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져진 것은 를르슈였다. 떡을 치다 못해 떡이 되버린 를르슈는 스자쿠의 품에 붙들려서 다시 욕실로 돌아왔다. 스자쿠 또한 머리를 말려준 보람이 없게 흐트러졌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목에 팔을 두른 채로 자신을 안았던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응?’하는 앳된 반응과 동시에 가벼운 볼 키스가 돌아왔다. 척하면 척이다. 를르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욕실에서 씻는다는 의미가 없게 가벼운 거사를 두 번 치르고 이젠 떡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곤해진 를르슈가 욕조에서 뻗어버린 것에 스자쿠는 키득거리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정신 차려, 를르슈. 여기서 자면 감기 걸려.”
“빨리 옷 입혀줘. 그리고 머리도 말려줘.”
“그럼, 그럼. 다 해줘야지.”
“죽겠다…….”
“죽을 만큼 좋았다구?”
“그래, 임마.”
스자쿠가 일으켜서 몸의 물기를 닦아주는 것에 를르슈는 금방이라도 흐느적거릴 것 같은 몸을 겨우 바로한 채로 있었다가, 입혀주는 파자마로 옷차림을 갖추고 나면 뚜껑을 내린 변기 위에 털썩 앉아버렸다. 두 시간 전에 스자쿠의 머리를 말려주느라 치워둔 헤어 드라이어가 들어있는 선반을 툭툭 건드리면 스자쿠는 잽싸게 헤어 드라이어를 꺼냈다.
시끄러운 소움이 커지기 전에 우선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한 번씩 훑어주는 스자쿠의 손길에 를르슈는 눈을 감았다. 자기 머리를 만질 때에는 거칠게 탈탈 터는 모양새인 것에 비해, 를르슈의 머리를 만질 때에는 조심스럽게 모발 끝의 물기를 닦아내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 많이 길렀네, 를르슈.”
“아아, 자를 때가 됐어.”
“나 그거 좋아, 를르슈가 귀 뒤로 머리카락 넘기는 거.”
“그래?”
“뭔가 야해.”
“미안하지만 이제 야하다고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거든?”
정말로 아무것도 안 나와. 애당초 말이야, 늦은 밤까지 잔업한 직장인이 새벽까지 섹스를 해줬다는 건 엄청나게 사랑한다는 의미니까 섭섭해하진 마라. 를르슈의 덧붙여지는 말에 스자쿠는 알고 있다면서 쿡쿡거리고 웃었다.
“딱히 뭐 나오라고 말한 건 아니야. 그냥… 머리 기르는 를르슈도 보고 싶어서 그래.”
“머리 넘기는 건 지금도 할 수 있는데.”
를르슈는 아직 물기가 남은 촉촉한 손끝으로 머리카락 몇가닥을 귀 뒤로 넘기면서 씩 웃었다. 그건 어딘가 작정한 듯한 표정이었으나, 스자쿠는 를르슈에게서 이제 나올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또 엄청나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했다. 를르슈가 비록 확신범 같은 미소로 음흉하게 웃고 있다 하더라도!
“뭔가 그런 느낌이야.”
“무슨 느낌?”
“음란 유부녀, 남편이 출장 간 사이에 못 참고 그만…… 같은.”
“취향 한 번 조악하다.”
“저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거든요, 음란 유부녀 씨.”
“누가 음란 유부녀야?”
“소악마계 쿨뷰티 애인♂의 도발섹스…는 어때?”
“너 AV 제목 짓는 거에 재능 있는 거 아니야?”
“를르슈 한정으로만 재능 있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
“너 사실 밤마다 컨셉 잡지?”
“그런 생각 해본 적은 없는데… 앞으로 참고할게.”
“뭘 참고하는 거야.”
“를르슈와의 뜨거운 밤… 매너리즘 타파 섹스!”
“웃기네, 진짜.”
그렇게 말했지만 듣기에는 영 나쁘지 않은 ‘소악마계 쿨뷰티 애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를르슈는 스자쿠의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를 맡기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규칙적인 헤어 드라이어의 소음과 스자쿠가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두피에 뜨거운 바람이 닿지 않게 살살 어루만지는 것에 잠이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를르슈는 꿈뻑꿈뻑 감기는 눈과 나오는 하품을 번갈아 하면서, 머리카락이 거의 다 말랐을 무렵에는 스자쿠의 품에 기대면서 졸리다고 말했다. 방금 전의 스자쿠가 를르슈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애교를 부리던 것과 비슷한 자세였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뺨을 만져주면서 따끈따끈하게 열이 오른 를르슈가 완전히 잠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금방 할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귀찮아… 이제 됐으니까 잘래. 방금 전까지는 음담패설로 여유롭게 웃더니, 이제는 애가 되어서 다 귀찮다고 칭얼거리는 것이 귀엽게 느껴지기만 하는 것은 아마도 사랑이겠지. 나는 를르슈를 사랑하나보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나오는 거 없대도.”
옛날 같으면 부끄럽게 뭐하는 짓이냐고 크게 화를 냈을 텐데, 이제는 여유롭게 그 접촉을 즐기는 를르슈의 모습에서 스자쿠는 그의 애정을 느꼈다. 나는 를르슈를 사랑하고, 를르슈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스자쿠는 를르슈의 보들보들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를르슈가 가늘게 눈을 뜨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왜, 음란 유부녀 자는 거 처음 봐?”
“하하하, 소악마계 쿨뷰티 애인♂ 침대까지 모시고 가야 되는데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기꺼이 협조하지.”
욕실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스자쿠의 품에 안겨서 나가는 자신의 모습에 를르슈도 새삼스러운 것을 깨달았다. 나는 스자쿠를 사랑하고, 스자쿠도 나를 사랑하는군. 정말 완벽한 사실이군.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정의였다. 그렇게 두 남자는 같은 생각으로 침대에 누우며, 같은 꿈을 꾸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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