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업으로 늦게 끝난 를르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벌써 토요일 자정을 넘어선 때였다. 이놈의 회사, 언젠가 가만두지 않을 테다…라고 중얼거린 를르슈는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절경에 잠시 피곤을 잊었다. 절경, 이라고 해봤자 트렁크 한 장 차림의 반라의 스자쿠가 물기에 촉촉하게 젖어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지만, 를르슈는 잠시 입맛을 다시면서 신발을 벗는 것도 잊었다.
“어서 와. 늦었네, 를르슈.”
“…뭐, 미리 늦는다고 말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늦을 줄은 몰랐어.”
스자쿠의 반겨주는 말에 그의 잘 빠진 쇄골을 보느라 를르슈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지만, 스자쿠는 를르슈가 늦은 것이 불만스러운듯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다.
“를르슈는 저녁 먹었어?”
“어. 너는?”
“나도.”
“뭐 먹었어?”
“피자.”
“또 몸에 안 좋은걸….”
“를르슈가 먹을 것도 남겨놨어.”
“안 고마워.”
“고맙다고? 알았어.”
태연하게 를르슈의 말을 받아치는 스자쿠는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리고 이내 목에 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기 시작했다. 그런 스자쿠를 보면서 를르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거칠게 하면 머릿결 나빠져.”
“어차피 곱슬이라서 좋아도 다 엉키네요.”
“기다려 봐, 내가 말려줄 테니까 욕실로 와.”
“싫어, 귀찮아.”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오, 마지막 말은 좀… 엄청난데요, 람페르지 씨. 스자쿠의 음흉한 미소에 를르슈는 미동 하나 하지 않고서 손끝을 까닥거리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스자쿠는 잠옷으로 입는 트레이닝복 바지를 꿰어입고는 티셔츠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왜 위에는 안 입어?”
“를르슈가 더 보고 싶어하는 거 같아서.”
“뭐를?”
“뭐겠어?”
“참나…. 네 몸 볼 거 다 봤는데 이제 와서 더 볼 게 있…….”
“방금 전에 내 몸 보느라 대답도 건성으로 했잖아.”
정곡을 찔린 를르슈는 스자쿠의 등을 꼬집었다. 아악, 하고서 소리 지르는 스자쿠에게 시끄럽다고 말한 를르슈는 그를 뚜껑을 내린 변기 위에 앉혀놓았다. 낮아진 스자쿠의 시선이 저를 올려다보는 것에 를르슈는 괜히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웠다. 나 그렇게 정신 없이 쳐다보고 있었나…? 손을 씻고 마른 수건으로 닦은 를르슈는 시선을 모르는척 하면서 헤어 드라이어를 꺼냈다. 전원을 꽂고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스자쿠의 머리카락 끝을 향해서 바람을 쐬어주면 스자쿠가 어깨에 힘을 풀고 를르슈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뭐야, 이건.”
“안아주고 싶어서.”
“됐어, 불편하니까 가만히 있어.”
“히잉.”
“히잉이 뭐냐, 히잉이. 너 몇살이야?”
“너무해.”
“귀여운 척 금지.”
“귀여운 척이 아니라 귀여운건뎅.”
“그럼 귀여움 금지.”
“그거 어떻게 하는 건뎅?”
“네가 입을 다물면 될 거 같다….”
시끄러운 드라이어 소리에도 스자쿠는 연신 쫑알거렸다. 부들부들한 스자쿠의 곱슬머리가 손끝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두피부터 미지근한 바람으로 말리면서 그의 머리카락 끝까지 매만졌다. 를르슈가 불편하다고 하니 스자쿠는 허리에 둘렀던 팔을 내려놓고서 얌전히 그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평소보다 더 곱슬곱슬한 느낌인데.”
“약간 방향을 바꿔서 드라이를 했으니까.”
“…흐음, 를르슈 취향이야?”
“너는 언제나 내 취향이야.”
를르슈도 스자쿠와 사귄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느끼한 대사 한두 마디 정도는 받아치는 기술은 이제 패시브인 것이다. 반면 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게 드라이어를 정리하면서 하는 를르슈의 말에 두근거렸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를르슈의 감성을 닮아가나봐, 나. 스자쿠는 뜨거워진 뺨을 감추면서 를르슈의 등을 끌어안았다.
“또 뭐야?”
“를르슈도 씻을 거지?”
“그래야지.”
“속옷이랑 잠옷 가져다 줄게.”
“고마워.”
먼저 욕실을 나갔다 온 스자쿠가 를르슈의 파자마와 속옷을 가져다주었다. 한 차례 더 고맙다고 말하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헤헤 웃을 뿐이었다. 옷을 벗은 를르슈는 빨래바구니에 옷을 집어 던져넣고서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로 몸을 덥히고 있으면 피곤이 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아, 오늘 진짜… 진짜…. 를르슈는 눈을 감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오늘 진짜 개같이 피곤했는데 스자쿠가 나의 복지다. 정확히 말하면 자양강장제 같은 거지. 를르슈는 피곤함에 지쳐서 그냥 쓰러져 잘 생각이었지만 헐벗은 스자쿠의 몸을 보자마자 솔직하게 꼴려버린 자신의 음심에 따르기로 했다.
를르슈는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서 스자쿠의 물고 빨 준비를 위해서 바디로션을 생략했다. 속옷을 입으려고 스자쿠가 가져다 준 파자마 사이에 있는 그것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평소라면 비키니 스타일의 무난한 검정색인 그것이, 오늘은 엉덩이를 가릴 생각이 없는 빨간 티 팬티라는 점에서 를르슈는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문제는 를르슈는 자기 남자의 발칙한 속셈이 귀엽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 오늘 한 번 죽어보자. 를르슈는 손바닥만한 빨간 속옷을 입으면서 스자쿠를 조질 각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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