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 Shy
코우즈키 카렌은 지금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카렌 슈타트펠트로 돌아온 일상, 평화롭고 지루한 학원 생활에 들이닥친 적들과의 조우,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지금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지노 바인베르그였다.
이 남자는 브리타니아의 명문 귀족가문의 셋째 아들이라는 형편 좋은 팔자를 타고난데다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작위까지 받고 있었다. 자기소개를 듣기만 해도 재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카렌이 흑의 기사단 에이스로서 생각하건대, 그와 얽혀봤자 좋을 일이 없는 상대인 건 분명했다. 그래서 카렌은 있는 힘껏 병약한 미소녀를 연기하며 그의 시야에 들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다.
‘나 엄청 노력했지?!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런데 왜 지노 바인베르그는 카렌을 따라다니는 것일까? 그것도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카렌은 최근 자신의 행동들을 떠올려보았다. 요즘 병약 미소녀 연기에 물이 오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신은 힘없는 여학생A 수준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저 남자와는 학생회 활동 외에는 엮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딱히 관심을 가질 건덕지를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나를! 따라 다니는 건지! 참다못한 카렌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수줍은 듯한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말했다.
“저기, 바인베르그 군.”
“지노라고 불러주면 좋을 텐데.”
“그, 그래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의외네, 카렌은 그런 거 생각 안하는 줄 알았어. 그냥 지노라고 불러줘.”
대체 뭐가 의외야, 아니 그럼 너는 생각이 없냐?—라고 일갈하고 싶어지는 것을 겨우 억누르면서, 카렌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카렌을 마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불리한 것은 오직 카렌뿐이었다.
“지노…는 왜 자꾸 나를 따라오는 거야?”
떨떠름한 목소리로 겨우 이름을 말하는 카렌에게, 지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카렌이 언제 나를 봐주나 싶어서.”
보통의 여자애들이라면 반해버릴 대사였겠지만, 듣고 있는 사람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흑의 기사단 코우즈키 카렌이었다. 약간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카렌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런 건 좀 불편해서… 곤란하다고 해야 하나.”
더 덧붙이자면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에게 그런 소리 들을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카렌은 겨우 참았다. 그 말을 들은 지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조금 놀란 듯 했다. 아, 설마 ‘날 거절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전개인가? 진짜 그러면 최악이다.
“그런 말 처음 들어서 놀랐어.”
아아, 이 자식 최악이네! 카렌은 속이 펄펄 끓는 것을 다잡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띄운 채로 말했다.
“그럼 그러지 말아줬으면 해.”
“아, 물론이지. 카렌이 불편해하지 않게 조심할게.”
“으음…? 응, 그래주면 고마울 거 같아. 난 이제 가야 돼서.”
카렌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제 갈 길을 가면, 계속 따라오던 지노는 쫓아오지 않았다. 조금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카렌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조심하겠다는 지노의 말에서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의 여지를 줘버린… 걸까? 아니, 아니, 난 단호하게 말했어. 확실하게 거절했으니까 이제 끝일 거야!’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 * *
“그럼 카렌이랑 제가 다녀올게요!”
활기차게 손을 드는 지노를 보며, 카렌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다음번 학생회 이벤트 때 입을 의상을 사러 다녀와야 하는데, 라고 미레이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지금은 부활동 예산 분배 회의로 바쁜 와중에, 또 미레이의 주문에 맞는 번거로운 쇼핑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참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 그냥 포기할까나, 하고 미레이가 아쉬워할 때, 지노가 손을 든 것이었다.
“어머, 진짜?! 둘이 함께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뭘 맡기는데?! 미레이가 방금 전까지 말한 것은 바니 페스티벌이었다. 학생회 멤버들이 바니걸 의상을 입고서, 그 꼴로 들고 다니는 당근을 빼앗은 사람이 부활동 비용 두 배의 찬스를 얻는다는, 말도 안 되는 기획이었다.
“네?”
그래서 저보고 지금 바니걸 의상을 사러 다녀오라고요? 저 병약한 캐릭터인데?! 카렌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네!”
그리고 지노는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미레이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며 ‘이번 이벤트는 내 사비로 진행하지!’라고 말했다. 기사에게 검을 하사하듯, 지노에게 카드를 주면서 미레이는 감격에 젖은 채로 말했다.
“좋아! 그럼 다녀오도록 해!”
그렇게 카렌은 지노와 단 둘이 쇼핑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서민의 쇼핑, 기대된다!’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지노를 옆에 둔 채로 걷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서민은 바니걸 의상 따윈 사지 않아…. 혼자서 중얼거린 카렌은 우울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푹 떨군 채 교문 밖을 벗어났다. 이대로라면 신체뿐만이 아니라 정신마저도 병약해질 것 같았다.
“카렌? 무슨 일 있어?”
보면 몰라? 너 때문이잖아.
“아니…. 나는 이 근처를 잘 모르는데 나로 괜찮은가 싶어서.”
“그거라면 괜찮아. 회장이 자주 가는 가게로 가면 된대. 약도도 받았고.”
그거 참 다행이다. 걱정을 덜어줘서 고맙다, 비겁한 브리타니아놈아.
“아, 근데 나 전철 탈 줄 모르는데. 카렌은 전철 탈 줄 알아?”
주먹이 덜덜 떨리는 것을 참으면서 카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갸냘픈 고갯짓에 지노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면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카렌은 앞으로 펼쳐질 인내의 시간이 고된 것을 직감했다. 그런 카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노는 카렌을 정성껏 에스코트 하겠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전철도 타본 적 없는, 이 철부지 브리타니아 귀족을 어떻게 암살할 수는 없는 걸까.
전철역에 다다르면, 정말로 전철을 타본 적이 없는 것처럼 지노는 탑승권 하나 제대로 끊을 줄 몰랐다. 카렌이 나서서 해결해주자, 그는 주눅 드는 것 하나 없이 환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미레이가 자주 가는 가게는 조계의 번화가 근처에 있었다. 전철로는 15분이면 도착한다는 카렌의 말에 지노는 전철을 15분이나 타는 건 기대가 된다며 기뻐했다.
전철은 금방 도착했다. 기다리는 것 없이 타는 것도 럭키! 들뜬 지노와 다르게 어딘가 피곤해지는 기분으로 카렌은 전철의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지, 연신 떠들어대던 지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카렌은 브리타니아 본국에 와본 적 있어?”
“…아니. 나는 여기서 나고 자라서.”
“흐음, 듣기로는 슈타트펠트 본가는 펜드래곤에 있다고 하던데."
대답하는 것 대신에 침묵으로 대꾸하자, 지노는 별 거 아닌 걸 물었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슈타트펠트는 꽤 복잡하구나?”
그리고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서 쇼핑만 하고 돌아가면 좋을 텐데. 그러나 지노는 카렌이 원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주지 않았다.
“카렌은 에리어11이 좋아?”
에리어11이 아니라고, 여기는 일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랬다가는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나이트 오브 스리가 저에게 붙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거니와, 자꾸 저를 떠보는 듯한 질문을 하는 것이 이상했다. 마치 ‘코우즈키 카렌’을 아는 것처럼 굴고 있다. 카렌은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렌의 긍정에 지노는 기분이 좋은 듯 씩 웃었다.
“나도 그래. 에리어11은 사쿠라다이트 말고는 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곳이야.”
카렌은 크게 동요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카렌이랑 함께 해서 더 재미있는 거 같아.”
그 말에 카렌은 KMF에 타도 한 번도 한 적 없는 멀미를 하는 기분이었다. 병약함을 연기하다 못해 몸이 진짜로 약해진 걸까. 아니면 저런 거에 설레지 못할 정도로 나는 찌들어버린 걸까. 안색이 순식간에 안 좋아진 카렌을 보고서 지노는 또 아하하, 웃어버렸다. 아픈 사람을 보고 웃어? 카렌은 황당한 나머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하, 그런 거 좋아. 카렌은 원래 그런 표정이 더 잘 어울려.”
그런 표정? 그 말에 카렌은 고개를 바로 돌렸다. 한참을 실실대는 것 같던 지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전철이 덜컹거리는 소음이 간간히 들리고, 두 사람은 바깥만 바라보다가 내려야할 역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15분은 제법 긴 시간이었다.
* * *
“검은색이 스테디라고는 하는데 빨간색이 더 예쁘지 않나? 어떻게 생각해, 카렌?”
형형색색의 바니걸 의상을 입은 마네킹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지노의 모습에 카렌은 죽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나는 레지스탕스라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어야 마땅한데! 어째서 이런 바니걸 의상에 고민하고 있는 적의 뒤통수를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회장님한테 전화해도 받지를 않으니까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아무거나 골라도… 될 거 같은데.”
“아니, 모처럼 처음 맡은 임무인데 제대로 해내고 싶어.”
“…….”
임무라고 말하니 또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고작 바니걸 의상을 사는 것뿐이다.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어가며 지노는 고심했다.
“그런데 이거, 카렌이랑 나도 입는 거지? 카렌이 입으면 몰라도 내가 입으면 엄청 흉할 거 같은데.”
그런 걸 입는 날이 오면 그날로 학교를 관둬버릴 것이다. 카렌은 영혼이 나간 눈으로 대충 검은색 바니걸 의상을 짚으면서 ‘구관이 명관이다’라고 주장했다. 깊게 고민하던 지노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카렌한테는 빨간색이 잘 어울려.”
뭔 개소리야, 난 안 입을 건데. 병약 캐릭터는 그걸 위해서 연기하고 있다고. 카렌은 슬슬 경련이 오는 입가의 미소를 겨우 띄웠다. 지노는 그런 카렌을 보며 또 즐거워했다. 진짜 취미가 고약하군. 인내심의 한계가 오는 것이 느껴졌고, 카렌은 그렇다면 빨간색으로 사서 돌아가자고, 이젠 불편한 기색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아, 그렇지만 손님. 남성용 재고가 가장 많은 컬러는 아무래도 검은색이에요.”
“그래요? 고민되네. 남녀 모두 같은 색을 해야 통일감이 있지 않을까.”
“차별성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남자 분들은 검은색, 여자 분들은 빨간색이 어떨까요?”
“어떻게 생각해, 카렌?”
어떻게고 나발이고 그냥 돌아가고 싶다. 카렌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당히 타협이 된 모양인지 지노도 더 이상 묻지 않고 학생회 멤버 수대로 주문을 부탁했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노는 그 말에 미레이의 카드 대신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문양이 새겨진 카드를 내밀었다. 점원은 놀란 눈으로 지노와 카렌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더 이상의 반응을 하지 않고서 침착하게 결제를 마친 뒤, 애쉬포드 학원까지 직접 배달해주겠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카렌이랑 편하게 데이트할 수 있겠어요.”
지노의 능청스러운 말에 점원은 허허 소리 내어 웃었고, 카렌은 난데 없는 ‘데이트’라는 단어에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카렌, 또 재미있는 얼굴 하고 있어. 지노는 히죽 웃으면서 카렌이 먼저 가게를 나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잘 배운 명문가 귀족 자제의 몸짓으로 카렌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렌은 그런 모습에서 설렐만한 포인트는 어느 것 하나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 밖으로 나오고 나면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지노는 카렌의 옆에 서면서 말했다.
“방금 전에 나, 멋있었지?”
“응?”
“나이트 오브 라운즈인 걸 이때 써먹지 언제 써먹나 싶어서.”
“…….”
정말 재수없다. 카렌은 못들은 척을 하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노는 가게 근처의 식당가를 가리키며 카렌에게 물었다. 정중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가 하는 말은 카렌을 시종일관 열받게 했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않을래?”
“…부모님이 걱정하셔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실까?”
보통의 멀쩡한 부모라면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옆에 있는 상황 자체를 걱정하시겠지. 카렌은 이를 악물고서 병약한 여학생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지노, 난 어제도 말했던 것처럼….”
“이런 상황이 불편해?”
“으응.”
“어떤 상황인데?”
“…….”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주제를 모르고 자꾸 내 앞에서 나대는 게 너무 싫어, 라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카렌은 이런 상황, 이라고 겨우 얼버무렸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지노는 끈질겼다.
“그, 방금 전에도 말한 데이트…라던가, 아무튼 그런 식으로 말한다거나.”
“하지만 데이트잖아? 나는 카렌이랑 데이트하고 싶어서 일부러 나온 건데.”
뻔뻔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지노는 또 어떤 것이 있냐는 식으로 물었다.
“이게 데이트는 아니잖아. 우리는 지금 학생회 이벤트에 쓸 물건을 사러 나왔을 뿐이야.”
“그래, 근데 단둘이서 나왔지. 그럼 데이트 아니야?”
“데이트가 아니라 이건 그냥 심부름이잖아.”
“그럼 데이트는 뭐야?”
“데이트는 보통 어디서 만날 건지 약속하고서 만나서 노는걸 데이트라고 하는 거지, 이렇게 너랑 막무가내로 나와서 밥 먹고 돌아가자고 하는 걸 데이트라고 하진 않아.”
“우와, 나 카렌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거 처음 들어.”
저걸 진짜 죽일까. 지금 당장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들고 찌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카렌은 참을 인忍을 세 번 새겼다. 성질을 죽이기 위해 카렌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노는 어제처럼 천천히 따라왔다. 그에게서는 싱긋 웃고 있는 낌새가 느껴졌다. 뭘 쪼개고 있는 거야. 카렌은 씩씩거리면서 전철역 앞까지 단숨에 걸었다.
“카렌, 엄청 빠르네. 숨 안 차?”
“괜찮아.”
“이렇게 속도를 낼 수 있는데, 왜 몸이 약하다고 하는 거지? 혹시 거짓말인 거 아니야?”
또 떠보는 듯한 질문이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게 거짓말이 들통 나면 일이 커져도 보통 커지는 게 아니니까. 카렌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괜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노는 그렇구나, 라고 태평하게 말하며 (가짜지만) 아픈 여자애 옆에 서서 부축하려고 했다. 그건 괜찮다고 손을 쳐내자 지노가 물었다.
“여기까지 숨 참고 걸은 거야?”
그런 게 되겠냐. 멍청한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모를 말이었다. 숨이 안정된 것처럼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고 나서, 이제 전철을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걸어가려고 할 때였다.
“카렌만 괜찮다면 저기 앞에 있는 가게에서 크레페 먹어도 될까? 나 진짜 배고프거든.”
“…….”
“10분이면 돼. 아니, 5분.”
지노는 정말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비열한 브리타니아 양아치 자식아, 그런 불쌍한 표정을 짓는 건 반칙이잖아! 카렌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역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크레페를 주문했다. 지노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제법 양이 되는 크레페를 단숨에 먹어치웠다. 그 바니걸 의상을 고르는 데에 제법 체력을 쏟은 걸까, 카렌도 우물우물 먹다보면 절반을 해치웠다.
“카렌, 이거 맛있지 않아?”
“응, 맛있어.”
“하나 더 시켜야지.”
카렌 또한 하나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병약하기 때문에 많이 못 먹는 설정 중이라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아, 진짜 피곤하네! 지노는 활짝 웃으면서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 사이에 카렌은 남은 절반을 다 먹었다. 카렌의 빈손에 남은 하나를 건네준 지노는 뿌듯해 했다.
“뭔가 하나로는 부족한 거 같아서.”
“…나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
사실 먹을 수 있어. 너만 없으면 진작에 먹었을 거야. 지노는 정말 여러모로 오늘 카렌의 인생에 있어서 방해 그 자체였다.
“흠, 그럼 들고만 있어줄래? 내가 먹을 테니까.”
“……응.”
“그럼 이제 우리 데이트 한 건가?”
“응?”
갑자기 튀어나오는 데이트라는 단어에 카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노는 틀린 말이 없지 않냐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서 만날지 약속해서 놀았잖아. 카페에서 가서 크레페를 먹었고— 데이트했네, 우리.”
“너는 왜 자꾸 나랑 그런… 그런 걸 하고 싶어해?”
카렌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이 억울했다. 놀림 받아서 속상하다는 마음 여린 소녀처럼 보일까봐 싫었다. 현실은 지노의 잘 땋은 세 가닥의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인데, 그놈의 병약 캐릭터가 뭐라고 이렇게 발발 떠는 아기고양이처럼 말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흑의 기사단 에이스, 코우즈키 카렌인데!
“당연히 카렌이랑 함께 있고 싶으니까 그렇지.”
으악! 너무 싫어! 카렌은 소름이 끼치는 팔을 절로 끌어안으면서 기겁했다.
“하하, 진짜 싫어하네.”
지노는 상처 하나 받지 않은 얼굴로 상큼하게 웃었다. 왜 웃어? 변태야? 거절 당하는 거에 희열을 느끼는 마조히스트야? 카렌은 입밖으로 소리만 안냈지만 얼굴로는 수습하지 못할 욕들이 표정으로 새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뜨거운 것은 기분 탓이 분명했다.
그런 카렌에게서, 그녀가 들고 있던 마지막 크레페를 먹겠다고 한 지노는 얼굴에 뭐 하나 묻히는 것 없이 깔끔하게 먹었다. 잘 먹는다, 그것도 맛있게 먹네. 카렌은 그런 지노를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지노는 웃으면서 왜 쳐다봤는지 캐묻진 않았다. 물어보지 않는 것이 어쩐지 더 열받았다.
카렌이 도닦는 마음으로 지노의 식사가 끝나는 걸 기다렸을 무렵에, 때마침 타이밍 좋게 울리는 벨소리에 지노는 전화를 받더니 ‘금방 갈게’라고 말했다. 이제 돌아가는 건가? 드디어 이 끔찍한 상황이 끝난다는 안도와 동시에 뭔가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라운즈 집합 명령이야. 카렌,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 조심히 들어가.”
카렌을 전철역의 플랫폼까지 데려다주면서 지노는 정말 아쉬워했다. 마음 같아서는 트리스탄으로 태워다주고 싶네, 라고 하는 말에 카렌은 질색했다. 쟤는 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의문은 끊이지 않고 들었으며 그러면서도 계속 휘말리고 있는 자신이 불안해서 싫었다.
전철을 기다리기 위해 올라가려던 때에, 지노가 카렌을 붙잡았다.
“다음엔 진짜 데이트를 하자, 카렌.”
이번에도 싫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카렌은 입을 열지 못했다. 고개를 젓지도 못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빤히 쳐다보는 카렌에게, 지노는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금방이라도 가까워지는 거리. 키스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에서 지노가 한 것은 손을 잡아보는 것 뿐이었다. 뜨거운 지노의 손끝이 긴장으로 식은 카렌의 손에 닿았을 때, 카렌은 그 손을 밀치거나 내치는 것 대신에 얌전히 붙들려있었다. 서로 손을 한참 잡고 있다가, 멀리서 들리는 전철이 도착하는 소리에 카렌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빼내었다.
지노는 빠져나가는 카렌의 손을 다시 붙잡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전철을 타기 위해 달아나는 카렌을 보고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문이 닫히려는 전철을 전력질주로 겨우 잡아탄 카렌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점점 커지는 것에 당황했다.
이게 뭐야, 왜 이러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뜨거워진 뺨을 부여잡으면서, 카렌은 지노를 생각했다. 그 열받는 말투, 나를 떠보는 듯한 태도, 재수 없기 짝이 없는 그 녀석. 그리고 그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다음엔 진짜 데이트를 하자. 다음? 그건 또 언제일까.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나면, 카렌은 지노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끝>
공지 | <부활의 를르슈> 스포일러 있는 글은 * | 2019.05.12 |
325 | 스자루루하는 를르슈의 우울 | 2024.02.04 |
324 | 그동안 쓴 것들 [크리스마스] [치키타 구구 AU] | 2023.12.29 |
323 | 리퀘스트 - 머리 말려주기 下 | 2023.11.27 |
322 | 리퀘스트 - 머리 말려주기 上 | 2023.11.27 |
321 | 리퀘스트 - 원나잇 콜렉터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나이트 오브 세븐을 만남 | 2023.11.25 |
320 | Piano | 2023.11.17 |
> | Super Shy | 2023.11.06 |
318 | Ditto | 2023.11.06 |
317 | 스자쿠의 얼굴을 하루종일 보는 를르슈 | 2023.11.05 |
316 | 2023 스자루루 가운데 생일 기념 4 | 2023.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