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는, 아주 가끔씩, 줄리어스가 자신과 같은 쌍둥이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물론 그는 거울을 들여다본 것처럼 똑같이 생겨먹은 데다가, 하는 행동거지가 완전히 달라서 좀 낯설 뿐이지, 그 행동의 기저에는 저와 비슷한 사고 회로가 흐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 를르슈는 줄리어스를 의심하고는 했다.
특히 오늘처럼 날을 새고 공부를 한 뒤의 휴일에 쇼핑에 나서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더더욱 그랬다. 이번주 금요일은 예기치 못한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사전에 미리 입수한 정보에 따라서, 평소에 출석점수가 처참한 를르슈와 줄리어스는 그 테스트에서 점수를 따놔야만 보충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테스트라는 것이 단순히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친다는 개념이라면 두 사람 모두 밤을 샐 필요가 없었겠지만, 일명 ‘숙제 검사’라는 것으로… 이제까지 공부해온 노트를 검사하는 것이었기에 를르슈와 줄리어스는 옆집의 스자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노트를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노트를 베껴가면서 서로 노트 한 개 반 분의 필기를 하고 나면 뻐근한 손목이며 목덜미 같은 것에 피로가 쌓이기 마련이었다. 를르슈와 줄리어스는 금요일의 위기를 모면했지만, 토요일은 영락없이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서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를르슈는 금요일 저녁, 목요일날 미리 채워놓은 먹을 거리에 장 볼 걱정이 없다는 이유로 토요일에 (스자쿠와의 데이트는 뒷전으로 하고서!) 늘어지게 잘 예정이었다. 그러나 줄리어스는 다른 듯 했다. 한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를르슈는 파자마 차림이었지만, 줄리어스는 한껏 빼입은 하얀색 퍼 코트를 입고 있었다. 줄리어스는 를르슈의 파자마를 보고서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루는 안 가?”
“어디를? 너 어디 나가?”
“당연하지. 마-망이랑 같이 백화점 가는 날이라구. 뭐 하나라도 건져야지.”
“…너 지난주에 용돈 받지 않았어?”
“당연히 다 썼지.”
“가계부는 쓰냐?”
“진짜 남자는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아.”
그럼 나는 가짜 남자냐?! 를르슈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줄리어스를 뒤로 했다. 너나 가라, 백화점. 를르슈가 냉정하게 말하고 2층의 자기 방으로 다시 올라가면, 줄리어스가 를르슈를 부르며 애원했다.
“루! 같이 가자, 마-망이 예쁜 옷 사준댔어!”
“넌 대체 몇 살이야? 17살이 어머니를 그렇게 부르는 게 어디 있어?”
“파-팡도 귀여워 해주는데 왜?”
“…….”
를르슈와 똑같이 생겼고, 비슷한 사고 회로를 가진 이 쌍둥이 남동생은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부모님을 그렇게 소름 돋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지, 를르슈는 잠시 생각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떠올려봤자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줄리어스 왈, “그러고 싶으니까!” 라고 말하면 끝인 것이다. 그런 점은 정말 마-망… 이 아니라 마리안느를 쏙 빼닮은 것이다
“자러 가는 거야, 진짜?”
“피곤해….”
“어제 쿠루루기도 안 왔잖아? 왜 피곤한 척이야? 섹스도 안 했으면서.”
“섹스를 해야만 피곤한 건 아니잖아, 넌 대체 어디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난 대체 이해가….”
를르슈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다가 눈앞에 서있는 천사를 보고서 입을 닫았다. 줄리어스의 하얀 퍼코트와 세트인지, 같은 디자인의 베이비 핑크의 퍼코트를 걸치고 있는 나나리가 있었다. 나나리는 기대에 찬 눈으로 줄리어스와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줄리어스 오라버니랑 쇼핑가는 날이죠? 저 지난 번에 샀던 옷 입었어요, 어때요?”
“뭐, 나 만큼은 아니지만 귀여워. 베이비 핑크는 정말 나나리 같이 귀여운 타입에게 딱이니까 아쉽지도 않네.”
“후후, 오라버니와 패밀리룩은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에요! 를르슈 오라버니는 어때요, 저?”
천사, 여신, 요정…. 를르슈는 떠오르는 단어들을 무심코 중얼거리려고 했다. 아무리 여동생이 귀엽고 예쁘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칭찬을 해야하는 것이 그녀의 인격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줄리어스랑 비교도 안 되게 아름답구나, 나나리. 네가 만약 결혼하는 날이 온다면 그 남자는 세계를 정복하고 이 세상의 불합리와 맞서 싸워 이긴 다음에 그 정의를 위해 스스로 순교할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만 할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너 같은 천사, 여신, 요정을…….”
“뭐야, 그거. 적당히 쿠루루기 스자쿠 같은 남자한테 시집 보내고 싶은 거야?”
“시끄러워, 줄리어스.”
“너무해, 루.”
“헤헤, 오라버니도 참. 저는 아직까지는 오라버니들이 제일 좋아요. 결혼은 이르다구요.”
“그래, 나나리, 이르지… 나도 모르게 그만.”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그만 현실적인 칭찬을 넘어서서 천사, 여신, 요정 따위를 언급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은 이유가 뭐라고 했더라?
마음만 먹으면 학년 수석을 노릴 수 있는 를르슈의 두뇌가 멍청해지는 희귀한 순간이었다.
“줄리어스 오라버니랑 같이 옷을 고르기로 했거든요.”
를르슈는 줄리어스의 취향을 떠올렸다. 남자 치고는 과감한 노출 패션은 둘째 치고, 여자 옷을 제 옷처럼 맞춰입을 줄 아는 것도, 그것도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천사 여신 요정 나나리를 줄리어스의 취향대로 입히게 되면…!
내 나나리가 더럽혀져버려!! 를르슈는 그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돌아서서 나가려는 줄리어스의 팔목을 붙잡았다. 저와 똑같은 두께의 얇은 팔목이 덥썩 잡히면서, 돌아보는 줄리어스의 한쪽 눈이 싱긋 웃고 있는 것에 를르슈는 그의 계략에 자신이 완전히 말려든 것을 느꼈다.
“나, 나도 같이 가.”
“음? 피곤하시다며.”
“네가 나나리한테 무슨 옷을 입힐지… 불안해서 못 있겠어.”
“그래?”
줄리어스는 장난끼 넘치는 미소를 지으면서 앞서 가는 나나리에게 말했다.
“루가 혼자서 집 보기 외롭다네, 나나리? 같이 데리고 갈까?”
내가 언제!! 를르슈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서 어색하게 굳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람페르지 가의 천사, 여신, 요정 나나리는 그 이야기에 너무나도 기쁘다는 듯이 두 손을 모으며 웃었다.
“당연하죠, 두 분이랑 같이 쇼핑하고 싶어요!”
나나리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동안, 를르슈는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노라고 말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중에, 내려오는 로로가 시끌벅적한 아래를 보면서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뭐야, 다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로로도 올래요? 다 같이 쇼핑하러 가거든요!”
“뭐 사는데?”
“옷이요!"
“안 가. 필요한 거도 없고.”
나나리와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로로는 람페르지 가의 유일한 천사에 대해서 은근한 면역이 있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거절당한 나나리가 한숨을 내쉬면서 씁쓸하게 웃는 모습에는 로로 또한 이겨낼 수 없는 것이었다.
“나, 나는 모, 목도리 잃어버렸으니까 사야 되거든?”
“그럼 로로는 목도리 사러가요!”
“후… 그래. 옷 갈아입고 나갈 테니까.”
“를르슈 오라버니랑 같이 내려오세요!”
“두 사람 다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줄리어스의 말에 로로와 를르슈는 잠시 참을 인을 생겼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잠시 잠깐 참기로 했기 때문에 겨우 위기를 넘겼다.
“나는 나나리 옷만 사준다고 한 거 같은데 왜 아들놈들이 다 따라나오는 거지?”
“미녀들끼리만 다니면 위험하잖아, 마-망.”
“어머, 쥬리는 합격.”
“어머니와 줄리어스가 나나리에게 이상한 옷을 고를…….”
“를르슈는 여기서 내릴까?”
를르슈는 도로 한복판에서 차 문의 락을 풀어버리는 마리안느의 살벌한 모습에 크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머니랑 나나리 취향은 제가 꿰고 있잖아요 ^^(ㅅㅂ)”
“아슬아슬하네, 합격. 로로는?”
“사실 여기서 보디가드 할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아요?”
“합격.”
그리하여, 조금 길었지만, 마리안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서 그들은 쇼핑을 하러 갔다.
쇼핑 목록
를르슈의 검은 비키니
줄리어스의 시스루 란제리 (어째서인지 몰라도 레드/블랙으로 두 개)
로로의 목도리
로로의 슬리퍼 (나나리와 세트)
나나리의 슬리퍼 (로로와 세트)
나나리의 겨울 원피스
나나리의 틴트
마리안느의 스키복
마리안느의 비키니 (그녀는 곧 남쪽 나라로 출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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