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노 바인베르그가 건네는 청첩장에, 쿠루루기 스자쿠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노의 옆에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카렌이 서있었다. 카렌과 지노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는 새하얀 청첩장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 기사단 간부인 카렌과 지노의 결혼식이다. 나나리도 참석하는 그 결혼식에 제로가 참석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이었다. 제로가 참석하겠다고 대답하자, 지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긴장한 어깨에 힘을 풀었다.
“다행이다, 못 온다고 할까봐 걱정했어.”
“그런 걸로 긴장하기는, 바보. 제로가 내 결혼식에 안 올 리가 없잖아.”
카렌은 지노의 팔짱을 끼며,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스자쿠가 못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한 것은 아닌지, 올 수 있다는 확답을 듣고 난 뒤에는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제로가 되고 나서부터, 제로가 필요로 되는 자리는 많았다. 나나리가 참석하는 자리에는 무조건적으로 그녀의 호위를 위해서 나서는 편이었고, 또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자리에도 빠져서는 안 되었다. 그런 자리들을 구별하는 것은 슈나이젤의 몫이기에, 그가 ‘제로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면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어려워진 것은, 타인의 판단이 없을 때였다.
결혼식 같은 자리에, 그런 행복과 축복을 빌어주는 자리에, 제로가 끼어도 되는지. 그 이전에 참석했던 오우기와 비렛타의 결혼식은 특별한 경우였을 뿐이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제로는 결혼식 같은 사적인 경사에는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다. 예전에, 슈나이젤에게 그런 판단을 맡겼을 때에는 ‘그날 제로의 일정은 비어있습니다’ 같은 말로 돌아왔다. 즉, 모든 것은 스자쿠의 판단이 우선이라는 말이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복 속에서, 제로의 축복이 필요할까?
스자쿠는 지노와 카렌의 청첩장을 받았을 때,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 질문을 곱씹었다. 그래도 우선 가겠다고 했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겠지. 흑의 기사단 에이스인 카렌과 흑의 기사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맡고 있는 지노의 결혼식에, 제로가 빠지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번 만큼은 가야하는 걸지도.
스자쿠는 카렌의 품 안에서 울었던 때를 떠올렸다. 타인의 체온 속에서 위로를 구하며, 그녀가 괜찮다고 다독이는 손길에 서럽게 울었던 기억은, 카렌에게 받았던 그 위로를 갚아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스자쿠가 어떠한 핑계로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도망치려고 한 것을 눈치챈 것마냥, 기억은 스자쿠를 붙들어맸다.
나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두 사람의 결혼식까지 금방이었다. 지노와 카렌은 완벽한 결혼식을 올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축복을 받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스자쿠는 이상하리만큼 냉정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마냥 알 수 없는 분노가 스자쿠를 휘감았다. 정말로 이상했다. 무언가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거나, 그런 낌새가 느껴지는 결혼식이 아니었음에도, 스자쿠는 그런 상황 속에 내몰린 사람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세상은 평화롭고, 사람들의 웃음 소리는 끊이지 않으며, 환호하는 목소리는 하늘까지 닿을 것마냥 명랑하고……
‘제로!’
‘제로!’
‘제로!’
마치 ‘그날’처럼.
스자쿠는 ‘그날’의 기시감을 느끼는 자신에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고,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듯했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모든 것은 다 멀쩡했으며,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스자쿠만이 버려진 채로, 뒤로 남겨졌을 뿐이었다.
모두가 빛 속으로 달려드는데, 스자쿠 혼자서만 가면 속의 어둠에 내버려진 것이다. 이제 와서 이런 모든 것을 탓하기엔 늦어버렸다. 그런 것을 아는데도, 나는 이제와서 또.
“지노 씨랑 카렌 씨, 행복해보이죠?”
샴페인을 들고 있는 나나리가 제로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멍하니 있던 것처럼 보였을 제로는 뒤늦게 대답했다. 네, 하고 짧막하게 이어지는 대답에 나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뭔가… 부럽다고 해야할까요?”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잖아요.”
그렇게 말한 나나리는 샴페인을 한 잔을 바로 비워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뺨은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스자쿠는 자신의 생각에 잠겨서 나나리를 살피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또 샴페인을 마시려고 움직이는 나나리를 막자, 나나리는 불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왜요, 제로? 오늘 같은 날은 마셔도 좋잖아요.”
“과음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많이 안 마셨어요.”
“얼굴이 빨갛습니다.”
“……한 잔만요. 딱, 한 잔만.”
스자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가로막았던 길을 열어주었다. 나나리는 샴페인 한 잔을 쥐고서 다시 제로의 옆으로 왔다. 나나리는 느릿한 손으로 샴페인 잔 속에 지노와 카렌을 비추며 말했다.
“사실은 카렌 씨가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어요.”
“…….”
“나처럼 계속 그 사람을 그리워해주기를… 바라면서.”
“…….”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떠나면, 이제 정말, 남아있는 건 나 밖에 없겠구나 싶어져서.”
“…….”
“제로, 너무 슬퍼요.”
나나리는 누구에게도 내밀지 않은 손을 꽉 주먹으로 말아쥐며 말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눈물을 떨궈냈다.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알고 있는 나나리의 모습에, 스자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 또한.
나나리는 반도 못 마신 샴페인 잔을 제로에게 내밀며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돌아가는 나나리와 제로에게 모두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둘에게 내일의 일들이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다들 호쾌한 인사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파티의 여운은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평화로운 세계의 일상. 스자쿠는 옆자리에 앉은 작은 여자에게 걸려있는 그 일상의 무게를 가늠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날’ 들었던 검의 무게 만큼보다 가벼울까, 무거울까. 하지만 죄없는 그녀에게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할까.
“제로, 고마워요.”
스자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나나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스자쿠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랐다. 슬프다고 말하는 그녀를 위로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미안함 조차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나리가 자살시도를 한 것은 그날 밤이었다. 급하게 들어온 문서가 아니었다면, 세상은 영원히 나나리를 잃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크를 했던 밤,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이 수상했고, 뒤늦게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에는 하얗게 질린 나나리와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손목이 보였다. 지혈을 했지만 늦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자쿠는 다급하게 의사를 불렀다. 병원으로 옮겨지는 나나리의 모습에 스자쿠는 오랜만에 신을 찾으며 기도를 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울면서, 나나리만큼은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못하게 죄여드는 가면의 무게 때문에 누구도 스자쿠의 기도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도, 의미가 있을까.
이런 소망을 가져도, 의미가 있을까.
스자쿠는 나나리의 병실 앞에서 숨을 죽였다. 병원에 입원한 나나리는 누적된 과로로 인한 피로 때문에 요양과 검사 차 입원을 했다고 언론에 알려졌다. 누구도 그녀가 자살시도를 한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나나리가 입원하고 나서 스자쿠는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 바빴으며, 덕분에 사흘 늦게 이 병실 앞에 서있게 되었다.
나나리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스자쿠는 그런 문제에 답안지가 있다면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훔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정답을 찾아내서, 상처투성이인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제로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이며,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 사람이다. 다가서는 그 자체가 오답인 것이다.
그럼에도 스자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있는 나나리는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로 느릿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제로가 들어온 것을 보자, 나나리는 음악을 끄고서 제로를 불렀다.
“드디어 와줬네요, 제로.”
“…….”
“괜찮다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당신의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요.”
스자쿠는 머뭇거렸다. 그런 스자쿠를 알고 있기라도 한듯이, 나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미 확인도 했어요. 여기서는 누구도 못 듣게 되어있고… 설령, 듣는다고 하더라도. 다들 제가 미쳤다고 할 거예요.”
“…….”
“안 될까요?”
그런 간절한 부탁에 스자쿠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쉬이 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스자쿠에게, 나나리는 작게 숨을 고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했다.
“제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제로는 물어보지도 않는군요. 아니, 어쩌면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요? 처음에는 알고 있었어요,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 어째서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지. 너무 확실해서, 도망칠 구석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건 나의 죄니까, 내가 속죄해야할 부분이니까.”
“…….”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모르게 되어서… 아니면, 모른척 하고 싶어지는 건지. 나만, 나만 이렇게…… 남아버리고, 다들, 잊어버리게 되는 거 같아서.”
“…….”
“그렇다면 나도… 편해져도 되지 않을까. 행복해지려면… 그런 방법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는 소리조차 숨죽이는 나나리의 모습에, 스자쿠는 가면을 벗었다. 가면을 내려두는 둔탁한 소리에 나나리는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스자쿠의 모습에, 나나리는 눈물 범벅의 뺨을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소리 없이 ‘스자쿠 씨’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배려에, 스자쿠는 나나리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스자쿠가 장갑을 벗고, 그들의 손과 손으로, 피부끼리 맞닿아 느껴지는 체온 속에서 나나리는 눈을 감았다.
“나도 알아.”
“…….”
“도망치고 싶어지고, 그만두고 싶어지면서… 이런 건 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스자쿠는 저보다 작은 나나리의 손을 잡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이… 네가 선택한 것처럼 죽음도 나쁘지 않을 거야. 아니, 어쩌면 우리 둘에게 유일한 구원이 죽음일 수도 있어. 그래, 내가 너였다면 나도 똑같이 그랬을 거야.”
“…….”
“나나리 네가, 카렌이… 를르슈를 계속 그리워해주기를 바란다고 그랬지.”
“…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를르슈를 계속 그리워해. 계속해서, 를르슈가 살아있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 거라고…. ‘그날’의 방법이 최선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
저를 향하고 있을 나나리의 눈과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토로하는 감정들은 제로에게 있어서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도.”
나나리의 손등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스자쿠는 나나리를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같이 울고 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한심함에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 핫…. 끊어지듯 나오는 스자쿠의 숨소리에 나나리는 스자쿠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 둘이라도 계속 남아요.”
“……나나리, 난.”
“계속 남아서, 언젠가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우리 둘이서라도.”
“…….”
“우리 둘이라면, 못 해낼 게 없을 테니까요.”
나나리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에 스자쿠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죽이는 방법은 그것 말고는 알 수 없었다. 울음으로 들썩거리는 어깨를 토닥이는 작은 손은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손길에 울음이 잦아들고, 스자쿠는 엉망이 된 얼굴로 나나리를 마주했다. 나나리 또한 눈물로 엉망이었다. 서로 마주보고 웃는 얼굴을 하면,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우는 것 대신에 스자쿠는 나나리에게 키스를 했다. 그것은 충동이 아니었고, 무언의 맹세로 입술과 입술이 닿을 뿐인 키스였다. 나나리는 닿았다 떨어지는 스자쿠의 입술에 미소를 지었다. 희미하게 웃는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후후, 오라버니가 알면 놀라겠어요.”
“그럴 각오를 한 거야, 나는.”
오랜만에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쌓여있던 것들이 훌훌 떠내려가는 기분에, 스자쿠는 다시 쓴 가면이 평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이 거짓된 삶 속에서, 몇번이고 살아있기를 선택하는 위선이 인정받을 날이 올까? 그러한 선택에도 ‘계속 남자’고 하는 말은 되찾은 나침반 같았다. 계속해서 흔들렸던 것들이 자신의 궤도를 되찾았다.
그는 제로.
누가 뭐라고 해도 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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