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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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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레퀴엠 2022 (미완)

DOZI 2022.09.28 00:00 read.94 /

Do not play the Requiem

 

그때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일상적으로 하는 여동생과의 전화통화를 마치고 나서 정확히 13시간이 흐른 뒤었다. 를르슈는 온몸을 싸늘하게 감싸는 냉기에 몸을 뒤척였다. 30년 평생을 살면서 이불 한 번 내친 적 없었는데, 창문이라도 열어두고 잤던가. 를르슈는 환하게 들어차는 빛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커텐도 안 치고 잤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리고 를르슈 람페르지는 눈을 떴다. 어딘지도 모르는 대리석 바닥,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그리고 저를 경게하는 사람들의 기척. 를르슈는 습관적으로 이불을 걷어내려고 했지만 손에 걸리는 것 하나 없었으며, 자신은 평소 입고 자는 검은색 파자마 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무슨.’

 

그리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도 안되는 해괴한 흰 옷 차림의 소년이 한 명, 그리고 그 옆에 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이 있었다. 두 사람은 를르슈 만큼이나 당황한 얼굴로 서 있어서, 를르슈는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면서도 그들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를르슈에게 도움을 줘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듯 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를르슈 람페르지 또래의 남자가 흰 옷의 소년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폐하와 정말 닮으신 분이라 함부로 대할 순 없어서… 혹시 이것 또한.”

“그래, 기어스일지도 모른다. 제레미아, C.C.를 데려와.”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나이트 오브 제로도 없는데… 폐하의 호위를 비워둘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낙관하고 있을 수도 없다. 빨리 C.C.를—!”

 

귀에 또렷하게 들리는 소년의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했다. 를르슈는 저를 멀찍이서 두고 보는 두 사람의 기색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2 대 1의 상황에서 평소에 운동조차 하지 않는 저체중 를르슈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없었다. 그저 주특기인 화려한 언변으로 살아남는 것이 방법이겠거니, 하면서 를르슈는 사람을 구워삶을 때 짓는 미청년 미소를 만들며 말을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가 어딘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나 미청년 미소는 먹히지 않았다. 소년과 남자는 굳은 얼굴로 를르슈를 쳐다볼 뿐이었다. 젠장, 대화가 들리는 걸 봐서는 말이 통하는 것 같았는데…! 를르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으려고 할 때였다.

를르슈를 무척이나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는 소년의 낯이 익었다. 검은 머리, 보라색 눈동자, 날이 선 눈매. 쓸데 없이 화려한 디자인의 흰 옷을 두르고 있어서 그렇지 잘 보면 거울을 본 듯 닮은 얼굴이었다. 약간의 세상 풍파를 덜 맞은 듯한 소년 티가 나는 것이 를르슈(30세)보다 훨씬 어려보이긴 했지만… 마치 꼭, 고등학생의 를르슈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믿으실 지는 모르지만 저는 자다가 일어났더니 여기에 있었고… 이름은 를르슈 람페르지, 서른 살이고, 아, 명함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브리타니아 컴퍼니 일본 지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를르슈, 람페르지?”

 

그 어린 소년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를르슈의 이름을 되뇌었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를르슈는 그 소년이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흠, 여긴 어디죠? 무슨 영화 세트장 같은데. 궁전 같네요.”

“이름이 진짜 를르슈 람페르지인가? 나중에 심문하겠지만 지금 제대로 대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너의 본명은? 어디서 널 보낸 거지?”

 

그러나 소년은 매서웠다. 를르슈는 저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소년의 패기에 입을 다물었다. 철컥, 하고 장전되는 소리에 옆에 있던 남자가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년을 말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뭐야, 이거. 영화는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속이는 쇼도 아닌 거 같고. 미레이의 농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분위기가 무겁잖아! —라고 를르슈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 폐하~! 엄청난 일이 일어났어요~!”

 

멀리서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발소리와 유난히 한 톤 높게 시끄러운 목소리가 맞물렸다. 백의를 입은 남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를르슈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닥쳐라, 로이드! 지금은 네 투정을 받아줄 때가 아니야!”

“그~ 역시 안되겠죠?! 세실 군, 내 말이 맞잖아. 폐하는 이런 거에 관심 없으시다니까~!”

“그치만 이런 건 폐하께 알리지 않으면…!”

“하지만 폐하께서 때가 아니시라니, 우리들은 가보는 수밖에. 스자쿠 군이 두 명이 되어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야.”

 

그 말에 를르슈를 팽팽하게 노리고 있던 총구가 거둬졌다. 소년은 ‘로이드!!’하고 외치는 소리에 를르슈는 귀를 막았다. 어이구, 목청도 좋아. 요즘 배우들은 발성이 이렇게 좋은 건가? 를르슈는 이제 이 상황을 마음대로 세트장에 놓인 드라마나 영화 배우들의 한 부분이라고 좋을 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뭔가 브리타니아 제정 시대의 역사 드라마 한복판에 놓여진 기분이었다.

 

“스자쿠가 두 명이라고?!”

“네, 랜슬롯 알비온 안에 누가 있길래 열어보니까 스자쿠 군이 있더라구요!”

“우선 스자쿠 군이 제압해서 묶어두긴 했지만…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없으니까요.”

“설마 도플갱어일까 생각해도, 아무래도 기어스의 힘이겠지만, 그렇죠, 폐하?”

 

로이드라는 남자와 세실이라는 여자가 번갈아가면서 떠들어가는 목소리에 소년의 분위기는 더더욱 가라앉았다. 를르슈는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제레미아라고 불린 남자에게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근데 여긴 어디죠, 진짜?”

“…정말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뭐라도 알고 있으면 좋겠네요, 저도.”

 

제레미아와 를르슈의 대화가 미적지근한 끝을 보고 있을 때, 로이드가 재미있는 것을 보듯이 눈을 둥글게 휘며 를르슈에게 삿대질을 했다.

 

“아니, 여기도 폐하가 두 명?!”

“어머, 게다가 이쪽도 ‘어른’이네요?!”

 

를르슈는 영문을 모르겠지만 우선은 주특기인 미청년 스마일을 지었다. 그러자 로이드와 세실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말 폐하랑 똑같잖아’ 같은 말을 했다. 역할상 ‘폐하’로 정해진 소년은 이 상황 속에서 꿋꿋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가라앉은 침묵의 ‘폐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나잇대 소년이 지을 수 없는 사악한 미소를 지은 ‘폐하’가 입을 열었다. 

 

“상황은 파악했다. 예상되는 패턴은 17가지… 지금 당장 C.C.와 스자쿠를 불러와!”

 

그렇게 를르슈 람페르지(30세)는 박물관 중에서도 브리타니아 제정시대에서 본 것 같은 구속복을 입고서, 옥좌로 보이는 곳에 앉아 있는 ‘폐하’ 앞에 덩그러니 놓였다. 제레미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무릎 뒤를 치자 를르슈는 ‘흐아아!’ 소리를 내며 철푸덕 엎어졌다. 무릎이 찡하게 아파왔지만 이 황당한 상황극에서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그쪽도 정말 폐하랑 똑같군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를르슈는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검은 옷의 소년이, 저와 비슷하게 생긴 모양새의 어른을 구속복 차림으로 데리고 서있었다. 그쪽도 만약 소년이 성장하고 자란다면 그 어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이트 오브 제로, 그쪽도 ‘쿠루루기 스자쿠’인 건가?”

 

‘폐하’는 낮게 깐 목소리로 검은 옷의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구속복을 뒤집어 쓴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쪽’도’라니…. 설마 너도 스자쿠야? 너네 부모님도 못됐다, 정말. 하필이면 사람 이름을 스자쿠라고 짓다니. 나는 늦었지만, 어린 친구는 최대한 빨리 개명하는 게 좋아. 나중에 크면 사회 나가서 자기소개 할 때 부끄러우니까.”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해.”

 

스자쿠라고 불린 검은 옷의 소년이, 아마도 같은 동명이인의 스자쿠라는 어른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크흑, 하는 소리와 함께 스자쿠(어른)가 구르는 모습에 를르슈는 제가 다 아팠다.

 

“두 사람 모두, 다시 한 번 자기소개를 해보도록.”

“……어?”

“……응?”

 

‘폐하’의 말 앞에서, 스자쿠(어른)와 를르슈는 어정쩡한 소리를 냈다. 스자쿠(소년)의 미간이 한 번 찡그려지면서, ‘폐하’가 들고 있었던 총과 똑같은 총이 들이밀어졌다. 아니, 요즘 애들 왜 이렇게 난폭해? 를르슈는 황당한 숨을 삼키면서 눈을 굴렸다. 평소 잘 돌아가던 머리가 이런 난폭하고 폭력적인 상황에 놓이니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그런 를르슈를 힐끔 보던 스자쿠(어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쿠루루기 스자쿠… 서른 살이고, 스메라기 화학에서 일하고 있어. 직업은 연구원. 어, 음… 음, 아직 결혼은 안 했고? 또, 어… 개명 신청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이름이 없어서 그냥 살고 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철학원이라도 다녀서 이름을 받아둘 걸 그랬나 생각이 드네. 음, 뭐, 또 무슨 이야길 할까? 아, 근데 여기 무슨… 촬영장인 건가? 나 서프라이즈 쇼 같은 데 나온 건가? 우와, 그러면 방금 전에 너한테 맞은 거 전국에 다 방송된 거야?! 창피해라….”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것은 ‘폐하’뿐만이 아닐 것이다. 를르슈도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게 자기소개냐고!’라고 딴지를 걸고 싶어졌지만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보다 주름이 깊어진 ‘폐하’ 소년의 미간에 를르슈는 왜인지 이런 자기소개를 들어주고 있는 그 ‘폐하’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윽고 ‘폐하’와 를르슈가 눈이 마주쳤다.

 

“…그쪽도 자기소개를 해보시지.”

“방금 전에 말했다시피… 이름은 를르슈 람페르지, 올해로 서른 살이고. 직장은 방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브리타니아 컴퍼니에 다니고 있고… 나도 결혼은 안 했고… 어젯밤에 자고 눈을 뜨니까 여기에 있었을 뿐이에요.”

“흐음… 어젯밤에 뭘 했지? 특별하게 한 게 따로 있지 않나?”

“뭐, 딱히… 아, 나나리— 여동생이랑 전화를 하고 잤습니다. 그건 원래 일과라서 상관 없긴 하지만.”

“여동생…?”

“나나리는 결혼한 뒤로 브리타니아에서 살고 있는 중이라서.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이 시차를 생각하면 밤 밖에 안 돼요.”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를르슈는 삐걱대며 굴러가는 머리의 결론으로 자기소개를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