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오브 세븐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말 뿐이었다. 를르슈 전하의 마음은 굳혀졌어, 라는 지노의 말을 듣고서 스자쿠는 황제와의 알현을 앞둔 자리에서 바로 뒤돌아 나섰다. 스자쿠, 어디 가는 거야?!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스자쿠는 멈추지 않고서 바로 를르슈의 집무실로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황제의 알현실에서 정반대 방향에 있는 를르슈의 집무실 근처에는 아리에스에서 옮겨 심은 꽃나무들이 아직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였고, 평소라면 그것을 아쉬워하며 를르슈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여유를 보여줬던 스자쿠는 오늘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전하께서 결혼하신대.
—…누구와?
—미레이 애쉬포드. 옛날부터 친하기도 하셨고… 비 가문에도 든든한 패트론이 되어줄 거라고 하셔서.
—왜 나한테는…!
나한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마음대로…!
스자쿠는 를르슈의 집무실에 노크조차 하지 않고 벌컥 들어섰다. 그러나 그 문을 열고 나면 아무도 없었다. 그가 자주 앉아있던 책상은 비어있었고, 책장에 가득했던 서류와 책들은 텅 비어있었다. 마치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텅 비워져 있었다.
그는 도망친 것이다. 스자쿠를 두고서 결혼하는 자신에 대해서 비겁함을 알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다. 스자쿠보다 한 발 늦게 도착한 지노가 다급하게 쫓아왔다.
“스자쿠! 아무리 그래도 폐하의 알현을 앞두고 나가는 건…!”
“그래서, 그래서 를르슈 전하는 어디 계셔?”
“그건….”
“너한테도 말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한 거야?”
“……둘 다 맞아.”
스자쿠는 를르슈가 자주 앉던 책상 근처로 다가갔다. 아무런 온기도, 사용감도 없이 텅 비어있는 책상을 손으로 쓸어보고서 스자쿠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지노가 더 붙잡기 전에 스자쿠는 를르슈의 집무실이었던 공간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원래대로의 알현을 마쳤다. 아리에스로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서, 스자쿠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지금 찾아가도 그는 만나주지도 않을 것이며, 만날 수도 없는 곳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차 안에서 밖으로 흐르는 풍경들을 보면서 복잡한 머릿속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미레이 애쉬포드는 자신의 회사에 대뜸 찾아온 나이트 오브 세븐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군복 차림으로 앉아, 미레이의 비서가 가져다 준 형편 없는 홍차를 마시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나이트 오브 세븐의 행차에 회사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그 유쾌하지 못한 공기 속에서 미레이가 애써 웃으면서 스자쿠의 앞에 앉았다.
“쿠루루기 경, 여기까지 무슨 일로…?”
“무슨 일로 왔는지, 본인이 제일 잘 알 텐데요.”
“제가요?”
미레이는 사실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를르슈 전하 때문이겠지. 미레이도 제대로 못을 박아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제 결혼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거라면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
“…….”
“자리를 옮길까요? 저희집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랑이소굴로 들어가는 기분… 아니, 호랑이를 집으로 부르는 거나 다름 없는 기분이라 미레이는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겨우 폈다. 미레이와 스자쿠가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와르르 쏟아지는 사람들의 궁금함이 묻어나는 시선 속에서, 스자쿠는 어디 하나 동요하지 않은 얼굴로 미레이보다 앞장 서서 걷고 있었다.
그래, 를르슈 전하와 자주 웃는 얼굴을 보고서 잊고 있었지만… 저 사람은 브리타니아의 하얀 사신이었지, 참. 미레이는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뒤를 씩씩하게 따라걸었다.
* * *
애쉬포드 저택에는 자주 찾아왔다. 비 가문의 공식적인 패트론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로 힘이 되어주고 있는 가문이기 때문에 를르슈와 나나리는 자주 초대받아 그 저택에 놀러갔었고, 그들의 호위로 스자쿠가 따라가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평소의 분위기처럼 말할 수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었으며 사건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 미레이는 바싹 마르는 입술을 겨우 홍차로 적시고서는 입을 열었다.
“비 가문 쪽에서 청혼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저도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어요.”
“를르슈 전하께서 먼저 청혼을 하셨다고요?”
“…뭐어, 서류상으로는 그런거죠.”
“…….”
“그, 그렇지만 저도 집안 어른들이랑 상의도 해야하고, 무엇보다도 당사자끼리의 대화도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아직까지 확답은….”
“이미 황궁에서는 두 분이 결혼하시는 걸로 소문이 자자해요.”
스자쿠는 지난 며칠간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아리에스의 황자님께서 결혼을 하신대, 라는 이야기는 메이드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소꿉친구였던 미레이 애쉬포드가 드디어 그 짝사랑의 끝을 보게 되었다, 라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소문이 돌고 돌았다.
미레이는 그 말을 듣고서 미간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그런 게 아닌데. 미레이가 그렇게 중얼거리든 말든,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곳에 를르슈 전하는 없군요.”
“네?”
“저는 미레이 씨가 를르슈 전하를 숨겨주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요?”
“네, 두 분이서 진한 대화라도 나누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미레이 씨도 모르는 내용이라고 하시니까, 그 말을 믿고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레이는 나가려는 나이트 오브 세븐을 붙잡았다. 아, 이건 말해야 되는데. 그러나 스자쿠의 음울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서류상으로 청혼이 오긴 왔지만 그냥 서류만 온 게 아니라.”
“또 뭔가 있습니까?”
미레이는 메이드에게 ‘그걸 갖다줘’ 라고 말했다. 메이드들이 황급하게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하얗게 빛이 나는 아름다운 웨딩드레스 한 벌이, 그것도 미레이에게 딱 맞춘 듯한 분위기의 드레스가 한 벌이 나타났다.
“이 드레스랑 같이 온 서류에는 언제 결혼할지, 결혼하고 나서의 일들에 대해서 적혀있었어요.”
“……멋없는 청혼이군요.”
스자쿠는 그 웨딩드레스를 보고서 숨을 들이켰다. 바짝 긴장한 그의 등 뒤로는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이 드레스는 하루 이틀 만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를르슈는 꽤 오랫동안 이 청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인인 스자쿠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스자쿠는 그것을 떠올리며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께서 언제 식을 올리자고 하셨죠?”
“……이번 주 토요일이에요.”
“빠르다면 빠르고, 여유가 있다면 있군요. 알겠습니다.”
스자쿠는 그녀를 등지고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인사도 받지 않은 채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차를 타고서 돌아갔다.
미레이 애쉬포드. 그녀가 를르슈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를르슈의 선택은 언제나 스자쿠였기 때문에 한 번도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녀라면… 이렇게 돌아온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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