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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의 여름, 쿠루루기 스자쿠는 술에 취해 있었다.
시원하게 돌아가는 냉방은 더운 술 기운을 가시게 할 것 같기도 하면서도, 애매하게 취하게 만들어놨다. 안주도 없이 혼자서 홀짝거리면서 마신 술은 제법 독했고, 그것을 반 병 이상 비웠으니 취하지 않는 게 이상하기도 했다.
스자쿠는 취기에 어지럽게 돌아가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내일은 무슨 날이더라. 의미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술을 마신 이유도 기억이 흐릿했다.
이제 세상은 평화로우니까 제로 없이 다녀올 수 있다면서, 나나리가 혼자서 출장을 다녀왔다. 그리고 출장의 선물이라고 술을 주었다. 술? 나나리의 선물이 술이었다는 것이 의외여서, 스자쿠는 가면 속에서 놀란 얼굴을 했었다. 그런 스자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나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이제 어른이거든요. 술 정도는 살 수 있어요.’
어른이 된 나나리. 스자쿠는 그 단어들의 조합이 낯설게 느껴졌다. 술 정도는 살 수 있다, 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감동적이었다. 물론 나나리가 만찬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 정도는 스자쿠도 몇번 보았기 때문에 어색할 것이 없었지만, 그녀가 저에게 어른이 되었으니 술을 선물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묘했다.
그래서 오늘은 왜 그 술을 마셨는지, 그 기억은 아직도 흐릿하다. 에어컨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스자쿠는 술냄새가 섞인 더운 헛숨을 내쉬면서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왜 술을 마신 거지…….”
혼자서 중얼거려도 답을 해줄 상대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제로가 혼자 사는 곳이다.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다. 아무도 없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독하다. 스자쿠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네가 없는 세상은 생각보다 고독했어.’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고독한 세상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웃음으로 넘어간 이야기였지만, 사실은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어떤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꺼냈었는지, 이제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스자쿠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결론에 다다랐다. 그 결론은 너무 단순하고 유치하고 명료했다.
‘나는 외로웠던 거야.’
침대 위에 드러누운 스자쿠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입술만 당겨 웃다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베개에 박았다. 그러자 이번엔 억눌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스자쿠는 몸을 뒤틀어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진짜 한심하다.’
술에 취해서 몸을 뒤척이는 자신의 꼴이 한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제로를 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깊어지고 나면, 스자쿠는 작년의 여름이 떠올랐다. 카렌과 담배를 피웠던 여름. 생각하지 못했던 일탈. 그런 여유라도 있어야지 제로를 할 수 있다던 카렌의 말.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나면 올해의 여름밤도 그저 제로로써 지내기 위한 한여름 밤의 일탈 같은 것이 아닐까?— 같은 생각이 들면, 스자쿠는 이내 쓴 웃음을 지었다.
“그만두고 싶다.”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스자쿠는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말을 한 거지? 무엇을 그만두고 싶은 거지? 스자쿠는 당황하다 못해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가 그 말을 들었을까 생각하면 아찔했다. 하지만 이곳은 제로가 혼자 사는 곳, 그 누구도 스자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누구도 듣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염치도 없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스자쿠는 한 손으로 틀어막은 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을 일부러 내뱉었다. 염치도 없다, 무슨 소리를…. 그래, 말 그대로였다.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간 ‘그’는 이런 내일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는데, 그 희생을 위해서 만들어진 제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적어도 ‘그’를 알고 있는 스자쿠라면,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려왔는지, 스자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겠지. 그 내일 속에 스자쿠의 자리를 만들어준 ‘그’를 위해서라도.
“아….”
입술을 막고 있던 손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낀 스자쿠는 또 황당한 상황 속에 놓인 자신을 발견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중얼거리고, 혼자서 또 부정하고, 그러면서도 울고 있다.
술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지만, 이렇게까지… 깊은 심연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스자쿠는 눈물로 흠뻑 젖어가는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살갗끼리 부벼지는 것이 쓰리고, 입술 근처로 흐르는 눈물은 짰다.
“이제 그만….”
스자쿠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그리운 얼굴들이 있다.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웃어주던 사람들.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두 번 다시 자신에게 웃어주지 않을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 아니, 상냥한 그들이라면 스자쿠가 가면을 쓰지 않아도 웃어줄 것이다.
상냥한 사람들은 멀리 떠나버렸어. 아주 멀리.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스자쿠는 훌쩍거리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무엇을, 이라는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상냥한 사람들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거짓과 위선이 아닌, 진실된 평화 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는데, 제로, 아니 쿠루루기 스자쿠만이 홀로 거짓과 위선의 가면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뭐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눈을 감았다 뜨면 세상은 더 어둡게 느껴졌다. 스자쿠에게 허락된 빛은 아주 희미하고, 창백해서, 존재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제로는 올바른 정의이며, 세상의 평화를 위한 존재이며, 거짓과 위선으로부터 자유롭지만, 그 실체는 사실 쿠루루기 스자쿠이다. 이 세상에 죽고 없어졌으며, 누구보다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런 게 맞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살아있어도, 되는 건가?
이제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는건지, 무엇을 위해서, 어째서….
“를르슈.”
스자쿠는 오랜만에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자신에게 이런 기어스를 남기고 간 그 남자는 세상 어디쯤에서 떠돌고 있을까. 그래,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자신의 죽음으로써 세상을 올바르게 다잡고 갔으니 이제 면죄부를 얻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머리와 다르게 가슴은 타들어가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너는 비겁해.”
나를 이렇게 삶이라는 지옥 속에 내던져놓고, 나를 이곳에 멈춰서게 만들고. 억지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어서…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에,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나도 끝내고 싶어.”
마지막으로 보았던, 를르슈의 어쩔 수 없이 웃어보였던 그 미소 속에서, 스자쿠는 그때 자신이 이 ‘제로’라는 가면 밖으로 영원히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걸었던 기어스 속에서, 그가 건넸던 기어스 속에서, 스자쿠는 앞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공포가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를르슈가 웃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을까.
스자쿠는 비틀거리면서 책상 근처로 걸어갔다. 총과 칼, 어느 쪽이 한 번에 쿠루루기 스자쿠의 삶을 끝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잠깐 들었다. 소음기가 달려있지 않은 총은 시끄러울 수도 있으니, 칼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스자쿠는 술을 마시고 감정적인 고뇌 끝에 자살을 결심한 사람 치고는 무척이나 차분한 손으로 칼을 찾아 헤맸다.
제일 먼저 찾은 페이퍼 나이프는 스자쿠에게 걸려있는 기어스를 부수기에는 충분치 않아보였다. 스자쿠는 혀를 차며 다음 서랍을 뒤졌다. 총이 나왔다. 앞에서 말한 이유로 총은 기각처리 되었다. 아쉬운 눈으로 스자쿠는 총을 흘낏 쳐다보았지만, 나중에 이 방에서 제로의 시체를 치우게 될 사람들에게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은 자신을 죽이기에 가장 적절한 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제로의 방에서 습격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슈나이젤이 억지로 설치해둔 무기고가 있었다. 총도, 칼도, 폭탄도…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수단은 그곳에 있었다. 스자쿠가 책상 뒤쪽에 있는 책장 쪽을 더듬으며, 무기고를 여는 버튼을 누를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다잡고 있을 때였다.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에 미련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어가는 것에 대해 공포가 남아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스자쿠는 더 흐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또 다시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왜 또 울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앞서 들었던 모든 의문에 대해서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느꼈던 마지막 공포를 떠올린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의 가슴에 쳐박았던 검의 무게가 손끝에서 묵직하게 닿아오는 것 같았다. 를르슈라는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는 그런 짓을 저질렀고,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렇게 역할을 다한 를르슈에게서 어째서 자신은, 그가 비겁하다고 느끼고 있는 건지.
“이제 모르겠어.”
스자쿠는 중얼거렸다. 살아있어야 하는 의미도 알 수 없고, 세상을 지켜야할 의무의 굴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느껴질 수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라!
그 목소리가 걸어놓은 기어스는 스자쿠를 이렇게 완전히 삶으로 묶어놓았다. 그게 스자쿠의 역할이라고 못박아두면서,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
—살아라!
모르겠다고 말하는 스자쿠의 목소리에 다그치듯이, 를르슈가 외치는 그 말의 효력은 무시무시했다. 스자쿠는 무기고의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바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스스로도 기이하다고 느낄 정도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공포감이 발끝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살아라!
—살아라!
—살아라!
“그만!”
스자쿠는 머리를 감싸쥐며 외쳤다.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스자쿠는 더 이상의 문장을 이어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마디에 스자쿠는 칼에 찔린 사람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영원히, 머나먼 시간까지 흘러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을 때,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스자쿠를 찾았다.
“제로?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닌데.
그럼에도 스자쿠는 굳어버린 입술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실례했군.”
그렇게 말하면, 문 너머에서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멀어졌다. 스자쿠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쿠루루기 스자쿠, 22살의 7월 1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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