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수 를르슈 주의
나이트 오브 세븐이 부마의 자리에 오른 것도 벌써 반년 전의 일이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 중에서도 쿠루루기 스자쿠가 부마가 된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으며, 부마가 되었다고 한들, 대체 황족 중에 누가 그를 남편으로 맞이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어느 가문이 나이트 오브 세븐과 혼약을 맺었는지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쿠루루기 스자쿠가 출산휴가 신청서를 내밀었을 때,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선 그가 몸을 담그고 있는 캐멀롯에서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 일 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휴직기간에 반발했다. 로이드 아스플런드는 ‘전하와 나이트 오브 세븐 사이에서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랜슬롯과 나이트 오브 세븐 사이에서의 조정은 그때 그때 딱 한 번 뿐이니 랜슬롯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최종 결정권자인 황제는 자신의 기사이자, 자식의 남편인 쿠루루기 스자쿠의 휴직을 허가했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휴직에 로이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군가의 집무실로 뛰어갔다. 중앙 본궁에서 좀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아름답기로 따지자면 황궁에서도 손꼽히는 곳인 아리에스 궁의 주인은 예고도 없이 나타난 불청객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전~하!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그러는 건 너무 하잖아요!”
아리에스 궁의 주인인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로이드는 단정치 못한 걸음으로 삐죽거리며 를르슈의 앞에 섰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말입니다~! 전하와의 약속을 어기고 벌써 출산휴가를 썼다구요!”
“…뭐?”
“아직 출산일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그러면 우리도 곤란하고 계획이 틀어진단 말이죠~ 세실 군도 나이트 오브 세븐을 위해서 영양식을 만들 준비 만만인데~!”
“세실의 영양식은 모르겠고, 스자쿠가 벌써 휴직계를 냈다고?”
를르슈는 턱을 괴고서 종이조각들을 시선 끝으로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내야겠어.”
“네?! 전하! 전하까지 그러시면~!”
“더 이상 집중도 안되고, 일 처리 효율도 떨어지고 있는데다가, 이젠 밥도 안 넘어가고.”
“인간이 좀 그렇죠, 저도 공부해보니까 인간의 신체처럼 비효율적인 게 없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셔요. 그러니까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스자쿠 말고 다른 사람 얼굴 보는 것도 스트레스 받는다.”
“…….”
종이를 갈무리하여 한 곳에 쌓아둔 를르슈는 겉옷을 꺼내입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서 입었을 것이지만 요즘 들어서 를르슈는 이런 생활의 작은 일조차도 혼자서 해내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스자쿠가 옆에서 계속 시중을 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써 국가의 부름을 받을 때가 수없이도 많았으니 그런 어리광을 부리는 건 포기했었다. 하지만 휴직이라니 이제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겠군. 를르슈는 단추를 잠그며 한숨을 쉬었다.
“전하, 입덧으로 힘든건 알지만요~ 우리 모두 효율적인 브리타니아를 위해서~”
“시끄럽다. 다른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시중을 들면 되잖아? 카렌이나, 지노, 아냐…. 또 누가 있지?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아, 귀찮으니까 나가라, 로이드.”
“시중이라니! 캐멀롯은 특파가 전신이라구요~? 스자쿠 군을 위한 기관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스자쿠 군과 우리의 사이는 그렇게 쉽게 교체되는 파트 같은 게 아니잖아요.”
로이드가 카페트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징징대는 꼴을 보고 있으면 를르슈는 평소라면 대충 달래다가 로이드와 타협을 했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온실에 가서 꽃도 보고 따뜻한 햇볕이나 쬐고 싶은 마음에 를르슈는 잘 쓰지 않는 개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제부터 스자쿠한테 전화할 거다.”
“당연히 복직하라는 이야기를 하실거죠~!”
“아니, 휴직 전에 군대의 기강을 좀 다져놓으라고.”
“…….”
“로이드는 스자쿠의 부하지?”
“아~하! 그래도 스자쿠 군은 저보다 어리고,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되기 전에는 제 부하였죠!”
“그래서 지금은?”
“…….”
로이드를 현관까지 배웅하고 온 를르슈는 살롱의 소파에 드러눕듯이 앉아있었다.
귀찮은 녀석을 치워버리고 나서 속이 시원해져야하는데, 오히려 피곤해져서 몸이 나른해졌다. 온실까지 가는 것도 귀찮아져서 여기서 차라도 한 잔 마실까 했지만, 또 생각보다 입맛이 돌지 않아서 를르슈는 미간만 찡그린 채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끼에 가깝고, 그 한 끼조차 반식을 하는 를르슈는 나날이 마르고 있었다. 테일러에게 따로 재단을 맡긴 셔츠의 손목 부분이 더 헐렁해진 것을 보면서 를르슈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뭐라도 먹어야하겠지만, 입맛이 없고, 억지로 밀어 넣으면 다 토해내게 되서 속이 더 안 좋아진다.
‘스자쿠가 먹여주는 거면 또 이야기가 다르지만….’
아마 나나리가 유로 브리타니아로 유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발견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를르슈가 식욕이 없을 때면, 스자쿠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딱 한 입에 넣기 좋은 크기로 를르슈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여주는 것을 를르슈가 겨우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건 덜 역하고, 더 맛있고, 입덧으로 더욱 입맛이 없어진 를르슈에게는 겨우 찾은 생명유지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아무리 를르슈라고 하더라도 그런식의 먹는 방법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도 알고, 그렇게 먹여지고 있으면 괜히 애 취급을 당하는 거라서 처음엔 창피했었다.
처음에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를르슈에게는 문제였다. 를르슈는 푹신한 소파에 점점 나른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일이야 한숨 자도 될 정도로 여유를 만들어 놓았으니 낮잠은 자도 상관 없다. 조건은 올 클리어. 잠든 를르슈는 긴 소파에 몸이 무너지는 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스자쿠가 있었다.
정확히는 스자쿠의 뒷모습이었다. 를르슈의 기억 속에 있는 스자쿠는 대부분 얼굴을 포함한 앞모습이 많았다. 그래서 스자쿠의 등줄기가 훤히 보이는 뒷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를르슈는 어두운 것에 익숙해진 밤눈으로 스자쿠의 행동을 뒤쫓았다.
망토를 벗고, 자켓까지 단정하게 벗어둔 스자쿠는 검은 이너 차림으로 잠시동안 행동을 멈추었다. 심호흡과 다른 짧은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고는, 이너까지 가볍게 벗었다. 맨살을 드러낸 등과 어깨를 가볍게 풀던 스자쿠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욕실로 가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몸을 일으켰다.
“를르슈? 일어났어?”
스자쿠는 바로 를르슈의 인기척을 알아채고는 그를 향해 돌아보았다. 이미 욕실 쪽의 자동 센서로 불빛이 들어왔다. 눈이 부신 탓에 미간을 찡그리자 스자쿠는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낮에 많이 피곤했어? 낮잠 자다가 아직까지도 안 깨고 잔 거 같은데.”
“…피곤하진 않았는데, 그렇게 오래 잤다고?”
“저녁도 걸렀다고 들었어. 뭐라도 먹을 거 갖다달라고 할까?”
“아냐. 괜찮아.”
를르슈가 고개를 내젓는 것에 스자쿠는 한숨을 쉬었다.
“낮에 로이드 씨가 왔다 갔다며.”
“응.”
“피곤했지?”
“그냥 그래. 그 녀석이 그러는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내가 계속 있을거니까 걱정하지 마. 를르슈도 일을 쉬면 좋겠지만…. 라운즈랑 다르게 를르슈를 대체할 사람은 없는 거 같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줄게. 아, 그래도 코넬리아 전하께서 를르슈가 몸이 불편하면 바로 재상부 일까지 도와주신다니까, 쉬고 싶으면 바로 말해줘.”
“누님께 신세를 지는 건….”
“쉴 수 있을 때 쉬는 것도 능력 중에 하나라고, 를르슈가 그랬잖아.”
스자쿠는 를르슈가 있는 침대 옆에 걸터 앉으며 키득거렸다. 나 이제 씻을건데 를르슈는? 를르슈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고 있는 옷은 어느새 파자마 차람이긴 했지만, 일어난 김에 개운하게 씻고 싶었다. 오랜만에 같이 목욕하네. 스자쿠는 를르슈를 욕실까지 에스코트하며 오늘 하루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낮에는 로이드의 방문 이후로 잠만 내리 자느라 할 일이 없었던 를르슈는 스자쿠의 이야기를 듣는 것 뿐이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를르슈의 파자마를 벗기면서 스자쿠는 하얗게 드러난 살결을 손끝으로 가볍게 훑었다. 아직 부풀지 않은 배를 조금 집요하게 쓰다듬는 스자쿠의 손길에 를르슈는 이제 됐다고 억지로 손을 떼어냈다. 알몸으로 서로 욕실에 들어가서 가볍게 씻고, 물을 받고 입욕제까지 풀어서 좋은 향기에 취한 채로 서로에게 기대었다.
“너무 비밀리에 결혼을 해서 그런가? 다들 출산휴직을 한 거보다 그 전에 결혼한 게 더 신기하다고 그러더라.”
“비밀로 해두는 게 좋았을 거야. 안 그러면 지금처럼 너랑 나랑 조용하게 지내는 건 무리였을 테니까.”
“그래도 결혼식은 하고 싶어.”
“그건 낳고 나서….”
를르슈는 후우, 하고 더운 숨을 쉬었다. 피곤해? 나갈까? 스자쿠가 걱정스럽게 묻는 것에 고개를 저었다. 없는 체력을 깎아서 뱃속에서 애를 키우고 있으니, 피곤한 것은 일상적이었다. 그냥 그때의 일이 떠올라 를르슈는 한숨이 나왔을 뿐이었다.
스자쿠와 연인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던 중에 피임을 딱 한 번 하지 않았던 그날 밤에 를르슈는 임신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약혼을 맺지 않은 황자가 임신한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황제의 기사가 그의 아들을 건드렸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더 죄인이냐고 묻는다면 스자쿠는 당장 목이 내쳐져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를르슈는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했다.
를르슈는 나이트 오브 세븐에게 ‘비’ 가문의 대표로써 약혼 관계를 비공식적으로 맺었다고 서류를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폐쇄적인 ‘비’ 가문의 특성을 이용하여 누가 나이트 오브 세븐의 신부가 되었는 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도록 입단속까지 했다. 황제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충성을 황족과의 결혼으로 묶어둘 수 있다면 괜찮은지 둘의 결혼을 허락했다.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으며, 황족들 중에서도 아주 일부만 알고 이는 그 기밀사항의 당사자들은 지금의 조용한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역시 뭔가 먹여야겠어.”
“이제 잘건데?”
“그럼 내일은 세 끼 다 먹어야 돼? 디저트까지. 야식도.”
“야식은 무리야.”
더 마른 를르슈의 몸을 보고서 스자쿠는 신경이 쓰이는지, 수면 위로 괜히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울상을 지었다. 입욕제를 풀어서 불투명한 물 아래로 스자쿠의 손이 또다시 배 위를 만지는 것에 를르슈는 간지럽다고 웃었다. 그의 웃음에 스자쿠의 울상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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