에 스자쿠는 후우, 하고 한숨을 뱉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에 들린 천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 천으로 를르슈의 더러운 것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았다. 갑자기 닿는 보드라운 촉감에 를르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너도 깨끗해졌거든? 그러니까 이건 네가 써.”

“…….”

“난 죽은 사람 물건은 써도, 죽고 싶어하는 사람 물건 받는 취미는 없으니까.”

 

를르슈는 제 손에 쥐어지는, 더러운 것이 묻어 흐려진 천의 꽃무늬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눈물로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곧 다물린 입술 사이로 엉엉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처럼 우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당황했다.

 

“더, 더러워져서 그래? 내 물, 물 빌려 줄게. 그걸로 빨면 다시 깨끗해질 거야.”

 

나름 큰맘 먹고 한 말이었으나 를르슈의 눈물은 그치질 않았다. 를르슈는 엉엉 울면서 천을 끌어안았다. 바닥으로 무너져 우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가 그의 어깨를 붙들고서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는 듯 했다. 한참을 울던 를르슈는 이내 기절하고 말았다. 질 나쁜 손님들의 상대와 강렬한 스트레스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다.

하얗게 질린 를르슈의 얼굴에 송장을 치를까 겁이 난 스자쿠는 급하게 제 집으로 달려가 물동이를 얹고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를르슈에게 어떻게 물을 먹여야할까 고민한 끝에, 제 입에 물을 머금고 를르슈에게 입을 맞추었다.

 

 

5.

“정신이 들어?”

 

오랜만에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이 따뜻해서일까, 를르슈는 알 수 없는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어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스자쿠가 보였다. 눈을 서너 번 깜빡이고 나면 시야가 또렷해졌다.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다… 나는 너 그대로 죽는 줄 알았어.”

“…….”

“미안. 우선 그 천, 빨아뒀으니까… 새 거 같진 않아도 그래도 깨끗해졌어!”

“…….”

“네가 그렇게까지 울 줄 몰랐어. 진짜 미안.”

 

스자쿠의 사과에 를르슈는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았다. 겨우 세워진 천막의 천장이 예전보다 더 견고해진 것은 기분 탓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면 모양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는 를르슈를 살피던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너네 집… 손 좀 봤어. 다른 건 안 건들이고, 그냥 보수공사! 그런 거!”

“…….”

“다른 물건은 진짜 손 안 댔어.”

“…….”

 

를르슈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심해, 라고 말하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를르슈는 아아, 하고서 목소리를 내보았다. 쉬어있는 데다가 울기까지 해서 목소리는 엉망이었지만, 말하는 데에는 지장은 없었다.

 

“내 이름, 를르슈야.”

“…를르슈?”

“응.”

“그렇구나.”

“너는?”

“응?”

“너는… 이름이 뭐냐고.”

 

알려주기 싫으면, 안 알려줘도 되고. 를르슈의 덧붙여지는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스자쿠. 를르슈는 스자쿠의 이름을 듣고 나서 고개를 숙였다. 를르슈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스자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고마워, 스자쿠.”

 

정말 고마워.

를르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다 흘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또 줄줄 흘러 넘쳤다. 그 겨울, 나나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에도, 내려치는 추위에 살겠다고 남쪽으로 향하기로 결정한 사흘째에 울었던 것보다 더 서러운 감정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날부터 자신의 욕망으로 더러운 자신을 깨끗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스자쿠가 처음이라서? 이젠 무엇이 고마운지, 혹은 미안한지도 알 수 없는 채로 를르슈는 계속 울었다. 하지만 스자쿠는 더는 당황하지 않고서 를르슈의 옆에 있어주었다.

 

 

6.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길한 전조 증상이었다. 하지만 내리쬐는 더위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모두가 살 것 같다며, 그 불길함에 눈감고 있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너그러워진 사람들의 인심에 조금 여유로워진 생활에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스자쿠는 다른 것 같았다.

 

“있잖아, 를르슈는 여기를 떠날 생각 없어?”

 

어딘가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스자쿠는, 평소의 감정표현이 단순하게 드러나는 그 모습과 달라보였다. 스자쿠가 가지고 온 통조림과 를르슈가 모아온 채소로 겨우 차린 식탁은 휘황찬란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적당했다. 그런 저녁식사를 앞에 두고서,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말했다.

 

“어른들한테 들었어. 여기서 북쪽으로 한참 가다보면, 예전에 무슨 연구소 사람들이 버리고 간 기지가 있나봐. 거기는 식량도 제법 있고, 원래부터 북쪽이라 겨울 나기도 편하다고.”

“…북쪽? 이 시기에?”

“응.”

“……곧 추워질 것 같은데.”

“강요하는 건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남쪽으로 가고 싶으면 가도 돼. 근데 난…….”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잡았다. 햇빛에 타고, 거칠게 일어나고, 마디가 졌지만, 그래도 따뜻한 스자쿠의 손이 를르슈의 차가운 손에 닿았다.

 

“난 를르슈가… 나랑 같이 갔으면 좋겠어. 북쪽에는 뭐가 있을 지도 모르고, 진짜 기지가 있을 지는 알 수 없고… 또 지금 가면, 얼어 죽을 지도 모르지만.”

 

스자쿠의 말끝은 점점 흐려졌다. 미안, 이런 걸 말해서. 스자쿠의 마지막 말은 결국 사과였다.

앞서 이어지던 터무니 없는 말들과 반대로 마지막 사과를 들으니, 를르슈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마음을 정했다. 스스로 버린 목숨은 두 번이나 스자쿠에게 구해졌다. 이제서야 죽는 것이 두려워서 북쪽으로 향하는 것을 망설이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좋아. 같이 가자.”

“…진짜?”

“응.”

“나랑 같이 가면 죽을 수도 있어, 를르슈. 정말 괜찮아?”

 

를르슈는 그 말에 역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목숨을 걸고 같이 가자고 하는 스자쿠에게, 꼭 확인 받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럼 스자쿠는, 나랑 같이 죽는 건 괜찮아?”

 

나는 스자쿠랑 같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좋아. 를르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딘가 입맛이 씁쓸한 고백이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잡은 손을 힘주어 당겼다. 가만히 있던 를르슈는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이끌렸다.

아직 먹지 않은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막으로 만들어진 집은 더위도, 추위도 막기에 힘들었다. 하지만 그 허름한 곳에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7.

스자쿠와 를르슈가 북쪽으로 향한 뒤, 한 달을 한참이나 걷고, 식량이 없이 나흘을 굶고 나서야, #4629라고 적혀있는 튼튼한 컨테이너로 지어진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가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통조림이 한 가득한 박스를 여덟 개나 발견 했을 때, 스자쿠와 를르슈는 부자라도 된 것마냥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곳은 스자쿠가 말한 ‘기지’였다.

기지에는 자동 정수 시설이 갖춰져 있고, 자동 태양 전지로 덕분에 귀한 전기도 쓸 수 있었다. 스자쿠와 를르슈가 기지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은 침대였다. 를르슈의 꽃무늬 천을 깔아둔 침대는 남자 둘이 눕기에는 조금 좁았지만, 서로 바짝 끌어안고 있으면 그럭저럭 포근했다.

기지에 머무는 첫 일주일은 기지 안에 있는 물건들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로운 보존식량, 따뜻한 방한복 같은 것들은 눈이 쌓여가는 북쪽에서는 보물 같은 것이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기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물품들 중에서 가장 의아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딱딱한 관절을 굽히면서 길게 기지개를 켜는 듯, 몸을 삐걱대면서 소리를 냈다.

 

‘냐아아옹.’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우는 기계는 본 적이 없었다. 쇠로 만들어지고 전기로 움직이는 ‘그것’은 계속해서 냐아아오옹하고 요란하게 울어댔다. 스자쿠가 ‘그것’의 머리 같은 부위를 쓸어주면 잽싸게 구석으로 숨고, 를르슈가 쓸어주면 또 냐아아오오옹하고 소리를 냈다.

 

“이거 은근히 귀엽네.”

“귀엽긴 한데… 내 손만 피하는 게 열받네.”

“뭐… 너무 세게 쓰다듬는 거 아니야?”

“를르슈만 따르고, 뭔가 치사해.”

 

세모난 귀 같은 것을 쫑긋거리는 ‘그것’을 본 스자쿠는 를르슈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에 부럽다는 듯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거, 이름 지어줄까?”

“스자쿠가 지어줘, 그럼.”

“…내가? 따르는 건 를르슈 뿐인데.”

“이름 지어준 사람한테 잘해줄 지도 모르잖아.”

 

‘그것’의 작명권을 얻은 스자쿠는 잠시 곰곰히 생각했다. 를르슈의 옆에 붙어있던 ‘그것’은 펄쩍 뛰어서 솜씨도 좋게 소리 없이 착지하였다. 그 위치는 스자쿠와 를르슈의 침대 위, 꽃무늬가 흐릿해진 그 천 사이의 틈바구니였다.

 

“이름 정했어.”

“뭐로?”

“‘나나리’라고 부르자.”

 

갑자기 나오는 나나리의 이름에 를르슈는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별 거 아닌 것처럼 입을 열었다.

 

“나는 나나리를 본 적은 없지만… 진짜 나나리가 있었다면 이렇게 를르슈한테 찰싹 붙어다녔을 거 같아서.”

“…….”

“뭐, 이런 거보다 진짜 나나리가 훨씬 훨씬 더 귀엽겠지만!”

 

나름 감동스러운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오랜만에 울었다. 훌쩍거리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가 히죽거리면서 ‘나나리’를 를르슈의 앞에 내밀었다. 스자쿠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냐옹냐옹 우는 ‘나나리’를 겨우 제 품에 끌어안고서, 그 기곗덩어리의 삐걱거림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에, 를르슈는 다시 나나리가 돌아온 것처럼 울어버렸다.

 

 

8.

기지의 벽면에 적혀있는 #4629라는 글자는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얼어붙다 녹는 눈에 글자가 흐릿해졌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나나리’가 뛰어다니면서 헤집어놓은 짐 사이에서 페인트를 발견했다. 손에 묻어도 지워지지 않는 파란색 페인트에 두 사람은 한참을 고생했다.

어느 날은 눈도 적당히 녹았고, 햇빛도 딱 날이 좋게 드는 날이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아끼는 하얀 패딩을 입고서, 페인트와 붓을 들고 기지 밖으로 나왔다. 문밖을 나서려는 ‘나나리’를 겨우 안에 넣어두었다. 그러기 위해서 제법 기력을 빼앗긴 탓에, 페인트를 들고 나왔을 때에는 서로 힘없이 웃고 말아버렸다.

 

“뭐라고 적을 거야?”

“글쎄… 글을 모르니까 뭐라고 적어야 할 진 모르겠어.”

 

애석하게도 스자쿠와 를르슈 모두 글자를 배운 적이 없었다. 이름 한 번 제대로 적을 일이 없는 인생에, 무언가를 남기게 되었다는 생각은 두 사람을 어렵게 만들었다. 글도 모르고, 그렇다고 아무 그림이나 사랑하는 집(기지이긴 하지만)에 남기는 것은 싫었다.

머뭇거린 채로 페인트 통을 흔들고 있는 스자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를르슈는 들고 있던 붓을 페인트 통에 담갔다.

 

“를르슈가 적게?”

“이대로라면 안 끝날 거 같아. ‘나나리’도 기다리고 있고.”

“정말 ‘나나리’ 바보야.”

“너도 만만치 않으면서.”

 

를르슈는 페인트 통에 담근 붓을 들고 벽면에 크게 원을 그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순서의 획을 그었다. 를르슈가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것에, 스자쿠는 그 모습을 얌전히 보고 있었다.

무언가의 글자 같기도 하면서도, 낙서 같기도 한, 를르슈의 표식이 완성되었다.

 

“뭐라고 썼어?”

 

스자쿠는 붓을 내려놓는 를르슈의 옆에 섰다. 를르슈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면서 스자쿠에게 말했다.

 

“뭐라고 썼을 거 같아?”

“음……. 쉬운 뜻은 아닌 거 같은데.”

“뭐, 뜻은 정하기 나름이지.”

“그래?”

“스자쿠가 정해.”

“응?”

 

난 최선을 다했어, 라고 를르슈가 말했다. 스자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네가 써놓고 나보고 정하라고 하면 그게 뭐야. 스자쿠의 볼멘 소리에 를르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럴 때의 를르슈는 완고하다. 자기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스자쿠는 억지를 쓰는 를르슈의 고집을 알고 있었다. 그럼 내가 뭐라고 정해도 그대로 하는 거야.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확인을 받았다.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자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천국.”

 

천국? 갑자기 나온 그 단어에 를르슈가 약간 맥이 빠진 얼굴을 했다. 

 

“왜, 집이 천국이라는 말이 있잖아. 나는 이 집이 천국이야. 를르슈도 있고, ‘나나리’도 있고.”

“그렇다고 천국은 좀.”

“나보고 정하라며!”

“너무… 저차원적이지 않냐?”

“너무하네, 진짜!”

 

스자쿠가 돌아서는 모습에 를르슈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장난이야, 스자쿠. 그의 사과어린 말에 스자쿠는 뒤로 돌았다. 를르슈는 그에게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스자쿠.”

 

그것은 ‘나나리’를 길들이면서 생긴 를르슈의 말투였다. 내가 ‘나나리’도 아니고. 스자쿠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를르슈를 끌어안았다. 바스락거리는 옷소리와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와중에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 어딘가 기분이 이상했다.

천국을 집으로 삼고서, 이렇게 안고 있기만 해도 행복한 기분은 영원할 수 없는 걸까. 어딘가 불안한 마음은 언제나 말하지 않아도 통했다. 두 사람의 포옹은 늘 감정 이상의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스자쿠는 잠긴 목소리로 일부러 밝게 말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누가 집에 가자는 소리를 그렇게 해?”

 

를르슈 역시 어딘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스자쿠와의 포옹에 힘을 주었다. 자신을 단단하게 끌어안는 스자쿠의 팔이 있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나나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이 눈을 가리는 속임수로 만든 얄팍한 천국이라고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