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몹시 심기가 불편했다. 이유는 눈 앞에 있는 나이트 오브 세븐 때문이었다. 코넬리아와 함께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는, 평소라면 ‘하얀 저승사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뚝뚝한 표정이어야만 했지만, 어째서인지 코넬리아 앞에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그런 미소는 를르슈 앞에서만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그 남자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코넬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를르슈는 평소라면 아름답게 만개한 장미정원을 만끽했을 테지만, 현재 스자쿠와 코넬리아가 다정하게 있는 것을 봐버린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멀리에 있는 것도 아닌데, 스자쿠는 를르슈를 보지 못한 채로 계속 코넬리아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그 생각이 머리 끝까지 닿고 나면 를르슈는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스자쿠!”
“르, 를르슈 전하?!”
“를르슈?”
를르슈는 저를 바로 돌아보는 스자쿠를 보고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를르슈는 저를 보듬어 안는 스자쿠의 품에 안기면서 그의 목에 팔까지 두르고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코넬리아 누님,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구나, 를르슈. 그나저나 이 자리에는 어떻게 왔지? 네가 오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멀었을 텐데.”
“스자쿠가 여기에 있는데 제가 못 가는 건 이유가 안 되거든요.”
를르슈의 당돌한 발언에 코넬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안느 님도 걱정이 많으시겠군, 이라는 말을 하고 나면 를르슈는 못들은척 스자쿠에게 매달릴 뿐이었다. 스자쿠는 코넬리아가 했던 그 말을 그대로 전했다.
“마리안느 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전하.”
“어머니랑 같이 왔으니까 상관 없어. 오히려 스자쿠랑 같이 있는 걸 보고서 좋아하실걸?”
“여기까지 혼자 오신 건가요?”
“스자쿠랑 누님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어?”
“전하….”
를르슈의 따박따박 이어지는 말대답에 스자쿠는 머리를 쥐어싸고 싶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올해 10살이 된 이 황자전하는 스자쿠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잘 따르다 못해 언젠가 스자쿠와 결혼하고 말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소년이었다.
평소에는 머리도 좋고 냉정하며 또 상냥하고 배려심 넘치는 황자전하는 스자쿠와 관련된 일이면 잠깐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대응할 때가 많았다. 지금처럼 언제 자신을 덮칠지 모르는 암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파티회장에서 동떨어져 외진 구석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보들보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자쿠의 한숨소리에 를르슈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약간 주눅이 든 표정으로 스자쿠에게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장미정원 쪽으로 왔으니까 괜찮았어…. 제레미아한테도 말하고 왔고.”
“제레미아 경한테도 통보하고 오셨겠죠. 마리안느 님의 허락도 없이 다니시면 안돼요.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그럼 스자쿠도 다른 사람이랑 단 둘이 있지 마.”
“네?”
“왜 코넬리아 누님이랑 같이 있었어? 같이 웃고 있었잖아.”
를르슈는 볼멘 소리로 말했다. 스자쿠는 저에게 독점욕을 드러내는 황자전하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를르슈는 대답 없는 스자쿠가 불만인지 그의 망토를 쥐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나보다 누님이 좋아?”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애당초 코넬리아 전하와는 를르슈 전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렇죠, 전하?”
멀찍이서 듣고 있던 코넬리아는 한참이나 어린 남동생의 질투에 또 하나 하나 대답해주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다정함에 질릴 것 같았다. 다정한건지, 아니면 멍청한건지. 코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자쿠의 품 안에 있는 를르슈의 뺨을 쭉 잡아 늘렸다.
“너 때문이야, 너. 를르슈. 네가 나이트 오브 세븐을 너무 쥐고 사니까 오만 군데에 소문이 다 나잖아.”
“저를 쥐고 산다니, 코넬리아 전하도 참.”
“스자쿠는 조금만 잘해주면 금방 빠져나가니까 이럴 수밖에 없다구요. 누님께서 제 심정을 알 리가 없어요.”
“네? 뭐예요, 그런 건.”
“어휴, 고생이 많다. 나이트 오브 세븐.”
“네?”
“스자쿠, 누님이랑 이야기 하지 마. 내 이야기도 하지 마.”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전하.”
“그럼 스자쿠는 내 말보다 누님이 더 중요해?”
“두 분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를르슈는 마지막 말에 스자쿠의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살짝 올라오는 셔츠 사이를 야무지게 깨무는 를르슈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난데 없이 깨물린 스자쿠는 으악,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저 멀리서 제레미아가 달려와서 그제서야 찾은 를르슈를 보고서 눈물을 닦았다. 스자쿠는 셔츠를 풀면서 를르슈가 남긴 잇자국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스자쿠가 내 거라는 증거야.”
제레미아에게 팔이 붙들린 를르슈는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스자쿠는 다시 셔츠 단추를 잠그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 저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 강압적으로 구시면 저도 싫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 그치만 스자쿠가 먼저 누님이랑 같이 있었잖아!”
“를르슈 전하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제레미아 경.”
“스자쿠가 이 사람 저 사람 홀리고 다니는 거야!”
“저는 평소대로 하고 다닐 뿐이에요.”
“그게 문제야!”
를르슈는 저를 붙잡고 있던 제레미아의 손을 뿌리치고 스자쿠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리고 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나랑 결혼해, 스자쿠!”
“네, 네, 결혼이든 뭐든 간에 우선 제 의견을 들어주세요, 전하.”
“싫어!”
“그런 남자는 사랑 받을 수 없어요~”
“스자쿠한테만 받으면 돼!”
“제가 싫다니까요….”
를르슈는 울먹거리면서 스자쿠의 품에 안겼다. 이제 스자쿠랑 떨어지기 싫어! 스자쿠는 그렇게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황자전하를 아리에스로 향하는 차에 태웠다. 싫다니까! 이거 놔라, 제레미아! 를르슈의 반항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전하가 좀 더 크면, 그때 다시 생각해볼게요.”
스자쿠는 그렇게 말하고서 를르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 정도로 참아주세요, 전하. 완전히 어린아이 취급하는 볼 키스에 를르슈는 억울한 듯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난 진짜 스자쿠랑 결혼할 거야. 스자쿠랑 결혼해서 애도 다섯 명이나 낳을 거야!!! 멀어져가는 를르슈의 발악에 스자쿠는 하하,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줄 뿐이었다. 다시 파티회장으로 돌아가면, 재미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자쿠는 얌전히 술잔만 비웠다.
한바탕 를르슈가 휩쓸고 간 자리는 정신이 없었지만, 자신을 좋아한다고 정면으로 부딪혀 오는 그 감정에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열 살짜리의 어린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나를 좋아해준다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스자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를르슈가 깨물어 남긴 흔적은, 이제 곧 멀리 떠나는 길에 소중한 선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8년의 시간이 지났다.
를르슈가 남긴 상처는 흉터도 되지 못한 채로 사라졌고, 스자쿠는 8년 동안 브리타니아의 많은 에리어를 전전하며 전쟁터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넘버스 출신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처지가 그러했다. 브리타니아 본국에서 오는 연락은 많았지만 계속 반복되는 전투에 나가야하는 스자쿠의 처지는 고달팠다.
스자쿠는 가끔씩 를르슈를 떠올렸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한 그 황자전하는 어떻게 컸을까? 그의 아름다운 형제자매들처럼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겠지. 어려서부터 예뻤던 아이니까. 날 좋아한다고 했었던 그 시절은 다 잊고 어른이 되었겠지. 스자쿠는 그때를 떠올리면 를르슈가 남겼던 상처 부위를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던 그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스자쿠도 희미해져가는 그 황자전하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버거우니까.
그렇기 때문에 스자쿠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라고 자신을 밝히면서 스자쿠에게 무릎을 꿇은 이 아름다운 소년에게 손을 내어주고 있는 지금을.
8년 만에 돌아온 본국에서, 때마침 어느 황족에게 온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받은 스자쿠는 처음엔 무시하고 쉬려고 했다. 그러나 다짜고짜 찾아와 ‘파티 가자, 스자쿠!’ 하면서 스자쿠를 끌고 나온 지노의 손에 이끌려서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그 황족의 이름을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스자쿠는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검은 장갑을 벗기면서 드러나는 손등 위로 입을 맞추는 를르슈를 보며 기겁했다. 소년은 보랏빛 눈을 반짝이며 감회가 깊다는 등 감동이 물씬 묻어나는 말들을 중얼거렸지만, 스자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주문한 반지가 딱 맞아서 다행이네. 사이즈를 알려준 로이드에게는 특별 지원을 해준다고 약속한 보람이 있군. 아, 널 여기에 데리고 온 지노한테도 답례를 해야겠어.”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 다음으로 서늘한 것이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반지일 줄은 몰랐다. 소년 를르슈는 스자쿠를 보면서 녹을 것 같은 눈으로 말했다.
“나랑 결혼해줘, 스자쿠.”
그는 8년 전보다 더 성장했으며,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으며, 사랑이 넘치는 모습은 여전했다. 스자쿠의 딱딱하고 거친 손을 자신의 부드러운 손으로 감싸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스자쿠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목소리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를르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르, 를르슈 전하…?”
“나, 많이 컸지?”
“몰라볼…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
무려 8년이나.
를르슈는 속상함을 감추지 않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 표정에서 어렸을 때의 모습이 살짝 묻어나오는 것 같아 스자쿠는 어딘가 반가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왼손에 끼워진 반지의 무게를 느끼자 세월의 흐름이 어딘가 엇나감을 느꼈다.
“보고 싶었다는 말보다, 먼저 할 말이 있지?”
“네?”
“내가 결혼하자고 했잖아. 스자쿠, 대답은?”
스자쿠는 자신에게 강요되는 청혼의 이야기에 그제서야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그러고 보니 8년 만의 휴식이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땅의 무게와 조용하고 안락한 환경,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 맛있는 음식… 강요되는 프로포즈. 왼손에서 느껴지는 반지가 천근만근의 무게를 지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스자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의사의 말로는, 스자쿠가 그때 쓰러진 것은 강렬한 스트레스로 인한 기절이라고 했다.
지노와 로이드는 폭소를 했다. 아, 물론 스자쿠도 오랜만에 본국에 온 것이니까 마음이 놓이고 그럴 수 있으니, 뭐…. 서로 눈물날 정도로 웃어놓고 나서 스자쿠에게 쾌유를 빌었다. 스자쿠도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스트레스 받을 게 뭐 있나? 스자쿠는 황제폐하가 하사한 저택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보면서 여유를 되찾으면 금방 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투 중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8년 동안 떠돌아다니기도 했었고… 스자쿠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스자쿠가 쓰러진 이유가 스트레스 때문이라니, 역시 브리타니아는 망해야 돼.”
“아니, 무슨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전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내 남자의 집에 내가 있는 게 무슨 문제인가?”
“예?”
스자쿠는 자신이 가져온 붉은 장미꽃을 꽃병에 넣어 보기 좋게 정리하는 를르슈를 보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를르슈는 침대 옆 협탁 위에 꽃병을 올려두면서 환하게 웃었다.
“결혼식 때까지 스자쿠가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서포트할게. 좀 늦었지만 아내로써의 내조랄까.”
“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부끄럽군. 아, 결혼식은 역시 6월이 좋겠지? 앞으로 반 년이면 충분하다, 스자쿠.”
“…네?”
“네가 8년 동안 본국을 떠난 사이에 내가 다 준비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마.”
“……뭐, 뭘요?”
“뭐긴 뭐야. 우리의 결혼식이지.”
스자쿠를 바라보며 웃는 를르슈는 애정으로 녹아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는 시기와 질투로 어쩔 줄 몰라했던 아이 같은 호의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자쿠에 대한 사랑은 만개해서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그를 사랑스럽게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스자쿠는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그 사랑을 보며 쉽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를르슈는 가만히 굳어있는 스자쿠의 모습에 의아함도 품지 않은 채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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