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나이젤의 부탁은 사실상 거의 명령이라는 것을, 똑똑한 를르슈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슈나이젤 역시 를르슈의 의견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 자신이 정해놓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를르슈는 손에서 굴리고 있던 볼펜 끝으로 적어놓은 단어를 몇번이고 동그라미를 쳤다.
일본, 이라는 단어는 동그라미 안에서 거의 지워질 지경이었다. 일본 도쿄랑 브리타니아 팬드래건이랑 시차가 얼마나 나더라? 그리고 슈나이젤이 원하는 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를르슈는 많은 고민과 계산 끝에 볼펜을 내려두고서, 휴대폰을 고쳐쥐었다.
‘듣고 있니, 를르슈?’
“네, 형님. 잘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일이 잘 된다고 하면 그건 형님보다 저한테만 이득이 될 것 같은데요.”
‘사랑하는 남동생을 위해서 공을 돌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
“…저는 그런 말에 속지 않아요. 원하시는 게 있지 않나요?”
전화 너머의 슈나이젤은 한숨을 쉬었다. 너는 언제까지나 사람을 믿지 못하는구나, 를르슈. 자신을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를르슈는 울컥 열이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슈나이젤에게 화를 내봤자 자신이 어린애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말고는 남는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을 잘 해내면 를르슈도 스스로의 커넥션을 만들 수 있는 기회잖아. 지긋지긋한 내 부탁은 듣지 않아도 된다고?’
“지긋지긋하다고 한 적 없어요. 커넥션 정도는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고….”
‘너의 그런 자신감 넘치는 점이 마음에 들어.’
“들을수록 꺼림칙하네요. 형님은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안 하시잖아요.”
‘그건 너겠지. 나나리가 걱정되어서 팬드래건을 떠나지 않으려고 지금 나랑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면 더더욱.’
를르슈는 정곡을 찔렸다. 그런 그를 알아차린 슈나이젤이 여유롭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본은 너무 멀지. 하지만 서로 독립할 시기가 온 거야. 나나리도 이제 스무 살이고, 대학도 다니고 있잖아. 너도… 그래, 원래대로라면 너 역시 약혼식 정도는 진작에 마쳤을 시기지.’
“옛날 기준에 맞추려고 굳이 번거로운 일을 하신다는 건가요? 필요 없습니다.”
‘를르슈. 착각하지 마렴. 이건 내 부탁이야.’
그럼, 사흘 후에 일본으로 가는 걸로 알겠어. 슈나이젤은 그렇게 말해놓았다. 그 이후 카논에게서 메일이 왔다. 비행기 편도 항공권과 머물 호텔에 대한 자료였다. 빌어먹을 슈나이젤. 를르슈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저녁에 대학 수업을 마친 나나리가 돌아오면서, 를르슈는 갑작스러운 일본행을 알렸다. 나나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슈나이젤 오라버니다워요’ 라는 말을 했고, 를르슈에게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를르슈 역시 불안한 내색 없이 평소대로 잔소리를 했다. 숙제는 갔다와서 바로 하고, 빨래는 제때 잘 분류해서 세탁할 것이고, 거실 청소는 바라지도 않으니 자기 방 정도는 늘 깔끔하게…— 를르슈의 잔소리를 듣고 있던 나나리는 흘려듣는 시늉을 하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래서, 언제 돌아오세요?”
나나리가 태어난 이래로 늘 나나리의 질문에는 확신에 찬 정답만을 알려준 를르슈가 오랜만에 머뭇거린 순간이었다.
“글쎄, 일이 좀 복잡한거라 짧으면 일주일, 길면… 뭐, 한 달 정도일까.”
“한 달씩이나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 이런 번거로운 일이니까 슈나이젤 형님께서도 직접 나를 보내시는 거겠지.”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나나리는 심란하다는 표정으로 를르슈를 보다가, 이윽고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얼마든지 기다려요. 돌아와 주시기만 하면 되니까요, 오라버니.”
여동생의 사랑스러운 포옹에 를르슈는 한참 찡그리고 있던 미간에 힘을 풀며 그녀를 부드럽게 마주안았다. 그럼, 돌아오고 말고.
그리고 사흘 후, 를르슈는 일본으로 떠났다. 배웅은 슈나이젤이 직접 나왔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슈나이젤 때문에 를르슈는 대놓고 표정을 굳혔다. 뭡니까? 를르슈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슈나이젤은 웃으면서 27인치 캐리어 하나를 내밀었다.
“를르슈한테 요즘 옷 선물을 안 해준 거 같아서.”
“오늘 챙긴 옷들도 새 옷인데요.”
“그건 작년 거잖아. 이건 올해 S/S로 나온 거니까 예쁘게 입으렴.”
“형님이 고르셨나요?”
“카논의 안목이야.”
“더 싫어요.”
그 사이에 를르슈가 가지고 온 캐리어를 낚아 챈 카논은 소리 없이 웃어보일 뿐이었다. 무슨 수작이에요, 이게! 를르슈가 약간 당황한 듯 목소리를 크게 내자, 슈나이젤은 동요 하나 없이 말할 뿐이었다.
“넌 항상 최고여야 해, 를르슈. 일본에 도착하는 순간 너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될 테니까.”
“…압니다.”
“그러기 위해서 보여지는 것은 순간마저도… 그런 거야, 알겠지?”
그 말을 들은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슈나이젤이 내미는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로 향했다. 슈나이젤은 뒤에서 부르지도 않았고, 를르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를르슈가 브리타니아를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 브리타니아 근처를 오가는 것이 전부였고, 일본 같이 먼 나라는 드문 경우였다. 아마 이제까지 어린 나나리를 홀로 두는 것을 배려해서 슈나이젤 나름대로 봐준 것일 수도 있다.
‘서로 독립할 시기가 왔다고? 웃기지 마. 그럼 이 형제놀음부터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니야?’
를르슈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어머니를 같은 친족의 힘에 의해 잃고 나서, 갈 곳을 잃은 를르슈 남매에게 슈나이젤은 ‘형제’로써의 의리를 다하겠다며 그들을 거두었다. 거둔다는 것은 말 뿐이었고, 사실 자신의 장기판 말로 쓸 사람을 구한 것이었다. 를르슈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슈나이젤이 벌리고 다니는 사업들의 귀찮고 손가는 일들을 도맡아했다.
이번 일본행도 그런 일들 중에 하나였다. 슈나이젤은 나이트메어프레임KMF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KMF에 쓰이는 사쿠라다이트가 많이 채굴되는 일본에 시선을 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를르슈에게 ‘부탁’했다. 사쿠라다이트의 채굴권을 가져오라고. 그런 막무가내의 억지를 쓰는 슈나이젤의 말을 들어주는 이유는, 슈나이젤과 를르슈가 반쪽짜리이긴 해도 형제이기 때문이었다.
슈나이젤이 를르슈와 나나리가 이제껏 사고 하나 없이 클 수 있게 뒤를 봐준 것도 사실이며, 를르슈는 대외적이든 아니든, 그것에 대한 의리를 다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그의 명령에 불복한다면 대가는 상당할 것이며, 나나리라는 인질이 엘 브리타니아 가문에 잡혀있는 이상 를르슈는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하는 순간,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된다…?’
비 브리타니아.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의 죽음 이후로 몰락한 그 이름을 떠올리며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버려진 이름은 를르슈 남매에게 언제나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었다. 어머니가 버렸던 람페르지, 어머니를 버린 비 브리타니아.
언제쯤이면 이름의 힘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될까?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눈앞의 남자는 를르슈의 자기소개에 상당히 아니꼽다는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쿠루루기 겐부, 일본의 거물 정치인. 스메라기 그룹과도 긴밀한 관계. 현재 사쿠라다이트 채굴권 관련으로는 실질적인 소유자나 다름 없는 이 남자를 어떻게든 구워삶는 것이 를르슈의 목적이었다.
“비 브리타니아? 처음 듣는 성이군요.”
아니나 다를까 쿠루루기 겐부는 를르슈의 성을 짚고 넘어갔다.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가 직접 올 줄 알았더니 실망한 눈치였다.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꾸했다.
“슈나이젤 형님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쿠루루기 씨. 말씀 편하게 하세요.”
슈나이젤의 이름이 바로 나오자, 겐부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한낱 애송이로 보여도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밉보일 이유도 없었다. 를르슈가 내민 손에 겐부가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를르슈 군은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물 네 살입니다.”
“내 아들이랑 동갑이군.”
“아드님이 계신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거기까지 소문이 났나? 우리집 망나니 놈.”
망나니라고 하기보다는 괴짜라는 이야길 들었을 뿐이다. 를르슈는 어색하게 웃었다.
듣기로는 그의 하나 뿐인 외아들, 쿠루루기 스자쿠는 마약이나 술, 여자 문제로 시끄러운 망나니 한량은 아니었다.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중고등학교 내내 매년 다른 종목으로 전국 체전에서 우승할 정도로 엄청난 운동신경을 가졌으며, 머리 또한 나쁘지 않아서 스포츠 특별전형이 아니어도 자기 실력으로 일본 유수의 국립대 정도는 너끈하게 입학했다고.
그러나 그가 괴짜인 이유는… 그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같은 이야기는 찾아보진 못했지만.
“쿠루루기 씨께서 걱정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를르슈의 말에 겐부는 인상을 썼다. 그러나 이 화제는 여기까지인 듯 싶었다.
“일본 관광 잘하다 가시게나, 를르슈 군. 자세한 이야기는 자네 형과 할 테니.”
아무래도 슈나이젤이 아닌 를르슈의 존재가 겐부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예상범위 안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티를 낼 줄은 몰랐다. 심기가 불편하더라도 겐부는 슈나이젤이 아닌 를르슈와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붙잡고 애원할 때가 아니다.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켓 주머니에서 두 번 접은 메모지를 건넸다.
“제가 머물고 있는 호텔입니다. 형님과 이야기가 잘 되지 않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형님은 제게 약하시거든요.”
겐부는 사람을 대해본 연륜이 있었다. 를르슈를 싫어하면서도, 그는 를르슈가 내민 메모지를 거절하지 않았다. 를르슈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럼 이만, 하고 일행들을 이끌고 사라지는 겐부의 뒷모습을 본 를르슈는 한참 뒤에야 힘껏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빌어먹을!’
쿠루루기 겐부의 공략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별개로, 이렇게까지 꽉 막혀 있었을 줄은 몰랐다. 를르슈는 호텔로 향하는 택시를 잡으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설게해야하나…. 를르슈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슈나이젤에게 전화를 걸었다. 슈나이젤은 신경질적으로 저를 찾는 를르슈의 전화를 받자마자 호쾌하게 웃었다.
‘그래, 안 그래도 쿠루루기 겐부에게 차였다는 이야길 들었어, 를르슈.’
“기분 나쁜 표현 쓰지 마세요, 형님. 그런 일은 없었어요.”
‘뭐, 그렇다고 쿠루루기가 내 쪽으로 바로 연락한 건 아니야.’
“뭐라고요?”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 쿠루루기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어. 네가 온 일도, 내가 널 보낸 일도, 다 없던 일로 하는 거지. 브리타니아가 사쿠라다이트를 노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관심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드러내는 거야.’
“알아요, 안다고요.”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이다. 나름의 승부수를 던지고 온 일본행이다. 그런데도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를르슈는 쿠루루기 겐부에 대한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쿠루루기 겐부, 지나치게 깔끔하군요.”
‘아내를 잃은 뒤로 계속해서 정치에 전념 중인 보기 드문 사람이지.’
“스캔들도 전혀 없고.”
‘그래. 있다면, 아들이 좀 문제라는 건가? 하지만 가업 물려받기 싫다고 집나가는 자식 이야기는 어딜가나 흔하지.’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쿠루루기 겐부는 인상을 썼다. 를르슈가 말을 얹자마자 이야기는 끝이 났다.
를르슈는 겐부의 아들에 대한 서류 한 장을 읽었다. 브리타니아 정보원에 의해서 간략하게 조사된 그 내용은 이미 알고 있던 바였다.
이 청년은 왜 갑자기 잘 짜여진 선로 위를 벗어난 것일까. 를르슈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경쟁자도 없이, 준비된 길을 이어 달리기만 하면 되는 인생에서. 주어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그런 배부른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겠지?
“쿠루루기 스자쿠, 이 남자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야겠어요.”
‘우리도 그건 알아봤지. 그게 전부야.’
“이게 전부라고 하기엔, 이 남자는 가진 게 너무 많았어요. 뭔가 더 있을 거예요.”
‘…없다면?’
“있게 만들죠.”
를르슈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슈나이젤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비겁하고 너다운 방식이구나, 를르슈.’
“그런가요?”
‘쿠루루기 겐부를 잡지 못해서 그의 자식을 잡다니.’
그 아무리 청렴결백한 정치인이라고 하더라도, 쿠루루기 겐부 역시 한낱 아버지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아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 겐부는 움직이게 될 것이다. 를르슈는 자신이 조금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그렇지 않을 경우의 계획까지 탄탄하게 세워두었다.
전화를 마친 슈나이젤이 어떤 주소를 보내주었다.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농촌의 시골마을이었고. 그 중 띄엄띄엄 떨어진 집들 사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집이었다. 를르슈는 직감적으로 이 곳이 쿠루루기 스자쿠가 사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날 아침, 를르슈는 그 시골마을로 달려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를르슈가 도착했을 때에는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운 좋게도 막차 버스를 탄 를르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을마저 끝물인 그 시간에 를르슈는 캐리어를 끌고서 헉헉거리고 있었다. 아스팔트도 아닌 흙길, 그것도 제법 되는 경사를 캐리어와 함께 걷고 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의 집은 마을 안에서도 가장 깊은, 산 근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참을 더 가야만 했다. 를르슈는 잠시 걷던 걸음을 멈추고서 가야할 곳을 바라보았다. 비닐하우스가 바로 옆에 있고, 이층짜리 낡은 목조저택이 보였다. 불이 켜지지 않은 것을 보면 주인은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변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를르슈의 캐리어를 끄는 소리가 거칠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로 가면 아무것도 안 나와요.”
그때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꽤 높고 명랑해서, 를르슈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 하나가 손을 들어 를르슈가 가는 방향을 가리키더니, 다시 말했다.
“이쪽으로 가는 거죠?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요.”
“…저 집에 사람 안 살아요?”
그렇다면 낭패다. 를르슈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 남자는 를르슈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집에 가는 거예요?”
“네.”
“왜요?”
“집 주인한테 볼 일이 있어요.”
“아하.”
명랑한 소리를 한 번 더 내더니, 남자는 흙투성이 장갑을 벗어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넣고는 를르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악수를 청하는 남자에게 얼떨결에 손을 내민 를르슈는 손이 붙들리고 말았다.
“제가 저 집 주인이에요. 손님이 올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일이 늦게 끝나서. 많이 헤맸어요?”
“아… 집 주인이라고…요?”
를르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남자는 다 져가는 노을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녹색 눈으로 를르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이 민망해서, 를르슈는 허리를 세우고 남자와의 악수를 고쳐했다. 꽉 붙들어매는 남자의 손은 딱딱하고 거칠었다.
이게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이렇게 멍청하게 생긴 시골뜨기가… 쿠루루기 스자쿠?
를르슈는 혼란스러웠지만 우선 자기소개를 했다. 제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쿠루루기 스자쿠는 사람 좋게 대해줄 인상이긴 했지만, 선취점을 따놓을 수 있을 때 따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르, 를르슈 람페르지입니다.”
“람페르지 씨군요. 브리타니아에서 왔어요? 그쪽 느낌인데.”
“네.”
“멀리서 오셨네요.”
쿠루루기 스자쿠는 해맑게 웃으면서 를르슈의 캐리어를 가리켰다.
“들어드릴게요. 저희 집에 가는 거 맞죠?”
“아, 무거우니까 제가 들겠습니다.”
“그럴수록 제가 들어야죠. 람페르지 씨, 지금 힘드시잖아요. 헤매느라 고생하셨고.”
헤매지도 않았고 그저 경사길에 지쳤을 뿐이다. 그렇지만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캐리어를 내밀었다. 스자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대로 마구 떠들면서 걸었다.
대부분 농사일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에 온지 2년째였고, 작년 첫해는 진짜 구르면서 배우느라 농사도 거의 망했지만, 올해는 배운 것이 조금 있었는지 시장에 내놓을 상품들도 있고 그래서 뿌듯하다는 이야기였다. 어린애가 식물관찰일기를 써도 지금보다 문장력이 있을 법한 표현들을 늘어놓는 스자쿠의 이야기에 를르슈는 대충 맞장구를 치면서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죽이려고 애를 썼다.
산에 가까워질수록 경사는 가파른데, 스자쿠는 헐떡거림 하나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를르슈는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무릎에 손을 얹고 파들거리는 팔다리에 겨우 힘을 주고 있었다.
“들어가실래요?”
“그, 그래도 되나요?”
“뭐, 여기는 호텔도 없고, 그렇다고 외지 사람을 마음대로 재워줄 정도로 인심이 좋지도 않아서요.”
“…….”
“저는 인심이 좋으니까, 특별히 재워드릴게요. 람페르지 씨.”
“감사합니다….”
그렇게 를르슈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집에, 아주 수월하게 잠입할 수 있었다.
잠입이라고 하기보다는, 초대를 받았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를르슈를 환영하는 스자쿠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마치 오랫동안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그의 집은 낡았지만 잘 손질되어 있었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감상을 솔직하게 전달하면, 스자쿠는 웃으면서 ‘어지를 새가 없어요’ 라고 말하면서 뿌듯한 얼굴을 했다. 마치 칭찬을 받을 줄 몰랐던 아이처럼 말이다.
이게 정말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를르슈는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를르슈가 어딘가 심란한 기분에 빠져가기 시작했을 때, 를르슈에게 두 번째로 큰 방으로 소개한 방을 내어준 스자쿠는 식사를 권유했다.
“람페르지 씨는 식사하셨나요? 괜찮다면 같이 드시죠.”
“…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불은 밥 먹고 꺼내줄게요! 스자쿠는 부엌으로 가면서 그렇게 외쳤다. 꽤 가까이서 들려서, 를르슈는 빼꼼히 문밖을 내다보았다. 바로 옆이 부엌이었고, 스자쿠는 익숙한 듯이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능숙한 동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여기는 정말 그의 집이 맞다는 걸 증명했다.
‘요리 정도는 나도 하니까.’
하지만 저 남자는 쿠루루기 스자쿠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뭐라고 해야할까. ‘스자쿠’라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쿠루루기’라는 이름을 등에 업은 남자라고 하기에는 맥이 빠지는 상대였다.
‘당신 아버지를 설득해서 브리타니아에 당신 나라 주요 국가 산업을 말아먹어주세요!’라고 말하면 ‘에, 그게 뭔데요?’라고 물어보고, 번지르르한 말 몇마디를 나누고 나면 ‘네, 그렇게 하죠!’라고 선뜻 대답할 것 같다고 해야할까.
머리에 든 게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얕보는 걸까. 아니, 그냥 지나치게 너무 해맑다고 하면…? 를르슈는 자기랑 동갑인 남자에게 ‘해맑다’는 표현을 쓰는 자신에 대해서 잠시 소름이 돋았다.
“람페르지 씨! 식사하세요!”
“아아, 네.”
스자쿠는 작은 소반 두 개에 나눠서 두 사람 몫의 식사를 가져왔다. 완전한 일식이었다. 요리는 맛있어 보이고, 배는 고팠다. 를르슈는 자세를 고쳐앉아 잘먹겠다는 인사를 했다. 스자쿠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포크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브리타니아에서 젓가락질 챔피언이었거든요.”
“다행이네요.”
“이런 때를 위해서죠.”
를르슈의 대답에 스자쿠는 재미있다며 웃었다. 를르슈는 이 남자의 웃는 수준에 대해서 잠시 회의감이 들었다. 정말 쿠루루기 스자쿠가 맞긴 한걸까.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를르슈는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를 잠시 잊어갈 때였다.
“그래서, 저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쿠루루기 스자쿠는 갑자기 본론으로 들어갔다. 를르슈는 젓가락질을 멈추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는 걸 보면 아버지가 보낸 사람은 아닌 거 같고.”
그는 를르슈를 훑어보며 그렇게 말했다. 시선이 위아래로 훑어질 때, 를르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적당한 대답을…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죠?”
“네, 쿠루루기 스자쿠 씨.”
를르슈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쿠루루기 스자쿠는 여유롭게 웃었다.
“잘 찾아왔네요. 보통 여기까지 못 오는데.”
“전 보통이 아니니까요.”
“그래보여요, 람페르지 씨. 그러니까 저를 찾아온 이유도 보통 평범한 일은 아니겠죠?”
“…….”
이게 진짜 쿠루루기 스자쿠. 방금 전은 눈속임에 불과했을 뿐이다.
“여기에 왜 왔어요?”
그리고 그는 를르슈의 속셈에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를르슈는 37가지의 시뮬레이션 중에서 가장 유효할 것 같은 대답을 골랐다.
“맞춰보세요.”
쿠루루기 스자쿠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아무도 오랫동안 맞추지 못한 정답을 들은 사람처럼 놀랐다. 를르슈는 힘있게 입술을 당겨 웃으며 말했다.
“저랑 계약 하나 하시죠, 쿠루루기 스자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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