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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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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gerous Darling 下

DOZI 2023.04.06 17:01 read.124 /

 

‘근데 뭐가 잘 되었다는 거지?’

 

점심을 먹고 나서 스자쿠가 설거지를 했고, 를르슈는 그와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스자쿠는 오늘의 할 일을 마저 하러 가겠다면서 다시 나갔고, 혼자 남은 를르슈는 텅 비어버린 집안을 지켜야만 했다.

뭘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 모르는 기분이 마냥 막막하지는 않았다. 전화는 전파가 잘 잡혔고, 스자쿠의 집에는 공유기가 있었기에 인터넷도 원활하게 연결되었다. 한마디로, 수작질 하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 다 갖춰졌기 때문에 를르슈는 할 일을 만드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어제 무리한 몸으로 짐을 늘어놓고 판을 까는 것은 꽤 고역이었다. 어젯밤의 스자쿠가 차렸던 것처럼 일본식의 저녁밥을 다 준비하고 나서, 를르슈는 나나리와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쾌활한 나나리는 를르슈의 목소리를 들으며 반가워했다. 잘 지내시나요, 오라버니? 그럼, 나나리는 잘 지내? 남매가 애틋한 전화통화를 마칠 무렵에 스자쿠가 들어왔다. 스자쿠의 발소리가 들리자, 를르슈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나리에게 이제 전화를 끊겠다고 말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내일도 이야기하면 되니까. 얼마 안가 스자쿠가 활기차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어!”

“아아, 다녀왔어?”

“응, 방금 전에 전화하고 있지 않았어? 일부러 끊을 필욘 없는데.”

“아냐, 어차피 저쪽도 끊어야 할 타이밍이었고….”

“여동생?”

“맞아.”

 

스자쿠는 더 말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저녁은? 를르슈가 묻는 말에 스자쿠는 ‘씻고 먹을게!’라고 말했다. 살짝 식어가는 저녁을 다시 데우고 옮기는 사이에 스자쿠의 샤워는 끝이 났다. 두 사람은 다시 밥상 앞에 앉았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요리 실력에 감탄하며 또 맛있게 음식들을 비워나갔다. 를르슈는 잘 먹는 스자쿠의 모습에 또 다시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먹을 것으로 쿠루루기 스자쿠를 회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족감이 높았다. 자칫하면 그 목표를 잊을 정도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내일의 오므라이스를 잊지 않고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스자쿠가 아침을 차리고, 를르슈가 점심과 저녁을 차리는 날들이 반복이 되었다. 처음에는 를르슈가 두 끼니나 차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던 스자쿠지만, 돈도 안 받고 머무는데 밥이라도 차리게 해달라는 를르슈의 말에 항복하고 말았다.

첫날을 빼고서, 두 사람은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얼굴을 보며 같이 밥을 먹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1.5배 정도를 먹었고, 매일 같이 땀에 젖은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해맑아서, 를르슈는 걱정이 되다가도 ‘좋은 게 좋은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를르슈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집안에서 들어온 소일거리를 처리하면서, 요리를 하거나, 스자쿠에게 어쩌다가 배운 잡초 제거 방법으로 집 근처에 무성한 잡초들을 뽑아대거나…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느긋하게 보내고 있었다. 마치 긴 휴가를, 스자쿠와 함께 보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가롭게 보내고 있는 이러한 일상 속에서 유일한 불만은 이제 스자쿠의 비닐 하우스에서 나오는 채소들로 하는 요리들의 레파토리가 다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자쿠는 불만 없이 먹고 있지만, 를르슈는 일주일에 못해도 두 번씩 겹치는 레파토리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할 줄 아는 요리가 이게 전부인가? 를르슈는 잡초를 뽑으면서 ‘이거 먹을 수 있는 건가’ 같은 생각을 했다. 먹을 수 있으면 이거로 다른 맛이 나는 요리를… 여러모로 지옥 가는 맛이 나겠지. 

 

“스자쿠는 이런 밥… 안 지겨워?”

“이런 밥? 맛있는데?”

“아니, 계속 반복되잖아. 지난주에도 토마토 계란 볶음 먹었는데.”

“그건… 지난주니까?”

“…….”

“아, 를르슈는 지겹구나!”

 

그래, 알아줘서 고맙다. 를르슈는 속으로 그런 말을 하며 토마토 계란 볶음을 먹었다. 맛은 있지만 지난주에도 먹었다는 점 때문에 를르슈는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의 먹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스자쿠는 ‘그렇지!’ 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장보러 갈까? 안 그래도 씨앗도 사야하고, 고기도 떨어져가고.”

“장?”

“응, 차 타고 좀 나가야 하긴 하지만. 를르슈는 낮에 시간 괜찮아?”

“상관없어. 어차피 하는 일도 없고.”

“그럼 내일 갈까?”

 

그렇게 내일의 약속이 정해졌다. 를르슈는 내일 아침 먹고 가면 점심 먹기 전에 도착할 거라는 이야기에, 시장이 서는 곳까지 꽤 거리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 진짜 깡촌에 사는구나. 를르슈는 그런 감상을 삼켰다. 잘 자, 를르슈, 내일 봐—하고 스자쿠가 밤 인사를 하면, 를르슈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자쿠에게 ‘잘 자’라는 말을 건네고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갔다.

잠자리에 누워 이제는 익숙해진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일의 일이 왜인지 기대가 되었다. 시장에서 뭘 살까. 무슨 음식을 해먹을까. 스자쿠는 차가 있으니까 좀 무리해서 사도 되지 않을까? 내가 내 돈주고 사도 되잖아. 오랜만에 브리타니아 음식도 해보고 싶고. 과자 만드는 건 오븐이 없으니까 무리려나. 뭐든 잘 먹어주겠지, 스자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 집에서 사라지고 난 뒤의 일을 떠올렸다. 를르슈가 이 집에서 산 지도 보름은 훨씬 넘었다. ‘계약’을 맺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를르슈의 계획에는 차도가 없었다.

 

‘그래도 뭐… 초조하게 굴어서 의심사는 것보단 낫지 않나.’

 

를르슈는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는 기분 좋게 두근거리던 심장 소리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뭘 설레고 있었던 거야. 소풍 가는 어린애도 아니고. 를르슈는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서 미간이 찡그려질 정도로 눈을 힘껏 감았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하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고, 를르슈는 거의 밤을 새다시피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얼굴을 보자마자 짓궃게 놀려댔다.

 

“나랑 같이 나가는 거, 기대되서 잠도 못 잤어?”

“말이 되냐?”

“아하하, 데이트잖아.”

“그럴 리가.”

 

스자쿠와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자니 어제의 자신이 대체 무슨 고민을 하며 잤던 것인지, 그 고민이 무쓸모하게 느껴져서 를르슈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스자쿠는 차고에서 금방 차를 끌고 와서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를르슈 앞으로 댔다.

 

“차가 좀 낡고… 살짝 더럽지만, 아, 조수석은 그래도 깨끗해!”

 

스자쿠의 차는 예전에 살폈던 것처럼 차가 좀 낡고, 살짝 더러웠지만, 스자쿠의 말대로 조수석은 깨끗했다. 를르슈가 조수석에 타자, 스자쿠는 잠깐 실례, 라는 말과 함께 를르슈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스자쿠의 팔이 를르슈의 어깨 위를 스쳐지나갔다. 거의 끌어안다시피하는 그 몸짓에 를르슈는 당황했다.

 

“뭐, 뭐야?”

“응? 안전벨트 때문에. 조수석에 있는 거 고장나서 이렇게 해야하거든.”

“그럼 안 해도 돼!”

“사고 나면 위험해! 자, 됐다.”

“말, 말로 하면 되잖아.”

“에이, 금방이면 되는데.”

 

그 금방 때문에 잠을 못 자서 피곤한 심장이 터질 것처럼 굴었다.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은척 창밖을 내다보았다. 스자쿠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이 어딘가 기분이 상했다.

낡은 차의 라디오에서 흐르는, 이름 모를 클래식 음악을 배경음 삼아 드라이브는 시작되었다. 스자쿠의 차는 마을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스쳐지나가는 다른 집들이 보였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다른 이웃주민에게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했었지만, 너무 멀었으며, 또 그런 모습이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수상해 보일까봐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도 뭐… 상관 없지 않으려나. 스자쿠는 보나마나 뻔하고 시시한 남자일 것이다. 를르슈는 그렇게 단정지으려고 노력하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스자쿠가 말한 시장은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스자쿠가 키워보고 싶었던 채소 씨앗을 사고, 를르슈가 만들어보고 싶거나 먹고 싶은 음식 재료, 조미료 따위를 사고 나면 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근처에 작은 아울렛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요새 아직도 좀 쌀쌀하지?”

“응. 꽃도 폈으니 안 추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산이라서 그런가.”

“옷 살래?”

“…나? 나는 필요 없어. 어차피 안에만 있으니까.”

“그럼 내 꺼. 같이 골라줘, 를르슈.”

 

그렇게 해서 스자쿠의 옷을 골라주는 것에 시간을 제법 쏟았다. 스자쿠의 패션 감각은 썩 나쁘지 않았지만, 그보다 를르슈가 따지고 드는 것이 많았기에 시간이 걸렸다. ‘여기는 끝부분의 마감이 별로야’ 라던가, ‘이 옷은 손빨래로만 해야되서 번거로워’ 등등 스자쿠가 고르는 옷마다 퇴짜를 놓는 를르슈 때문에, 막판에 스자쿠는 를르슈가 골라주는 옷만 사기로 했다.

장보기는 거의 저녁달이 뜰 무렵에 겨우 끝이 났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새삼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가 아무 옷이나 이제껏 막 입어왔으며, 관리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주변에서 다 챙겨줬다는 것이 느껴졌다.

 

“피곤하지?”

“……조금.”

 

를르슈는 솔직하게 대답하며 조수석에 앉았다. 스자쿠는 키득거리면서 다시 처음에 이 차를 탔을 때처럼 를르슈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피곤함에 찌든 를르슈는 화낼 기력도 없이 ‘됐어?’라고 물어볼 뿐이었다.

 

“응, 됐어. 그럼…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우렁차게 말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실없이 또 웃음이 났다. 저녁달이 뜨고 바깥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낮에 보았던 하천이나 숲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낯설게 보이는데도, 를르슈는 어떠한 감흥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옆자리에서 운전하고 있는 스자쿠의 모습이 더 흥미로웠다. 저도 모르게 스자쿠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를르슈는 행여나 그가 자신의 시선을 눈치챌까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도착했구나, 하고 를르슈는 잠에서 덜 깬 몽롱한 의식으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했다.

 

“를르슈, 자?”

“…아니.”

“자도 돼.”

“안 잔다니까.”

“를르슈가 자면 내가 안아서 방까지 데려다줄게.”

“절대 안 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말이었다. 스자쿠는 바로 눈을 뜨는 를르슈를 보더니 하하, 하고 웃으면서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그럼 내릴까, 하는 말에 를르슈는 자리에서 내렸다.

탔을 때에는 뒷좌석에 짐이 한가득이었는데, 지금 뒤를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스자쿠가 벌써 다 정리한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빚을 달아두는 스타일인가? 를르슈는 뻐근한 허리를 툭툭 치면서 스자쿠를 흘겨보았다.

 

“왜 일찍 안 깨웠어?”

“잘 자길래.”

“……내일 아침, 내가 할게.”

“응? 뭘 바라고서 그런 건 아니야. 그래도 를르슈가 차려주는 아침은 기대된다.”

 

봄인데도 으슬으슬한 밤 추위에 를르슈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스자쿠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를르슈. 하늘 좀 봐.”

“하늘?”

 

그 말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별들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와. 엄청 예쁘다.”

 

자기가 보라고 해놓고서, 혼자서 감탄하고 있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웃음이 나왔다. 예쁘지, 를르슈?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물었다. 그래, 예쁘다. 를르슈가 웃으면서 하는 대답에 스자쿠는 소리 없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별도 달도 분명 스자쿠보다 더 반짝이고 있을 텐데, 스자쿠의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웃음에 더욱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리 와봐, 하고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어깨를 끌어안고서 밤하늘에 손짓했다.

 

“별이 너무 많아서, 뭐가 무슨 별인지 모르겠어. 나 분명히 배웠는데. 저게 북극성이던가? 북극성이 어디서든지 보이는 별, 맞지?”

 

스자쿠는 계속 이야기를 했고, 를르슈는 어느 순간 스자쿠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자기 심장 소리만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손발이 뜨겁고, 스자쿠와 닿아있는 곳은 데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무서우면서도, 설레고, 떨리고…. 

그러다가 스자쿠가 아무런 말도 없이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 또 다시 느꼈던 감정들이 를르슈의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별도 달도 훤히 밝은 밤, 그 중에서도 스자쿠가 유독 빛나고 있는 이 밤. 스자쿠의 눈에도 를르슈가 가장 빛나고 있을까? 를르슈는 문득 그것이 두려워져서 스자쿠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더 빨랐던 것은 스자쿠였다. 스자쿠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손을 잡았다. 뜨거운 손끝끼리 맞닿는 기분은 짜릿했다.

 

“를르슈.”

 

스자쿠는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다. 를르슈는 그 목소리에 떨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면 입술 끝에 따뜻한 느낌이 닿아왔다. 놀라서 아, 하는 소리가 나오면 그 소리마저도 집어삼키는 것이 바로 스자쿠였다.

스자쿠와 키스를 했다. 그 키스는 를르슈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를르슈는 키스 한 번으로 무력해진 자신이 싫어서 스자쿠를 있는 힘껏 끌어당기고 말아버렸다.

 

* * *

 

[피곤해 보여서 안 깨웠어. 아침은 꼭 먹기.]

 

언젠가 보았던 그 문구가 다시 식탁 위에 올려져 있을 때, 를르슈는 이번엔 혀를 차는 대신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가 차려진 식탁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뒤에, 를르슈는 다시 한 번 거세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의 키스가 자꾸 생각났다. 키스가 끝나고, 스자쿠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에게 스자쿠는 괜찮다고 말했다. 뭐가 괜찮은데,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너는 대체…! 스자쿠에게 그런 말을 퍼붓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가지 못한 채로, 를르슈는 스자쿠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먼저 씻는다는 스자쿠의 말에, 그의 씻는 물소리를 들으며 긴장을 하다가…… 자버렸다.

 

“젠장!”

 

잘 때가 아닌데 자버렸다. 따져야할 것들이 수만 가지였고, 짚고 넘어가야 할 일들이, 스자쿠가 치고 들어온 빈틈을 막아야만 했는데, 맥빠지게 잠이나 자버린 자신이 어이가 없고 황당할 뿐이었다.

를르슈는 [밥은 밥솥, 국은 냄비, 반찬은 데워서.]라고 적힌 메모를 구기면서, 스자쿠가 바라는대로 식사를 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어제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왜 그랬냐고, 왜 나한테 키스를… 했냐고! 를르슈가 허공을 노려보며 시뮬레이션을 해도, 상상 속의 스자쿠는 그럴싸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남자는 예측 불가능의 남자다. 이레귤러 그 자체라고.

를르슈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면서 먹었던 것들을 정리했다. 얼마 되지 않는 설거지를 하고, 그릇들을 정리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어제 장을 보면서 샀던 도시락통이었다.

 

‘를르슈, 꽃구경 하는 거 좋아해?’

‘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꽃을 보는 건가?’

‘음… 브리타니아의 티 타임이랑 비슷하다고 해야하나, 그냥 꽃을 보면서 맛있는 걸 먹는 거야.’

‘그렇군.’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락이 빠질 수 없지. 아, 물론 술도. 꽃이 더 지기 전에 가자.’

‘가자니, 어딜?’

‘꽃구경. 를르슈랑 가고 싶어.’

 

비닐하우스 뒤쪽 산에 꽃이 만발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스자쿠의 모습이 떠올랐다. 를르슈는 어제 잔뜩 사둔 음식 재료들을 떠올리며, 두 사람 몫으로 충분할 것 같은 도시락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키스 한 번 했다고… 꽃구경 같은 걸… 남자 둘이서… 하하, 말도 안 돼!

를르슈는 귓볼까지 단숨에 붉어지며 극구 부정을 외쳤다. 말이 될 리가 없—잖—아!!

 

“를르슈?! 괜찮아?!”

“허억… 허억….”

“무, 무슨 일 있어?!”

 

그리고 2인분의 도시락과 함께 스자쿠가 일하는 비닐하우스까지 걸어오는 동안, 를르슈는 은근한 경사길에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도착했다. 수건을 뒤집어 쓰고 일하던 스자쿠가 뛰쳐나와서 를르슈의 흔들리는 몸을 부축해주었다.

스자쿠가 쉴 때 쓰는 간이의자에 앉은 를르슈는 숨을 고르며 스자쿠를 힐끔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를르슈가 걱정되어서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를르슈, 대체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오고.”

“…그냥, 오고 싶어서.”

“응?”

“오고 싶어서 왔다고. 아, 그리고 꽃구경도 하고 싶고.”

 

를르슈는 스자쿠가 간이테이블 위에 올려둔 도시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시락도 가져왔어. 그 말에 이번엔 스자쿠의 얼굴이 붉어졌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더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니, 를르슈는 자신이 꽤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쩌겠어. 그러고 싶었는걸.

얼굴이 달아오른 스자쿠는 흐르는 땀을 닦아내더니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어떡하지, 나 오늘 할 일이 많아서… 꽃구경은 힘들 거 같아.”

 

어제 쉬었으니까 오늘은 꼭 해야 되서… 라는 말을 흘리듯 말하는 스자쿠의 눈에는, 를르슈의 실망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일 것이다. 를르슈는 감정을 더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널뛰는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어떻게든 숨기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필사적으로 스자쿠의 변명이 이어졌다.

그, 그래도 내일은 할 수 있어! 내일은 차 타고 같이… 더 멀리 나가서 벚꽃구경 갈까…! 필사적으로 ‘내일’이나 ‘다음’ 같은 것을 잡으려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기분이 다시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정말 이렇게 쉬운 남자였냐고…! 고작 그런 말 한 마디에 이렇게 쉽게 화가 풀리는 거냐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괜찮아. 다음에 같이 가면 되는 거잖아?”

“응! 그때는 내가 도시락 쌀게!”

“같이 해도 돼.”

“좋아!”

 

를르슈가 싸온 도시락은 그대로 스자쿠의 새참이 되었다. 계란말이를 보기 좋게 집어서 먹는 스자쿠는 또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먹었다.

스자쿠가 밥을 먹는 동안, 를르슈는 스자쿠의 비닐하우스를 돌아보았다. 조금 습하고 더웠고, 흙냄새와 달큰한 향기가 났다. 하얗고 작은 꽃들이 올망졸망 피어있는 것이 신기했다. 스자쿠는 이런 곳에서 일하는구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커다란 두 눈을 진지하게 빛내며 일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예전의 를르슈라면 상상도 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좁은 흙길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발이 꼬여 넘어질 뻔 한 를르슈를 붙잡은 것은 스자쿠였다. 괜찮아? 스자쿠는 를르슈를 바로 세워주고는 손을 놓았다. 그 떨어지는 손길이 아쉬운 것을 겨우 내색하지 않으며, 를르슈는 꽃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뭐야? 그러자 스자쿠는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여기서 딸기를 키우고 있어.”

“딸기?”

“응, 딸기 좋아해?”

 

를르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자쿠는 눈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나도 좋아해.”

 

그 말은 꼭 를르슈를 좋아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를르슈는 태연하게 굴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력할수록 더욱 알 수 없어졌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다 못해 숨을 어떻게 쉬고 있었는지도.

그런 를르슈를 알아차린 듯, 스자쿠는 천천히 다가왔다. 를르슈는 뒤로 한두 걸음씩 물러나다가, 자신이 하우스의 막다른 지점에 온 것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피할 구석이 없었다.

 

“어제는 못 물어봤는데.”

“…응.”

“키스 해도 돼?”

“…….”

 

안된다는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입을 열어 키스해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전해야할지 몰라, 를르슈는 어제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스자쿠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숨이 닿고, 어깨를 붙잡는 단단한 손, 부드럽게 끌어안는 팔 같은 것에 온몸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스자쿠와의 키스는 를르슈를 또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스자쿠 말고는 무엇도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입술을 떼었을 때, 를르슈는 힘이 풀려 스자쿠의 품에서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제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서로 들리는 심장 뛰는 소리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것, 그뿐이었다.

 

“괜찮아.”

 

스자쿠는 또 다시 괜찮다는 말을 했다. 처음 키스를 했을 때처럼. 를르슈는 그 말에 이번엔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에는 무엇이 괜찮은지에 대해서 의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괜찮다는 말을 들으니 다 괜찮은 것 같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에, 를르슈는 눈을 감지 않았다. 스자쿠 역시 키스해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2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ㅠㅠ 아직 야외플이 안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