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너머의 날씨는 우중충하기 그지 없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를르슈 람페르지는 덩달아 가라앉는 자신의 기분에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날씨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날이면 날씨가 좋아도 기분은 우울했다.
뒷좌석의 한숨소리가 워낙에 컸던 탓인지, 운전을 하던 제레미아가 기색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를르슈 전하.”
“여기에 전하는 없어, 나는 를르슈 람페르지다.”
“그럼 를르슈 님.”
“……왜?”
“힘드시다면 오늘 일정은 취소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레미아의 말에 를르슈는 다시 한 번 나오려는 한숨을 참았다. 를르슈가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제레미아는 훨씬 전부터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 그 이상의 배경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그도 크게 왈가왈부할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아마도 답답했겠지. 뭐든지 제 뜻대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를르슈가 그 남자 앞에서는 힘도 못 써보는 것에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를르슈 스스로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렇게 정했어.”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
“오늘따라 말이 많군, 제레미아.”
를르슈는 비겁한 수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제레미아의 잔소리를 들어줄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 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는 알 수가 없다. 이 관계의 고삐는 그 남자에게 쥐어져있기 때문이었다. 를르슈는 기어이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최악의 날이 될 것만 같았다.
그 남자, 쿠루루기 스자쿠는 집안에서 맺어준 약혼자였다.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만났음에도, 훨씬 어려보이는 외모며, 앳된 표정이나 활발하게 드러나는 감정 표현 같은 것이 쿠루루기 스자쿠가 과연 일본 총리의 아들인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를르슈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에게 빠져들었다.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라는 타이틀이라는 것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잘 맞았다. 결혼까지도 수월했다. 집안의 이익을 위해서 드물다는 동성 결혼식을 올렸으며, 그것이 매스컴에서 꽤나 시끄럽게 떠들긴 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잘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브리타니아’의 이름을 짊어진 를르슈와 ‘쿠루루기’를 이어받을 스자쿠의 결혼생활은 순탄했다. 스자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를르슈는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천재적이라고 불리는 두뇌가 고작 아이 하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얼마나 그 아이가 미웠으면 그랬을까. 를르슈는 결국 참았던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스자쿠의 얼굴이었다.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다. 그 남자, 스자쿠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혼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 여자가 죽어도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한 날이었다. 그녀는 악다구니를 쓰면서 스자쿠와 를르슈의 집앞에서 시위하듯 외쳐댔고, 그날로 를르슈는 짐을 싸들고 일본에 사는 지인의 집으로 도망쳤다.
—왜 내가 도망쳐야하지, 나는 떳떳하고, 그 자리에서 그 여자를 보란듯이 엿먹여줬어야 했는데.
를르슈는 스자쿠의 아이를 가져 배가 부풀어오른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남의 가정을 보란듯이 파탄낸 주제에 떳떳했던 그 여자…. 를르슈는 낯선 집의 소파에서 몸을 떨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여자를 죽여버리고 싶다.
그렇지만 살인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불법이었다. 를르슈는 합법적인 루트를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이혼이었다.
이혼하겠다는 결심을 스자쿠에게 알리자, 스자쿠는 길길이 화를 내며 를르슈를 다그쳤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나를 못 믿어? 그런 여자는 만나본 적도 없고, 그런 일도 없었는데! 스자쿠의 화내는 말에 를르슈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휴대폰을 내던져 박살냈다.
옆에 있던 C.C.가 휴대폰에서 떨어져나간 유리조각이 튀어버린 바닥을 보면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야, 남의 집에서 무슨 깽판이야, 너네. 를르슈는 엉뚱하게도 C.C.에게 닥치라고 쏘아붙인 다음에 그녀의 침대를 차지하고서 20시간 가까이를 자버렸다.
아무튼, 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한달 가량의 숙려기간이 주어진다.
그 한달이 시작되기 전에 스자쿠의 내연녀는 아이를 낳았다. 를르슈에게 빌러 온 스자쿠 앞에 갓 태어난 아기를 들이밀던 그 여자에게 를르슈는 완전히 질리고 말았다. 이혼하겠다는 결심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혼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말했다시피 스자쿠는 어떻게든 를르슈와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를르슈가 만나주지 않으려고 하자, 이번엔 이혼해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를르슈는 어쩔 수 없이 스자쿠를 만나기로 했으며, 한달의 숙려기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스자쿠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혼을 위한 첫만남에서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친자확인증명서를 내밀었다. 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스자쿠의 아이가 아니라는 증명서였다. 를르슈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걸 어떻게 믿어?”
그러자 스자쿠는 따귀를 때렸다. 스자쿠에게 얻어맞은 를르슈는 바닥에 엎어진 게 아닌 것이 용하다는 생각을 하며, 겨우 굴러가는 머리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더 이상 이 야만인과 할 이야기는 없다, 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그 만남 이후, 사흘 만에 스자쿠에게 전화가 왔다. 뺨은 괜찮냐는 말에 를르슈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괜찮다고 말하면 이혼해줄래?”
‘를르슈, 제발…. 나를 좀 믿어봐.’
를르슈는 자신을 믿어달라는 스자쿠의 말에 할말이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메시지가 왔다. 다음 주 날짜와 함께 어느 장소가 적혀있었다. 난폭하게 안 굴게, 이야기 좀 하자. 스자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메시지였다.
두 번째 만남에서 를르슈는 그 아이를 안고 온 여자와 만났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여자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이 아이는… 사실 쿠루루기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쿠루루기 씨, 아니 스자쿠 씨를 너무 좋아해서.”
“네.”
“어떻게든… 같이 있을 수 없을까, 거짓말을 한 거예요.”
“네.”
“그러니까, 스자쿠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래요.”
“…….”
“그 자식이 그래서 당신만 덜렁 보내놓고서 자기는 무죄다, 이렇게 전하라고 그랬어요?”
를르슈는 울고 있는 여자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를르슈는 냉정하게 말을 맺었다.
“당신이 우리집에 찾아왔고, 내가 우리집에서 나왔을 때… 스자쿠가 나를 바로 쫓아오지 않았다는 시점에서 우린 끝난거예요. 그렇게 전하세요.”
그리고 를르슈는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상황이 스자쿠의 무죄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를르슈가 받은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혼하는 일은 더욱 당연해져만 갔다.
제대로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를르슈에게는 스자쿠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집안과 집안이 인정하는 결혼, 두 사람의 관계, 사회적으로도 굳혀진 입지… 그런 것들이 풀어주지 못하는 불안함이었다.
아마도 ‘아이’ 같은,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행복을 스자쿠에게 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를르슈는 고민하고 있었다. 스자쿠에게는 보다 더 최선의 선택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가 집안을 위해서 를르슈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늘 있었다. 즉 를르슈와의 결혼은 스자쿠의 의지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를르슈를 언제나 좀먹고 있었다.
그런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 이혼은 어쩌면 하나의 돌파구라고 여겨졌다. 누구라도 를르슈의 상황을 이해하고 응원할 것이다. 다만 그 남자, 쿠루루기 스자쿠는 지치지도 않는 건지 포기하지 않고서 를르슈에게 세 번째 만남을 약속했다.
무시하라면 할 수 있지만. 를르슈는 그 날짜가 다가오면, 그 장소로 나가고 있는 자신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자신은 알게 모르게 스자쿠를 깊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그런 씁쓸한 생각을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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