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 내가 그 홍차에 독을 탔어!”
너무나 당차게 말하는 유페미아의 목소리에, 찻잔을 들고 있던 를르슈는 그 의미를 파악하고 나서 정말 황당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뭔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를르슈의 반응에 유페미아는 흐음, 하고서 제 턱을 감싸고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그 홍차에 독을 탔다구!”
유페미아의 새로운 장난인가 싶어서 를르슈는 옆에 있던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정작 그 홍차를 우리고 만든 스자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를르슈와 비슷하면 비슷했지, 유페미아의 말에 동조조차 하지 않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한 모금 넘기려는 찻잔을 다시 내려놓고서, 를르슈는 유페미아에게 말했다.
“그런 농담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겠어, 유피.”
오빠의 냉정한 반응에 유페미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벌떡 일어났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를르슈는 재미가 없어졌어요. 유페미아의 시시하다는 반응에 를르슈는 혀를 찼다.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도 그런 농담은 재미 없어.”
“요즘 학교에서 유행이야.”
“그런 게? 왜?”
“드라마에서 나오는 유명한 장면을 따라하는 거야. 를르슈, 드라마 안 봐?”
“볼 새가 있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독을 탔다고 하는 건 좀.”
를르슈는 낭만이 없어, 로맨스가 없어. 유페미아는 를르슈에게 투덜거렸다. 평소라면 유페미아의 장난에 같이 어울려주던 를르슈가 이번 만큼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략 보름 전에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를르슈다. 암살 중의 가장 초보적인 독살 협박도 장난이래도 피곤했다.
를르슈의 입맛대로 내린 홍차는 식어가고 있음에도 를르슈는 한 입도 대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기사인 스자쿠가 직접 내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입맛이 가신 것이다. 스자쿠는 홍차에도, 케이크에도, 스콘에도 손을 대지 않는 를르슈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원인을 모르는 유페미아만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티 파티 중이었다.
이복여동생이 장난에 실패한 것에 우울해하는 기색이 짙어지자,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독을 탔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면 되는데?”
“를르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유피가 나한테 독을 탄 차를 준다면?”
“응.”
“……뭐, 한 마디 정도는 하겠지.”
“뭐라고?”
“아마도…….”
“아마도?”
“이럴 줄 알았다—라고.”
“뭐? 너무해!”
“난 원래 너무한 사람이야. 그래서, 원래 드라마에서는 뭐라고 하는데?”
를르슈가 어울려주는 대화에 유페미아는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네가 주는 걸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하고 마셔. 멋있지?”
“그거 참 주체의식 없는 대사군.”
“그러니까 를르슈는 낭만이 없다는 거야! 그쵸, 스자쿠?”
이제 저에게 돌아오는 질문에 스자쿠는 애매하게 웃을 뿐이었다. 원래 드라마 대사는 진부할 정도로 정석적인 사랑 멘트이고, 이쪽은 목숨이 진짜로 달려있는 상황에서 그런 대사를 듣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도 생각하는데… 아무리 장난이래도 그런 농담은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 유피.”
“스자쿠까지? 두 사람 다 정말 재미 없어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유페미아는 크레이프 케이크의 한 조각을 잘라 먹으면서 히죽 웃었다. 내가 주는 독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 정말 멋진 사랑이지 않아? 그녀의 덧붙여지는 말에 를르슈도, 스자쿠도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바탕이 튼튼한 귀족 집안의 어머니, 승승장구하는 언니, 그 틈에서 그늘 한 번 드리운 적 없는 환한 햇살 아래서 아리따운 꽃처럼 자란 유페미아는 독살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평민 출신 어머니에, 그 어머니 조차 잃은 아리에스의 를르슈와 나나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런 것을 일부러 알려주고 싶지도 않고,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자존심의 문제도 있고, 그녀와의 관계가 변질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도 있다. 순식간에 한쪽은 가진 것이 없는 약자가 되고, 한쪽은 누릴 수 있는 강자가 되는 구조에 놓이는 것은 지긋지긋했다. 유페미아와의 시간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치유의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따금 그녀가, 이렇게 누리고 있는 것들에서 오는 여유를 보일 때마다 를르슈는 기분이 묘했다. 묘한 기분은 부정적인 사고로 흘러들었다. 를르슈는 유페미아가 떠날 때까지 그 사고의 소용돌이에서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래도 이럴 줄 알았다는 너무한 거 아닐까요?”
저녁을 먹을 때, 나나리는 해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모처럼 같이 쉴 수 있는 휴일이었지만, 나나리는 평소 자주 가는 복지원의 봉사활동을 가느라 유페미아와의 티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쉬워하는 나나리에게 유페미아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니, 나나리는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건 꼭, 유피 언니가 언젠가 오라버니를 죽일 줄 알았다… 같았다는 말이잖아요.”
“하지만 유피가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말할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오라버니도 참 짓궃어요.”
를르슈가 마지막으로 물을 한 잔 마시려고 할 때에, 나나리는 하하,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지금 들고 계신 그 잔에, 제가 독을 발라놨다면요, 오라버니?”
“…나나리, 너까지.”
“만약이잖아요, 만약. 그렇다면요?”
“…….”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들고 있던 잔을 노려보았다. 스자쿠가 끼어들려고 할 때에, 를르슈는 더 망설일 것 없이 그 잔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다 마시고 나서 빈 유리잔을 내보이며 하아, 하고 한숨까지 내쉬는 모습에 스자쿠와 나나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면 나나리에게도 무슨 뜻이 있었겠지, 나는 그 뜻을 존중할 뿐이야.”
“……도, 독을.”
“독이라도 상관 없어.”
“……오라버니 말씀대로, 이런 농담은, 좋지 않은 거 같아요.”
잔을 내려놓고 먼저 나서는 를르슈의 모습에 나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독 같은 거도 없고, 이 모든 상황이 가정이고 농담이지만…. 나나리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를르슈는 심각해지는 나나리의 표정에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농담이잖아, 나나리. 아무 일도 없어.”
“…그, 렇죠.”
나나리의 시무룩해지는 기색에 를르슈는 한숨을 삼켰다. 암살의 위협은 를르슈 뿐만이 아니라 나나리에게도 가해졌던 때가 있었다. 그녀가 독살을 장난스럽게 이야기할 정도로 시간이 흐른 것이지만, 그 장난의 반응 하나에도 이렇게 우울해질 정도라면 아직까지도 그 어둠은 짙게 남아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나나리의 어두운 표정에 를르슈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유피가 보는 드라마에서— 아, 그거 저도 보고 있어요. 너도 본다고? 아니, 그런. 그리고 그 장면, 이렇게 무섭고 진지하지 않아요. 정말 로맨틱하다고요. 그런 대사가…? 오라버니는 정말 낭만이 없어요!
아리에스의 모두가 자는 시간이 되었을 때, 스자쿠는 를르슈의 방문을 두드렸다. 낮에는 그를 지키는 기사, 밤에는 몰래 찾아오는 연인. 문이 열리자 연인이 저를 반기는 것에 스자쿠는 입술을 당기며 웃었다. 저를 끌어안고 매달리는 체온은 사랑스러웠다.
“많이 기다렸지, 를르슈.”
“그래. 너, 늦었어.”
“어느 전하께서 갑자기 내일 오전 일정을 모두 취소해버리셔서 말이야, 그 뒤처리는 전임기사의 몫이라서.”
“하, 내 탓이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크게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황족으로서의 일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그가 어째서 오전 업무를 취소했는지에 대해서 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어디 아파?”
“아프진 않고… 그냥 생각하다보니 내일은 일할 기분이 아니더군.”
“무슨 생각?”
“…….”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그는 대답 대신에 술잔 가득 술을 부었다. 호박색의 액체가 달빛에 일렁거렸다. 를르슈가 내미는 술잔에 스자쿠는 그것을 받았다.
“스자쿠, 여기에 내가 독을… 탔다면.”
“…그 농담, 너까지 하는 거야?”
“난 진심이야.”
“진짜로?”
“그래.”
를르슈가 내민 술잔은 평범했다. 매번 보던 그 잔이었고, 따르던 술도 익숙한 향이 났다. 를르슈와 스자쿠가 밤마다 같이 즐기는 술이었고, 독의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잔을 내미는 를르슈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어딘가 바닥을 들킨 듯한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런 걸로 불안해 한단 말이야? 스자쿠는 긴장으로 떠는 를르슈의 손 때문에 떨리는 수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를르슈 네가 독을 탔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술잔을 내밀어 놓고, 묻는 말을 다 하고 나서도 를르슈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내가 모를까?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일관했다.
우선 를르슈가 내민 술잔을 받았다. 떨렸던 수면은 스자쿠의 손에 들어오지마자 잔잔해졌고, 를르슈는 그가 잔을 건네 받는 모습에 더 알 수 없이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스자쿠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스자쿠는 잔 속의 내용물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그가 거침없이 술을 털어마시는 것에 를르슈는 놀란 표정을 하고서 스자쿠의 팔을 붙잡았다. 그것이 바로 스자쿠가 바란 것이었다.
제 팔에 감기는 그 손을 잡아당겨 스자쿠는 를르슈와 입을 맞추었다. 혀를 섞으면서 흐르는 타액에서는 술의 알싸한 알코올 맛이 났다. 키스라고 하기 보다는 술을 나눠 마시는 기분에 를르슈는 찌푸린 미간을 느슨하게 풀었다. 스자쿠가 허리를 감싸는 것에 저도 그의 목을 끌어안고서 한참이나 키스를 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를르슈는 헐떡거리면서 스자쿠에게 물었다.
“너 말이야, 이거… 같이 죽자는 뜻이야?”
“그러자고 한 말 아니야?”
를르슈는 스스로 낼 수 없었던 정답을 쉽게 맞추는 스자쿠를 보고서 허탈하게 웃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입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는 너 만큼 똑똑하지 않아서 멋진 말은 해주지 못하지만….”
“응.”
“그래도 정답을 앞에 두고 틀리는 바보는 아니야.”
“…….”
술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독이 아니라 최음제가 든 게 아닐까, 그저 섞인 것은 혀에 뒤섞인 타액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를르슈는 그런 어리석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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