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메시아를 세 번 부정한 성인마냥 세 번 부정까지 했다. 그렇지만 모니터 속의 글자는 변함이 없었다. 를르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쥔 다음에 내용을 전부 드래그하고 나서 자신의 애인에게 그 전문을 붙여넣기하고 보내버렸다.
[이게 뭐야?]
이게 뭐겠냐고, 이 멍청한 자식! 를르슈는 애인을 향해 욕을 퍼붓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키보드를 쳤다. 두다다다다다다다… 탁!
[스자루루 온리전이 열린다.]
스스로의 문장으로 적고 나니 그 현실감에 갑자기 감동이 밀려와서 눈물이 날 뻔 했다. 아직 울 수는 없다. 행사장에 가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우는 건 이르다. 이제까지 힘내준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나서, 다 같이 온리전 2회차를 기원하는 종이학 접기 이벤트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이상…! 그래, 그때까지 울지 않는 거야, 를르슈 람페르지.
[축하해, 를르슈 ^0^]
[그런데 가보고 싶어 했잖아.]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간, 열심히 일하고 있을 모니터 너머의 연인은 를르슈의 산전수전을 다 알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간단한 설명을 하자면, 를르슈는 인기 없는 선O이즈 로봇 애니메이션 <코드G어스>의 ‘스자쿠’와 ‘를르슈’라는 캐릭터를 엮어먹는 것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인기가 없는 애니메이션인데다가, ‘스자쿠’와 ‘를르슈’는 각자 공식적인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캐릭터들로써, 아무래도 음지에서 암암리에 덕질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었다.
마이너 장르인 거로도 모자라서, 공식 눈치 보면서 물밑에서 파야한다는 서러운 세월이 어연 12년이었다. 를르슈 나이 24세, 인생의 절반을 스자루루 했건만, 갖고 있는 스자루루 동인지는 매물을 뒤지고 뒤져서 겨우 산 것이 10권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세월을 딛고 일어서서, 이제 온리전이 열리다니…! 를르슈는 뜨거워지려는 눈시울에 부채질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직 울기는 이르다. 이르다고!
[같이 가줄 거지?]
를르슈는 망설임 없이 그 메시지를 보냈다. 스자쿠라면 기꺼이 가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여기서부터 간단한 설명 2. 스자쿠와 를르슈는 대학에서 만났다. 를르슈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풍화된 스자쿠의 가방에 달린 키링을 알아보았다. 달고 다니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일까? 를르슈는 새내기 술자리에서 만난 스자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그 키링, 뭐야?
‘아, 이거 코드G어스에 나오는 스자쿠라는 캐릭터인데. 에헤헤, 나랑 이름이 똑같아서 좋아하고 있어.’
스자쿠는 그런 말을 하면서 은근슬쩍 웃는 미소가 사기였다. 옆에 있는 이름 모르는 동기 하나가 꺄악하고 소리를 질렀고, 를르슈는 속으로 ‘우아아악!!!!’하고 소리를지르며 그에게 반해버렸다.
그리고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했으며, 순진하면서도 쉬운 남자 쿠루루기 스자쿠가 를르슈 람페르지와 개강 일주일만에 CC가 되어 졸업할 무렵에는 동거까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그가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를르슈가 ‘스자루루’를 하는 동인남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스자루루가 뭐야? 언젠가 스자쿠에게 를르슈가 ‘그 키링, 뭐야?’하고 물어봤던 것처럼, 스자쿠는 순진하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를르슈는 ‘때가 왔도다’의 자세로 진지하게 말했다.
스자쿠와를르슈는소꿉친구지만사실재회하고나서부터는친구라고하기에는지나친유대감이심해져서그게집착과애증으로이어지고이윽고서로가서로의적이됨으로써나쁜의미로든좋은의미로든서로에게유일무이한존재가되었는데마지막에스자쿠가를르슈를죽이는과정에서둘은상호간에완벽한이해자가되어이제돌이킬수없는운명의소용돌이에서서로를선택하게된거야…. 그게 스자루루야.
그리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아득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를르슈 그거 되게 좋아하는구나? 근데 나 교수님이 부르셔서….
아무튼 그날의 서러움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같이 가자’는 말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었다. 네가 양심이 있다면 같이 가야지, 그렇지? 하지만 스자쿠는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불안함에 모니터를 노려보던 를르슈는 찔끔찔끔 오는 답장에 눈을 부릅 떴다.
[내가 가도]
[되려나]
[왜냐면]
[이거]
[여자들만]
[참여 가능]
[하다는데]
[ㅎ]
그 말에 24세 를르슈는 더는 참지 않고 울었다. 살면서 이렇게 분한 적은 없었다. 스자쿠랑 게이커플이 되었다는 생각에도 한 번도 든 적이 없던 남성성에 대한 혐오가 이렇게 강렬한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ㅎㅌㅊ 남자들이나 할법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남자들만 차별하죠?! 하지만 를르슈는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저질러온 이제까지의 역사를….
[근데 를르슈는 갈 수 있겠다]
[를르슈는 내 여자잖아]
이 ★★놈은 뭐라는 거야.
를르슈는 죽은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보이지 않았던 문장 한 줄이 보였다. <여성 한정 이벤트> 그것은 를르슈가 다시 태어나야 얻을 수 있는 성이자, 최첨단 의료 기술을 통해서 급하게 갖출 수는 있지만 스자루루를 위해서 성을 갈 수는 없었다. 성을 간다고 해도 그 회복기간에 온리전이 열리고 말 것이다.
를르슈는 주변에 있는 여자들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나나리를 스자루루 낙원에 보낼 수는 없었다. 스자루루의 난잡한 주지육림 속에서 꽃같은 나나리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막되먹은 C.C.는 어떠려나? 아니, 그 여자에게 빚을 져서 좋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카렌? 셜리? 미레이? 니나? 세실? 유페미아? 코넬리아 누님?
아는 여자는 많았지만 쉽게 부탁할 상대는 없었다. 대체로 다들 스자루루에 미쳐있는 를르슈의 상태에 대해서 아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악역황제였나, 내 인생 왜 이렇게 기구해?! 를르슈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컴퓨터 본체를 느릿한 박자로 탕탕 두드렸다. 열받으면 욕조에서 주먹이나 갈기는 게 고작인 를르슈의 유일한 화풀이 방법이었다.
[대행이라도 구해야겠어]
냉정을 되찾은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다음 계획을 말했다.
[통판을 노리는 건?]
스자쿠는 제법 날카로웠다.
[현장 이벤트에서 주는 특전을 갖고 싶다고!!]
를르슈는 포기하지 않았다.
[를르슈 그쪽 사람들이랑 친하지 않아?]
[특전 정도는 챙겨줄 거 같은데]
그렇다. 를르슈는 이미 커넥션을 다 뚫어놓았다. 그의 평소에도 넘쳐나는 여자력은 트위O 같은 SNS에서 쉽게 먹혀들었다. 그러니까 통판으로 특전을 받는 것 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를르슈가 현장 이벤트를 고집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평생에 한 번 열리는 이벤트야]
[영혼이라도 보내고 싶어]
그는 스자루루 오타쿠였기 때문이었다.
를르슈의 절절한 메시지에 스자쿠는 잠시 아무말도 없었다. 그 사이에 를르슈는 어떻게 사람을 구할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무해해보이면서도 평범한, 그러면서도 인상에 깊게 남지 않고 상냥하게 스자루루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여장은 어때?]
[목소리는 감기 걸려서]
[안 나온다는 설정]
이 ★★놈은 뭐라는 거야 2222
를르슈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자신에게 초를 치는 스자쿠에게 열이 받아 컴퓨터를 꺼버렸다. 어두워진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얄쌍한 선을 그린 입술은 뒤틀려 있었고, 미간은 터질 것처럼 찌푸려진 채였다.
이런 얼굴에 무슨 여장이야. 스자루루를 뭐로 아는 거야?!
를르슈는 거친 발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나리가 자리를 비웠기에 망정이었다.) 열을 식힐 겸 세수를 하고 나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어머니를 닮아 예쁘다 소리를 듣는 것이 일상인 이 얼굴은 예쁘다 하더라도 남자의 얼굴이다. 불룩 튀어나온 목젖이나 모델이 아닌 이상 훤칠하게 큰 남자 키 같은 것은… 여장을 하면…….
여장을 하면.
어쩌면.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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