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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자 11

그는 여자 / DOZI 2024.04.28 11:49 read.70 /

스메라기 카구야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이제까지 누려왔던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며, 오히려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서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카구야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위해서 욕심을 부리는 걸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포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점은 교토6가 안에서 스메라기 집안의 입지를 굳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고, 그녀의 인생에서 플러스가 될지언정 마이너스가 될 요소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권력과 명예에 대해서 언제든 책임질 준비가 된 리더였다. 누군가를 앞서 끌고 나가는 것이 그녀의 숙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에 끌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세상의 이치 중에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구슬리는 것에도 카구야는 능숙했지만, 단 한 사람— 쿠루루기 스자쿠를 앞두고 있을 때면 카구야는 모든 것이 피곤해졌다. 스자쿠 한 명을 설득하는 것은 교토6가의 늙은이들 전부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하지만 카구야는 자신이 왜 유독 쿠루루기 스자쿠에게만 진을 빼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스자쿠와 카구야는 좋든 싫든 닮은 꼴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손에 넣고, 가진 것이 있으면 빼앗기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어리석은 이에게는 아량을 베푸는 것보다 짓밟는 것에 익숙한 속내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싫은 상대에게는 한 번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도, 스자쿠와 카구야는 닮아있었다. 그런 서로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구야는 스자쿠와 엮이는 것이 싫었다. 동족혐오라면 동족혐오일 것이고,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사람은 애당초 싫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여길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카구야가 가지고 있는 현재 상황을 보다 낫게 진행시키기 위해서, 교토6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라면 카구야는 스자쿠를 한 번쯤은 품어줄 생각이었다. 교토의 아가씨로 나고 자란 카구야는, 교토6가가 만들어준 자신의 기득권에 대해서 언젠가 답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기 위해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쿠루루기 스자쿠와의 결혼에 응해야 한다고 여기는 편이었다. 그것은 카구야가 어렸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으며, 스자쿠가 원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실행시켜야 할 임무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자쿠 또한 자신의 현상 유지를 위해서 이 정도의 귀찮음은 이해하며 언젠가는 카구야의 뜻에 의해 꺾일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쿠루루기 스자쿠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카구야는 자신이 이제껏 보고받은 스자쿠의 행적이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객관적 사실만 늘어놓는다면 스자쿠는 어린 아이를 상대로 강간을 저지르는 중이었다. 그 어린 아이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라는, 스자쿠의 하나 뿐인 아내로 10년째 호적에 올라가 있으며, 스자쿠와의 관계에 있어서 호의적이라고 할지라도 세간의 인식은 그들을 강간범과 피해자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 사실을 들이밀어도 스자쿠는 어떤 것에도 당황하지 않으면서 카구야의 이야기를 가볍게 넘기고 또 비웃을 뿐이었다. 고작 그런 것으로 자신을 상대할 생각이냐고 되묻기까지 하는 여유도 보였다.

물론 그런 스자쿠의 여유로움까지도 계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구야가 타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쿠루루기 스자쿠의 숨통을 어떻게 옥죄고, 최종에는 어떻게 끊어놓을지에 몇날며칠을 고민하던 카구야는 행동으로 옮겼다.

그런 스메라기 카구야가 쿠루루기 저택을 찾은 것은 스자쿠가 없었던 어느 날의 오후였다. 스메라기의 아가씨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방문한 것에 대해서 쿠루루기 저택의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이내 손님으로써 그녀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쿠루루기 집안의 모든 주인들이 자리를 비웠다는 이야기에 카구야는 그것을 알고 왔다는 내색은 하지 않은 채, 그저 기다리겠다며 안내된 응접실에 앉아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몇번이고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겐부와 스자쿠만 만날 용건 뿐이었기 때문에 오늘처럼 긴장한 적은 없었다.

카구야는 자신이 싸움을 걸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관계상 연적이 될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를 만나고 말겠다는 각오로 그녀는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만약 그 브리타니아의 황자님을 건드렸다가 스자쿠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어 일이 뒤틀린다고 할지라도, 카구야는 두렵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스자쿠와 카구야는 닮았기 때문에 카구야는 스자쿠가 할 만한 사고 방식의 루트를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카구야를 적대하지는 못할 것이고, 브리타니아 황자를 지키기 위해서 방어에 집중할 것이고, 카구야가 앞으로 가할 공격에 버티고 버티다가 맥없이 백기를 들 것이 분명했다. 그 백기를 볼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었다. 카구야는 이길 생각으로 싸움을 걸러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연적을 만나서 선전포고를 해야 하는 것이 카구야의 첫 번째 작전이었다. 카구야는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카구야를 대접하기 위한 준비는 한참 전에 끝났으니 그 주변을 돌아다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구야는 복도를 지나며,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방향으로 쿠루루기 저택의 안으로 들어섰다.

쿠루루기 저택은 찾아온 손님에게만 공개된 밖과 쿠루루기 집안 사람들이 사는 안이 엄격하게 나뉘어진 곳이었다. 카구야는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면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딘가에서 느껴질 어린 아이의 기척 같은 것을 기대했다.

쿠루루기 저택은 일본식으로 지어진 것은 스메라기 저택과 닮아있으면서도,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았던 안으로 들어갈수록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군데 군데 드러나는 브리타니아풍의 장식 같은 것들을 보면서, 카구야는 그 황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참을 돌아다녀도 아이의 웃음 소리 하나, 발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하인 조차 돌아다니지 않는 복도를 나와서, 카구야는 빛이 들어오는 정원 쪽으로 나가보았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그 아이가 거기에 서있었다. 카구야는 검은 머리와 보랏빛 눈을 한 그 소년이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얀 셔츠와 검은색 반바지를 단정하게 갖춰입은 소년은 카구야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에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반갑게 달려들지도 않았으며, 그저 침착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게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카구야는 그제서야 그의 시선에 자신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기선제압을 당한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 아이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이는 아이인 법. 카구야는 싱긋 웃어보이면서 를르슈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카구야의 당당한 인사에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닿아왔다. 안녕하세요, 하는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카구야는 를르슈가 서 있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쁜 정원이네요.”

 

를르슈는 카구야가 훑어보는 시선을 따라 정원을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정원의 풀밭을 벗어나서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왔다.

 

“정원은 예쁘지만… 스자쿠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요? 당신은 어떤데요?”

 

카구야의 물어보는 말에 를르슈는 정원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이 서있었던 곳에 닿았다. 다시 카구야에게 시선을 돌린 를르슈는 입을 열었다.

 

“저도 그래요. 좋아하지 않아요.”

“예쁘게 꾸민 정원사가 들으면 섭섭하겠네요.”

“괜찮아요. 아무도 정원을 싫어한다고는 하지 않으니까요.”

 

를르슈는 카구야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저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그가 묻는 방식은 직설적이었지만 날이 서있지는 않았다. 카구야에게 물어보는 말은 정중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가 쿠루루기 스자쿠의 아내라는 그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는 타고난 신사라는 것을 카구야는 느꼈다. 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메라기 카구야에요.”

“스메라기…?”

“네, 교토6가의 한 집안이기도 하죠. 스자쿠에게 제 이야기는 들어보신 적 있으실까요, 를르슈 씨?”

“아뇨.”

 

를르슈는 한 차례의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의 솔직하면서도 계산된 대답에, 카구야는 이 아이를 상대하는 것은 스자쿠를 대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울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럼 이제부터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

“…….”

“스자쿠는 제 이야기를 좀처럼 들어주지 않거든요.”

“그럼 저도 들어줄 이유가 없어요.”

“왜죠?”

“왜…라고 해야 할까요? 당연한 일이잖아요. 남편이 반대하는 일을 굳이 아내가 해야 할 것도 아니고요.”

 

카구야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를르슈의 말에 카구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렇게 나온다면 이야기가 빨랐다. 그러나 카구야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고 할 찰나에, 를르슈가 말했다.

 

“제가 응접실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스메라기 씨께서는 길을 잃으신 것 같으니까요.”

 

자신에게 틈을 주지 않겠다는 를르슈의 모습에 카구야는 말을 꺼내는 대신에 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곧은 자세로 걷는 를르슈의 뒷모습에서는 이 상황에 대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 저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 그는 카구야가 오지 않았던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를르슈 씨는 여기를 잘 알고 계시네요.”

“계속 여기 살았으니까요.”

“평생을?”

“네.”

“답답할 거 같아요.”

 

카구야의 던져지는 말에 를르슈는 걸음을 멈추어서 뒤를 돌았다.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에 카구야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스메라기 집안도 이 정도로 넓고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집이니까 밖에 나가는 것 만큼의 자유로움은 없거든요. 를르슈 씨는 그렇지 않나요?”

“자유로움….”

“듣기로는 를르슈 씨는 계속 이 집에서 두문불출이셨다고 하던데요.”

“…….”

 

그것은 완전히 를르슈를 떠보는 말이었다. 를르슈는 천천히 카구야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무언가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자유라는 말을 일부러 꺼낸 카구야의 도발에 대한 분노이길 바라며, 카구야는 ‘아닌가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를르슈는 시선을 거둔 채로 천천히 뒤를 돌아 다시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스메라기 씨, 조금만 더 가면 응접실이에요.”

“그렇군요.”

 

를르슈는 더 이상의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이 입술을 다물었고, 카구야는 를르슈가 화가 나서 입을 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봤자 어린 아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대로 입에 올린다면 그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자유롭다는 건 뭘까요?”

 

가만히 걷고 있던 를르슈의 발소리 사이로 들리는 질문에 카구야는 글쎄요, 라고 대답했다. 카구야가 던진 수에 를르슈는 그것에 걸려들 생각인 것 같았다.

 

“적어도 를르슈 씨가 처한 지금의 상황은 자유롭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어떤데요?”

“갇혀 지내는 거잖아요. 어디에도 못 가고, 나갈 수도 없고.”

 

를르슈는 그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느릿한 말투로 카구야의 말을 따라하는 를르슈는 싱긋 웃었다.

 

“제가 갇혀서 어디에도 못 가고, 나갈 수도 없고….”

“그렇죠.”

“스자쿠가 저를 그렇게 가두고 있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이 집안이?”

“아무래도요.”

 

를르슈는 그녀의 대답에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구야는 저 복도 반대편에서 보이는 응접실이 가까워지는 것에 이 대화가 어디서 끝날지 궁금해졌다.

 

“스자쿠가 왜 카구야 씨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지 알 것 같아요.”

“왜일까요?”

“카구야 씨는 너무 자기 중심으로만 이야기를 하니까요.”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을까요?”

“지금 같은 부분이겠죠, 뭐.”

 

를르슈는 재미있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카구야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휘어지는 두 눈동자에서는 카구야를 향한 비웃음이 느껴졌다. 를르슈의 그런 미소에 카구야는 머리에 찬 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들었다.

 

“자유롭지 않다거나, 갇혀있다거나… 그런 건 그렇게 느끼는 사람한테나 그런 거겠죠.”

“…….”

“저는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이에요.”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침착한 를르슈의 태도에 카구야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놀란 모습에도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게 응접실을 가리켰다. 카구야는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에 대해서 곱씹었다.

 

“응접실은 저기니까, 스메라기 씨는 저기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아요. 스자쿠한테는 제가 연락할게요.”

 

를르슈가 뒤돌아서서 가는 것을 카구야는 급하게 잡았다. 황급한 손길에 를르슈는 카구야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카구야를 기다려줄 듯 하다가도, 를르슈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다시 자신의 갈 길을 향해 걸었다. 홀로 남겨진 카구야는 차게 식은 손끝을 둥글게 말아쥐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 * * 

 

퇴근한 쿠루루기 스자쿠는 집안의 분위기가 평소보다 더 어수선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를 맞이하러 나온 를르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지만, 스자쿠는 그가 자신을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를르슈를 품에 안고서 자신의 서재로 돌아간 스자쿠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면서 다녀왔다고 말했다. 어딘가 들뜬 를르슈는 스자쿠의 키스에도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를르슈가 기뻐하는 모습은 좋지만, 스자쿠는 그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어떠한 기쁨을 얻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를르슈, 무슨 일 있었어?”

“응?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래?”

 

의자에 앉은 스자쿠는 를르슈를 무릎 위에 앉혀두고서 어떻게 그의 입에서 사실을 말하게 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스자쿠의 앞에서 비밀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인지, 를르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스자쿠랑 닮았어.”

“응?”

“오늘 말이야, 스메라기 씨가 찾아왔어.”

 

를르슈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스자쿠는 눈을 부릅떴다. 스메라기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를르슈를 만날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카구야를 지난 번 교토에서 그런 식으로 내친 이후로 다시 한 번 만날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녀가 비겁한 방식으로 돌파해오는 것은 예상 외였다. 놀란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을 덧붙였다.

 

“근데 별 일 없었어.”

 

를르슈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줘야 할지, 스자쿠는 자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를르슈와 마주하면서 생각했다. 스자쿠가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에, 를르슈는 다른 말을 꺼냈다.

 

“스메라기 씨랑 스자쿠는 눈이 닮았어. 물론 스자쿠 눈이 더 예뻐.”

 

자신의 눈이 더 예쁘다고 말하는 를르슈는 묘하게 흥분한 듯 했고, 그는 이내 사랑스러운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스자쿠의 눈가에 작게 키스했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울리면, 를르슈는 흡족한 얼굴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를르슈의 키스를 받은 스자쿠는 생각했다. 이건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를르슈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달라는 것처럼 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아랫입술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카구야가 왔는데 어떻게 별 일이 없었어?”

“흐음… 스자쿠는 스메라기 씨를 이름으로 부르는구나.”

 

를르슈는 아랫입술을 만지는 스자쿠의 손을 피하면서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까 스메라기 씨도 스자쿠를 이름으로 불렀어.”

“둘이서 내 이야기를 했어?”

“아니, 안 했는데.”

“했구나.”

“…했어도 별 이야기 아니었어.”

 

를르슈는 스자쿠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면서 말했다. 정말 별 이야기 아니었어, 라고 재차 강조하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집안에 있는 CCTV를 한 번 뒤져볼까 생각을 했다. 를르슈가 저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스자쿠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를르슈가 말했다.

 

“지금 스자쿠는 나를 못 믿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아닌데 왜 자꾸 물어봐?”

“신경 쓰이잖아.”

“난 스자쿠의 아내답게 잘 행동했어.”

“어떻게?”

 

를르슈는 별 걸 다 묻는다는 식으로 스자쿠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금방 스자쿠에게 다시 안겨들어서 그 웃는 얼굴을 감추었다.

 

“스메라기 씨는 스자쿠가 이야기를 잘 안 들어줘서, 내가 대신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했어. 나도 싫다고 그랬어. 스자쿠가 싫어하는 일인 거 같아서. 그리고 나도 스자쿠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싫다고 그랬어.”

“잘했어.”

 

를르슈는 스자쿠의 칭찬에 당연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고갯짓에 스자쿠는 그의 등허리를 천천히 토닥이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또… 스자쿠가 왜 스메라기 씨랑 이야기 하기 싫어하는지, 알 거 같았어.”

“하하, 그래?”

“내가 갇혀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 같았어. 나보고 자유롭지 못하다고… 그랬거든.”

 

스자쿠는 그 말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구야는 스자쿠의 성질을 긁다 못해서 뒤집을 생각인 듯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비겁한 수로, 스자쿠가 없을 때를 틈타서 를르슈에게 헛소리를 불어넣을 생각을 했을까. 를르슈는 스자쿠의 손이 멈춘 것에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근데 스자쿠랑 같이 있는데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스자쿠의 호흡에, 를르슈는 스자쿠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스메라기 씨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확실히 그런 편이지.”

“이제 됐어?”

“응. 그래도 나한테 바로 말 안 해준 건 를르슈도 잘못했어.”

“그건 미안해.”

 

를르슈는 스자쿠를 달래듯이 사과했다. 하지만 그래놓고서 뭔가 재미있는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웃었다. 스자쿠는 자신의 품안에서 쿡쿡거리면서 웃는 를르슈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말했다.

 

“스자쿠, 지금 섹스하고 싶지 않아?”

 

그가 묘하게 흥분하고 들떠 있는 상태인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유혹에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더 추궁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곧 입술에 닿아오는 여린 혀 끝에, 스자쿠는 이 어리고 영악한 아내의 꾐에 넘어가는 것도 어쩌면 남편의 소양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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