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아리에스의 황자가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도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동생 공주와 유유자적한 나날을 즐기는 것이 원래대로의 일과였다면, 요즘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사교계의 파티를 나가거나 군공을 세우러 다니는 등, 각종 전장을 빠짐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뒤늦게 그 서민 기사 출신의 어머니 피가 거꾸로 도는 게 아니냐며 깔깔거리는 귀족들의 이야기에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를르슈는 발코니에서 자신이 내려다보는 줄도 모르고 떠드는 귀족들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귀족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시선을 주거나 말거나 귀족들은 황족 다음으로 가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등장에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를르슈는 어쩐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랫층에서는 음악이 멈추고 잠시 박수소리가 들렸다. 오늘밤 승전연회의 주인공인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모두 모였기 때문에 건배사라도 할 생각인 듯 싶었다. 를르슈는 급하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머리, 흐트러짐 없음. 연회복, 주름 없음. 미소, 아름다움.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로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급습한 불안함이 를르슈를 방 밖으로 나가게 하는 걸 두렵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옷이 너무 검은색인 건 아닌지. 안 그래도 창백한 인상이 더 어두워보일 거 같은데. 화장을 조금 할 걸 그랬나. 향수가 너무 독하진 않은 건지. 나이트 오브 세븐이랑 어디에 있어도 잘 어울리도록 준비한 게 너무 과하진 않은지….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걸 너무 티내는 건 아닐까?
를르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아름답고 잘생긴 아리에스의 황자가 거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얼굴이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먹힐지는 마찬가지로 미지수였다. 결국 를르슈는 아래에서 건배사가 끝나고, 짧게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고, 음악이 다시 재개할 때까지 나가지 못했다.
모처럼 나이트 오브 세븐을 보기 위해서 이 번거로운 파티에 참석한 것이었는데.
를르슈가 방 밖으로 나온 것은 1시간 하고도 30분이 지나서였다. 파티에서 길게 즐기는 법이 없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는 이미 승전 축하를 받고 나서 또 다음 전장으로 나가기 위해 진작에 떠났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한껏 꾸미고 나온 제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져서, 를르슈는 우울한 표정으로 파티의 중앙 홀에 나타났다.
“를르슈! 도착했다고는 들었는데 몸이 안 좋았나보구나. 안색도 안 좋고.”
“…클로비스 형님.”
“그래도 파티는 아직 한창이니까 더 즐기고 가도록 해.”
“네, 그러겠습니다.”
오늘 파티를 주최한 클로비스가 를르슈를 알아보고서 말을 걸었다. 를르슈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며 나이트 오브 세븐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시간은 늦었고, 그의 파란 망토는 보이지 않았다. 확인사살을 당한 기분으로 를르슈는 더욱 침울해졌다.
“요즘 네가 밖으로 많이 나와서 무척이나 기뻐. 아, 다음 달에는 펜드래곤에서 좀 떨어진 곳이긴 한데 미술관 개관 파티가 있어. 그때도 올 거지?”
“아뇨, 이제 파티는 그만 나가려고요. 할 일도 많고.”
서민 기사 출신의 어머니와 그녀의 자식인 자신을 헐뜯는 귀족들이 참석하는 파티는 어렸을 때부터 즐거워하지 않았다. 다만 요새 얼굴을 자주 내밀게 된 이유는 오로지 나이트 오브 세븐 때문이었다.
“이런, 아쉽구나. 를르슈가 못 온다고 하면 쿠루루기 경이 안타까워 하겠군.”
“쿠루루기 경이…오나요?”
“그럼, 그 파티는 쿠루루기 경이 보안을 맡았거든. 아버님의 특별지시랄까.”
“아, 그럼 가겠습니다. 일정이야 조정하면 되니까.”
“하하, 둘이 엄청 친한가 보구나. 아, 때마침 저기 있군. 쿠루루기 경!”
어라.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도 않았던 나이트 오브 세븐이 보였다. 쿠루루기 경, 하고 부르는 클로비스의 목소리에 그의 파란 망토가 2층 계단에서부터 보였다. 를르슈는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얼굴에 화끈거림을 느꼈다.
아, 진정해, 보름 만에 만나는데 이런 꼴로 어떻게 마주할 거야? 를르슈가 침착하게 소수를 세고 있는 사이에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걸음으로 다가와서 를르슈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그렇습니다, 전하.”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두근거리다 못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를르슈는 그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은 두근거림을 다스리느라 한 박자 늦게 그에게 일어나도 좋다고 말했다. 꼴사납게도 그 목소리는 떨림을 애써 감추는 것이 고작이라 볼품없게 느껴졌다.
얼굴은 화끈거리지, 심장은 터질 것 같고, 목소리는 떨리고. 참담하군,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를르슈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스자쿠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시선을 애써 다른 곳에 두면서 스자쿠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자쿠는 클로비스와 함께 다음주에 있을 미술관 개관 파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들어보면 별 거 아닌 이야기였다. 클로비스의 주변에는 예술가들이 많았고, 그들이 이번 미술관 개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가 섞여있었다.
“그리고 답지 않게 마담 르메르도 참석한다고 하더라고. 하하, 나이트 오브 세븐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나봐.”
마담 르메르는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인사였다. 그녀는 10년 전 남편을 잃고 나서 재혼을 하지 않은 채로 애인을 턱턱 갈아치우는, 를르슈의 기준에서는 꽤나 난잡한 관계의 여자였다. 그리고 를르슈가 그녀를 좋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닌 쿠루루기 스자쿠 때문이었다. 마담 르메르의 최근 하룻밤 애인은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는 소문이 한 번 돌았다. 스자쿠는 그런 소문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지만, 마담 르메르는 그 소문을 즐기는 듯 했다. 그래서 부득불 외딴 곳에서 이루어지는 미술관 개관 파티에 참석하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마담 르메르의 이름이 나오자 스자쿠는 어려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인기가 많군, 쿠루루기 경. 를르슈도 자네가 온다는 이야기에 바로 말을 바꿨거든.”
“클로비스 형님!”
“아, 비밀이었나? 모르는 척 해줘, 쿠루루기 경.”
“아니, 난… 딱히 일정이 많은 편도 아니니까 바람을 쐴 겸 해서…!”
“전하께서 오신다니 파티 보안에 만전을 다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적당한 말로 자신의 속내를 둘러대려고 한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를르슈가 더 말을 보탤 것이 없게 깔끔한 뒤처리를 하는 스자쿠는 를르슈의 참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쫓아다니기만 하는 이 관계에 대해서 잠깐의 아쉬움이 일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파티에 나온다거나, 아니면 군공을 세우러 나가지 않으면 나이트 오브 세븐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 만날 수 있는 기회에 소중함을 느껴야하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으면 끊어지고 말 인연이라는 것이 씁쓸했다.
셋이서, 대체로 스자쿠와 클로비스가 대화를 나누고, 를르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중에 클로비스가 빠지게 되었다. 파티의 주최자인 클로비스는 워낙에 아는 귀족들이 많아 받아야할 인사도 많은 듯 싶었다.
“그럼 를르슈를 부탁하지, 나이트 오브 세븐.”
“네, 맡겨만 주십시오.”
“형님, 전 어린애가 아닙니다. 동갑내기인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맡겨질 정도는 아니라고요.”
“그런 고집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그런 거야, 를르슈.”
그렇게 클로비스가 돌아서고, 를르슈는 드디어 스자쿠와 단둘이 되었다. 들고 있는 와인잔을 흔들거리면서 를르슈는 스자쿠를 힐끗 쳐다보았다. 커다란 녹색의 눈동자가 이 파티에서 어울리지 않게 그를 순진하게 보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녹색이 불타오르듯 매섭게 빛이 나는 전장을 떠올리면, 그 격차에 새삼 반해버리는 자신이 있었다.
잠깐 옆모습만 훔쳐본다는 것이 눈동자에 홀린듯이 그를 빤히 쳐다보게 되어서, 시선이 마주쳤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를르슈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꽤 늦게까지 파티에 남아있었네, 스자쿠.”
“아, 사실은.”
“사실은?”
“를르슈 전하께서 참석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사도 못 드리고 가는 건 너무 아쉬울 거 같아서 이렇게 남아있었습니다.”
희미하게 짓던 미소가 아닌 활짝 웃어보이는 것에 를르슈는 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보기 흉하게 달아올랐을 것이 뻔했다. 누가 봐도 ‘그런 말, 너무 좋아! 그리고 너도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튀어나오려는 ‘좋아’라는 말을 삼켰다.
“그… 그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위에서 쉬고 있었어.”
“그러셨나요? 지금은 어떠세요?”
“원래대로 회복했으니까 이제 돌아다니는 거겠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요즘 전하께서 바쁘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파티에도 나오시고, 전장에도 나오시고… 저야 전하를 자주봐서 기쁘긴 하지만, 그래도 건강을 먼저 챙기세요.”
스자쿠는 정말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를르슈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본인이 알아차릴 정도로 이렇게 끈덕지게 따라다니고 있는데도 스자쿠는 건강 이야기나 하고 있다는 게, 이 짝사랑의 말로는 꽤 비참할 거 같았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스자쿠의 단말기가 울렸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집합 명령이었다. 환하게 웃던 그 얼굴은 어디론가 가고, 스자쿠는 딱딱한 나이트 오브 세븐의 표정으로 돌아가 를르슈에게 돌아가야한다는 말을 전했다.
“클로비스 전하께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아, 형님도 이해해주실 거다.”
“를르슈 전하와 만나서 기뻤습니다. 다음에도 또.”
스자쿠는 자신을 데리러 온 군인들을 따라 뒤돌아 나섰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를르슈는 제때 대답하지 못한 말이 입에서 맴돌았다.
‘나도 너를 만나서 기뻤어.’
쿠루루기 스자쿠를 다음에 만나면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고, 를르슈는 다짐했다. 물론 그 다음 또한 자신이 노력해야한다는 것에 눈물이 나게 서럽게 느껴져, 를르슈는 잔 속의 와인을 털어마셨다.
* * *
그에게 사랑에 빠진 이후로, 를르슈는 나이트 오브 세븐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을 몇번이고 반추하는 습관이 있었다. 스스로도 이러는 자신이 얼마나 촌스럽고 유치한지 알고는 있었지만, 를르슈는 쿠루루기 스자쿠를 만날 기회가 드물다보니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곤 했다.
를르슈와 스자쿠가 만난 것은 1년 전이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를르슈의 첫 출전을 앞둔 군사회의에서였다. 흔하디 흔한 제11황자, 애매한 황위계승권 서열 순위는 13위, 어머니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 출신이라지만 서민이라는 이유로 를르슈의 발언권은 회의에서 큰 힘을 갖지 못했다. 그동안 비공식적으로는 슈나이젤의 휘하에서 전략을 내세워왔지만, 그것이 슈나이젤의 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를르슈는 적잖이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 누구도 를르슈의 의견에 대해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때였다. 나름 황자전하의 첫 출전이었기 때문에 나이트 오브 라운즈 한 명이 끼어있었지만, 그 마저도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이었기에 귀족 출신 군사들은 를르슈를 더욱 비웃었다. 그리고 그 나이트 오브 라운즈— 나이트 오브 세븐은 를르슈의 편 같지도 않아보였다. 그는 늘 미간을 찌푸린 채로 회의실에 앉아서 진척이 없는 회의를 들으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출전을 앞둔 마지막 회의였다. 를르슈가 내세운 것은 매복하여 미끼를 내던지고 급습하자는 의견이었지만 다들 ‘이래서 서민 출신은 효율적인 척 하면서 고상하지 못한 전략을…’ 따위의 반응이나 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른 군사들은 브리타니아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며 압도하자는, 효율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의견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효율은 군인들의 사상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하하, 를르슈 전하. 어차피 제8부대는 명예 브리타니아인이 움직입니다. 그러라고 있는 부대니까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안 될 건 또 뭐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다, 그런 철부지 같은 의견을 내세우실 겁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다. 를르슈는 어느 것 하나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애초부터 이 작자들은 를르슈를 황자로써 취급하지도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날 것이고, 그렇게 된다고 하면 를르슈의 책임이 될 것이니 그들은 부담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절망적이군. 를르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를르슈 전하의 작전대로 갑시다. 이건 제가 나가는 전장이니 저의 의견도 중요하겠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나이트 오브 세븐이 입을 연 것이다. 그의 말에 를르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이트 오브 세븐은 화면에 띄워져 있던 이제까지의 모든 작전을 폐기처분 해버리고 를르슈의 작전을 띄웠다.
“하, 나이트 오브 세븐. 설마 명예 브리타니아인 부대에 대해서 신경 쓰느라 그런 저급한 작전을…?”
“아뇨.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써의 판단입니다. 지금까지 논해진 작전은 비효율적이라는 게 너무 확연해서요.”
“그런 걸로는 어떤 설득도 되지 않습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명령할 수밖에 없겠군요. 이건 명령입니다.”
전장에서는 황족, 그리고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그 실권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군사들은 얌전히 있던 나이트 오브 세븐이 자신들의 작전에 어깃장을 놓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반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제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 대한 반란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리고 나이트 오브 세븐은 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달았던 이들에게 돌아가며 총구를 들이대다가, 마지막으로 를르슈에게 향했다. 그의 총구 앞에서 를르슈의 비상한 머리도 멈추었다. 긴장한 를르슈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제 의견이나 전하의 의견에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나이트 오브 세븐의 차분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그는 방금 전까지 ‘명령’이라고 해놓고서 지금은 뻔뻔하게 ‘의견’이라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총을 들이민 채로. 그러나 방금 전의 살기는 진심이었다.
아무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나이트 오브 세븐은 총을 거두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의 분위기에 놀란 군사들은 입을 다물었고, 그가 총을 치우고 나서도 눈치를 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 작전이 정해졌으니, 이제 회의는 그만해도 되겠군.”
보다 못한 를르슈가 말했다. 나머지들은 한 대 얻어맞은 불쾌한 얼굴로, 그러나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모두가 회의실 밖으로 나갔지만, 를르슈와 나이트 오브 세븐만이 남아있었다.
를르슈는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말을 걸었다.
“덕분에 불필요한 전력 소모를 막을 수 있어 다행이군, 나이트 오브 세븐.”
“아닙니다. 저야말로 방금 전, 무례한 행동을….”
“아아, 총을 꺼낸 거 말이야? 훌륭한 연출이었어.”
를르슈의 ‘훌륭한 연출’이라는 말에 나이트 오브 세븐은 작게 웃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거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그 답지 않은 미소였다. 를르슈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작게 탄식했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저를 향해 쳐다보는 것에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게 웃으면 좋잖아.”
“네?”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보다, 나이트 오브 세븐은 웃는 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말이야.”
“……제, 제가요?”
그는 를르슈의 말에 당황스러운지, 방금 전 총을 들이대며 ‘명령’했던 사람과는 영 딴판인 모양으로 말했다. 얼굴까지 붉어진 나이트 오브 세븐의 모습에 를르슈는 유쾌해졌다.
“이번 작전이 끝나고 나면 아리에스로 와서 차나 한 잔 하는 게 어때?”
“아리에스…라면 전하께서 계시는 곳이죠?”
“응. 나이트 오브 세븐은 바쁘니까 못 오나?”
“아닙니다. 초대해주신다면 언제든 찾아뵙겠습니다.”
“어려워 할 것 없어.”
“…그렇다면 전하도 저를 어려워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나이트 오브 세븐을 어려워한다고?”
“스자쿠… 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꺼내는 나이트 오브 세븐은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 사람처럼 말했다. 그는 시선을 한 번 맞추다가 바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쿠루루기 스자쿠… 입니다, 제 이름. 스자쿠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이름을 불러달라고 하는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를르슈는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이렇게 귀여운 부탁을 한다고…? 정작 그렇게 말한 나이트 오브 세븐, 아니 스자쿠는 침묵을 견딜 수 없는지 바로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쿠루루기 경도 좋습니다. 전하께서 부르기 편하신 쪽으로 불러주시면, 오히려 뭐랄까, 나이트 오브 세븐이라고 계속 부르셔도 됩니다.”
“…하하, 스자쿠라고 부르지. 쿠루루기 경이나 나이트 오브 세븐은 너무 길잖아?”
“그, 그렇죠?”
를르슈는 그의 이름을 언제 불러줘야할지 타이밍을 찾으면서 회이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를르슈의 뒤를 따라나온 스자쿠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회의실이 더웠네요’ 같은 말을 했다. 회의실의 에어컨이 얼마나 세게 돌아갔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를르슈 또한 ‘그러게’라고 대꾸했다. 어딘가 뻣뻣하게 굳은 두 사람은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를르슈를 데리러 올 차가 올 때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리에스의 문장이 그려진 차가 가까워지자, 스자쿠는 아쉬운 듯한 얼굴로 를르슈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전하,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이트 오브 세븐…이 아니라 스자쿠도 저런 얼굴을 할 줄 아는군. 를르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의 배웅을 받았다.
“스자쿠도 잘 지내도록.”
스자쿠, 라고 겨우 이름을 꺼냈다. 휘둥그레 눈을 뜬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괜히 민망해져서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건 너였잖아.”
“그, 그랬죠.”
를르슈는 차에 타고서 스자쿠를 힐끔 쳐다보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를 바라보며, 방금 전보다 환하게 웃어주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를르슈는 괜히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상했다. 또래라면 귀족도, 황족도 만나봤었다. 이제 와서 떨릴 만한 것이 없었음에도. 나이트 오브 세븐은 브리타니아 제국 안에서도 좀 튀는 존재라서 그런 거겠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를르슈는 자신의 첫사랑이 시작됐음을 2주 뒤에 아주 사소한 계기로 깨닫게 되었다.
처음은 전화 한 통이었다. 여동생 나나리와 티 타임을 갖고 있던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수화기를 들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입니다, 를르슈 전하.’
“아, 스자쿠.”
‘…네, 스자쿠입니다.’
두 번이나 자기소개를 하는 그가 귀여워서 를르슈는 또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그래, 무슨 일이지?”
‘출정 전 최종 작전 회의에 대한 일정을 확인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건 이번주 목요일이지 않나?”
‘…제가 제대로 알고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응.”
‘……네. 늦지 않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래.”
나이트 오브 세븐은 매 회의 때마다 5분 일찍 와서 기다렸다는 걸 알고 있기에 를르슈는 그의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대체 왜 전화한거지? 를르슈가 의아한듯이 그렇게 대답한 것이 느껴졌는지, 전화 너머의 스자쿠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꺼냈다.
‘사실… 이번 출정이 끝나고 나서 바로 나이트 오브 라운즈 회의가 있어서요. 그 다음에는 또 다시 파견을 나갈 거 같기도 하고.’
“아, 바쁘겠군.”
‘그래서.’
“응.”
‘아리에스로… 초대해주시면 좀 늦게 갈 것 같습니다.’
업무에서는 어렵고 딱딱하고 꽉 막히기로 소문난 나이트 오브 세븐은 지금 그때 말 한 번 꺼냈던 아리에스의 초대에 대해서 이렇게 전화를 한 것이다. 를르슈는 그의 숨겨진 진짜 모습이 이럴 줄은 몰라서 저도 모르게 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았어.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
“홍차는 좋아해?”
‘네.’
“케이크는? 특히 더 좋아하는 디저트 같은 게 있나?”
‘아, 뭐든지 좋습니다. 가리는 건 없어요.’
“그래. 알겠어. 나중에 일정이 비면 연락해.”
‘네.’
“그럼 그때 보자고, 스자쿠.”
‘…네!’
마지막은 기합을 더한 목소리 같아서 를르슈는 전화를 끊고서 한참이나 쿡쿡거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나리가 의아한듯이 물었다.
“누구랑 통화하셨나요?”
“아, 스자쿠… 그러니까 나이트 오브 세븐이야. 생각보다 웃기는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웃는 오라버니, 정말 오랜만에 봐요. 요즘 첫 출정 때문에 계속 피곤해보이셨는데.”
“그런가? 나나리랑 있어서 더 행복해서 그런 걸지도.”
“오라버니도 참.”
“나중에 스자쿠가 아리에스에 오게 되면 나나리한테도 소개할게.”
“정말요?”
“그럼. 나이트 오브 세븐은 첫 인상만 조금 어렵지, 이야기 해보면 재미있어.”
를르슈가 스자쿠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에 나나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그 나이트 오브 세븐이 정말 마음에 드시나봐요.”
“…뭐, 나쁜 사람 같진 않아서 말이야.”
“저도 빨리 만나보고 싶네요.”
“나나리도 분명 친해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나나리와의 티 타임을 마치고 나서, 를르슈는 집무실로 다시 돌아가 일을 했다. 휑하니 놓여있는 달력을 앞에 두고서, 를르슈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지간한 일정들은 머리에 하나도 빠짐 없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에 달력을 굳이 쓰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를르슈는 펜을 들어 최정 작전 회의 날짜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 날 최종 작전 회의에서 만나고, 출정이 이쯤이니까… 그리고 나이트 오브 라운즈 회의가 있다 그랬지. 그럼 파견도… 이쯤? 돌아오게 되면 이 정도…. 한 달 가까이 못 만나는 거잖아.’
날짜 계산을 한참을 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를르슈는 한 달 뒤에 있는 가장 가까운 주말에 다시 동그라미를 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려도 그를 그때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빨리 보고 싶은데. 아리에스에서 스자쿠와 같이 차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기대가 되는 만큼 약속이 미뤄지게 되면 더 우울해지는 자신을 알아차리고는,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에 한숨을 쉬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를르슈는 열심히 그려놓은 동그라미의 궤적을 손으로 따라그리다가 중얼거렸다.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어.”
스자쿠, 하고 그 이름을 꺼내불러보면, 를르슈는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간은 어떻게 해서든 흘러가는데 빨리 가길 바라는 건…! 를르슈는 낯부끄러운 말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렇게까지 나이트 오브 세븐과 같이 있고 싶은 건… 맞지만. 혼자서 속으로 중얼중얼 생각하던 를르슈는 한 장 넘겼던 달력을 덮어버리고는 숨을 골랐다.
침착하게 최종 작전 회의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해도 쿠루루기 스자쿠에 대한 생각만이 자꾸 났다. 총구를 겨누던 그의 모습까지 떠올렸는데도 를르슈는 입가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뭔가… 좋지 않은 이 기분은… 아니, 좋은데, 뭔가, 이상해.
“바보도 아니고 왜 자꾸 스자쿠 생각만 하는 건지.”
입 밖으로 소리내어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한 를르슈는 그제서야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마냥 깨달은 것이다.
를르슈는 바보가 된 것이다. 스자쿠 생각만 하는 바보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똑똑한 를르슈는 단박에 깨달은 것이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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