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르슈에게.
잘 지내고 있어? 지금쯤 어디야? 이 편지는 제대로 닿을까? 어떤 루트로 편지가 전해질지는 모르지만… 우선 적어볼게.
나는 여전히 흑의 기사단에서 지내고 있어. 하는 일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까지는 없는 건 아니야. 슬프게도 제로는 여전히 필요한 존재인가봐. 아, 내가 빨리 일을 쉬고 싶다는 게 아니라, 제로 없이 돌아가지 못하는 세상은 뭔가, 아직 네가 원했던 ‘내일’은 아니었던 거 같아서 말이야.
나나리는 잘 지내고 있어. 뭐, 너도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나나리는 나보다 하는 일이 더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이제 나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서 그런 걸까, 더 욕심쟁이가 된 거 같기도 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 나나리는 좀처럼 욕심내는 법이 없는 아이였잖아.
작년에 카렌과 지노가 결혼을 했어. 예전에 비렛타 선생님과 오우기 씨의 결혼식처럼 카구야가 비디오를 찍어두긴 했는데, 네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만날 일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이 편지를 보내는 쪽에 파일을 담은 디스크를 보내기는 하는데… 좀 놀랄 거야. 카렌이 정말 예뻤거든. 워낙에 미인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기합을 더한 미인이라고 해야 할까? 가면 덕분에 울고 싶은 얼굴을 가릴 수 있어서 좋았어. 지노도 멋졌어. 약간 철부지 같은 면이 어느새 듬직해졌다고 할까, 진중해졌어. 다들 어른이 되었다, 고 하면 감이 오려나?
어른이 되었다는 말을 적고 나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해.
나는 어른이 되었을까? 나는 여전히 네게 가면을 받은 제로인 채로, 그 상태의 18살인 기분인데. 벌써 26살이야.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이제 네가 떠난지도 10년이 지난 후의 일이 되는구나. 너는 어때? 너도 어른이 되었어? 궁금하네.
기어스라는 이상한 힘부터, 코드까지 받은 불로불사의 네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로 흐르고 있을까?
상냥한 세상 속에서, 나와 나나리를 두고 다시 떠나버린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네 생각은 문득 떠오를 때도 있고, 한참이나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어. 그래도 그때마다 기도해. 네가 잘 지내기를.
제로가 기도를 한다는 게 우스워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기도 뿐인걸.
예전엔 원망도 했었지. 나를 혼자 속죄 속에 묶어두고서, 너 혼자만 비겁하게 빠져나갔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네가 만들어준 일상, 같이 함께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 세상을 위해 벌을 받고 있는 주제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조금 불순해보이겠지만… 너로부터 받은 기어스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후회하지 않아.
세상을 좀 더 상냥한 곳으로 바꾼다는 그런 거창한 목표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너도 알잖아, 나라는 사람은 그런 멋진 일을 할 수 없어. 나는 그릇이 작고, 속도 좁으면서, 한치 앞의 일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 네가 준 가면 너머의 세상을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 머리도 나빠.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에게 제로의 가면을 쓸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해. 나는 늘… 내가 있는 자리가 불안하고, 또 도망치고 싶고… 어른답지 못한 선택을 자꾸 하고 싶어져.
그때마다 너를 떠올려. 그리고 네가 잘 지내고 있기를 기도하면서,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가. 어렸던 네가 했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고, 너를 믿고 선택한 나 자신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 자리에 서있는 것이 무섭지 않아.
앞으로 네가 보낼 시간은 무척이나 길겠지? 나는 가늠할 수 없는 그 공포 속에… 너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야.
하지만 내가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듯이, 너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어.
답장은 하지 않아도 돼.
K1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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