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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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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 By Me

2세 / DOZI 2024.09.30 12:28 read.99 /

 

다음 주의사항을 읽어주시고, 괜찮으신 분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본 회지에서는 오리지널캐릭터(2세: 쿠루루기 세이류)가 나옵니다. 

2. 본 회지에서는 를르슈가 임신, 출산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스자루루가 육아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코드도 기어스도 없는 세계관에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쿠루루기는 끝나고 교무실로 와라.”

“네, 알겠습니다.”

쿠루루기 세이류(青竜)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영 편치 않았다. 세이류가 교무실에 불려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매년 이 시기만 되면 세이류는 교무실에서 한참을 시달리다가 돌아와야만 했다. 교무실에서 하는 일은 간단했다. 진로희망서를 적어내면 되는 일이었다. 생활기록부에 들어갈 진로희망 부분을 적어내는 것이었는데, 세이류는 그 빈칸들을 채우는 것이 어느때보다 어려웠다.

다른 문제의 정답을 맞추는 것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하게 해치우는 세이류지만, 진로희망서는 매년 써도 답을 적어내기가 어려웠다. 앞으로 이런 일들을 몇 년이나 더 반복해야한다는 것이 끔찍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담임 선생님이 귀찮은 표정으로 텅 비어있는 진로희망서를 내밀었다.

“너 작년에도 이랬다면서? 너 때문에 입력하는 거 늦어지고 있으니까, 그건 알고 있어라.”

“…죄송합니다.”

“죄송해 하지 말고. 내일까지 제출해.”

“네.”

세이류는 가방 안에 진로희망서를 반으로 접어 넣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밖에서는 운동부 사람들이 뜀박질을 하는 소리와 기악부 아이들이 음을 맞추는 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세이류는 그런 소음들을 들으면서, 오늘따라 가방이 더 무겁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이든 금방, 척척 해내는 세이류는 이런 곳에서는 영 감을 잡지 못했다. 특히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A가 B고, B가 C이면, A는 C이다. 이런 간단한 공식 같은 인생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D라는 변수는 곤란할 정도가 아니라 미울 정도로 싫었다.

1학년 때는 선생님, 2학년 때는 공무원, 3학년인 올해는 뭐라고 적어야 할까.

세이류는 한숨을 내쉬면서 ‘적당한’ 것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진로희망서의 빈칸을 채우기에는 모든 것이 역부족인 것처럼 느껴졌다. 뭐가 정답이 될 수 있을까. 늘 명쾌한 해답을 주는 부모님도 이 진로희망 관련으로는 전적으로 세이류에게 맡겨버린다.

다른 때에는 얼마든지 참견하면서, 왜 이거는 안 도와주는 거야. 세이류는 길목에 나뒹구는 돌멩이를 툭, 하고 발로 차며 걸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내일까지 제출해야하는 종잇조각 때문에 돌멩이는 금방 다른 곳으로 튀고 말았다. 그리고 집앞까지 다다랐다.

세이류는 현관을 열었다. 집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 전에 인사가 먼저였다. 세이류는 부엌까지 들리게 큰소리로 외쳤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오늘은 좀 늦었네?”

부엌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세이류는 으응, 하고서 얼버무리듯이 대답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대충 내려두고서 옷을 갈아입은 세이류는 방을 나서기 전에 잊어버렸던 진로희망서를 꺼내고서 부엌으로 향했다. 이 잠깐 사이에도 얼마나 생각하기 싫었으면 잊어버렸을까. 세이류는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부엌에서는 저녁 준비에 한창인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세이류는 알 수 없는 멜로디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요리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옆에 섰다. 식탁 위에는 아직 식기들이 준비가 되지 않은 걸 보니 음식을 나르기 전에 그릇들을 꺼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발빠르게 눈치껏 움직이는 세이류의 모습에, 아버지는 세이류를 불렀다. 갑자기 이름이 불린 세이류가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가,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그렇게 티를 내고 있는데.”

“티가 났어? 어떻게?”

“너는 약간 스자쿠를 닮아서… 답 없이 고민할 일이 생기면 우선 정리가 안되니까 몸으로 움직여서 떼우려는 경향이 있어. 그래, 지금도 평소라면 ‘뭐 도와줄까?’라고 물어봤을 텐데, 오늘은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너 좋을 대로 움직였잖아. 네 생각이 급해서.”

“…아버지는 내가 도와주는 게 별로야?”

“딱히 그런 말은 아니었어. 후후. 그래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고. 진로희망서 빨리 내라고 잔소리 들었어.”

“아, 벌써 또 그 시기군. 올해는 뭐라고 적을 거야?”

“그러게…. 굳이 뭐가 되고 싶은 건 없는데.”

아버지는 세이류의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세이류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나, 많이 이상한가. 조금 시무룩해지는 세이류의 모습에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너만할 때에는 그런 생각 자주 했거든.”

“진짜?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했어?”

“뭐라도 지어내서 적었지. 연구원이라던가.”

“연구원? 무슨 연구원?”

“그냥 적당한 걸 생각해낸 거라서 크게 의미는 없었어.”

“너는 좀 고민해.”

세이류는 학생이었던 아버지가 적었을 진로희망서를 떠올렸다. 힘을 빼도 단정하게 획을 그리는 글씨로 연구원이라고 적었을 아버지는 어땠을까. 나도 연구원이라도 적을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분야라서 오히려 신선할 지도. 아니다, 조금은 고민하는 게 좋을 거야….

세이류가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버지는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세이류에게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세이류는 아버지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그릇들을 날랐다.

“아빠는 금방 온대?”

“응, 오늘은 제때 온다니까 곧 오겠네.”

아빠를 기다리기로 한 세이류와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때 아버지의 휴대에서 아빠 전용 벨소리가 울렸다. 통통 튀는 멜로디는 <사랑의 인사>였다. 아버지는 낯간지러운 멜로디에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아, 난 또 늦는다는 줄 알았잖아. 저녁 준비 다 되었으니까 너만 오기만 하면 돼. 세이류도 왔어. 그래, 그래… 푸딩? 거기 푸딩 좋지. 응, 난 클래식 커스터드 푸딩. 세이류는?”

“아빠가 푸딩 사온대?”

“응, A제과에서 사온다네.”

“그럼 나도 클래식으로!”

“그래, 그래. 들었지? 클래식으로 두 개.”

아버지의 휴대폰 너머로 경쾌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접수 완료!’라고 외치는 소리에 아버지는 ‘그렇게 크게 안 외쳐도 돼.’라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다른 부끄러워야 할 부분에서는 덤덤하면서도, 이상한 부분에서 아버지는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했다. 그 기준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이류는 그것을 굳이 입밖으로 낼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아무래도 부모님 사이가 좋은 거겠지….

대신에 세이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진로희망서를 꺼내다. 접힌 자국을 펼치면서, 이름을 먼저 적었다. 학생 칸과 학부모 칸이 나란히 비워져 있는 이 종잇조각은 심리적으로 무겁게 느껴졌다.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다른 것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옆에 세이류는 달라붙었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빠가 진로희망 뭐로 적었는지 알아?”

“글쎄….”

“아빠랑 아버지랑 언제부터 같이 알고 지냈다고 그랬지? 중학교?”

“고등학교.”

“음…. 그때도 아버지 꿈은 연구원이었어?”

“다른 거로 바꿨던 거 같은데, 기억은 잘 안 나. 의사였던가.”

“의사?!”

세이류는 반쯤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의사와 아버지. 정말 생각도 못한 조합이었다.

“왜 하필 의사야?”

“성적 때문이지. 아무데나 들어가긴 아깝다고 억지로. 너는 그러지 마.”

별 거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평생 기록에 남는 거잖아. 후회를 하고 있는 듯이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세이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가 의사가 될 수도 있었구나. 정말 신기하다. 그런 감상을 품으며 다시 아버지의 어깨에 기댔다.

“아버지가 의대 갔으면 아빠랑 못 만났겠네?”

“그렇겠지.”

“연구원, 의사, 또 뭐 있었어?”

“기억 안 난다니까….”

아버지는 정말 잊어버린 것처럼 세이류에게 말했다. 더는 이야기를 안 해줄 생각인 거 같았다. 세이류는 아빠가 오면 그는 진로희망서에 뭐라고 적었을지 꼭 물어보기로 했다. 뭔가 황당무계한 직업이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언제 오려나, 하고 기다리던 사이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하고 활기차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옷을 갈아입고서, 저녁 밥상에 세 가족은 둘러 앉았다. 고픈 배를 맛있는 밥으로 채우고 있으면 금방 행복해졌다. 회사에서 말이야, 하고서 아빠의 이야기가 잠깐 이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되긴 했는데 또 내일 봐야 돼. 곤란한 일도 크게 무리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세이류는 어땠어? 아빠의 말에 세이류는 진로희망서 이야기를 했다. 이미 한 번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도 다시 들어주었다.

“그래서 쓸 게 없어. 난 뭐가 되고 싶은건지 모르겠어.”

“아직 어리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되는데.”

“근데 내일까지 꼭 제출하랬어. 나 때문에 입력도 못하고 있대.”

“뭐라도 적어야겠네, 그럼.”

밥을 먹던 와중에 생각에 빠진 아빠의 모습에 세이류는 오늘밤까지만 생각해내면 된다고 말했다. 그 말에 식사는 다시 이어졌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버지의 오늘 주식시장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짧막한 코멘트가 있었다. 아빠가 조금 질린 얼굴로 ‘또 이상한 거 하고 있네’ 라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못 들은 척 했다.

저녁을 다 먹고 나면 아빠와 세이류가 설거지를 맡았다. 아버지는 거실에서 후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세이류는 아빠에게 줄곧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아빠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내 꿈?”

“응. 아니면 진로희망서에 적었던 거.”

“어렸을 때면 진로가 정해졌던 때라…. 재미 없지만 정치인 같은 걸 적었지.”

“정치인?”

의사와 아버지 만큼 의외의 조합이다. 안 어울리지? 세이류는 아빠의 웃는 얼굴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중에 진짜 꿈도 생겼어?”

“응.”

“뭐였어?”

“를르슈랑 결혼하는 거. 애도 낳고 잘 지내는 거.”

“…….”

장난스러운 말투에 괜히 진지하게 받아치려던 세이류만 놀림을 당한 기분이었다. 세이류가 기분이 상한 것을 알아차린 아빠는 그제서야 다급하게 말을 붙여왔다.

“아니, 뭐, 진지하게 말하면 있긴 있었어. 군인이나, 운동선수 같은 거도 하고 싶었고.”

“…진짜로?”

“응. 공부하는 거 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는데.”

군인이나 운동선수. 실제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잘하는 아빠를 떠올리면 그럴듯해 보였다. 세이류와 아빠는 마지막 접시까지 헹구고 싱크대의 정리까지 마쳤다.

“두 사람 다 끝났어? 푸딩 먹을 거지?”

때마침 세이류의 고모이자 아버지의 여동생과의 통화가 끝난 모양인지 아버지가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푸딩 세 개를 쌓아올리는 모습에 아빠가 다급하게 다가가서 맨 위에 걸쳐놓은 끄트머리 푸딩을 낚아챘다.

“위험하잖아, 를르슈.”

“안 떨어뜨릴 자신 있었어.”

“대체 그런 자신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아빠가 허탈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세이류는 들고 있던 스푼 세 개 중에 하나를 건넸다. 아버지에게도 건네주면 아버지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거실에서 편하게 먹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다들 엉거주충 서있던 부엌의 한 구석에서 거실로 옮겨갔다.

텔레비전의 볼륨은 이야기하는 세 가족의 목소리를 넘지 않을 정도로만 맞춰두었다. 다 같이 앉을 수 있는 3인용 쇼파에 아버지의 왼편에는 아빠가, 오른편에는 세이류가 앉았다.

각자 푸딩을 한 입씩 먹고서 소소한 감동에 젖어있을 무렵이었다. 세이류는 잊고 있었던 진로희망서가 눈에 띄었다.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어보이면 아빠와 아버지가 작게 웃으면서 빨리 해치우자고 말했다.

“세이류는 하고 싶은 거 없어? 세이류 취미가 뭐였지?”

“책 읽기, 음악 듣기.”

“좋아하는 건?”

“숙면?”

마지막 말에 아빠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학교에 낼 거에 숙면을 적을 순 없잖아.”

“안 적을 거야. 그냥 농담한 거야.”

“다행이다.”

아버지와 아빠는 서로에게 기댄 채로 세이류를 쳐다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두 시선에 세이류는 펜을 손끝에서 굴릴 뿐이었다. 두 사람의 세이류를 보던 시선은 이윽고 서로에게 향하더니 마주보고는 웃고 말아버렸다. 아버지와 아빠의 사이 좋은 모습은 언제 봐도 기분이 이상했다. 두 사람은 세이류가 중학생이 되어서도 한결 같은 모습이다.

“웃지만 말고 도와달라니까.”

알겠어, 알겠어. 아버지의 느긋한 목소리에 아빠도 가세했다. 세이류는 예쁘게 생겼으니까 모델이나 연예인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아빠의 말은 농담인 것 같은데도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진심인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세이류가 한마디 하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사과를 한 입 베어물면서 말했다. 모델도 나쁘지 않지. 아버지까지 놀리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세이류를 놀리는 아빠와 아버지의 모습에, 세이류도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진로희망서에 ‘모델’을 휘갈겨 적었다.

다음날 방과후. 세이류는 또 교무실로 불려갔다. 모델이라고 적은 것이 진심이냐는 말이었다. 대답하는 것을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혼나고 말았다. 새로운 진로희망서를 받은 세이류는 한숨과 함께 또 반으로 접어 가방에 그것을 넣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혼자서 정리하고 말 것이다. 모델이라고 어제 홧김에 쓴 것은 무리수였으니까.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 아빠와 아버지도 정작 필요할 때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는 세이류는 어딘가 들릴 곳도 없이 교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쿠루루기, 하고 어딘가 끝이 늘어진듯한 목소리는 같은 반 친구의 것이었다.

“이제 집에 가는 거야? 같이 가자.”

“너는 역 쪽으로 가지 않아? 난 반대방향인데.”

“그럼 직전까지만 같이 가는 건?”

“상관없어.”

두 개의 발걸음은 서로 보폭을 맞추어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이야깃거리는 친구 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세이류는 적당한 대답을 하면서 오늘의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그래서 진짜로 모델 할 거야?”

“…적당한 걸 쓴 거 뿐이야.”

“근데 쿠루루기는 모델 해도 어울릴 거 같아.”

“뭐?”

“예쁘고 귀엽잖아. 안하면 오히려 더 손해 같아. 아, 근데 공부도 잘하니까…. 굳이 모델이 아니어도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예쁘고 귀엽다는 말엔 늘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모르겠다. 세이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갈림길 앞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가면 세이류의 집이 있는 골목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전철 역까지 향하는 길이었다. 잘 가, 쿠루루기! 친구가 손을 흔드는 것에 따라서 세이류도 인사했다.

세이류는 혼자 걸어가는 길에, 건물 유리벽에 비치는 제 모습을 살폈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부터 하얀 피부, 위로 올라간 눈꼬리는 모두 아버지를 닮았다. 어렸을 때부터 다들 아버지를 닮았다고 이야기를 했으니까, 자기 자신의 외모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다른 것은 눈동자 색 정도 뿐이었다. 그 부분은 아빠를 닮았다.

하지만 모델도 단순히 예쁘고 귀엽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한 노력과 열정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일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진로란 대체 무엇일까. 세이류는 사춘기 소녀다운 고민을 하면서 다시 집으로 향해 걸었다.

그래서 오늘도 진로희망서를 들고서 소파에서 뒹굴고 있는 세이류에, 아버지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다며 손을 뗐다. 그러나 어제도 그렇게 고민했음에도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오늘이라고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저녁 준비가 끝나고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이 되면, 아버지의 옆에 앉아서 결국 SOS를 쳤다.

“글쎄…. 요새 애들은 뭐가 되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는데.”

“그냥 선생님, 공무원 반복해서 적을까?”

“네가 하고 싶으면 해. 책임지는 건 너니까.”

“그런 말 들으면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진로는 고민하면서 정하는 게 좋은 거야. 너무 생각없이 사는 것보단 낫잖아.”

정론이다. 세이류는 종잇조각을 들여다보다가 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이류의 시선에 아버지는 의아한 듯이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야, 하는 얼굴에 세이류는 무심코 말을 꺼냈다.

“아버지, 나 예뻐?”

“예쁘지.”

바로 나오는 즉답은 세이류를 조금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예뻐.”

“이럴 때면 아빠랑 똑같아, 진짜로….”

이번엔 아버지 쪽이 조용해졌다. 사랑하면 닮으니까? 세이류의 확인하듯 쐐기를 박는 말에 아버지의 손끝이 잠깐 떨린 것 같았다.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 하고, 빨리 해. 저녁 먹기 전까지는 끝내두는 게 좋잖아?”

“알겠어, 알겠어.”

“대답에 진실됨이 없어보이는데?”

“알겠습니다!”

“그래.”

세이류는 진로희망서 끝을 접으면서 펜을 손끝으로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운동 선수를 써볼까 했지만 무슨 종목이든 잘 해내니까 특별히 좋아하는 스포츠도 없었다. 군인 같은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남의 명령을 따르는 건 질색이다. 경쟁하는 것도 싫어하고, 그렇다고 모두가 일률적인 것도 싫다.

골치 아픈 제 성정을 떠올리다가 세이류는 어떤 직업을 떠올렸다.

“아버지, 나 변호사는 어때?”

“변호사?”

“응. 적당히 괜찮은 거 같아.”

“네가 좋으면 됐지.”

“그럼 변호사 적어야지.”

변, 호, 사. 세이류는 또박또박 적어놓은 글자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 물음에 아버지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 네가 이럴 때 보면 스자쿠 딸인 거 같아서.”

“갑자기?”

“그러게. 뭔가 그러네.”

아버지의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표정을 짓는 아버지는 보통 아빠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것을 깨달으면, 세이류는 사이가 좋은 두 아버지들이 그러려니 싶었다. 그래도 조금 낯부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아빠랑 아버지는 고등학생 때부터 계속 그랬어?”

“뭐가 그런데?”

“음…. 사이 좋은 거?”

“아니.”

딱 잘라 말하는 아버지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상하네. 세이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졸업식 직전까지도 안 친했어.”

“…아빠한테 이야기 들은 거랑 좀 다른데. 아빠는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했다고 그랬어.”

“좋아하는 거랑 친한 거랑은 별개였어.”

“왜? 그럼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는 거잖아?”

“그때 우리는 그랬어.”

좀 이상했지만, 아무튼 그랬어. 아버지의 반복되는 말에 세이류는 결국엔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본인들이 그랬다는데 뭐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결국 잘 만나서 세이류의 부모가 되었으니까.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지만,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두 사람은 마중을 하러 나갔다. 저녁을 먹고 수다를 떠는 사이에 세이류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은 기억 저편으로 묻어두게 되었다.

다행히 진로희망서는 무사히 정리되었다. 선생님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세이류는 기분 좋게 여자 테니스부의 대타를 뛰러 갔고, 저녁이 조금 늦어졌지만 평소보다 더 맛있는 식사를 했다.

완벽한 하루였다.

 

* * * 

 

스자쿠는 회사에, 세이류는 학교에 가고 난 집안에는 를르슈 혼자 남아있었다. 집안일을 해치울까 했지만 오늘은 좀 여유롭게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근 들어서 스자쿠가 밤마다 집요하게 구는 탓에 몸이 항상 이상으로 나른했기 때문이었다.

소파에 걸터 앉은 를르슈는 아침 햇살이 드리우는 것에 눈을 감았다. 따끈해지는 몸이 수마에 점점 빠져들어갔다.

 

* * *

 

진로희망.

를르슈는 눈앞에 놓인 하얀 종이를 보고서 한숨을 쉬었다. 매년 돌아오는 이 시기마다 적어내야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많고, 하고 싶은 것은 없는 를르슈에게는 꽤나 귀찮은 작업이었다. 올해는 수험생이라는 이유로 이 진로희망이 한층 더 중요하다고 선생님은 강조했다.

두 배로 더 귀찮아지겠네. 를르슈는 종이를 반으로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집에 가서 더 고민할 생각이었다. 종례를 마친 아이들이 각각 할일을 따라 흩어졌다. 부 활동을 가는 아이들은 그곳으로, 학원을 가는 아이들은 학원으로, 집으로 가는 아이들은 집으로. 를르슈는 제일 마지막 그룹에 속했다.

느릿하게 짐을 싸서 교실 문턱을 넘으면, 복도 끝에는 ‘그’가 보였다. 를르슈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손에 들려있던 종이는 친구들 손에서 한 바퀴 구르다가 어느새 바닥에 떨어졌고, 그 종이의 주인은 그것을 모르는지 그것을 뒤로 한 채 걷고 있었다. 그건 를르슈의 가방 안에도 들어있는 진로희망서였다.

쿠루루기 스자쿠, 라고 적혀있는 진한 글씨 아래로는 모든 것이 텅 비어있었다. 를르슈는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 앞서간 그를 부르기엔 거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뛰어가서 이 종이를 전달해주는 것은 를르슈의 장르가 아니었다.

내일 전해주자. 를르슈는 종이를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그 종이는 졸업식 날이 되도록 를르슈의 가방 안에 있었다.

그에게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는 것은, 를르슈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결국 쿠루루기 스자쿠가 어느 대학에 가는 지도 모르고, 무엇이 될 지도 모르는 채로 일 년이 지나갔다. 모처럼 같은 반이 되었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가 되지도 못했다.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어 본 것도 드물었다.

아쉬움과 미련은 를르슈에게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칠 것 같았다. 친구들과 뒤엉켜서 사진을 찍고 있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를르슈는 제가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람페르지, 잠깐만!”

바로 그때 쿠루루기 스자쿠가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다급하게 를르슈의 곁으로 뛰어오는 그는 상기된 얼굴로 를르슈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근데 지금 아니면 이야기 하기가 힘들 거 같아서.”

“무슨 이야기?”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서 잠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쿠루루기 스자쿠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를르슈를 떨리게 만들었다.

“그, 저기, 나, 람페르지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그래?”

나도, 라는 말을 겨우 삼켰다. 를르슈는 이 대화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결심과 다르게 계속해서 이 시간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잡을 수가 없었다.

“친하게 지내고, 친한 친구도 되고….”

“응.”

“더, 잘 알고 싶었는데. 결국엔 이렇게 되고 말아서.”

“응.”

“그러니까, 나는, 음, 람페르지랑 친하게 지내서, 잘 알게 되고, 그리고, 그리고….”

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맞추었던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깔다가 결국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기합을 한 번 넣은 눈을 반짝이며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친구가 아니라 람페르지랑 사귀고 싶었어. 그게… 그냥 사귄다는 게 아니라 좋아한다는 러브love의 의미로.”

“좋아한다…고?”

“맞아, 너를 좋아해.”

횡설수설한 그 말을 함축해주는 한 문장에 를르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표정을 본 스자쿠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아하며 말했다.

“미안. 놀랐지?”

“…엄청 놀랐어.”

“농담은 아니야. 장난도 아니고. 진심이야.”

“…….”

“들어줘서 고마워. 대답은… 솔직히 듣고 싶은데 말이야. 그래도 갑자기 이런 말해서 놀랐을 테니까. 응,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뒤돌아 서는 스자쿠는 씩씩하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그대로 달아날 것만 같았다. 를르슈는 그가 더 멀어지기 전에 스자쿠를 불렀다. 쿠루루기, 하는 아주 작은 소리였고, 목이 잠겨서 형편 없는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자쿠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나도 좋아해.”

를르슈는 그 이상의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스자쿠의 커다란 눈이 일순 반짝인다 싶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남들이 다 헤어지는 졸업식장에서, 새로운 연인 관계로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 * * 

 

오랜만에 꾼 꿈은 를르슈의 집중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멍하니 있던 사이에 시간은 금방 흘러버렸고, 를르슈는 노트북을 덮음으로써 오늘의 작업을 그만두기로 했다. 마감까지는 시간이 넉넉했으니 문제는 없었다. 오늘은 여유롭게 보내기로 한 만큼 초조하게 굴지 않으려고 했다.

우선은 청소기로 한 번 바닥을 쓰는 것으로 기분 전환을 하려고 했다. 청소는 사람의 마음을 정리하게 만든다. 물리적으로 깨끗하게 비우고 나면 기분은 훨씬 나아지기 마련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청소기를 돌리고 있으면 세이류의 방 근처에서 먼지가 요란하게 빨려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또 과자 부스러기인가?

의외로 군것질을 좋아하는 세이류의 방에서는 과자 부스러기나 몰래 사먹고 버리지 않은 봉지과자의 쓰레기 같은 것들이 나오곤 했었다. 제때 정리를 하면 내가 들어갈 일도 없잖아. 를르슈는 한숨을 내쉬면서 세이류의 방문을 열었다.

아이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끗한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것도 부모의 의무이다. 세이류의 방으로 들어간 를르슈는 침대 바닥까지 꼼꼼하게 청소했다. 책상 주변만큼은 깔끔했지만 책장에는 다 먹은 과자박스가 책 사이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까지 치우고 나면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져있었다.

세이류의 방문을 닫고 나오기 전에,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가족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교복을 입었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의 사진이었다. 입학식 때 가족 셋이서 단란하게 서있는 것을 나나리가 찍어준 것으로, 세이류가 꼭 제 방에 장식해두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내년이면 고등학생인가?

를르슈는 그 사진을 손끝으로 쓸어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고등학생 때 뭘했더라, 하고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은 모두 스자쿠에 대한 짝사랑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생활 뿐이었다. 나중에 스자쿠와 마음이 통하고 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도 다를 바 없었다지만, 를르슈가 보기엔 스자쿠는 자기 없이도 평생을 잘 살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믿기가 어려웠다.

세이류에게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겠지. 그럼 좀 쓸쓸해지겠는걸.

그런 생각의 마무리는 ‘아직 이르다’라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아직까지는 어리고, 진로희망서도 혼자서 겨우 쓰는 어린 아이이다. 물론 세이류가 보통의 아이들보다 영특하고 똑부러지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 를르슈의 눈에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도 한참 뒤에나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를르슈는 자신을 달래면서 세이류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그날은 세이류가 부 활동을 하는 친구를 돕는다는 이유로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었다. 늦는다는 전화를 받은 를르슈는 너무 늦게까지는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던 스자쿠는 그 모습에 웃기만 할 뿐이었다.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좀 이르네.”

“그렇지?”

“아직 중학생이잖아.”

아직 어린애니까, 라는 말을 하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시절의 꿈을 꿨다는 이야기만 빼놓고 말을 전하는 중에, 스자쿠의 지긋한 시선에 눈을 맞추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벌써 중학생이니까…. 애들 크는 건 의외로 금방이고.”

“그렇게 말하면 또 그렇지.”

“를르슈는 섭섭해?”

“안 섭섭할 리가 있나.”

저녁 식탁에는 오랜만에 단둘이었다. 섭섭하다고 말하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그저 식사를 이어갈 뿐이었다. 를르슈는 그런 스자쿠의 눈치를 힐끗 보면서 입을 열었다.

“둘째라도 가질까?”

“안 돼.”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그것은 완강한 반대였다. 절대로 그 뜻을 굽힐 수가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웃어보이는 스자쿠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를르슈와 스자쿠는 몇 번이고 싸우곤 했었다. 이번에도 그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를르슈도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이젠 나이도 있고 예전보다 체력도 더 없잖아.”

“스자쿠.”

“이제 이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

그의 말투에서는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모처럼 단둘이 먹는 저녁 시간에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를르슈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스자쿠는 다정한 목소리로 오늘 하루에 대해서 물었다. 를르슈도 더는 그 주제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은 채로,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의 한 구석에는 알 수 없는 어두운 분위기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경계를 지켜가며 식사를 했다. 때마침 세이류가 돌아왔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 * *

 

쿠루루기 스자쿠는 제 옆에서 자고 있는 를르슈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따뜻한 체온이 맞닿아 전해지는 온기가 기분이 좋았다. 를르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넘겨서 하얀 이마도 쓸어보았다. 제 얼굴을 만지고 있는 손길에 잠깐 미간을 찌푸리던 를르슈는 이내 눈을 떴다. 깨울 생각은 없었던 스자쿠는 놀란 눈으로 를르슈와 마주했다.

“미안, 안 깨우려고 했는데.”

“…왜 안 자고 있어? 잠이 안 와?”

를르슈는 다정하다. 깨워버린 것보다 자고 있지 않은 것을 신경 쓸 정도로. 스자쿠는 별 거 아니라고 말했다. 한참 졸린 눈으로 를르슈는 스자쿠의 품을 찾았다. 가슴에 가볍게 매달리는 온기에 스자쿠는 그를 끌어안았다.

를르슈를 끌어안고 있으면 새삼스러운 감회가 느껴졌다. 이전에는 그와 이런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품 안에 있는 를르슈는 늘 믿기지가 않으면서도, 그의 무게감이 느껴질 때면 크게 안심했다.

과거에 를르슈의 손을 잡을 수 없었던 때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이마 위로 작게 키스한 뒤에 눈을 감았다.

 

* * *

 

진로희망.

스자쿠는 가방 안에 있어야할 그 종이를 찾다가 결국 포기했다. 내일 다시 선생님께 달라고 하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학기 중반이 되면서 진로희망과 희망 대학 조사를 시작했고, 조만간에는 보호자 면담까지 이어질 일정들을 생각하면 스자쿠의 학교 생활은 숨이 가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를르슈 람페르지였다.

그는 스자쿠의 햇수로 3년째 되는 짝사랑 상대였다. 스자쿠는 엇갈렸던 지난 2년을 보상 받듯이 올해는 같은 반이 되는 행운에 감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같은 반에 있는 를르슈를 보고 있으면,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했고, 가끔은 말을 걸고 싶었고, 가끔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매일 그의 옆에 있고 싶어졌다.

너무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면 불편할 거야. 스자쿠는 그런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억지로 거리를 두고 있어도 를르슈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많았다. 그는 공부를 잘했고, 그러면서도 수업 시간 도중에는 알게 모르게 선생님들 눈을 속여서 졸 만큼 성실한 편은 아니었고, 그 차이를 깨닫고 나면 또 스자쿠는 를르슈가 한없이 좋아졌었다.

를르슈는 어느 대학을 갈까. 그리고 뭐가 되고 싶을까.

그 옆에 나도 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갖고서 일 년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보내버렸다.

를르슈의 대학은 스자쿠가 진학하는 대학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같은 대학은 아니었다. 그는 뭐든지 골라서 갈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고, 여유롭게 일본에서의 진학은 안정권이었다고 들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브리타니아의 유명 대학으로도 갈 수 있었다고 그랬다. 그것도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서 확실하진 않았다. 그가 무엇이 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스자쿠의 좁은 시야로는 담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수험이 끝나고 나서는 모든 것이 허했고, 모처럼 붙은 합격장도 다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를르슈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마구 써버린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러했다. 말 한 마디 제대로 섞어보지 못한 채로 헤어지게 되었다.

졸업식 날. 이제 돌아서 가려는 를르슈의 모습을 보면서, 스자쿠는 손에 들고 있던 모든 것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쥐어주고는 그를 향해 달렸다. 람페르지, 하고 부르는 입술이 경련하듯 떨려왔지만 겨우 말을 이어갔다.

의아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스자쿠는 숨고만 싶었다. 겨우 마음을 전하고 나면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마음이 더 괴로워져서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서 빨리 뒤돌아서 나오려는데, 저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기적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말은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나도 좋아해. 를르슈의 입술 끝에서 나온 마침표까지 완전한 문장에 스자쿠는 눈물이 흐르는 것도 잊고서 웃어버렸다.

“그럼, 우리 사귀는 건가?”

“…잘 부탁해, 쿠루루기.”

“아, 응! 나도 잘 부탁해. 잘 부탁드립니다.”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뭐랄까, 그래야 할 거 같아서. 아직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하나.”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다. 우와, 질려버리면 어떡해. 바보 같아 보이겠다. 스자쿠의 머리 한 켠에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더는 말하지 마, 입을 닥쳐, 쿠루루기 스자쿠! 그러나 바짝 마르는 입술과 다르게 아무 말이나 튀어나오고 있었다.

횡설수설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그는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아, 응, 네! 진짜로!”

악수를 하면서 손을 잡았다. 그것이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

 

* * * 

 

를르슈의 아침은 스자쿠의 기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자고 있는 순간 어느새 썰렁해지는 감각에, 스자쿠가 먼저 일어난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옅어지는 수마 사이로 스자쿠가 없는 것을 깨닫고서 를르슈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다. 파자마 차림으로 욕실 앞까지 가면 물소리가 들렸다. 잠시 멍하니 그 앞에 서있다가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아있었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채로, 잠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뺨에 촉촉하게 젖은 느낌이 와닿았다. 스자쿠였다.

위에서 쏟아지는 시선과 함께 입술을 떨어졌다.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지만 상쾌하게 느껴졌다. 닿았다떨어지는 입술이 아쉽긴 했지만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스자쿠를 보내고 나서, 를르슈도 이어서 욕실에 들어갔다.

쏟아지는 물 줄기를 맞으면서, 오늘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몸을 개운하게 씻고 나오면 모든 것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엌으로 나가면 졸린 눈으로 2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세이류가 있고, 그런 세이류에게 인사하는 스자쿠가 있었다.

남은 아침은 스자쿠와 함께 요리를 하면서, 그리고 다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스자쿠가 먼저 출근하고, 세이류가 조금 아슬아슬하게 등굣길에 오른다. 를르슈는 남은 식기들을 정리하고서 오늘의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출판사에 가서 번역된 원고를 보내고, 나서는 김에 나나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쇼핑을 하기로 했다. 쇼핑까지는 좀 무리일까. 를르슈는 가방을 챙기면서 집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 * * 

 

20살 를르슈 람페르지의 일상은 고등학생 때랑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가족들과 살던 집을 나와서 대학가 근처에 있는 맨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여동생 나나리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날들이 불안하고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녀의 응원을 받으며 혼자서도 씩씩하게 해내겠다고 다짐했다. 본가까지는 전철로 30분이니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를르슈의 일상 속 위치 에너지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 달라진 것은 연애를 통해 시작한 사랑의 에너지였다. 를르슈에게는 쿠루루기 스자쿠라는 남자친구, 즉 연인이 생겼다. 모두와의 이별이 이루어지는 졸업식에서 스자쿠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이로 시작한 것이다.

졸업식을 하고 한동안은 뒤늦게 자취방을 알아보러 다니는 일과 이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연락 조차 제대로 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 스자쿠가 자신에게 불만이나 불안함을 느낄까봐 를르슈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런 를르슈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스자쿠는 를르슈를 재촉하거나 불안해는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이 를르슈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가까스로 정리가 되었고, 다음주 월요일에 있을 입학식 전 주말. 를르슈는 스자쿠와의 첫 데이트를 앞두고 있었다. 

새로운 집에서 나오는 길은 이제 익숙해질 것 같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 향하는 곳, 그리고 집을 나온 목적을 떠올리면 더 떨려서 그런 것 같았다. 를르슈는 휴대폰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면서 장소와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후 2시, 역 앞에서. 이모티콘으로 마무리된 스자쿠의 메일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나기로 한 곳은 전철을 타고 가면 15분 걸리는 역이다. 새로 생긴 영화관에서 최근에 유행하는 영화를 보고서, 근처에서 밥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누가 들어도 흔한 데이트 코스였지만 를르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데이트이다. 상대는 심지어 쿠루루기 스자쿠였다.

이루어지지 않을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은 여전했다. 졸업식장에서 그대로 헤어지지 않고, 연인으로써 서로를 인식하게 된 것은 기적과 같았다. 그리고 나서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근 1년동안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음에도 현실성이 없게 느껴졌다. 차라리 상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철에 탄 를르슈는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을 확인했다. 무난하게 입어야하는지, 아니면 조금 꾸며야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하다 고른 옷이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하얀 셔츠에 검은색 가디건은 사람이 어두워보이는 것 같았다. 갈아입으러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를르슈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기분으로 전철에서 15분을 보냈다. 길면서도 짧은 시간이었다.

“람페르지! 여기!”

역에서 를르슈가 나오자마자, 그에게 손을 흔드는 남자는 스자쿠였다. 커다란 벚나무는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인 것 같았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쿠루루기 스자쿠는 눈에 띄었다. 검은색 웃옷과 데님 자켓이었음에도, 그의 밝은 분위기가 눈길을 끌었다.

그런 스자쿠가 사람들 틈바구니 사이에서 헤매고 있던 를르슈를 바로 알아본 것은 신기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옆에 섰다. 막상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려니 어딘가가 부끄럽고 속이 베베 꼬이는 것 같았다. 어색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 스자쿠는 붉어진 뺨으로 말했다.

“영화 시작하려면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밖에서 좀 걷다가 들어갈까?”

“그래? 나는 상관 없어.”

“이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가 괜찮다는데, 조금 있다가 거기도 갈까?”

“응….”

를르슈는 스자쿠가 하는 말들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답할 때마다 스자쿠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골라서 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응’ 같은 단답이 고작이었다. 그때마다 스자쿠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혹시 마음이 상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스자쿠는 그런 기색 없이 를르슈를 정성껏 에스코트했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를르슈가 두 사람 몫의 팝콘과 콜라를 샀다. 예매는 스자쿠가 했으니 그 정도는 자기가 해야할 것만 같았다. 를르슈가 재빠르게 주문과 값을 지불하는 것에 스자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하고 기가 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조차 귀엽게 보여서, 를르슈는 스스로 중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는 둘이서 하는 거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쿠루루기만 내는 건 불공평하고. 나도 사주고 싶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순간 팝콘에 얼굴을 묻을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으아, 하고 작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영화관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스자쿠가 빠르게 를르슈의 손을 잡고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손을 잡고서?

손을 잡고서….

손을 잡고서! 둘은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얼음이 든 콜라를 쥐고 있는 손이 미지근해질 정도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았다.

 

* * *

 

결국 팝콘은 한 입도 못 먹고 콜라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로, 그때 봤던 영화의 포스터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았다. 꽤 강렬한 인상의 포스터가 다시 영화관에 리마스터 재개봉을 한다는 문구와 함께 걸려있는 것에, 를르슈는 어딘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티플렉스 전광판에 큼지막하게 걸린 티저 영상은 그때 봤던 것이 맞았나 싶을 정도로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때는 스자쿠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서,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풋풋했던 시절이었다.

이번 주 주말에 다시 보러 가자고 해볼까? 를르슈는 세이류와 스자쿠랑 같이 보낼 주말을 떠올렸다. 셋이서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근데 이거 아이가 봐도 되는 영화였던가? 그것도 알아봐야겠군. 를르슈가 휴대폰으로 영화 시놉시스를 훑어보고 있을 무렵에 등 뒤에서 를르슈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람페르지 씨! 오래 기다리셨죠?”

“아, 방금 전에 왔어요.”

“정말 죄송해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전철 하나를 놓치고, 또 연착되고… 정신이 없었네요.”

“괜찮습니다.”

담당자는 정말 미안한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뭐하고 계셨나요, 하는 말에 를르슈는 전광판을 가리켰다. 때마침 그 영화의 광고가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저 영화, 다시 볼까 생각 중이었어요.”

“아, 유명하죠. 감독이 엄청 큰 영화제에서 저걸로 상을 탔으니까. 그게 다시 재개봉 하네요.”

“그런가요?”

“내용은 람페르지 씨 취향은 아닐 거 같았는데, 의외네요.”

“내용은… 솔직히 기억이 안 나서요. 다시 보긴 봐야할 거 같네요.”

기념비적인 첫 데이트의 영화니까. 어지간한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을 를르슈가 기억이 안 난다는 말에 담당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두 사람은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원고를 확인한 담당자는 만족스러운 OK 사인을 보냈다. 역시 람페르지 씨네요, 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의 칭찬에 를르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노트북과 짐을 정리해 넣은 담당자는 요즘의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길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의 아들이 요즘 들어 사춘기라서 그런지, 짜증이 늘고 그 반항을 받아주는 것도 슬슬 한계라는 이야기였다.

“람페르지 씨도 결혼 했죠? 애도 있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네, 딸이 하나.”

“몇 살이랬죠?”

“중학교 3학년이에요.”

“와우, 람페르지 씨도 한창일 때네요.”

“뭐, 아직까지는 어린애라 반항기까지는 아니고.”

“애들 크는 건 금방이에요. 정말 어느 순간에 갑자기라고요.”

손을 내두르며 그녀가 하는 말은 어딘가 과장이 섞여있는 것 같으면서도, 를르슈도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어느 순간에, 갑자기, 모든 것이 닥쳤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담당자와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되고 나면 그녀와 헤어졌다. 를르슈는 나나리에게 가기로 한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을 했다. 괜찮다는 답장이 오면 안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에 스자쿠에게 연락이 왔었다. 그와 잠깐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무심코 전화 해도 괜찮을까, 하고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전화가 울렸다. 이럴 때의 행동력이란.

“여보세요?”

‘를르슈? 일 다 끝났어?’

“응. 잘 끝났어. 너는? 지금 바쁠 때 아니야?”

‘아냐, 한숨 돌리고 있어. 오늘은 담당자 만나고 나나리랑 약속 있다고 그랬던가?’

“맞아.”

‘그래서 늦게 들어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를르슈는 웃음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저녁 시간에 맞춰서 들어갈 거야.”

‘헤헤, 더 오래 있다가 와도 되는데. 나나리랑은 오랜만에 보잖아.’

방금 전까지는 늦게 들어오나 노심초사 했으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그것을 지적할까, 고민을 하다가 관두었다. 그보다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우리 첫 데이트 했을 때 봤던 영화 기억나?”

스자쿠는 곧장 영화 이름을 댔다. 근데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 하긴,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니까. 그게 아니라, 그때 너무 긴장해서 뭘 봤는지 기억이 안 나거든. 스자쿠의 낯간지러운 말에 를르슈는 제 뺨을 긁적거렸다.

“그 영화, 다시 보러 갈까?”

‘재개봉 한대?’

“응. 주말에 세이류랑 같이 와서 볼까 싶은데.”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기대에 들뜬 목소리가 벌써부터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럼 시간 확인해보고 예매할게. 를르슈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하늘은 아직 높고 새파랬고, 를르슈는 그 아래를 걸어가면서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 * * 

 

XXX 거리의 역 근처에서 40분이라는 애매한 거리를 걸어가면 있는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카페가 있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로, 아기자기한 마당이나 브리타니아식으로 꾸며진 인테리어 같은 것이 시선을 끌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아마도 카페 사장의 취향껏 고른 원두가 맛있는 로스터리 카페라는 점이었다. 그 카페의 이름은 <카페 램프Cafe Lamp>로, 커피를 제법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로 알음알음 유명했다.

그리고 그곳의 사장인 나나리는 오랜만에 찾아오는 를르슈를 알아보고는 금방 카운터에서 뛰쳐나왔다. 오라버니, 하고 저를 부르는 경쾌한 목소리에 를르슈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세이류의 생일이 있었던 9월 이후로 간만에 만나는 것이기에 반가움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나나리, 그래도 손님이 제법 있는데 자리를 비워도 되겠어?”

“괜찮아요, 그래서 오늘은 아르바이트생도 두 명이나 더 불렀어요. 다들 베테랑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바쁜데 일부러 나온 건 아니지?”

“아니라니까요. 오라버니도 참.”

나나리는 손사래를 치면서 햇볕이 잘 드는 테이블석으로 를르슈를 이끌었다. 오라버니 전용 자리를 비워두었답니다. 해사하게 웃는 여동생은 소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상냥했다. 스자쿠나 세이류에게서 얻는 힐링과는 다른 느낌의 분위기가 를르슈를 즐겁게 했다.

“오라버니, 오늘은 커피로 하시겠어요, 홍차로 하시겠어요?”

“카페에 왔으니 커피를 마셔야겠지?”

“후후, 오늘은 좋은 원두도 들였으니까 기대하세요. 다른 건 드시고 싶으신 거 없고요?”

“음… 아직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괜찮을 거 같아.”

“알겠어요.”

그렇게 말한 나나리는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원두를 그라인더에 가는 소리와 분주하게 물 끓이는 소리, 간간히 아르바이트생들과 같이 웃고 떠드는 나나리의 목소리 같은 것을 들으면서 를르슈는 오랜만에 여동생을 만난 것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세요?”

“그럼. 누가 내려준 건데.”

“지금 드시는 건 블루 마운틴이에요. 마음에 드시면 가실 때 원두 조금 싸드릴게요.”

“공짜로 받으면 그러니까 계산서에 달아놔.”

“헤헤, 물론이죠.”

를르슈와 나나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워낙에 애틋했던 남매 사이가 결혼을 했다거나 아이를 낳았다거나, 혹은 자기 가게를 꾸려나가면서 소원해지기 보다는 자주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움이 쌓여가는 편이었다.

브리타니아의 사연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악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도망치고 도망쳐 먼 이국의 땅 일본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다. 서로에 대해서 알 만큼 다 알고 그 속사정에 대해서 깊게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견고한 안정감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그래서 세이류도 어느새 그런 고민을 할 때가 되었구나 싶은 거야.”

“진로희망이라니, 뭔가 그립네요.”

“뭐, 그때 열심히 고민해서 꿈을 이루는 것도 좋지만, 그 꿈에 갇히지 않고 더 많은 것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진 않았으면 좋겠어.”

를르슈의 말을 듣던 나나리는 작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나리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라고 생각하면서 를르슈는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잠시 찾아오는 정적에 나나리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듯 했다.

“오라버니, 사실은 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뭐?”

를르슈는 갑자기 이어지는 나나리의 충격적인 고백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 보면 나나리도 어린 나이도 아니고, 그녀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를르슈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면서 나나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알게 모르게 충격을 받은 듯한 를르슈의 얼굴을 본 나나리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결혼을 한다거나 그런 정도로 깊게 만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뭐랄까, 이 사람이랑 있으면 좀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힘든 길이라도 웃으면서 달려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나리의 말에는 예전에 를르슈가 했던 말들이 겹쳐 있었다. 를르슈는 자신이 했었던 과거의 말들을 떠올리며 나나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스자쿠랑 함께라면 더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아.’

‘나나리. 나는 무조건 앞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믿진 않아. 언젠가 힘든 일도 닥치고 괴로운 일도 생기겠지. 스자쿠랑 있으면 그런 일들을 겪더라도 마지막에 웃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무려 15년도 더 되어버린, 어렸던 자신이 했던 말들이 이렇게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를르슈는 감회가 새로웠다. 나나리는 편안한 얼굴로 드디어 말했다는 후련함에 를르슈를 보고 생긋 웃어주었다. 그녀의 변함없이 상냥한 미소에 를르슈는 비어있는 나나리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나나리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엄청 좋은 사람이겠네.”

“후후, 그럼요. 엄청 좋은 사람이에요. 오라버니한테 빨리 소개해 드리고 싶을 정도로.”

“나중에 같이 차 한 잔 하지.”

“정말요? 그러면 저 진짜 약속 잡아요?”

“기대할게.”

를르슈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계를 한 번 살폈다. 생각보다 이야기는 길어졌고, 카페 안에도 사람이 서서히 붐비기 시작했다. 나나리는 신경 쓰지 말고 더 있다 가라고 할 것이 분명했지만, 를르슈는 슬슬 가봐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금방 떠날 채비를 하는 를르슈를 보고서 나나리는 그를 더 붙잡지 않았다. 대신에 다음의 약속을 잡았다.

“그럼 다음달 카페 휴일에 같이 식사라도 하실래요, 오라버니?”

“난 좋아. 평일이든 주말이든.”

“주말에는 세이류랑 같이 놀아주셔야죠. 아버지로서의 의무잖아요.”

“요즘은 놀아주려고 해도 잔소리 하지 말라고 얼마나 신경질인지, 원.”

“한창 그럴 때잖아요.”

따뜻하게 자리를 데우던 햇살은 어느새 사라졌고, 를르슈는 카운터로 향해서 나나리에게 커피 값을 지불했다. 나나리는 꼼꼼하게 계산서에 커피 한 잔 값과 커피원두 한 봉지 값을 달아두었다. 를르슈는 묵직한 커피원두 봉지를 받아들고선 쓰게 웃었다.

“이거 파는 거 보다 더 많이 담은 거 아니야?”

“오라버니 전용 서비스에요.”

“고마워. 잘 마실게. 다음달 휴일 정해지면 바로 연락줘.”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나나리가 카페 앞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주었다. 떨어지는 발걸음이 아쉽지 않을 순 없었지만 다음에 또, 라는 약속이 있었으므로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전철역까지 부지런히 걷던 를르슈는 이내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나나리한테 만나는 사람이 있다니. 자신에게 숨기지 않고 말해준 것은 기쁘긴 했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여동생인 나나리도 이런데 나중에 세이류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떠난다고 생각하고 나니까 어딘가 우울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들쑥날쑥해지는 기분을 어떻게 다잡을 수 없어서, 를르슈는 전철에 올라타고 나서도 한참 동안 한숨을 삼켰다가, 겨우 내뱉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의 자신이 했던 말들도 곱씹어보게 되었다. 세이류를 처음 가지게 되었을 때, 떨리는 를르슈의 손을 잡아주었던 나나리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듯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어렸었지. 정말 어렸었지. 

 

* * * 

 

어렸던 를르슈 람페르지의 20살 연애는 첫 데이트처럼 매 순간 순간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서로 인근에 있는 대학교라고는 해도 같은 학교가 아니다보니 만날 일은 약속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았고, 만날 수 있는 날이 적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려고 해도 서로에게 그것조차 부담이 될까봐 말하지 않고 끙끙 앓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를르슈는 어제 오후 5시를 마지막으로 끝나버린 메일을 보고서 휴대폰을 꺼버렸다. 지금 시각은 오전 11시. 스자쿠는 어제 저녁에 동아리 회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서 ‘집에 들어가면 전화할게!’라는 말을 했지만, 새벽 2시가 될 때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를르슈는 새벽 2시를 가리키는 시침을 보고나니 스스로 질려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쿠루루기에게도 쿠루루기의 일상이 있어. 나랑 하는 약속을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이런 거로 속좁게 굴어봤자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어.’

하지만 ‘그래도’라는 말을 계속해서 덧붙이면서 를르슈는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전화는 해주기로 했으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걱정하는 건 신경 안 쓰이나? 아니면 어쩌면, 어쩌면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더 즐거워서 나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를르슈는 마지막 생각에 더 침울해졌다.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의 스자쿠는 언제든 인기가 많았다.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몇 번 들었고, 예쁘기로 소문난 누군가랑 사귀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를르슈는 불안해하면서도 아무런 용기도 낼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해서 무력함을 느꼈다. 진로희망서 하나 제대로 돌려줄 용기가 없었으면서도, 스자쿠의 연애 사정에 대한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를르슈는 혼자서 괴로워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같은 반이었지만 서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한 번도 할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서로의 바운더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걸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스자쿠에게 있어 를르슈는 친해지지 못했으니 그만큼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고,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으로 를르슈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아니, 지금도 하고 있다.

정작 사귀고 보니까 별 거 아니라서 나를 이렇게 멀리하는 걸까?

를르슈는 속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속상하고, 학교가 다른 것도 싫고, 약속해놓고 어긴 스자쿠에게 따지지 못하는 자신도 이상하리만큼 모든 것이 미웠다. 평소대로라면 이런 것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 연락은 어제 오후 5시. 를르슈가 기다린 시간은 새벽 2시까지. 그리고 오전 11시인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는 스자쿠.

“힘들어.”

를르슈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이런 건 힘들어. 좋지도 않아. 기쁜 건 잠깐이고 계속해서 괴로울 뿐인 연애는, 옳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너무 힘들어.”

그렇다고 해서 그만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섣불리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이유로 헤어지자고 하기에는, 를르슈는 자기 마음을 믿을 수 없었다. 고작 이런 걸로 헤어지고 싶을 정도로 나는 쿠루루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가? 를르슈는 반복되는 물음 속에서 휴대폰 화면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검게 변한 화면 너머로 비친 스스로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스자쿠였다. 쿠루루기 스자쿠, 라고 멋없게 적혀 있는 그 글자들에 를르슈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기다렸던 그 전화를 받아야하는데,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어딘가 어긋나버린 느낌으로 스자쿠의 이름이 둥둥 떠있는 화면만 바라보기를 얼마나 했을까, 전화를 받지 않는 를르슈에게 지친 것인지 스자쿠의 전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뚝 끊긴 화면은 곧 부재중 전화 목록으로 넘어갔다. 를르슈는 자신이 처음으로 스자쿠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져서 를르슈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다. 부재중 통화 목록에 외롭게 올라온 스자쿠의 이름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의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바로 메시지를 남겼다.

‘자고 있어? 어제 전화 못해서 미안. 술자리가 아침까지 이어져서… 나는 지금 집에 들어왔어. 람페르지가 일어나면 전화 줘. 괜찮으면 데이트 하자.’

를르슈는 스자쿠가 남긴 메시지를 소리내어 읽었다. 괜찮으면 데이트 하자, 로 끝나는 문장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침까지 술자리였다면서 무슨 데이트야. 를르슈는 답장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스자쿠랑 사귀고 나서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냉정하지 못한 채로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이럴거면 혼자서 좋아하던 때가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더 우울해져서, 를르슈는 휴대폰을 아예 협탁 위에 내던져두고서 이불 사이를 파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오후 4시였다. 해는 한참 전에 다 떠버리고 나서 지는 일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다시 말해, 데이트는 물 건너 간 시간이었다. 를르슈는 시끄럽게 울리는 벨소리에 느릿한 움직임으로 휴대폰을 쥐었다. 뜨끈뜨끈한 열감이 휴대폰이 혼자서 얼마나 열을 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어렴풋한 가늠만 가능한 채로, 를르슈는 갑자기 잠잠해진 휴대폰의 부재중 전화 목록을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재중 전화 71통]

[쿠루루기 스자쿠]

를르슈는 72번째 울리는 전화를 엉겁결에 받았다. 다급한 스자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보세요, 람페르지?!’

정작 전화를 받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스자쿠의 목소리에 를르슈는 덩달아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답이 없는 를르슈의 반응에 스자쿠는 더 초조했는지 다그치듯 수화기 너머로 큰 소리를 냈다.

‘괜찮은 거야?!’

“아, 아무 일도 없어.”

‘진짜로?!’

“응. 진짜… 근데 전화를 왜 이렇게 많이….”

‘걱정되니까 그런 거잖아!’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계속 자다가 지금 일어났어…—같은 말들을 겨우겨우 밀어내듯 말하고 나면, 스자쿠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그래,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어제 뭐 하느라 이제까지 잔 거야?’

“…….”

뭘 했긴. 네 전화를 기다리느라 늦게까지 못 잤다고. 그런 말을 하기에는 를르슈는 무언가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면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진 스자쿠를 탓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스자쿠는 쓸데 없는 데까지 속박하려고 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이너스적인 요소를 쌓아두고 싶진 않았다.

‘람페르지?’

“별로… 아무 일도 없었어. 어제 그냥, 책을 좀 보느라.”

‘책? 무슨 책?’

“어, 으음…….”

를르슈는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둘러댔을 거짓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에 스스로 당황했다. 뭐라고 하지, 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혹시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야?’

스자쿠는 방금 전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물어왔다. 를르슈는 대답 대신에 한숨을 삼킬 뿐이었다. 스자쿠가 허탈하게 혀를 차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너무 멀고도 차게 느껴져서 를르슈는 괜히 겁이 났다.

‘알았어. 무사한 거 알았으니까 됐어. 전화 많이 해서 미안해. 놀랐겠네.’

“아, 아니야.”

‘됐어.’

“쿠루루기.”

‘끊을게.’

스자쿠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72번이나 전화할 정도로 끈질기게 전화를 했으면서, 를르슈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질린다는 듯이 차갑게 끊어버렸다. 를르슈는 뜨끈뜨끈한 휴대폰이 무색하리만큼 손끝이 차게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다시 걸어야하는데, 어떻게 해야 스자쿠의 기분을 바로 풀어줄 수 있는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사실은 네 전화를 기다리느라 밤늦게까지 자지 못했고, 네 메시지를 보고 더 기분이 나빠서 그냥 복수하듯이 자버렸다고. 그런 말을 하기에는 자기 자신이 속이 좁은 남자가 된 거 같아서 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한 자존심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를르슈는 괜한 싸움을 스스로 시작했다는 생각에 한 번 갇히고 나니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스자쿠에게 솔직해진다는 선택지 따위, 를르슈는 감히 고를 수도 없었다.

같은 시각, 쿠루루기 스자쿠는 땀 범벅이 되어 를르슈가 다니는 대학 캠퍼스를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주말의 캠퍼스는 스자쿠 또래의 커플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초조하게 를르슈의 흔적만 쫓아다니고 있던 스자쿠에게는 주변의 커플들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 전화를 무심하게 끊어내고 나니까 화기애애한 그들의 분위기 속에서 스자쿠 혼자 얼마나 험악한 분위기로 캠퍼스를 활보하고 다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스자쿠는 눈앞에 보이는 자판기에서 이온음료 캔 하나를 뽑아서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 속에서 이온음료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겨우 목을 축이고 나서 스자쿠는 주변 벤치에 앉았다. 그제서야 주변 풍경이 보이고, 스자쿠는 침착해질 수 있었다.

를르슈랑 사귀고는 있지만, 를르슈가 사는 맨션 주소도 모르고, 고작 아는 거라고는 를르슈가 다니는 대학과 학과, 그리고 대학가 근처 맨션에서 자취를 한다는 이야기, 아끼는 여동생이 있다는 것, 휴대폰 번호… 같은 것이 고작이라는 것이 스자쿠를 처량하게 만들었다. 아는 게 이렇게 없는데도 사귄다고 할 수 있는 거야? 스자쿠는 스스로에게 되물으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서 스자쿠는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를르슈를 알 수 없어서 더욱 답답하다고 느꼈다.

이럴 거면 혼자 좋아했던 때가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스자쿠는 차게 식어가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하지만 고작 이런 걸로 헤어질 순 없잖아. 이렇게 좋아하는데. 전화가 잠깐 안되는 순간에도 불안할 정도로 좋아하는데.

 

* * * 

 

“나는 그 영화 별로 안 보고 싶은데.”

“뭐? 왜?”

“결말 반전이 너무 유명해서 별로 보고 싶지가 않아. 이미 전개를 알고서 보는 건 재미 없고.”

“그 영화에 결말 반전이… 있었던가.”

“아빠랑 아버지가 첫 데이트 때 본 기념비적인 영화인데 왜 기억을 못해?”

세이류의 묻는 말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음, 그러게…—라는 말로 어물쩡 넘어가려고 하자 세이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서 ‘나는 주말에 친구들이랑 놀 거야.’라는 말로 대꾸했다.

“그래도 세이류, 아빠랑 아버지랑 앞으로 얼마나 같이 놀겠어? 같이 놀아주라.”

“앞으로 100년은 아빠랑 아버지랑 같이 살 거니까 앞으로 엄청 놀 거네요.”

“아, 아빠는 조금 감동해버렸다.”

“별 걸 다….”

“앞으로 100년 건강해야겠다.”

“200살까지 더 건강하게 살아.”

“200살은 좀… 아빠랑 아버지한테는 힘들지 않을까?”

“힘내봐.”

세이류와 스자쿠의 만담 같은 대화를 듣고 있던 를르슈가 피식 웃었다. 오늘의 디저트는 토끼모양으로 깎은 사과였다.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인 사과를 한 입씩 베어물면서, ‘이 사과 진짜 맛있어!’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를르슈는 갑자기 떠오른 오늘 낮에 있었던 나나리의 만나는 사람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나나 고모가? 거짓말, 진짜?!”

“그래… 나도 엄청 충격이었어.”

“나나리도 그럴 때이긴 하지. 우와, 좀 긴장되는데.”

를르슈의 이야기에 스자쿠와 세이류는 호들갑을 떨었다. 를르슈는 거의 다 비어가는 사과접시를 치우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럴 때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촉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먼저 해줘서 고맙더라고.”

“아, 그래? 아버지는 괜찮아?”

“뭐, 그렇지. 나나리가 이상한 사람 만나는 건 아닐 테고.”

“난 너무 떨려.”

스자쿠는 후, 하, 하면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와도 이제 당황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 스자쿠의 완벽하게 긴장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서 퍽이나 잘도 믿겠다 싶었다. 를르슈가 사과 접시를 치우고 돌아오면, 세이류와 스자쿠는 무언가 소곤거리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근데 아버지랑 아빠는 속도위반이었잖아. 나나 고모 엄청 충격이었겠다.”

“속도위반이 아니라 계획이 생각보다 일찍 앞당겨진 것 뿐이야. 나나리도 좀… 놀라긴 했지.”

“어? 처음 들어.”

“뭘?”

“내가 알기로는 아빠랑 아버지 어렸을 때 내가 생겨서 급하게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누구한테?”

“마리안느 할머니.”

“뭐어… 사람에 따라 말하는 게 다르긴 하지만. 나랑 를르슈는 세이류를 언제 가져도 행복했기 때문에 인생 계획에서 세이류가 없었던 적은 없어. 대신 세이류를 언제 만나느냐, 이건 좀 시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

“감동적이긴 합니다만… 결국엔 저는 예상보다 일찍 생긴 아이라는 걸 부정하시진 않는군요.”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대책 없는 거 같잖아!”

“대책 없이 너 낳은 거 아니야, 세이류.”

마지막은 를르슈였다. 세이류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면서 를르슈는 자신의 애정이 진심으로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과정은 계획과 연출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지. 너는 완벽한 계산 속에서 태어났어.”

하지만 내뱉는 말은 뭔가 TV애니메이션 속의 악역 황제가 늘어놓을 법한 대사여서 세이류는 약간 소름이 돋았다.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를 보고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 완벽한 계산, 계획과 연출 속에서 세이류를 만난 거야~! 스자쿠의 들뜬 목소리에 잠깐 스며들려는 감동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세이류는 괜히 차오르는 감동에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가리면서 ‘이제 숙제하러 들어갈 거야!’라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 소리를 배경음 삼아 느긋한 저녁을 보냈다. 

 

* * * 

 

한참 뒤에는 이렇게 아이를 낳고 저녁마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라고 20살의 를르슈 람페르지와 쿠루루기 스자쿠에게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시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다시 시간은 돌아가서, 를르슈가 스자쿠에게 72통의 전화를 받았던 때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의 일이다.

를르슈는 그동안 세 통의 메시지를 남겼다.

‘미안해, 쿠루루기.’

‘일부러 거짓말 하려고 한 건 아니였어.’

‘만나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장장 이틀에 한 번씩 걸쳐서 보낸 메시지는 내용은 별 거 없었다는 것이 를르슈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최대한 골라내고 정제한 문장은 이게 고작이었다. 더 이상의 말을 보태거나 문장으로 풀어쓰려고 하면 쓸데 없는 감정들이 들어갔다. 를르슈는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최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최악이 아니라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확신할 수 없고, 확답할 수 없고, 확정지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변수 그 자체, 쿠루루기 스자쿠 앞에서 자꾸만 무너지는 자신의 페이스가 싫었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6시간 후에, 일주일 동안 묵묵부답이었던 스자쿠에게서 답장이 왔다.

‘토요일 오후 2시 XX역 앞에서 만나.’

왜인지 스자쿠가 마지막에 내뱉었던 그 차가운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아서 를르슈는 괜히 불안해졌다. 평소라면 를르슈의 일정을 먼저 물어봤울 스자쿠의 배려가 느껴지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제까지 스자쿠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고 움직여줬는지에 대해서, 그 몇 번 있지 않았던 데이트에서의 상냥함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금요일 저녁에 겨우 ‘알겠어.’라는 답장을 보내고 나서, 를르슈는 계속해서 빠져드는 우울과 불행의 사고를 멈출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패를 모두 생각하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와의 이별에 대해서 준비하려고 했다. 결국엔 이렇게 헤어지는 것 말고는 답이 없을 것 같았다. 그것 외의 선택지로, 를르슈가 스자쿠에게 솔직하게 말한다거나, 혹은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기회를 준다거나, 그런 희망적인 사고 같은 것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를르슈는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고, 오전 11시에 느즈막이 일어나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스자쿠로부터 온 연락은 없었다.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고, 오늘의 만남으로 스자쿠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한 듯 싶었다. 어떻게 옷을 입고 나가야할 지도 몰라서 그냥 평소 학교에 갈 때의 차림으로, 무채색의 옷을 걸쳐입은 자신을 보고서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는데, 그런 것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역 앞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 스자쿠는 연청 남방을 걸친 채로, 평소보다 거친 모습으로 를르슈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스자쿠가 웃는 얼굴이었던가, 아니면 무표정했던가. 그것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긴장되어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냐. 1시 50분 쯤에 왔어.”

“……그, 쿠루루기.”

“술 마실래?”

“응?”

“람페르지랑 아직 술을 한 번도 안 마셨던 거 같아서.”

“…아, 상관 없어.”

“그래? 그럼 어디서 마실래? 술집 갈까?”

를르슈는 이제껏 데이트에서 어색하게나마 잡았던 손도 내밀지 않고, 그저 휴대폰으로 지도를 훑으면서 술집을 고르는 스자쿠의 옆에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술집이든, 조용한 룸으로 나뉘어진 술집이든, 어느 쪽이든 이별은 비참할 것 같았다. 를르슈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옆에 서있는 것에 스자쿠도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술집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를르슈에게 떠보듯이 말하는 스자쿠의 말투에 조금 겁이 났지만,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참은 말이 없던 스자쿠는 그럼 자기가 일하는 술집에 가자고 말했다. 스자쿠가 술집에서 일을 한다고? 를르슈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면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스자쿠가 말해주었다.

“지난주부터 아르바이트 시작했어. 야간에 하는 거라서 시급이 세서 좋아.”

“응. 그래.”

“조금 시끄럽긴 한데, 아직 낮이니까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을 거야.”

“응.”

를르슈는 스자쿠가 걷는 길을 따라서 걸었다. 스자쿠는 앞서 걸어가며, 를르슈가 뒤에서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모양인지,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스자쿠가 하고자 하는대로, 헤어지는 마지막에는 그래도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으로 를르슈는 부지런히 뒤따라 걸었다.

도착한 곳은 XX역에서 15분 정도 걷고 나면 골목 사이사이에 있는 술집 중 하나였다. 테이블이 열 개 정도 되는 가게였다. 이제 막 열기 시작했는지 손님은 한 테이블도 없었다. 스자쿠는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익숙하게 인사를 하며 들어섰다.

“오, 쿠루루기. 오늘 쉬는 날 아니야?”

“맞아요. 오늘은 손님으로 왔습니다.”

“친구랑 왔어? 친구 잘생겼네.”

“그때 말했던.”

“아하.”

그렇게 대꾸한 사장은 를르슈를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재밌게 놀다가요. 아직 오픈 시간이라 뭐 놀 건 없겠지만. 를르슈는 그런 인사는 처음이라 대충 고개를 꾸벅이며 스자쿠가 이끄는대로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하이볼 좋아해? 아니면 마시고 싶은 거 있어?”

“딱히… 그냥 편한대로 시켜줘.”

“안주는?”

“적당히.”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응.”

“그럼 탕으로 할까? 아니다, 꼬치가 좋으려나. 람페르지는 고기 좋아해?”

“나쁘지 않아.”

“알았어.”

스자쿠는 주방 쪽으로 가더니 이것저것 말을 하고서는 주문을 마쳤다. 얼핏 보이는 얼굴은 웃고 있었는데, 를르슈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또 굳은 표정이었다. 정말, 헤어지려나보다. 를르슈는 한숨을 삼키면서 스자쿠가 채운 물컵을 받으며 한 모금을 겨우 마셨다. 찬물이 속을 아릿하게 만들 정도였음에도, 수면부족으로 멍한 머리는 제대로 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꼬치요리 세트가 나오고, 어묵탕도 나오고, 하이볼 두 잔이 나오고 나서도 스자쿠와 를르슈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뒤늦게 가게에서 트는 최신음악 같은 것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지만, 대화의 빈 부분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묵묵히 안주를 한 입씩 먹어보고, 가볍게 하이볼 잔을 맞대고, 한 모금씩 술을 마시고,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 이별을 꺼내느냐에 대해서 고민하던 를르슈는 설마 자기가 스자쿠에게 헤어지자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잘못은 를르슈가 했고, 거짓말도 를르슈가 했으니까, 를르슈가 차이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스자쿠는 닭꼬치 하나를 깔끔하게 다 발라먹고, 하이볼 반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를르슈가 입을 먼저 열었다.

“술 마셨으니까… 이제 말해.”

“뭘?”

“오늘 무슨 말 하려고 부른 거 아니였어?”

“무슨 말? 무슨 말을 해야 해?”

“…….”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한 건 람페르지 아니었어?”

를르슈는 자기가 했던 메시지들을 떠올렸다. 그럼 내가 말해야 하는 건가. 나는 아직도 쿠루루기 스자쿠를 좋아하는데, 그냥 헤어져달라고 말하면 되는 걸까. 를르슈는 정답을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서 하이볼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가운 얼음 때문에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긴장으로 젖은 손바닥을 더욱 미끄럽게 만들었다. 를르슈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스자쿠는 그런 를르슈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 말이야, 람페르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더라고.”

“응.”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학교나 겨우 알고, 휴대폰 번호가 고작이더라.”

“…….”

“근데 람페르지도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내가 어디 사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그런 거, 알고 있어?”

알 리가 없다. 지난주부터 시작했다던 아르바이트도 오늘 알았으니까. 를르슈는 바싹 타들어가는 갈증에 술을 들이부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고등학생 때에는 보이는 게 많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었다.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고서도 사람을 돕는 친절함, 상냥함, 그러면서도 아닌 일에는 정의감을 감추지 않는 모습을 좋아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 서로 사귀게 되고 나서부터는 더 가까워진 만큼 보이는 것이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적당한 거리감을 잃어버리고서 한없이 가까워진 기분에 들떠서, 다 망쳐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런 참담한 기분이 되고 나니까, 를르슈는 스자쿠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좋았는데.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거였구나.

“람페르지가 몰랐어도, 난 앞으로 같이 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

“근데 오늘 람페르지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여서… 솔직히 너무 속상하네.”

나만 좋아한 거 같아서.

마지막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내내 맞추지 못했던 시선을 들어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스자쿠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모습으로 정말 담담해보였다. 스자쿠의 커다란 두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얼빠진 남자의 얼굴 그 자체라서, 를르슈는 이 자리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을 되돌려서 스자쿠에게 72통의 전화가 왔던 그날 밤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첫번째 전화를 피하지 않고 바로 받아서, 네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술자리가 늦게 끝나서 속상했다고 털어놓고,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난 기분이라서. 를르슈는 더 말할 수 없는 것과 이제 이어갈 수 없는 분위기를 실감했다.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할 거 같아서, 를르슈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입을 열었다. 이제 밑져야 본전, 헤어지게 되는 마당에 무슨 말을 해도 될 거라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게 했다.

“쿠루루기한테 일부러 거짓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니야.”

“응.”

“사실대로 말하는 게 무서우니까.”

“…무서워?”

“쿠루루기가 귀찮을 거 같아서.”

“…내가?”

어차피 이제 볼 일도 없을 텐데, 라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지만 를르슈는 그 다음 말이 차마 입밖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마지막에 좋은 모습만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생각보다 강했다.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인걸. 그러니까 더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람페르지를 귀찮다고 말한 적 있어?”

“없는데. 없어도, 그래도, 나도, 신경은 쓴단 말이야.”

“뭘?”

를르슈는 다그치듯 묻는 스자쿠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말하고 싶었다. 괴로운 시간이었다. 지난 일주일도, 지금 이 시간도.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를르슈는 한참을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지금 쿠루루기는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잖아.”

드디어 꺼낸 말에 를르슈는 눈물이 나올 것 같다는 느낌과 다르게 꽤나 건조한 기분이었다.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이별을 목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를르슈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를르슈가 내뱉은 말에 스자쿠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남은 하이볼을 다 마셨다. 술이라고는 하이볼 한 잔 뿐인 이 미적지근한 연애 관계가 끝나는 건 이제 순식간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를르슈는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아직도 좋아하는데,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람페르지는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넌 그럼 헤어지자는 말을 거짓말로 해?”

어딘가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진짜로 헤어지고 싶어?”

했던 말을 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이별의 문제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해야하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너만 좋아한 거 아니야. 나도 너 좋아해. 근데, 근데 이제 뭔가 아닌 거 같으니까. 나도 이러는 거 이제 싫고.”

“지금 이상하잖아. 우리 서로 좋아하는데 왜 헤어져야 하는데? 그냥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전화 많이 해서 질렸어? 그건 난 람페르지… 네가 전화가 안 되어서 걱정이 되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러니까.”

끝을 결국 좋게 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를르슈는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 스자쿠는 먹던 음식들도 가만히 내버려두고서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의 빤한 시선에 가만히 있던 를르슈는 결국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못 볼 꼴과 흉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이별에 쐐기를 박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좋아하는데도… 아직도 서로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고. 네 이름을 불러도 되는지 아직도 모르겠고, 이럴 거면, 혼자서 좋아했던 때가 더… 더….”

차마 그때가 더 행복했다고 말하기는 싫었다. 스자쿠랑 사귀며 몇 번 했던 그 데이트의 추억은 언제든 떠올려도 즐거웠으니까. 행복했던 것을 거짓말으로라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를르슈.”

스자쿠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름을 불렀다. 를르슈,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헤어지는 것에 대한 분노나 우울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애정으로만 다가오는 부름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애매한 감정으로 닿아오는 자신의 이름에 를르슈는 시선을 내리깔고서 스자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혼자 좋아하는 거 아니라서 다행이다. 를르슈도 나 좋아한다니까 그건 진짜 다행이네. 그래서 내가 언제 를르슈가 귀찮다고 한 적 있어?”

“없지만….”

“없으면 없는 거야. 그럼 다른 거 물을게. 그때 거짓말 했던 이유, 솔직하게 말해줘.”

“…….”

“전날 늦게 잔 거 같은데, 혹시 내 전화 기다렸어?”

스자쿠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바보, 날 이렇게 좋아하는 주제에. 계속 헤어지자는 이야기나 하고 있고. 그런 말들을 억누르면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잡아 끌어 제 손으로 감싸쥐었다. 를르슈의 차게 식은 손에 스자쿠의 따뜻한 손이 닿자 를르슈는 어깨를 움츠렸다.

“나 기다리느라 늦게 잤다고 했으면 내가 귀찮아할 거 같았어?”

“……너는.”

“응.”

“너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이랑도 사귀어 봤으니까 어떤 게 적당한 건지 잘 알고 있겠지만, 난 아니야. 너랑 사귀는 게 처음이고, 또, 네가 귀찮아하면, 내가 싫어질거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계속, 그런 생각 밖에 할 수 없어.”

“내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어봤어도, 를르슈랑 사귀는 건 처음이잖아. 나도 그런 생각해. 그럼 를르슈도 화를 내면 되잖아.”

를르슈의 마음도 모르면서 스자쿠는 정론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한테 미움 받고 싶지 않고, 귀찮아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런 모든 눈치를 살피다 보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모르게 되고, 네 앞에서는 어떤 말도 내기가 어려운데. 너는 뭐가 그렇게 쉬운 건지.

“솔직하게 말해도 돼. 우리 서로 좋아해서 사귀잖아.”

를르슈는 그 말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엔 닭꼬치 하나를 제 앞으로 잘 발라서 넘겨주는 스자쿠의 손길에 그것을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맛있게 양념이 배어있는 닭꼬치가 달콤하니 맛있었다. 단순해진 사고 방식으로, 이게 정말 맞는 걸까, 하는 마음으로. 를르슈는 입을 열었다.

“술자리 같은 데 늦게까지 안 갔으면 좋겠어.”

“응.”

“걱정되잖아. 그리고,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는 건 건강에도 안 좋고.”

“맞아.”

“전화하기로 했으면…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는지도 궁금하고.”

“미안.”

“그리고….”

“응.”

를르슈는 자기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걸로 우는 꼴사나운 남자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 입술을 꾹 내닫고서 떨리는 입꼬리를 가렸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을 잡고서 소리 없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따뜻한 체온과 웃음에 를르슈는 훌쩍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나도 스자쿠를 좋아해.”

때마침 바뀌는 잔잔한 발라드는 꼭 놀리는 것 같이 부드러운 선율이었다. 눈물을 닦아내는 를르슈를 앞에 두고서 스자쿠는 시켜놓은 어묵탕과 꼬치요리 세트를 완벽하게 해치웠다. 술을 한 잔씩 더 시키고, 열 개의 테이블 중 다섯 개 정도가 찼을 무렵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술집 밖으로 나섰다. 처음 만났던 광장까지 걸어갔다가, 더 걸어서 공원까지 걷다가, 야경을 보면서 첫 키스를 했다.

그러고 나면 더는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았다.

 

* * * 

 

결국 리마스터 재개봉 영화는 스자쿠와 를르슈 둘이서 보는 데이트가 되었다.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영화관의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커다란 전광판에 비치는 예고편을 살펴보고 있던 스자쿠는 입을 쩌억 벌리면서 말했다.

“와, 나 이 영화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 거 같아.”

“나도. 그때 무슨 정신으로 봤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이런 장면이 있었구나.”

“이거 영화제에서 상도 많이 탔대.”

“그래? 정말 그때는 를르슈 밖에 몰랐어.”

“그거 참 고맙네. 나도 너밖에 몰랐으니까.”

“헤헤. 그립네.”

팝콘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영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고 있는 와중에, 를르슈와 스자쿠는 자신들의 앞을 지나가는 서너 살 되어보이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게 되었다. 아이는 팝콘과 장난감이 세트인 메뉴를 고른 모양인지, 장난감을 손에 쥐고서 실컷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를르슈와 스자쿠는 지금보다 더 어렸던 세이류를 떠올렸다.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상영관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까지 보고 난 뒤에야 스자쿠와 를르슈는 세이류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다.

“그때도 무슨 고양이의 대모험인가, 그런 애니메이션 보러 왔었을 때였는데.”

“고양이 키워서 말 가르치겠다고 세이류가 떼를 썼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세이류도 보통내기가 아니야. 보통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지, 진짜 고양이를 키워서 말하는 고양이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안 하잖아? 역시 우리 딸이야.”

“길고양이만 보면 달려들어서 진짜 곤란했어.”

“검은 고양이면 노래 부르면서 쫓아가고.”

스자쿠와 를르슈는 어린 세이류의 천방지축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또 실없이 웃었다. 그래놓고서는 이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닌다고 아빠들이랑 놀아주지도 않고 말이야.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그의 옆에서 콜라를 마시면서 대꾸했다.

“그래서 나랑 데이트 하는 건 싫어?”

“아니, 우리 딸이 이제 눈치껏 자리 만들어줘서 좋다고. 내가 언제 또 를르슈랑 첫 데이트 때 본 영화를 보겠어. 역사적인 순간의 재현이지.”

스자쿠가 말하는 역사적인 순간의 재현이라는 말에 를르슈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곧 상영관이 열린다는 안내방송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손을 잡고 움직였다. 그때도 손을 잡느라 정신없었는데, 지금은 손을 잡고 영화에 대한 기대로 부풀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감회가 새로웠다.

아무래도 부부도 연륜이 쌓이면 척하면 척이겠지. 스자쿠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팝콘을 다 먹어버려서 를르슈가 가볍게 잔소리를 하는 것으로 영화의 준비는 마무리가 되었다. 콜라만 먹으면 입이 심심하잖아. 를르슈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스자쿠가 웃으면서 ‘그럼 안 심심하게 뽀뽀해줄게.’ 같은 말을 하면서 등짝을 한 대 얻어 맞았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스자쿠와 를르슈의 사이에서 키스는 숱한 일이 되고 섹스도 역사적인 순간을 넘어서서 연애의 크고 작은 사건 중에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을 때였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가끔은 싸우기도 하면서, 때로는 서로 너무 좋아서 울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많아지고 쌓여서 벌써 사귄지 1년은 가볍게 넘겼을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의 설렘이 이제 어느덧 1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완벽하게 원을 그리는 관계는 아니지만, 비뚤빼뚤한 곡선으로 서로를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곡선으로 이어지는 모양이 왜인지 하트 모양이면 더 로맨틱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더 좋아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을 때였다.

어느덧 더워지는 여름이 찾아오고, 곧 있으면 또 스자쿠의 생일이 오는구나, 하는 것을 를르슈가 어렴풋이 실감하고 있었을 때 사건은 일어났다.

“아버지가 맞선을 보라고 하거든.”

스자쿠는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프라푸치노를 앞에 두고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미간에 힘을 줘서 잔뜩 좁힌 스자쿠는 하기 싫은 이야기를 억지로 꺼내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스자쿠의 아버지? 맞선? 무슨 맞선? 정작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상대인 를르슈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했다.

21살 쿠루루기 스자쿠의 인생에 대해서 가볍게 이야기를 해보자.

그는 대대로 정치가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그의 장래희망은 정해져있었다. 정해진 레일 위의 삶에 대해서 스자쿠는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됐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엄격한 아버지, 삭막한 가정환경 속에서 스자쿠의 숨쉴 틈은 주어지지 않은 채였다.

그나마 를르슈를 만난 게 삶의 목표 달성이라고 해야 할까. 스자쿠는 스스로의 인생에 그렇게 평하면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듣고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또 대책 없이 귀여운 얼굴 하고 있네, 를르슈.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프라푸치노의 휘핑크림을 한 입 떠먹었다. 입안에서 퍼지는 달달함에 만족스러움이 느껴졌다.

“이거 맛있다. 새로 나온 메뉴랬는데 카라멜 드리즐이 맛있어.”

“그래…가 아니라, 맞선? 결혼? 스자쿠 네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스자쿠의 말은 어딘가 건성이면서도 자신의 일에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듯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꺼낸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은 있는지, 스자쿠는 뒤늦게 말을 곱씹는 를르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빤히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서 어딘가의 SOS가 느껴져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한테는 맞선이라고 했지만, 아마 아버지는 이미 다 정해놨을 거야.”

“…….”

“나한테 를르슈가 있다고 말했는데.”

“응.”

“알고 있대.”

스자쿠는 어제 나누었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적당히 사귀고 헤어지도록 해.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적당히 사귀고 헤어져? 그게 어떻게 가능해. 스자쿠는 차오르는 욕지기를 억누르고서 아버지를 그 자리에서 무시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가는 스자쿠를 붙잡지 않았다.

냉랭한 부자 간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몇 번이고 반복되어 왔다. 스자쿠가 반항해도 아버지는 막무가내였으며, 매번 꺾이는 것은 스자쿠였다. 좋아하는 검도를 그만두었을 때나, 진로희망서에 적어내는 직업 같은 것이나, 이제는 사귀고 있는 연인을 정리하라는 말까지도.

그러나 이제까지 꺾여도 스자쿠 혼자만의 인생이었지만, 지금은 를르슈가 있다. 스자쿠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맞선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그것이었다. 를르슈랑 함께라면, 난 어쩌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 같아. 그런 막연한 기분으로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기대보고 싶었다.

“너네집도 꽤 복잡하구나.”

를르슈가 하는 말은 의외의 평이었다. 복잡하다고? 스자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히려 간단한 거 같은데. 누군가는 시키고 누군가는 그 말을 따르는 명료한 관계에 대해서 스자쿠는 복잡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스자쿠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나?”

“응.”

“당연히 안 나가고 싶지.”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구나.”

를르슈의 말에는 확신이 느껴졌다. 스자쿠는 대답 대신에 를르슈에게 빨대를 내밀었다. 를르슈는 거절하지 않고서 한 입 먹었다. 스자쿠가 맛있다고 한 프라푸치노는 카라멜 드리즐과 에스프레소 휘핑크림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있었다. 를르슈가 한없이 달기만 한 프라푸치노의 입가심으로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있는 사이에 스자쿠는 입을 열었다.

“안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래?”

“를르슈, 나랑 결혼할래?”

스자쿠의 말이 끝나고 나서, 를르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커피잔을 쥐고 있는 손을 가볍게 떨거나, 혹은 불안한 듯이 아랫입술을 깨물거나, 그런 반응을 보이는 대신에 를르슈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스자쿠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내 한숨을 한 번 짧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딱히 네가 할 이야기가 없어보여서. 그냥 가려고.”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런 소리 할거면 나는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해야 할 과제도 있고.”

“나 지금 맞선 본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결혼하자고 하는 게 맞선을 피하는 방법이야?”

“를르슈는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거 같아?”

“아니야?”

스자쿠는 황당한 얼굴로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를르슈는 잡혀있던 팔을 빼내고, 나가기 위해서 들었던 가방을 다시 자리에 내려놓고 의자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리 한 쪽을 꼬고 앉은 를르슈는 스자쿠를 보고서 미간을 찌푸린 것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너는 그게 제대로 된 방법이라고 생각해?”

“제대로 된 방법이라는 게 있어?”

“적어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랑 결혼하자, 하는 건 방법이 아니지.”

“그건 를르슈가 우리 아버지를 몰라서 그런 거 같은데.”

“모르니까 더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스자쿠가 이 열애 1년 간 배운 것이 있다면, 말로는 를르슈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기 주장도 제대로 못하고 스자쿠 눈치만 살폈던 를르슈가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뒷받침이 되어주니까 자신감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단순하게 기뻤다. 하지만 이렇게 신랄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화법으로 두들겨 맞을 때에는 스자쿠는 가끔 연애 초기의 를르슈의 배려가 그리워지곤 했다.

아니, 뭐 이제 와서 싫다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 뛰쳐나갈 기색이 보이지 않는 를르슈를 앞에 두고서, 스자쿠는 으음, 하고 팔짱을 낀 채로 를르슈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결혼할 상대를 데리고 간다고 해서 아버지를 꺾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일한 것 같았다.

곰곰히 생각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커피를 들이켰다. 적당한 온도로 식은 커피는 향도 나쁘지 않았고 풍미도 좋았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지금 대화의 주제였다. 스자쿠의 맞선. 스자쿠의 집안 사정. 스자쿠와 함께 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먹을만하다고 생각했던 커피는 오로지 쓴맛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냉정한 척 말은 꺼냈지만 사실 를르슈도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동성 간의 혼인이 가능하고, 남자의 임신이 가능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닫혀있고 보수적이었다. 스자쿠의 아버지는 정치인인 만큼 파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긴 어려울 것이다. 동성혼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가족이, 그것도 하나 뿐인 아들이 동성혼을 한다고 하면 말리게 되는 것이 부모였다. 쿠루루기 스자쿠의 아버지도 겉으로는 대단한 정치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식 일이 되면 평범한 부모가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를르슈가 그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에, 스자쿠의 휴대폰이 가볍게 울렸다. 잠깐 메시지 확인 좀 할게, 라고 스자쿠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서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도 양반은 못 되네, 라고 말하는 스자쿠의 목소리에 그의 연락은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시 중심에 세워진 으리으리한 호텔의 이름과 다음주 토요일의 날짜와 시간이 적혀있는 메시지는 단촐한 내용이었다. 스자쿠가 그렇게 뛰쳐나갔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맞선 계획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나랑 사귀는 걸 알고 계신다고 그랬지, 스자쿠?”

“응. 뭐… 좋은 소리는 안 하시더라고.”

아무래도 좋은 소리는 듣기 힘든 상황이니까. 나름대로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를르슈 또한 정답을 쉬이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 대해서 딱 맞아 떨어지는 방정식의 해 같은 해결책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은 스자쿠와 연애하는 지난 1년 간 배운 것이기도 했다.

“난 솔직히 를르슈가 아닌 사람이랑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아.”

“그래?”

“를르슈는? 내가 그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거에… 별로 아무 생각이 없어?”

“그럴 리가 있나.”

를르슈는 바로 즉답했다. 나도 싫어, 라고 바로 나오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안심한듯이 웃어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긴 있었다. 지금 분위기에서 말해도 되려나, 하고 눈치를 살피던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물었다.

“근데 왜 방금 전에 결혼하자고 하니까 싫다고 그랬어?”

“난 싫다고 한 적 없어.”

“나가려고 했잖아. 과제도 해야 한다 뭐 이러면서.”

“네가 진지하게 생각 안하고 말하는 게 화가 나서 그런 거야.”

“진지하게 생각한 거야. 난 를르슈랑 결혼하고 싶으니까.”

“너는 나의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럼 반대로 를르슈는 나의 뭘 못 믿고서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널 못 믿는 게 아니라.”

나를 못 믿는 거야, 라고 말하는 를르슈의 모습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 * * 

 

때는 쿠루루기 세이류 5살, 유치원에 한창 다니고 있을 시기였다. 통학 버스를 태워서 보내고 세이류가 유치원에 가서 없는 사이에 잽싸게 집안일과 하고 싶었던 일을 처리하면서 나름의 여가 시간을 보냈던 를르슈의 평온한 일상 속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유치원을 다녀온 세이류는 어딘가 불퉁한 표정으로 를르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눈빛에는 이 상황에 대한 불합리함을 견딜 수 없다는 억울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를르슈가 의아한 눈으로 그 이유를 묻자 세이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왜 동생이 없어?”

“도, 동생?”

“동생 말고도, 언니도 없고 오빠도 없어. 왜? 왜 나만 혼자야?”

세이류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같은 반 친한 친구에게 여동생이 생겼다고. 맨날 여동생 이야기만 줄곧 늘어놓고 같이 놀지도 않고 여동생한테 쓸 편지를 쓰느라 저랑 놀아주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세이류는 친한 친구를 여동생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에 울분에 찬 듯 싶었다. 유치원에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동안에도 여동생 이야기만 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게 되고, 이윽고 집에 오고 나서부터는 자신에게 동생도 언니도 오빠도 만들어주지 않은 아버지랑 아빠에게 괜히 성질을 부리게 된 것이었다.

“나는 친구가 없으면 혼자야, 아무도 없어. 아버지랑 아빠랑 친구가 없으면 아무도 없단 말이야!”

흐아앙, 하고 울어버리는 세이류를 보듬으며 를르슈는 저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그런 속상한 말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하고 달래주면서도 를르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심각성을 깨달았다.

“뭐, 그 나이 쯤 되면 한 번씩은 해볼 만한 생각인 거 같긴 한데.”

야근을 마치고 퇴근한 스자쿠에게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전해주면 스자쿠는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하는 듯 했다. 저녁은 먹었어?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적당히 때웠어, 라고 대꾸하면서 를르슈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헤헤, 충전된다. 를르슈 충전.”

“이상한 거로 충전하지 말고 밥을 제대로 먹으란 말이야.”

“이상한 거 아닌데? 내 몸엔 를르슈가 최고로 좋은 걸?”

를르슈를 부끄럽게 만들 생각인지 스자쿠의 낯간지러운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최고로 좋은지 확인해볼래? 를르슈는 저를 옷장 문 앞에 가둬놓고서 입술을 들이미는 스자쿠를 밀어냈다. 기분 좋게 키스를 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스자쿠는 굴하지 않고 다시 시도했지만, 를르슈는 아예 스자쿠의 입술을 손끝으로 밀어버리고서는 이야기를 들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이야기? 스자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어보면 를르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슬슬 세이류도 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거 같고, 나이 터울도 더 나기 전에 둘째를 가져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둘째?”

스자쿠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이 섰다. 를르슈는 이제껏 피해왔던 둘째 아이에 대한 화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한 숨을 멈추고서 스자쿠를 힐끗 쳐다보았다. 스자쿠가 등을 돌리면서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냈지만, 를르슈는 피하려는 스자쿠에게 도망치지 말라고 외치듯 말을 이었다.

“세이류가 외롭다고 하잖아.”

“…그래서?”

“너도 외동이었으니까 세이류 심정을 더 잘 알 거 아니야? 친구로는 채워지지 않는 형제의 안정감 같은 건 엄청 중요하고…. 나도 나나리가 있어서 이제까지 잘 버텨왔던 거였고.”

“…….”

“뭐라고 말 좀 해봐.”

“하나도 말이 안 되어서 굳이 할 말을 못 찾겠네.”

스자쿠는 화가 났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스자쿠의 초록색 눈빛은 차게 가라앉은 채로, 어느때보다 어둡고 음울한 색이었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 더 깊어보이는 그 시선은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내가 외동이었으니까 세이류 심정을 더 잘 알겠다는 건 어디서 드는 생각인지는 진짜 모르겠어. 우리 어머니는 나 낳고 나서 몸이 약해지셔서 돌아가셨잖아. 그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컸을 거 같아?”

“……스자쿠,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

“친구로는 채워지지 않는 형제의 안정감도 좋아. 있으면 좋지. 하지만 부모의 안위와 형제의 안정감, 둘 중 하나 고르라고 하면 난 당연히 부모의 안위야. 를르슈, 나는 세이류한테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 지금 살아있는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고.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그리고 그거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도 난 충분하다고 생각해.”

“…….”

“난 말야. 세이류를 낳은 건 후회하지 않지만, 그때 너를 잃었다면 나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야. 세이류를 지금처럼 사랑하면서 키울 자신도 없었을 건 확실하고.”

“스자쿠!”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까지 말 안 하면 너는 계속 둘째 이야기 할 거 아니야?”

스자쿠는 갈아입던 옷을 마저 갈아입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내가 말을 심하게 했어. 잘못을 바로 시인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눈을 매섭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날카로운 시선에도 스자쿠는 제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보였다.

“세이류가 원하고, 네가 원한다고 해도 난 둘째는 절대 안 가질 거야.”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너 혼자 겁 먹는 거 때문에.”

“겁쟁이라서 미안하게 됐어.”

“너 진짜…!”

그때였다. 안방 문을 두드리는 똑똑 거리는 노크 소리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문 너머에서는 세이류가 조심스럽게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스자쿠가 문쪽으로 다가서려고 하자 를르슈가 막아섰다.

“너 인상이나 풀어. 세이류 정서에 안 좋으니까.”

“아아, 그러셔?”

“계속 열받게 굴지 마.”

그리고는 를르슈가 문을 열고 문앞에서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세이류를 안아들었다. 무슨 일이야, 우리 딸.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도 세이류는 두 사람 사이에 안 좋았던 분위기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서, 를르슈는 세이류를 품에 안은 채로 다시 아이 방으로 향했다.

“아버지랑 아빠, 싸웠어?”

“아니야. 그냥 이야기 했어.”

“근데 소리 질렀잖아.”

“아닌데? 세이류 자다가 꿈 꿨구나.”

“그런가….”

를르슈는 세이류를 다시 침대에 눕혀놓고, 꿈의 친구인 토끼인형을 품에 안겨주고서 다시 토닥토닥 가슴팍을 두드려주었다. 세이류는 졸음이 오는 눈을 억지로 뜨면서 를르슈를 불렀다. 아버지, 있잖아, 아버지. 응, 세이류. 를르슈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아빠랑 싸우지 마….”

“안 싸웠다니까.”

“근데 왜 아빠는 나 보러 안 와? 둘이 싸워서 안 오는 거 아니야?”

“…아빠도 불러줘?”

“응. 셋이서 같이 자. 어렸을 때처럼.”

“지금도 어려.”

“그럼 더 아기였을 때처럼 같이 자자.”

“알았어.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를르슈는 불이 켜져있는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있는 스자쿠가 맥주 한 캔을 까려고 하던 찰나였다. 를르슈는 그가 캔을 따기 전에 말을 걸었다. 스자쿠, 하고 부르면 스자쿠가 바로 돌아보았다.

“세이류가 불러.”

스자쿠는 머리를 벅벅 쓸어넘기더니, 맥주를 다시 부엌의 냉장고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터벅터벅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 를르슈의 옆에 선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물었다.

“내 얼굴 어때?”

“방금 전보단 낫네.”

그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세이류의 방으로 들어갔다. 반쯤 졸고 있던 세이류는 아버지와 아빠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비몽사몽하는 눈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빠랑 아버지다아…—잠에 잠긴 듯한 목소리는 필사적으로 깨어있으려고 하는 티가 역력해서, 스자쿠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세이류, 아빠 찾았다며?”

“응. 나 혼자 자기 싫어. 아빠랑 아버지랑 같이 잘래.”

“그래, 그래.”

“아빠는 여기, 아버지는 여기. 나 가운데.”

세이류의 침대는 언젠가 커질 세이류의 몸을 생각해서 세 사람이 눕기에는 조금 비좁았지만, 끌어안고 잔다면 딱 맞는 크기였다. 왼쪽에는 스자쿠, 오른쪽에는 를르슈, 가운데에는 세이류가 누워서 세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는 모양으로 있다보면 세이류가 잠에 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말했다.

“아빠, 나 고양이 키우고 싶어.”

“고양이?”

“검은 고양이. 눈은 핑크색이면 좋겠어.”

“그거 요즘 봤던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고양이 아니야?”

“으응… 그리고 변신도 하면 좋을 거 같구.”

“변신까지 할 줄 알아야 하는구나….”

스자쿠와 세이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를르슈는 피식 웃어버렸다. 웃는 아버지의 모습에 세이류는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잠에 빠져드는 와중에도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입꼬리에 위로를 받으면서, 를르슈는 스자쿠의 기색을 살폈다.

스자쿠는 새근거리면서 자는 세이류의 모습을 보면서, 부녀가 닮은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험악한 말로 싸웠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워진 분위기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를르슈의 시선과 마주친 스자쿠는 세이류 너머에 있는 를르슈의 손을 잡았다. 를르슈는 자신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스자쿠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뎠다는 듯이 그 손을 꽉 붙잡아주면, 스자쿠는 안심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자, 를르슈.”

“응, 잘 자.”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밤은 평화로웠고,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일단락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 순간의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를르슈는 그 이후로 둘째에 대한 문제로 스자쿠와 몇 번씩 싸웠고, 스자쿠는 그때마다 한 번도 꺾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완고했기 때문에 양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서로 피곤할 만큼 싸우는 걸 알고 나서부터 를르슈는 어느 순간 둘째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고, 스자쿠는 그 이야기가 나올 만한 분위기를 피하게 되었다. 를르슈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스자쿠는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를르슈 또한 스자쿠가 이야기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고 해서 자신이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소강 상태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 * * 

 

스자쿠를 못 믿는게 아니라, 자신을 못 믿는다고 말했던 를르슈 람페르지를 기억하는가? 이야기가 조금 돌아갔지만 지금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를르슈 람페르지의 옛날 이름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로, 그는 애인이 수없이도 많았던 아버지를 두고 있었으며 이복형제들은 두 손으로 셀 수 없이 많은 피곤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런 집안 행태에 피곤함을 느껴 이혼을 했으며, 를르슈와 나나리를 데리고 브리타니아에서 벗어나 일본이라는 먼 나라까지 향하게 된 것이었다.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로 살던 시절에 느꼈던,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악의를 갖는다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다는 피로는 어렸던 를르슈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아이가 아이다움을 잃어가고, 순수하고 순진한 채로 남는 것이 멍청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가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브리타니아의 성을 버리고 다시 마리안느 람페르지라는 이름으로 돌아간 이유에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애정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이었다.

자유분방한 어머니의 성격을 알고 있고, 그런 배려를 일부러 말하지 않는 어머니의 성정 또한 알고 있기 때문에 를르슈는 일부러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등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집밖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돕고자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거나, 어머니가 신경쓰이지 않게 스스로 할 일을 다 해낸다거나, 하나 뿐인 여동생 나나리를 잘 보살핀다거나.

평범한 유년기를 보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를르슈의 성장 과정은 조금 특이했지만, 스자쿠를 만나며 연애를 하는 과정 속에서 그 특이한 점이 드러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해야 하나?’

스자쿠랑 사귄지는 고작 1년. 하지만 좋아한 시간까지 더한다면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짝사랑한 기간이 연애한 기간보다 길다는 건 평범하지 못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스자쿠가 결혼을 한다면.’

‘내가 아닌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하지?’

를르슈는 카페에서 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던 스자쿠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고 나오는 긴 한숨 끝에는 심란함이 담겨 있었다.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나를 못 믿는 거야. 그 말을 했을 때에 스자쿠는 무엇도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것을 마주하고 나니 를르슈는 더 이상 말할 힘도 빠져버려서, 스자쿠에게 이제 그만 가보겠다고 말했다.

를르슈가 두 번째로 나가려고 하는 것에 스자쿠는 다시 붙잡진 않았다. 그도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애인을 두고서 다른 사람과 맞선을 보겠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프로포즈에도 일절의 대꾸조차 하지 않고서, 그러면서 자기 좋을대로 구는 를르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스자쿠가 를르슈에게 알 수 없는 이레귤러인 만큼, 를르슈 또한 스자쿠에게 그런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평소에 휘둘리는 만큼 되갚아준 것이라고 하기에는, 주어진 상황과 조건이 영 꺼림칙한 내용이라서 를르슈는 미안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결혼하자고 하면… 그게 방법은 아니잖아.’

를르슈는 오늘 있었던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든 정당하다고 우기려고 애쓰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결혼은 를르슈에게 있어서 달갑지 않다 못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아마 그러한 사고의 원천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시절에, 어머니와 결혼을 했으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정부를 만들고 다녔던 친아버지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언제까지고 어린 시절의 상처에 휘둘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상처가 그만큼 깊었던 만큼 자신이 고민해온 것의 무게도 상당하다고 생각하면, 를르슈는 결혼에 대해서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믿지 못하는 것은 스자쿠가 아니다. 바로 자신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도, 그리고 그 책임감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는 것도, 더 나아가서는 그래서 결혼했을 때의 훌륭한 파트너가 될 자신이 없다는 것도. 전부 다 를르슈 때문이었다.

스자쿠에게 그런 불행한 결혼생활을 각오하긴 했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를르슈는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을 타고서 흘러가는 풍경 속에서 시선을 내던졌다. 덜컹거리는 소음 사이로 사람들의 말소리도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오늘은 하루가 피곤하게 느껴졌다.

 

* * * 

 

다가오는 토요일인 9월 28일은 아빠와 아버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아빠는 보름 전부터 가족끼리 다 같이 외식을 하자고 하면서 벼르고 있는 듯 했다. 들뜬 아빠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버지도 세이류가 자신들의 결혼기념일에 같이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세이류는 그날 시간 돼? 아빠와 아버지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묻는 말에 세이류는 끼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알콩달콩하는 아버지와 아빠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는 결혼기념일에 굳이 자신이 껴야 한다는 것이 세이류에게는 조금 부담으로 느껴졌다. 아니 어차피 나 없이도 잘 노는데, 왜 굳이 나를 끼워서…? 하지만 세이류는 자신을 향한 두 아버지들을 위해 눈치껏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쿠루루기는 이번 주 주말에 뭐해? 같이 쇼핑 안 갈래?”

“아, 토요일에는 가족들이랑 약속이 있어서. 부모님 결혼기념일이거든.”

“부모님 결혼기념일인데 쿠루루기가 껴도 되는 거야? 두 분의 데이트 아니야?”

“내 말이 그거야. 왜 둘이서 노는데 내가 껴야하는지 모르겠어.”

“하하, 그래도 따라가는 쿠루루기는 진짜 착한 거 같아.”

“그런가….”

세이류는 친구와의 대화를 마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기념일까지 하루 남은 금요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크리스마스도 이브가 제일 설레고 떨리는 법이고, 결혼기념일도 그런 날이라고 말하며 서로에게 두근두근거리고 있을 바보 같은 아빠와 아버지를 생각하면 빨리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오늘은 부 활동의 대타도 없는 날이었다. 빠른 귀가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라는 점에서 세이류는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작년 결혼기념일 때에는 아빠와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서 세이류가 인터넷에서 찾아놓은 제법 맛있기로 소문난 베이커리에서 예약해둔 케이크를 수령하러 갔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세이류 올해 몇 살이지?’

‘15살.’

‘15개 주세요.’

‘어머, 따님 분이 오늘 생일이신가봐요. 축하드려요.’

‘하하… 아쉽게도 오늘은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이에요. 딸아이가 축하해주는 거예요.’

‘어머 어머, 정말 귀엽고 착한 따님이네요. 서비스라도 더 드려야겠다.’

세이류는 딱 하나 남았다는 밀크 푸딩을 서비스로 받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케이크를 들고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아빠와 아버지를 보면서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세이류를 낳고 15년, 길다면 긴 그 시간을 같이 보냈으면서 두 사람의 한결 같은 모습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을 뿐이었다. 다만 자식인 세이류 앞에서 진한 애정행각은 지나치면 민망함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가끔 잊는다는 것이 골치 아팠다.

집으로 돌아가서 세이류와 아버지들은 케이크를 먹고, 아꼈던 와인을 땄고, 세이류는 스파클링 음료수를 마시면서 건배를 외쳤다. 아무래도 좋은 날이니까 축하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이류는 케이크의 촛불을 끄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빠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달래주는 아버지가 케이크 앞에서 입술을 합치는 모습을 보고서 이내 그 생각을 져버리고 말았다.

“올해도 봐야 하는 건가….”

작년의 회상을 마친 세이류는 가방을 들고서 친구들에게 주말 동안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하고서 교실을 나왔다. 올해는 밖에서 외식하니까, 사람들 보는 앞에서 뽀뽀를 하진 않겠지. 그런 바람을 가지고서 운동장 주변으로 걸으면서 교문 앞까지 왔을 무렵이었다.

“누구를 닮았는지는 몰라도 너 정말 예쁘게 생겼네, 할머니랑 같이 어디 안 갈래?”

그리고 보라색 람보르기니를 끌고 나타난 자신의 할머니— 마리안느 람페르지를 마주했다. 쨍쨍한 햇살에도 지지 않는 환한 미소를 지닌 할머니를 보며, 세이류는 맥없이 람보르기니에 태워져서 도로를 내달리게 된 것이었다.

세이류의 가방을 낚아채며 조수석에 들입다 태워버린 마리안느는 세이류를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하하, 이렇게 보니까 정말 를르슈랑 똑같이 컸구나, 세이류!”

“하, 할머니…!”

“그래, 오랜만이지? 다들 잘 지내니?”

“네, 잘 지내긴 하는데요…!”

“그렇구나, 요즘 너네 아빠랑 아버지 둘 다 나한테 연락이 없어서. 섭섭하기도 하고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그럼 안 오는 게 맞지 않나요?—라고 되묻고 싶어지는 대화의 흐름 속에서 세이류는 애써 웃었다.

“저도 연락 자주 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냐, 아냐. 연락 했어도 못 받았을 걸? 로밍이 안 터지는 나라에만 골라서 다녔더니 네 할아버지가 아주 난리란 난리를 피워서.”

“하, 할아버지요?”

“응, 샤를 할아버지. 기억 나니? 그 이상하고 곱슬거리는 머리에 무식하게 키만 큰 할아버지 있잖아.”

“…….”

“샤를이 요즘 나이 들어서 더 외롭다고 치대는데 왜 이렇게 귀찮은지, 원.”

“…아하하.”

세이류는 브리타니아 정치 잡지에서나 자주 보는 그 샤를 지 브리타니아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마리안느의 말로는 ‘이상하고 곱슬거리는 머리에 무식하게 키만 큰 할아버지’였지만, 세이류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지다 못해 비일상적인 느낌 밖에 주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아, 맞다… 나 나름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있는 아버지가 있지. 세이류는 쌩쌩 달리는 도로 위에서 빠아앙 하고 클락션을 크게 울리는 마리안느의 모습에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미안, 엊그제까지 있었던 나라랑 차선이 반대라서 헷갈리네. 놀랐니?”

“아, 괘, 괜찮아요!”

“창문이라도 열까?”

“괜찮아요!”

“노래라도 틀까?”

“괜찮습니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이류는 간절하게 바라면서 앞만 바라보았다. 거칠게 구는듯 하더라도 마리안느는 금방 여유롭게 운전을 이어가면서 세이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를르슈는 잘 지내니? 네, 아버지는 잘 지내요. 스자쿠 군은? 아빠도 잘 지내세요. 둘이 요즘도 싸우고 그러니? 마지막 말에 세이류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안 싸우시는데요, 라고 대답했다. 마리안느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도 돼, 세이류. 두 놈이서 싸우고 그러면 또 할머니 집에 와서 살면 되잖아.”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정말 귀여웠는데. 세이류도 정말 약간 를르슈를 닮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점에서 훌쩍 어른이 된 것처럼 구는 게 할머니는 아주 속상해요. 반쯤은 스자쿠 군을 닮았으니 보다 더 귀염둥이 같은 모습을 보여줘도 될 거 같긴 한데.”

“귀, 귀염둥이요?”

“하지만 그 얼굴에 그 정도 귀여움은 충분히 합격이야. 좋아, 훌륭한 나의 손녀딸.”

세이류를 보며 싱긋 웃는 마리안느는 ‘역시 누구를 닮았길래 이렇게 예쁜거지?’라는 말을 반복했다. 세이류는 아버지를 닮았고, 그 아버지는 바로 눈앞의 할머니를 닮았다. 그런고로 그 말은 할머니 본인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네 아버지들 결혼기념일 내일이지?”

“네? 어떻게 아세요?”

“다 아는 법이 있어.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니? 섭섭하구나, 세이류.”

하나도 섭섭하지 않다는 목소리로 마리안느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일은 뭐하기로 했니? 몰아치는 마리안느의 질문 속에서 세이류는 머리 한 번 굴릴 틈 없이 계속해서 대답만 해야 했다.

“아빠랑 아버지가 같이 밥 먹자고 해서요. 외식하기로 했어요.”

“나도 가도 되니?”

“괜찮지 않을까요? 저도 가는데.”

“세이류가 허락했으니까 그럼 이제 를르슈한테도 전화를 해볼까…! 아, 세이류, 미안한데 를르슈한테 전화 좀 걸어줄래? 내가 아직 로밍을 안 해놔서 전화가 안 되거든.”

“네, 잠시만요.”

세이류는 휴대폰을 꺼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대기음이 가는 와중에 ♡아버지♡라고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서 마리안느는 세이류를 보고서 미소를 지었다. 뭐지, 그 은근한 미소는. 세이류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면서 아버지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스피커 폰으로 돌려줄 수 있니? 아무래도 운전 중이라서 휴대폰 잡기는 힘들어서.”

“네.”

대기음이 몇 번 끝나고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평소처럼 다정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세이류는 폭풍처럼 몰아쳤던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

‘여보세요, 세이류?’

“아, 아버지.”

‘응, 무슨 일이야?’

“나 지금 할머니랑 있는데. 할머니가 지금 전화를….”

“여보세요, 를르슈? 엄마야. 오랜만에 일본에 와서 너네들 얼굴 좀 보고 가려고 하는데 괜찮지?”

‘어머니?! 언제 일본에… 아니, 지금 세이류랑 있는 거예요?’

“그럼, 그럼. 세이류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뻐졌네. 거의 2년 만인가. 중학교 들어간 게 엊그제 같은데… 어디 보자, 그럼 지금 벌써 3학년인가?”

‘네, 내년에 고등학생이에요. 아니, 그나저나 지금 어디세요? 지금 저녁 먹을 시간인데.’

“슬슬 드라이브 끝내고 갈까 했지. 나도 가면 저녁밥 주니?”

‘오실 건가요?’

“사실 오늘은 무리고. 내일 다 같이 저녁이나 먹자.”

‘내일… 저녁이요?’

“어머, 얘는. 너네 결혼기념일이라고 일부러 훼방 놓으러 온 사람처럼 대하지 말아. 엄마 좀 섭섭해?”

‘맞잖아요.’

“맞아. 그럼 내일 보는 거다? 내가 정했으니까 결정사항이야! 그래도 오늘은 세이류를 무사히 돌려보내주마. 그럼 세이류, 전화 끊어도 돼.”

“아, 네. 아버지, 전화 끊을게.”

를르슈가 세이류에게 뭐라고 한 마디를 더 남길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템포로 전화는 끊어졌다. 세이류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전생의 악역황제라고 불리울 정도로 악마의 독설을 하는 아버지가 이렇게 맥을 못추리고 당하는 것을 보면서 마리안느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괜히 할머니 차에 타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와 아빠의 데이트가…! 하지만 아버지도 답 없이 당해버리는 할머니의 상대로는 자신도 할 만큼 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세이류는 가슴 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할머니는 일본에 계시는 동안 어디서 지내시나요? 예전에 살았던 집인가요?”

“음, 예전에 살았던 집은 아마 처분했으니까 당분간은 호텔에서 지낼까 싶어.”

“그럼 나나리 고모랑도 만나실 거죠?”

“아침에 이미 만나서 브런치 하고 왔다고 말하면 놀라겠구나.”

대체 언제 일본에 오신 거지? 항상 전세계를 신출귀몰하며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할머니의 활동량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실시간으로 겪고 있으면 1년치 놀라움은 다 놀라버리는 기분이었다.

“나나리도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 세이류는 만나봤니?”

“아뇨, 아직은 이야기만 들었어요.”

“후후, 자식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줘서… 뭐랄까, 되게 뿌듯한데 정작 나는 자식들보다 정신 없이 사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내가 더 철이 안 든 느낌? 뭔지 알겠니?”

누군가를 휘두르는 에너지는 세계 제일급인 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낯설어서 세이류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도 슬슬 정착할까 하거든. 옛날에 만났던 사람 다시 안 만나는 게 내 삶의 모토긴 했는데, 사람이 항상 한결 같을 순 없잖니?”

“네? 네.”

“샤를이랑 다시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

“하, 할아버지랑요?”

“이 나이 먹고 다시 연애하려니까 너무 낯간지러운 거 있지?”

충격적이다 못해 경악할 만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에 세이류는 혼이 달아날 것 같았다. 근교까지는 아니어도 시내 바깥을 제법 돌아가며, 세이류는 마리안느가 투하하는 최근의 이야기에 당황하고 놀라면서 반응하느라 진이 빠졌다.

저녁 노을이 뉘엿뉘엿 질 무렵에 마리안느는 집앞 골목 앞에서 세이류를 내려주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식사하고 가세요, 할머니.”

“괜찮아, 저녁에는 술 약속이 있거든. 내일 맛있는 술 추천 받아서 들고 갈 테니까, 스자쿠 군이랑 를르슈한테 기대하라고 전해주렴.”

“네.”

세이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는 마리안느의 굿바이 인사에 세이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브리타니아식 인사는 익숙하지 않아서, 키스를 되돌려주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는 세이류를 보고서 마리안느는 더 귀여워 죽겠다며 반대쪽 뺨에도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교문 앞에서 만났을 때와 같이 멋지게 람보르기니를 끌고 사라졌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세이류는 어느새 식사할 준비를 마친 아버지와 아빠를 마주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이 전해져서 세이류는 아빠의 품에 가볍게 안기면서 중얼거렸다.

“나 진짜 힘들었어….”

“다 들었어, 세이류. 마리안느 씨랑 드라이브 데이트 하고 왔다며?’

“그게 드라이브 데이트였나….”

아빠가 세이류의 등을 토닥이면서 할머니가 좀 엄청나긴 하지, 하고서 달래주었다. 세이류와 스자쿠가 뜨겁게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면서 를르슈가 웃으며 식사를 하자고 말했다. 할머니와의 회포를 풀기 위해서 시달렸던 알 수 없는 스트레스가 쌓였던 탓인지, 세이류는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가 디저트로 사다 준 푸딩까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그래서 어머니랑 무슨 이야기 했어?”

자기 몫의 푸딩을 까서 맛있게 먹는 아버지는 뒤늦게 궁금한 것이 있었던 것처럼 물어왔다. 배부름에 지친 세이류는 으응, 하고 고민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몰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지친 세이류의 목소리에 아버지는 그렇구나, 하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버지도 심란한 모양인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푸딩을 욱여넣고 있었다.

“내일은 모처럼 가족 모임인데 어머니는 대체 왜 오신 거지?”

“마리안느 씨도 가족이니까 올 수 있는 거잖아, 를르슈.”

“……스자쿠, 너는 누구 편이야?”

“난 항상 를르슈 편이지. 정확히 말하면 를르슈를 몹시 사랑하는 편.”

스자쿠의 달콤한 멘트에도 를르슈는 웃지도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내일은 오로지 알콩달콩한 아빠와 아버지의 데이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세이류의 귀찮음 말고는 없었을 텐데, 마리안느 할머니라는 이레귤러가 떨어진 마당에 세 가족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맞아, 어떻게든 되겠지.

 

* * * 

 

쿠루루기 세이류가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때는 쿠루루기 세이류 8살,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처음으로 맞이한 여름방학의 끝물에 그녀는 과감하게 집을 나와, 저금통을 털어서 차비를 마련해 전철로 20분 거리에 있는 마리안느 할머니 집에 찾아가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때 당시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던 나나리 고모의 품에도 매달려서 세이류는 불안한 마음에 엉엉 울다가 이내 지쳐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걱정하는 얼굴의 아빠랑 아버지가 이 먼 곳을 혼자서 찾아왔냐고, 위험하다고 혼내면서 세이류를 끌어안았다. 세이류는 혼자서 먼 곳을 찾았다는 불안함보다는 아빠와 아버지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서로를 다시 끌어안고 세이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아빠랑 아버지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세이류는 몇 번이고 가출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만약에 세이류의 가출에 아빠랑 아버지가 지겨워서 더 이상 찾아주지 않고, 아니면 아빠랑 아버지가 진짜 더 이상 화해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더 무서워져서 세이류는 두 사람의 손을 꼭 쥔 채로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혼난 게 그렇게 서러웠냐고 물어보는 아빠와 아버지와 다르게, 할머니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너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는 예민해. 뭐 때문에 싸웠는지는 몰라도, 세이류 앞에서 흉한 꼴을 보였겠지. 세이류를 혼낼 게 아니라, 세이류한테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스자쿠와 를르슈를 혼내는 마리안느의 말에,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세이류만 어리둥절하게 남았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세이류의 양손을 꼭 잡아주고서 이제 집으로 가자, 라고 말했다. 세이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세이류가 집을 나오기 전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반복되는 아빠의 출장과 야근 때문에 세이류는 여름방학 동안 아빠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휴가까지 못쓸 정도로 바쁜 아빠를 이해하려고 하다가도, 그래도 속상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매일 저녁 5시에 하는 애니메이션을 다 보고 나면, 한 손에는 푸딩을 가득 사들고 돌아오는 아빠를 맞이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요즘 세이류는 자다가 깨서 화장실에 들렀다가 아빠와 아버지가 작은 소리로 다투는 모습 밖에 보질 못했다.

“일이 그렇게 많아? 전화도 못할 만큼?”

“미안, 를르슈. 나 진짜 피곤해.”

“너 이번주 주말에는 쉴 수 있긴 한 거야?”

“쉬어야지. 세이류 생일이잖아.”

“알고는 있네.”

“를르슈,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 말자.”

“내가 뭐라고 말했는데?”

“내가 세이류 생일도 잊을 만큼 정신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느껴질 만큼 양심이 찔렸나봐?”

“…를르슈. 이러지 말자니까.”

세이류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면 이야기는 바로 멈추었다. 아빠와 아버지가 번갈아 가며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나면 세이류는 조금 안심하면서도, 아빠를 제대로 본 게 한참 전이라는 생각에 섭섭하기도 했다. 내일은 진짜 일찍 일어나서 아빠 회사 가는 거 배웅해야지. 여름방학을 맞이해도 바른 생활 어린이 습관을 들인 세이류였지만, 새벽 일찍 출근하는 아빠에게 인사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세이류의 생일인 8월 31일까지 3일이 남았다. 그날도 아빠한테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속상한 세이류에게 아버지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 팬케이크를 만들어주었다. 아버지와 같이 반죽을 치고 마음껏 메이플 시럽을 부어서 달콤한 한 입을 베어물고 나면 세이류의 기분은 좀 나아졌다.

“세이류,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으음. 응, 있어.”

“뭐가 갖고 싶어?”

“갖고 싶은 거는 아니고. 하고 싶은 거야.”

“응.”

“아빠랑 아버지랑 같이 놀이공원 가고 싶어.”

“놀이공원?”

“응. 친구가 그랬는데, 놀이공원에 밤 늦게까지 있으면 퍼레이드도 하고, 불꽃놀이도 한대.”

“그래, 놀이공원에서 또 하고 싶은 거 있어?”

“어렸을 때는 키 작아서 못 탔던 거 타고 싶어. 롤러코스터 같은 거! 언니 오빠들이 타는 거!”

세이류는 신이 나서 말했다. 어젯밤에 아빠가 아버지한테 세이류의 생일에는 쉴 수 있다고 했으니까,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빠와 아버지라면 세이류를 진짜로 놀이공원에 데려다 줄 것이다. 세이류는 요술봉이나 야광 요요 같은 것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가 자랑했을 때에는 시큰둥하긴 했지만, 사실은 유치원에서 단체소풍으로 가본 것 말고는 가족끼리 놀이공원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기대는 점점 커져갔다.

“세이류 생일이 여름방학 마지막 날이라서 좀 아쉽겠다.”

“괜찮아, 놀이공원 가면 다 괜찮아!”

“후후, 다음날 학교 갈 수 있겠어?”

“응! 아, 학교 가서 숙제 바로 낼 수 있게 일기 미리 써둬야지!”

“일기를 미리 써둔다고?”

세이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류의 안에서 놀이공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오른손엔 아버지 손을, 왼손엔 아빠 손을 잡고서 놀이공원을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목요일인 오늘부터 금요일, 토요일 일기를 쓸 공간을 비워두고서, 세이류는 일요일에 있을 자기 생일에 갈 놀이공원을 상상하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미리 쓰겠다는 게 그제서야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아버지는 황당하면서도, 기대로 부푼 세이류의 귀여운 상상력을 칭찬하며 꼭 놀이공원에 가자고 약속했다. 세이류는 부지런히 타고 싶은 놀이기구와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가며, 그것을 이미 다 즐긴 것처럼 일기에 써내려갔다. 평소라면 몇 문장이 되지 않는 일기가 두 페이지를 빼곡히 채워간 것에 세이류는 뿌듯해졌다.

이제 이대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을 때였다.

8월 30일 토요일 아침. 세이류의 아빠는 금요일 저녁부터 돌아오지 않았다. 세이류는 거실 소파에서 웅크려서 자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서 불안한 발걸음으로 거실을 오고 가고를 반복했다. 세이류의 부산스러운 발소리에도 아버지는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던 모양인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빠를 기다리느라 그런 거겠지. 세이류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소파의 남은 구석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잠에서 깬 모양인지 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세이류는 아버지의 얼굴 근처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버지, 일어났어?”

“응… 스자쿠?”

“아니야, 나야. 세이류. 아빠는 안 온 거 같아.”

스자쿠의 초록색 눈빛과 똑 닮아있는 세이류의 두 눈빛에서는 섭섭함이 묻어났다. 를르슈는 세이류의 씰룩거리는 뺨을 쓸어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를 덮고 잔 것도 아니고, 스자쿠를 기다리다가 그냥 소파에서 자버렸으니 몸은 욱씬거리고 아팠다.

불편한 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돌아오지 않은 스자쿠였다. 를르슈는 휴대폰을 살폈다.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는 것이 영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스자쿠로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남겨져 있었다. 뭐라는 거야, 내일은 세이류 생일인데 오늘까지 못 들어오면 어떻게 하자고. 를르슈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살피던 세이류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빠 못 온대?”

“…세이류.”

“나 생일에 놀이공원 못 가?”

세이류는 머뭇거리면서 ‘진짜 못 가?’라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를르슈는 세이류가 놀이공원에 가는 것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일기를 미리 써두고 하고 싶었던 일 리스트를 꼼꼼히 적어내리는 정성을 보여줬던 세이류에게, 스자쿠는 오늘 저녁에나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말이 좋아서 오늘 저녁에 들어오는 것이지, 사정이 나빠지면 스자쿠는 내일까지도 안 들어올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고 있다. 스자쿠는 지금 회사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으니까 언제든 열심으로 하게 된다는 스자쿠의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때였다. 스자쿠는 자신의 아버지 쿠루루기 겐부의 연줄로 들어간 회사에서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타이밍이 좋지 않게 자기 딸 생일을 챙겨주지 못할 정도로 숨가쁘게 일하는 상황에 놓인 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를르슈가 이해하고, 힘들겠지만 세이류도 이해를 해줘야 한다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성은 이해하더라도 감정은 따라주질 않았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의 생일인데. 그렇게 기대하던 아이의 생일에 놀아주지도 못하는 아빠라니. 약속을 지켜주지도 못할 거면서 잔뜩 기대만 시키는 못난 남편을 어떻게 감싸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를르슈는 최대한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며, 분노를 억누르면서 세이류에게 물었다.

“세이류랑 아버지만이라도 놀이공원 갈까?”

"아빠는?”

“아빠는 일이 많은가봐.”

“아빠 없이 가기 싫은데…. 아빠 진짜 안 된대?”

“…….”

“아빠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면 안 돼?”

스자쿠를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세이류의 모습에서 를르슈는 더 이상의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세이류는 그런 를르슈가 망설인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나름의 타협책을 내놓으며 를르슈에게 대답을 졸랐다.

“집에서 내일 낮까지 기다렸다가 아빠랑 같이 밤에 퍼레이드 보는 건 안 돼?”

“그래도 세이류는 놀이기구 타고 싶어했잖아.”

“아빠랑 같이 가고 싶은데. 아빠는 나랑 같이 가기 싫대?”

“그럴 리가 없잖아. 스자쿠는 회사 일이 많아서 그런 것 뿐이야….”

를르슈는 애써 스자쿠가 그럴 리가 없다고, 일이 너무 많을 뿐이라고 스자쿠를 대신해서 답변하는 자신이 조금 비참하게 느껴졌다. 전화도 없이 그저 메시지만 남겨놓고 약속도 못 지키는 못된 남자를 이 이상으로 어떻게 감싸줄 수 있는지도 스스로 의문이었다.

세이류는 어떻게 해도 아빠가 올 수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매번 약속을 지키는 아빠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빠가 못 오는 것에 아버지에게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세이류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놀이공원을 포기하는 것. 아빠 없이 아버지와 단둘이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세이류는 그 서러움에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입술을 잔뜩 내밀면서 울상을 지었다.

“그럼 나 놀이공원 안 갈래.”

“하아… 세이류. 아빠가 없다고 가고 싶은 걸 꼭 참을 필요는 없어.”

“싫어! 아빠랑 아버지랑 셋이 아니면 싫어! 같이 안 가면 재미 없어! 아빠도 같이 가고 싶을 테니까 참을 거야!”

“…….”

세이류의 비장하기까지 한 말투에 를르슈는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참게 만드는 자신이 부모로써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응원해줘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를르슈가 아무런 말이 없자, 세이류는 씩씩거리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안에서는 이불을 뒤집어 쓰는 소리와 함께 세이류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느껴졌다. 흐아앙, 하고 우는 어린 목소리에 를르슈는 아이를 달래주러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인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저 스자쿠가 한없이 미울 뿐이었다.

점심 때가 되고 나서야 세이류는 울음으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방문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 나 배고파. 세이류의 배고프다는 이야기에 를르슈는 그제서야 웃어보이면서 같이 밥을 먹자고 말했다. 나가서 먹을까? 세이류가 좋아하는 어린이 햄버그 있는 식당 갈까?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세이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녀는 점심 늦게 외출을 했다. 세이류가 가고 싶은 식당은 거리에 있는 대형쇼핑몰에 있었기에, 사람이 많고 북적거려서 정신이 없었지만, 스자쿠의 빈 자리를 느낄 틈도 없는 것이 나쁘진 않았다. 햄버그 정식을 먹고, 디저트로 푸딩 파르페를 먹고, 세이류의 생일선물 쇼핑을 하러 1층부터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꼭대기 층까지 가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그때까지도 스자쿠에게서 집에 도착했다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쇼핑몰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기자기한 홀케이크 하나를 사서 돌아온 세이류와 를르슈는 단둘이서 조촐하게 세이류의 생일 이브를 마무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 세이류가 하는 밤 인사에 를르슈는 웃으면서 좋은 꿈을 꾸라며 그녀의 뺨에 키스를 해주었다.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닌 탓에 피곤한 세이류가 바로 잠드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는 못된 남편이자 못난 아빠인 쿠루루기 스자쿠를 기다리기를 시작했다.

8월 31일 일요일의 새벽 3시가 될 무렵이었다. 스자쿠는 근 사흘 만에 돌아온 집에 죄인처럼 눈치를 살피며 들어왔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문고리가 닫히는 소리에 소파에서 졸고 있던 를르슈는 눈을 떴다. 잔뜩 지친 기색의 스자쿠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를르슈를 보더니 어색하게 시선을 맞추면서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를르슈.”

그 말을 들은 를르슈는 스자쿠가 생각보다 뻔뻔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구석에서조차 천연인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다녀왔다는 말이 우선인 것일까 아니면 미안한다는 사과가 우선이 되어야하는 것인가. 스스로도 혼란스러워서 그 인사에 대꾸를 하지 못하면, 스자쿠는 를르슈의 표정을 살피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

그 말은 곧 기폭제가 되었다. 를르슈는 사과하는 스자쿠의 손목을 붙잡고서 부부 침실로 향했다. 혹시 세이류가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실 문을 살살 닫아 잠갔다. 를르슈의 힘에 이끌려서 침실로 걸어들어온 스자쿠는 곧 침실 한복판에서 뺨을 얻어 맞았다. 뺨을 갈기는 소리와 함께 를르슈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스자쿠를 노려보았다. 를르슈에게 맞은 스자쿠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다녀왔어, 미안해, 또 계속 말해봐.”

“…….”

“지금 회사 일 중요한 거 알아. 바쁜 거도 알아. 그래도 네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수준이라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이번주 주말에도 일할 거 같으면 그럴 거 같다고 진작에 말해주던가. 당일날 그런 식으로 메시지로 통보하고, 전화도 한 통 없고.”

“…….”

“넌 나랑 세이류가 계속 참아주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건 아니야. 나도 일부러 그런 거도 아니고.”

“변명하지 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면 애초부터 세이류 생일에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말이라도 하질 말던가!”

를르슈의 일갈에 스자쿠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자쿠는 지금의 를르슈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스자쿠가 잘못한 일이니까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입을 닫아버리는 스자쿠를 보고서 를르슈는 더욱 열이 받았다.

“변명할 것도 없으니까 이제 말도 안 할 거다, 이건가?”

“를르슈.”

“세이류가 방학 내내 얼마나 외로워했는지 알아? 생일날에도 너 없으면 가고 싶던 놀이공원도 안 갈거라고 말하는 게… 그걸 듣는 게 얼마나 속상한 지도 아냐고.”

“…….”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뻔뻔하게 들어와서 다녀왔다고 하고, 내 눈치 보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나 한 거겠지.”

를르슈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듣기만 하고 있는 스자쿠가 더 싫어졌다. 밉고, 짜증나고, 화가 나는 마음은 계속해서 커져가서 를르슈는 지켜야 할 선이 흐릿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의 경계가 무너져가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 또한 달랠 길 없이 폭발할 것 같았다. 이성이 말을 듣지 않는 분노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나랑 세이류는 너 힘든 거만 알아주고 다 양보해주는 게 당연한 거야? 우리는 계속 참고 있다가 어쩌다가 너 안 바쁜 날에, 네가 남편 노릇 아빠 시늉 하고 싶은 기분 들면, 니가 쓰는 그 선심에 바보 같이 기뻐하기만 하면 돼?”

“내가 잘못한 건 아는데, 말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잖아.”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건 너잖아!”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도 아닌데.”

“또 그 이야기하는 거 지겹지도 않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그걸 내가 제시해 줘야 해?”

“알아주길 바라면서 아무것도 말 안 해주는 건….”

“아, 지금 내가 알아주길 바란다고, 조르는 것처럼 느껴져? 내가 말하는 수준이 딱 그 정도야?”

“를르슈!”

“내 이름 부르지 마!”

커져가는 언성 속에서 서로 식을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날카로워지는 분위기가 되었다. 를르슈는 왜 자기를 몰라주냐는 듯이 저를 노려보는 스자쿠의 시선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분노로 뜨거워진 눈가를 겨우 문지르면서, 를르슈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이제 못 해먹겠어.”

“뭐?”

“나 한 달을 참았어. 세이류 생일까지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그게 뭐야, 헤어지고 싶다는 거야?”

“헤어지든 이혼을 하든, 이제 난 더는 못 하겠어.”

스자쿠는 뺨을 얻어맞은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를르슈는 그런 스자쿠를 살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입밖으로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꺼내고 나면 머릿속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냉정해지지는 못했다. 나는 스자쿠랑 헤어지고 싶은 걸까, 하고 를르슈가 스스로 되뇌고 있을 때, 스자쿠는 진심이냐고 물었다. 를르슈는 대답 대신에 방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가려는 를르슈를 붙잡은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너 지친 거 알겠어. 근데 너도 나도 지금 너무… 감정이 정리가 안되니까. 생각할 시간 좀 갖자.”

“…….”

“내가 나가서 잘 테니까 를르슈는 여기 있어.”

그리고 방문을 닫고 나가는 것은 스자쿠가 되었다. 를르슈는 홀로 남은 침실에서, 혼자 누워 더 크게 느껴지는 침대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로 나간 스자쿠는 겨우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거실 소파에는 를르슈가 꺼내놓은 듯한 담요가 보였다. 서로 헤어지느니 마느니 이야기는 했지만 이런 데에서 감기에 걸릴까봐 담요를 챙겨주는 데에서 를르슈의 애정을 느꼈다. 스자쿠는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내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세이류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스자쿠와 를르슈 모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에 세이류는 잠에서 깼다. 이내 문 너머로 아버지랑 아빠가 웅얼거리면서 대화하는 소리를 듣다가, 방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소리에 초조해하면서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들어버린 것이다. 

‘헤어지든 이혼을 하든, 이제 난 더는 못 하겠어.’

그리고 누군가 방을 나오려는 기척에 세이류는 재빠르게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쿵쾅거리는 가슴에 숨을 죽였다. 알 수 없는 서러움과 공포 속에서 세이류는 숨을 색색 죽여가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헤어지든 이혼을 하든, 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아빠랑 아버지가 헤어진다고?

세이류는 그 순간 가출을 결심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계획성과 아빠의 순발력을 물려받은 세이류는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망설임을 두지 않았다. 가출 후 목적지는 세이류의 할머니이자 아버지의 어머니인 마리안느 할머니가 사는 곳이었다. 할머니네 집 근처의 전철역 이름을 어렴풋이 떠올린 세이류는 저금통에서 모아놓은 지폐 묶음을 탈탈 털어서 외출용 가방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뜬눈으로 남은 새벽을 보내면서 세이류는 소리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아빠랑 아버지랑 헤어지면, 나는 누구도 선택할 수 없을 거야. 아빠랑 아버지 둘 다 좋으니까. 그래서 세이류는 타협점으로 마리안느 할머니의 집을 고른 것이었다. 할머니네 집에 살게 되면, 세이류를 보려고 아빠랑 아버지가 다시 자주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다시 화해하고, 진짜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평소처럼 돌아가게 되면 좋을 텐데.

그리고 8월 31일 오전 7시 50분, 세이류는 거실 소파에서 자는 아빠와 침실에서 자는 아버지를 두고서 대차게 전철에 올라탄 것이었다. 

 

* * * 

 

“그때 세이류가 한 말이 너무 귀여웠지. 아빠랑 아버지랑 헤어지면 어떡해요?—하고 엉엉 울어버리는데, 한편으로는 또 얘가 얼마나 똑똑한지, 나한테 와서 SOS를 친 거잖니? 정말 머리가 좋아.”

키득거리며 웃는 마리안느의 목소리에 세이류는 숨고만 싶었다. 대체 몇 년 전의 이야기를 아직까지도 어제 일처럼 신나게 떠드는 할머니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세이류는 고민했지만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던 스자쿠와 를르슈도 마찬가지로 할 말은 없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뭐어, 그쯤 나는 스자쿠 군과 를르슈의 사랑의 전도사도 아니었지만 해결사 정도는 됐었지? 그러니까 둘이 아직도 사이좋게 잘 지내는 거겠고. 세이류도 그 이후로는 별 일 없지?”

“네, 네. 어머니, 와인 더 드릴까요?’

“좋아, 를르슈도 한 잔 하렴. 아, 스자쿠 군도.”

“아, 저는 조금 있다가 운전해야 돼서.”

“그래? 그럼 대신 세이류가 마셔볼래?”

“무슨 소리세요, 세이류는 아직 어려요.”

“그러면서 크는 거지, 뭐.”

마리안느가 세이류에게 진짜 와인 잔을 건네려고 하는 것에 를르슈가 중간에서 겨우 말렸다.

아빠와 아버지의 결혼기념일에 정말로 할머니와 함께 보내고 있다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오히려 폭주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아빠와 아버지가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통상적으로 부부 두 사람의 기념일이니 둘이서 보냈으면 될 일을 굳이 세이류를 껴서, 그리고 나중에는 할머니까지 껴서…. 세이류는 맛있게 구워진 스테이크 한 접시를 다 비워냈다. 잘 먹는 세이류를 보면서 어른들은 흐뭇하게 웃었다.

“나나리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카페 일을 아무때나 쉴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자기 사업을 한다는 건 이래서 불편하다니까.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는 그런 일은 없 을까?”

“아시면 저 좀 알려주세요, 할머니.”

“아직도 방법을 몰라서 할머니도 지금 일하잖니, 후후.”

식사는 좋은 분위기로 무르익었고, 마지막에는 스자쿠가 계산을 했다. 마리안느가 계산하겠다는 것을 잽싸게 스자쿠가 앞서갔다. 결제할 타이밍을 놓친 마리안느가 원통해하며 말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세 세이류에게 건넸다.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스자쿠 군 같은 건 진작에 제쳤을 텐데. 아쉽구나. 세이류, 대신 용돈이야.”

“네? 이렇게 많이요? 할머니, 너무 많아요.”

“10년치 세뱃돈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세이류.”

“아버지까지?!”

세이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만엔짜리 열 장을 받았다. 더 필요하면 말하렴, 하고 말하는 마리안느는 산뜻하게 웃어보였다.

마리안느를 호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네 사람은 스자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거리로 나섰다. 토요일 저녁의 시내는 북적거렸고, 길은 제법 막혔다. 자동차 라디오에서는 꽤 오래 되었지만 요즘 사람들도 아는 브리타니아 팝이 나왔다. 마리안느가 흥얼거리면서 그 노래를 따라불렀다.

“아, 그립네. 이 노래도 나온지 벌써 20년 됐나?”

“그럴 거예요. 제가 고등학생 때 나온 노래니까요.”

스자쿠가 대답했다. 멜로디가 엄청 좋아서 일본에서도 엄청 유행했어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부르는 어른들 사이에서, 유일한 신세대이자 그 노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이류만 멀뚱멀뚱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내 곧 노래가 끝나고 라디오DJ가 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사연을 전하기 시작했다.

나란히 뒤에 앉은 세이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마리안느가 세이류에게 물었다. 

“명곡은 명곡이네. 세이류도 이 노래 아니?”

“멜로디만 들어만 봤어요. 자세히는 잘 모르고.”

“요즘 치고는 좀 막나가는 가사이긴 한데, 그래도 꽤 강렬해서 좋은 가사야. 내 머리를 밟아도 너를 사랑해… 였던가.”

“…네? 그런 가사인데 좋은 거예요?”

웅얼거리는 듯한 보컬 특유의 창법에 가사가 잘 들리지 않아서 몰랐던 탓에, 세이류는 할머니가 자기를 놀리는 건가 싶었다. 앞에 앉은 스자쿠와 를르슈는 가사가 좀 그렇지만 부드러운 멜로디랑 딴판이라서 반전되는 매력으로 인기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진짜 다 같이 짜고서 자기를 놀리나 싶은 기분으로 있었던 세이류는 이내 마리안느의 폭탄 선언에 노래 이야기는 다 까먹어버리고 말았다.

“나 다음달에 결혼한다, 애들아.”

“네?”

“네?”

“네?”

동시에 세 사람이 “네?”하는 소리가 차 안에 짱짱한 소리로 울려퍼졌다. 스자쿠는 하마터면 급한 브레이크를 밟거나 엑셀레이터를 밟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백 미러로 마리안느를 살폈다. 마리안느는 속이 시원한지 시선을 맞추며 웃어보였다. 진짜…인가? 이번엔 를르슈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를르슈는 아예 뒤를 돌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누구랑요?! 그걸 왜 지금 말씀하시는 거예요?!”

“누구겠니~ 내 인생에 다시 결혼할 남자는 를르슈 네 생각 외로 한 명 밖에 없단다.”

“설마 그 남자랑…!”

“샤를이 들으면 섭섭해하진 않겠지만 아무튼 자기 아빠를 그 남자라고 부르는 건 세이류 앞에서는 좀 어떨까 싶네.”

“…어머니!”

“저기, 를르슈, 위험하니까 다시 앉아.”

아예 뒷좌석으로 몸을 돌려버릴 기세인 를르슈를 막아서며, 스자쿠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세이류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할머니가 할아버지랑 다시 결혼한다는 이야기에 이렇게 길길이 날뛸 줄은 몰랐다.

“내가 샤를이 아닌 다른 남자 데려와서 족보 꼬이는 거보단 낫잖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어머, 어머, 무서워라.”

를르슈는 이마를 짚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자신의 친아버지와 친어머니가 다시 재결합을 한다는 이야기에 이렇게 심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남자(를르슈의 친아버지이자 마리안느의 전 남편)는 인간성이 결여된,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어쩌라고 싶은 심정에 를르슈는 백기를 들었다.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결혼식장에는 안 갈 거니까요.”

“이 나이 먹고 식 올리면 그것도 웃길 거다. 아무튼 난 말했어. 결혼한다고.”

“알겠다니까요. 사후통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할까요?”

“사후통보라니… 후후, 그것도 그립네.”

마리안느는 오늘따라 옛날 일이 많이 떠오른다고 중얼거렸다. 어느새 자동차는 호텔 앞까지 다다랐고, 내리는 마리안느를 따라서 세이류도 같이 내렸다. 갑자기 텅 비어버리는 뒷좌석에 스자쿠가 세이류에게 물었다.

“세이류는 왜 내려?”

“나 오늘은 할머니랑 같이 잘래. 할머니, 저 같이 자도 되죠?”

“물론이지, 우리 손녀는 언제든 환영이야.”

“뭐?”

“아빠랑 아버지는… 데이트를 하십시오.”

“데이트? 갑자기?”

“뭔 갑자기야, 오늘 결혼기념일인데 이제 좀 적당히 알아서 둘이서 보내! 할머니, 이제 들어가요!”

제발 이런 건 아버지 눈치 좀 닮아보란 말이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세이류는 마리안느를 이끌고 호텔 로비 안으로 사라졌다. 차 안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를르슈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세이류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다시 자리에 앉아 운전대를 쥔 스자쿠가 운전을 하면서 말했다.

“댁의 따님께서 데이트를 하라고 말씀하시던데요.”

어딘가 장난스러운 스자쿠의 말투에 를르슈는 웃어버렸다. 어깨까지 떨면서 웃는 를르슈를 보고 있자니 스자쿠도 같이 웃게 되었다. 모처럼 결혼기념일 데이트를 하라고 딸이 자리를 피해줬다는 게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썩 나쁘진 않았다. 

어디로 갈래? 어디로 가고 싶어? 

글쎄,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을 거 같은데.

 

* * * 

 

“일단 맞선에는 가. 그리고 나서 생각하자.”

모처럼 만난 오늘, 여태까지 숱한 핑계를 대가면서 피해온 연인이 한 말은 대뜸 맞선을 보라는 말이었다. 스자쿠는 자신의 귀를, 청력을, 그리고 무뎌진 상황판단력을 의심했다. 하지만 를르슈는 마지막에 보았을 때처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스자쿠의 맞선은 다가오는 토요일이었고, 를르슈를 가까스로 만날 수 있는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내일 모레의 맞선은 스자쿠의 인생에서 제법 중요한 날이었다. 스자쿠는 아버지와 절연할 각오를 했다고 를르슈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스자쿠의 각오를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를르슈가 선수를 친 것이었다.

“너는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알아.”

“아니, 몰라. 알면 그런 이야길 할 수 없어.”

“너야말로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를르슈는 정말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꺼내게 하는 것처럼 말했다. 스자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를르슈에 대해서 지난 1년 동안 알만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선을 그어놓고서는 그게 다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맞선 본다고 바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만약에 바로 결혼하라고 하면, 그럼 그때도 ‘일단 결혼해. 그리고 나서 생각하자.’ 이렇게 말할 거야?”

“…스자쿠, 냉정하게 생각해봐.”

“여기서 어떻게 냉정하게 생각해?”

“아직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네 아버지한테, 너랑 결혼하겠다고 갑자기 내가 나타나서 모든 걸 훼방 놓는다고 쳐. 상황은 로맨틱하게 돌아가더라도 결론적으로 네 아버지에게 나는 도움 안 되는 마이너스적인 요소일 뿐이야. 안 그래도 날 달가워하시지 않은데, 거기에 보란듯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면 향후 너희 아버지와 내가 잘 지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그러니까 를르슈는 우리 아버지한테 점수를 따고 싶다, 이거야?”

“표현은 좀 그렇지만, 아무튼 지금의 전략상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건 너네 아버지니까.”

스자쿠는 를르슈의 사고방식을 조금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많았다. 를르슈의 말대로 얌전히 맞선을 보고 나서, 뭐, 어떤 자리가 되었든 간에 를르슈를 소개하면 되는 걸까. 를르슈를 정식으로 소개하는 그 자리에서… 아니, 어떻게 하면 그런 자리를 만드는데? 스자쿠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떠오르는 의문을 솔직하게 입밖으로 꺼냈다.

“우리 아버지한테 어떻게 점수를 딸 건데?”

“그런 표현은 좀 그렇다니까. 아무튼 준비된 방법은 34개. 그 중 내 기준으로 제법 유효한 타격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은 7개.”

“방법이 7개나 되는 거야?”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 한 가지 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를르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이어졌던 목소리가 갑자기 끊기는 것에 스자쿠는 의아해했다.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를르슈는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하지 않았다.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자신이 없어서.”

“방법이 34개에서 1개로 줄어들면 좀 불안하긴 하지만, 를르슈가 생각해낸 방법이라면 효과만큼은 확실한 거잖아.”

“그렇긴 한데, 이건 나 혼자서 해치울 일이 아니니까.”

“나를 걱정하는 거야? 난 너랑 둘이서 못 해낼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 말, 진짜 믿어도 돼?”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 안에서, 를르슈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어딘가 잠겨있는 듯한 목소리에 스자쿠는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를르슈에게 필요한 것은 스자쿠의 확신과 애정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못 믿어주면 그거만큼 속상한 일이 없을 거야.”

“…그럼 믿어보도록 하지.”

“하하, 고맙다고 말하면 돼?”

스자쿠의 웃는 모습은 한결같이 를르슈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를르슈는 머릿속에서 세웠던 34가지의 시뮬레이션, 7가지의 유효 타격, 그리고 최후의 수단까지 다시 떠올렸다. 최후의 수단을 생각했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고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를르슈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예로부터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다. 를르슈는 그 말에 사활을 걸기로 했다. 를르슈가 명명한 최후의 수단, 그 작전명은 ‘사후통보’였다.

 

* * *

 

시간을 조금 되돌려서, 스자쿠의 맞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주말의 끝물. 21살 를르슈 람페르지는 남자친구의 맞선 소식을 듣고서,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좀 더 멀리 떨어진 본가로 돌아갔다. 잔뜩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나나리는 반가워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오랜만에 돌아온 본가는 여전했으며, 나나리가 내려주는 홍차 또한 변함없이 맛있었다.

홍차가 담긴 찻잔을 가운데에 두고서, 를르슈는 자신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 나나리의 상냥함에 가슴 속 불안이 조금은 사그러드는 것 같았다. 를르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렇다고 홍차를 즐기는 것도 아닌 그 애매한 모습을 보고서도 나나리는 무슨 일이냐고 재촉하며 묻지 않았다.

를르슈는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저에게는 한참이나 어리게 느껴지는, 아직도 아이 같은 여동생이라는 것이 어딘가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저를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나리의 눈빛에는 언제나 를르슈의 편이라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나나리한테는 이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내가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아, 네. 스자쿠 씨라고 하셨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던.”

“기억하고 있구나. 뭔가 부끄러운걸.”

“오라버니가 좋아하시는 분인데요, 뭘.”

를르슈는 스자쿠랑 본격적으로 사귀고 나서부터 본가에 내려오는 것이 뜸해졌다. 그것에 속상해하며 섭섭하다고 말했던 나나리에게는 예전에 한 번, 사귀고 있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나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솔직하게 말했다. 오라버니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솔직히 오라버니가 멀어지는 거 같아서 우울해요. 나나리의 이야기에 를르슈는 그렇다고 나나리를 소홀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를르슈의 반응에 나나리는 의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그만큼 행복하다면 저도 좋아요. 오라버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요. 그 말에 를르슈는 크게 위로를 받았다.

언젠가 나나리에게 스자쿠를 소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한 번 스자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조금 좋지 않은 이야기로 스자쿠의 이야기를 이어가게 되는 것에 대해서 를르슈는 다시 한 번 불안해졌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서 나나리에게 말했다.

“근데 스자쿠네 집이 좀 상황이 특수해서, 음… 스자쿠가 맞선을 보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라고요?”

“아, 그렇다고 스자쿠를 의심하는 건 아니야. 스자쿠도 예기치 못한 일이니까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해서 오라버니가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잖아요.”

“…상처 받을 게 딱히 있는 건 아닌걸.”

를르슈는 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자신이 은연 중에 스자쿠의 맞선으로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나리가 그게 아니라, 라고 말을 하려는 것에 를르슈는 바로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맞아, 나나리 말대로 상처를 받긴 했어. 응, 그런 거 같아.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스자쿠랑 헤어질 생각이 있는 건 아니야. 이건 스자쿠도 마찬가지고.”

“흐음… 네, 그래서요?”

“결혼을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스자쿠 씨로부터요?”

“응. 최악이라고 생각했어.”

“동감이에요.”

나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에 몰리니까 프로포즈 하는 남자는 최악이에요. 나나리의 안에서 최악의 남자가 된 스자쿠에게 애도를 표하며, 를르슈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더 질이 나쁜 건… 아무래도 그 방법에 편승해서 더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자신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를르슈는 나나리의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최악인 녀석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라버니도 참.”

“스자쿠랑 함께라면 더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아.”

“…그래도 걱정은 돼요. 오라버니가 많이 힘들면 어떡하죠? 맞선을 볼 정도의 집안이면, 평범하진 않잖아요.”

나나리의 현실적인 이야기에 를르슈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되새기듯이,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를르슈를 아끼는 그녀가 하는 걱정에 대해서 를르슈도 아예 생각이 없진 않았다. 반대로 를르슈에게 나나리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를르슈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나나리, 나는 무조건 앞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믿진 않아. 언젠가 힘든 일도 닥치고 괴로운 일도 생기겠지.”

그래도, 라는 말을 이으면서 를르슈는 눈을 감으면 또렷하게 떠오르는 스자쿠의 미소가 보고 싶어졌다.

“스자쿠랑 있으면 그런 일들을 겪더라도 마지막에 웃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희미하게 웃는 를르슈를 보면서, 나나리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오빠를 따라 웃었다. 그럼 오라버니가 옳다고 생각하는, 스자쿠 씨를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가는 거죠. 나나리의 말에 를르슈는 용기를 얻었다.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면 를르슈는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흐릿하게만 느껴졌던 스자쿠와의 앞날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들은 혼자서만의 준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긴장이 맴돌았다. 그 긴장을 달래기 위해서 를르슈는 사흘 동안 학교도 가지 않고, 34가지의 방법을 강구하고, 쿠루루기 스자쿠의 아버지를 무너뜨릴 7가지의 계책을 세웠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에 대해서 제법 긴 시간 동안 망설였다.

 

* * * 

 

토요일. 21살의 쿠루루기 스자쿠는 를르슈와 이야기한 대로 아버지를 대동한 맞선 자리에 참석했다. 즐거울 일이 없을 맞선은 그렇다고 해서 죽을 정도로 암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스자쿠는 저에게 눈을 맞추며 웃어보이는, 저보다 2살 많다는 어느 정치인의 딸과 마주하며 앉았다. 식사가 끝나면 아버지와 함께 이 자리를 마련한 또 다른 어른은 이제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라며 자리를 비웠다.

맞선 상대는 지금의 자리가 부담스럽냐는 화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로 처음 만나는 사이에 이런 만들어진 자리에서 장래를 결정해야한다는 것이, 아마 를르슈를 만나기 전의 스자쿠라면 어쩌면 큰 반항 없이 수긍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아버지가 정해준 대로 살아온 인생에 반항이나 자기 뜻을 갖는 것은 스자쿠에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스자쿠에게는 를르슈가 있었다. 자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 34가지의 계략을 세우는 멋진 남자친구를 위해서, 그와의 행복하고 찬란할 미래를 위해서 스자쿠는 잠깐을 견디기로 했다. 이야기는 흘러가지만 어떠한 경우도 되지 못한 채로 끝났다. 이대로 끝나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는 상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럼 나중에 또, 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은연 중에 스자쿠가 무심코 그었던 선이나 감추지 않았던 경계에 대해서 그녀도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 미안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스자쿠에게는 를르슈가 있으니까. 스자쿠는 낯선 마을의 거리에서 전철을 타고 를르슈에게 전화를 걸었다. 를르슈는 전화를 받더니 잘 끝냈냐고 물었다. 전철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노을은 벌써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구나. 스자쿠는 를르슈의 목소리를 들으며 맞선 내내 긴장으로 뻐근했던 어깨를 주물렀다.

“잘 끝냈다면 잘 끝낸 거겠지? 를르슈는 어디야?”

‘병원.’

“병원? 어디 아파?”

‘그건 아니고…. 아, 일단 끊어.’

휴대폰 너머 어디선가 ‘람페르지 씨’라고 부르는 소리에 를르슈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스자쿠는 끊긴 전화를 아쉬워하며 다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노을 지는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맞춤 양복인데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정쩡하게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런 흉한 꼴로 를르슈를 만나러가고 싶다고 하면, 를르슈는 반겨줄까. 스자쿠는 오늘따라 하루가 길다는 생각을 했다.

 

* * *

 

언젠가의 평화로운 주말 오후.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서 만화책을 읽고 있던 세이류는 서재에서 거실로 나오는 아버지를 보고서 문득 떠오른 질문을 꺼냈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세이류의 목소리에 아직 한창 번역 작업 중이었던 모양인지 아버지는 안경을 쓴 채로 돌아보았다. 바쁘냐고 물어보면 또 아니라고 하는 말에 세이류는 안심했다.

“나는 어렸을 때 태명이 뭐였어?”

“태명? 딱히 없었는데. 넌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세이류였어.”

“뭔가 별로네. 뭔가 웃기는 별명 있었을 거 같았거든.”

“뭐가 별로야. 자식한테 웃기는 별명을 지어주는 부모가 어디 있어?”

그런가, 하고 세이류는 다시 만화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엌으로 향한 를르슈는 물을 한 잔 꺼내 마셨다. 스자쿠는 몸이 찌뿌둥하다는 이유로 근처 공원에 러닝을 하러 갔고, 를르슈는 급하게 들어온 번역 건을 처리하느라, 모처럼 가족끼리의 주말에 아쉽게도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화책을 보면서 킬킬거리고 있는 세이류는 평화로워보였다. 를르슈는 소파를 지나가며 세이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만화책이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었다. 세이류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쌓아두었던 만화책더미에서 1권을 꺼내서 내밀었다.

“1권에서는 그럴 기미도 안보이는데 12권 쯤에서 둘이 애 낳았어.”

“…전개가 빠른건지 느린건지 모르겠네.”

일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진 마당에 를르슈는 세이류의 옆에 앉아서 만화책 1권을 펼쳐들었다. 잠시 리프레쉬라고 생각하며 화려한 그림체에 정신 사나운 내용을 쫓아가고 있을 때였다.

“아빠랑 아버지는 내 이름 지을 때 고민 별로 없었겠다.”

“무슨 소리야, 엄청 고민했는데.”

“왜? 사방신 이름 돌려가면서 쓰면 되잖아, 현무, 주작, 청룡, 백호.”

“네 성을 쿠루루기로 할 건지 람페르지로 할 건지부터가 엄청나게 고민이었어.”

“어, 그러네? 왜 나 람페르지가 아니야?”

“이야기 하자면 길어서. 아무튼 결론적으로 쿠루루기 세이류라는 이름이 나았지. 무슨 드래곤 람페르지는 너무 웃기잖아.”

“……드, 드래곤, 람페르지? 그게 뭐야?”

세이류는 만화책을 덮어버리면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황당한 그 시선은 어떻게 딸 이름을 드래곤 람페르지로 지을 수 있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1권의 중반까지 속독을 하면서 그쪽으로는 시선을 흘낏 주고는 ‘지금부터 드래곤 람페르지라고 별명 붙여줘?’라며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됐어. 쿠루루기 세이류가 훨씬 낫다.”

“그런 거야. 참고로 드래곤 람페르지는 너네 아빠가 만든 이름이야.”

“아! 아빠 진짜!”

“응, 나 다녀왔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양반은 되지 못하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등장으로, 세이류는 드래곤 람페르지의 충격에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아빠를 제대로 반기지도 못했다. 그런 세이류의 모습에 를르슈는 쿡쿡 웃으면서 1권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 * *

 

드래곤 람페르지가 될 뻔했던 쿠루루기 세이류가 태어난 이야기는 를르슈가 만든 최후의 수단 ‘사후통보’로부터 시작된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맞선이 끝난 후 맞이하는 첫 번째 월요일에 스자쿠의 자취방으로 찾아갔다. 주말 내내 퍼질러 자느라 퉁퉁 부은 스자쿠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를르슈는 서류 봉투를 꺼내들었다. 접힌 자국이 하나도 없이 말끔하게 보관되어 꺼내진 서류 봉투에서는 혼인신고서와 수술동의서 같은 것들이 쏟아졌다. 아직 머리도 제대로 빗지 못한 스자쿠는 식탁이자 책상으로 쓰이는 테이블 위에서 자기 쪽으로 펜을 굴리며 서명하라고 하는 를르슈의 말에 머리가 멍했다.

“여기랑 여기, 여기에 이름 쓰고. 정자로 또박또박하게.”

“응?”

“그리고 여긴 수술동의서.”

“무슨 수술?”

“남성 가임신 수술동의서. 남성 임신 전문 산부인과에서 필요하다고 해서. 만에 하나 혹시 모르니까 보호자 동의서도 같이 준비하랬어.”

“…임신?”

“응. 나 임신할 거야.”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네,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스자쿠는 며칠 전에 를르슈가 병원에 갔다는 말을 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체력이 없긴 하지만 어딘가 아프지 않았던 를르슈가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에 걱정이 되긴 했지만… 설마 남성 임신 전문 산부인과를 갔다는 이야기였을 줄은 몰랐다.

스자쿠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서류들이 혼인신고서와 수술동의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는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지금, 결혼하고, 애 낳자는 이야기를, 참 정없이 하는 게 를르슈답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니, 그래도 이건, 일생일대의 문제인데!—라는 생각이 들자, 스자쿠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빠각하고 부서지는 볼펜의 잔해에 를르슈는 웃으면서 필통에서 다른 펜을 꺼내주었다.

“지체할 시간 없어. 빨리 서명해.”

“잠깐, 잠깐만. 나 어제 맞선 보고 왔다고 갑자기 결혼하고 애 낳자고 하는 게 말이 돼?”

“네가 먼저 결혼하자고 그랬어.”

“그건 그렇지만! 아기는 지금 너무 이르지 않아? 우, 우리 아직 같이 살 집도 없고. 나 모아둔 돈도 별로 없어.”

“하나 하나 짚어볼까? 집이랑 돈 문제는 크게 신경 쓸 거 없어. 내가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기가 이르다… 는 말에는 동의는 못하겠군. 너는 나랑 결혼하면 애 없이 살 생각이었어? 딩크족이야, 너?”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기가 있으면 행복하겠지, 근데, 근데 이렇게 갑자기?! 나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그 준비는 언제 끝나는데? 그 준비하는 동안에 또 맞선 보고 결혼하라는 이야기 들리면? 지난주에 맞선 본 건 준비가 되어 있어서 본 거였어?”

“그거랑은 다르잖아.”

“뭐가 달라?”

정말로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하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말을 고르려고 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쐐기를 박았다.

“너는 나랑 함께라면 못 해낼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스자쿠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같은 말을 겨우 억눌렀다. 믿어주겠다고 한 를르슈의 말에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하는 부분은 정해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스자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를르슈가 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기를 낳는 거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과정이 어떻게 되는데?”

“내 시뮬레이션을 말하자면… 자기 자식의 앞길을 막는 남자를 치우기 위해서 너네 아버지는 어쩌면 물불 가리지 않으시겠지. 그런 상황에서 타계책은 하나야. 네 미래에 대해서 이미 강제로 정해진 끝을 보게 만드는 거지. 그 방법으로는 결혼이나 맞선보다 더 빠르고 강한 수단으로써 손자를 만들어드리는 거야. 뛰는 사람 위에는 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라고 말하면 될까?”

“…….”

“넌 뭘 망설이는 거야?”

“중요한 말을 못 들은 거 같아서.”

“뭔데?”

“를르슈한테 너와 나의 아기는, 그런 수단과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이렇게 조급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고, 를르슈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결혼은 솔직히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네가 결혼을 이야기 한 순간부터 그 이상의 미래에 대해서 가능성을 봤어. 나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너도 해낼 수 있어. 그렇다면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해. 언제든 네가 결혼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언제든 지금 생각한 미래에 대해서 생각했을 거야. 아이도 언제든 가질 수 있게 준비를 하겠지. 지금은 그 미래가 조금 더 일찍 다가온 거 뿐이야. 그러니까…!

를르슈의 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자쿠는 이내 실실 피어오르는 웃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필사적으로 스자쿠와의 사랑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를르슈를 생각하면 귀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겠어, 를르슈가 나 사랑해서 아기도 생각한 거라고.”

“이렇게 말해야 알아들어?!”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좋아, 기분 좋아졌어. 프로포즈도 멋있어. 여기랑 여기에 이름 쓰면 된다고?”

“그래!”

스자쿠는 열심히 이름을 썼다. 너와 하는 결혼, 함께할 육아, 모든 것이 미지의 영역이겠지만 네가 말한 만큼 우리 둘이라면 못 해낼 일이 없겠지. 를르슈는 처음에 들고 왔던 서류봉투에 스자쿠가 열심히 서명한 것들을 다시 집어넣었다.

조금 후련한 얼굴로 웃고 있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서류봉투를 테이블 구석에 두고서 스자쿠의 침대로 향해 걸어갔다. 뭐하려고? 갑자기 침대로 향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를르슈는 후, 하고 짧게 호흡을 고르고서는 옷을 벗었다. 훌러덩 훌러덩 옷을 벗기 시작하는 나체의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이 벌건 대낮부터 거사를 치를 준비를 하는 를르슈의 유혹에 영문을 모를 지경이었다. 이, 이게 뭐죠?! 그러자 를르슈는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지지 않을 각오로 싸우는 거야. 의기투합의 섹스다, 스자쿠!”

아, 그런건가요?! 오늘따라 를르슈의 생각에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한 스자쿠는 자기를 침대 위로 깔아뭉개면서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를르슈의 손에 흐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기 이름은 정했어, 라고 를르슈는 섹스가 한 판 끝나고 나서 말했다. 뭔데? 스자쿠는 콘돔을 정리하며 물었다. 쿠루루기 세이류. 남자든 여자든 세이류야. 신기하네, 람페르지가 아니야? 근데 세이류는… 너무 만화주인공 이름 같지 않아? 너는 주작이라서 스자쿠인 주제에 잘도 그런 소릴 하는구나. 맥없이 웃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그런가, 하고 볼을 긁적였다.

기왕 만화주인공 이름 같을 거면 드래곤 람페르지는 어때? 아, 세이류니까 블루드래곤 람페르지는 어떠려나? 영어 이름은 이거로… 앗, 아파, 를르슈! 너는 애 이름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다 벗은 스자쿠의 등을 짝소리가 나게 내려친 를르슈는 기운이 빠졌다. 내일은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고, 오후에는 병원 예약을 하고…. 그런 생각을 혼자서 하고 있을 때에는 정말 그대로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지만, 스자쿠와 함께 있다면, 둘이서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자쿠와 세이류와 함께라면. 를르슈는 그렇게 강해지기로 결심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자쿠와 를르슈는 21살에 부부가 되었다. 9월 28일에 기념비적인 혼인신고를 올렸으며, 21살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할 쯤에는 스자쿠는 자신이 살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를르슈의 맨션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다. 기말고사가 끝날 무렵에 를르슈는 남성 임신 가능 수술을 받았다. 겨울방학이 될 때에는 임신에 성공했으며, 를르슈는 다음 학기의 개강하기 직전에는 이른 입덧을 시작했다.

휴학계를 제출한 를르슈는 이제 모든 조건은 클리어했으며, 상황에 따른 연출도 클라이막스에 달했다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나나리도 성인이 되었고, 자리를 곧잘 비웠던 를르슈의 어머니 마리안느가 뒤늦게 긴 휴가를 받아 일본에서 두세달 가량 머물기로 했기 때문에, 를르슈는 가장 낮은 허들인 자신의 어머니부터 넘어보기로 했다.

“어머니께 소개해야 할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소개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소개해야 한다는 표현은 또 처음이네.’

이런 곳에서 예리한 어머니의 촉에 를르슈는 떨지 않으려고 하면서 이번주 토요일에 찾아뵙겠다는 말만 남길 뿐이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자쿠는 괜히 자기가 더 긴장해서 를르슈의 손을 붙잡은 채였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전화를 끊는 를르슈를 보고서, 스자쿠는 고생했다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 정장 입고 갈까?”

“평범하게 입고 가. 어머니는 그런 격식 차린다고 해서 더 좋게 봐주는 건 없으니까.”

를르슈는 자신이 아는 어머니라면 호쾌하게 웃으면서 스자쿠와 를르슈의 ‘사후통보’에 대해서 재미있다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걱정할 건 없어. 뭐든지 잘 될거야. 스자쿠가 뱃속의 세이류까지 함께 끌어안아주었다. 셋이서 함께 있다면 좋게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분 탓으로, 를르슈는 자신이 결혼했으며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리자마자 급격하게 가라앉는 마리안느의 분위기에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잊어버렸다. 본가에 들러서 기어이 정장을 입고 온 스자쿠는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애써 웃으며 를르슈와 눈빛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지금 나한테 사후통보를 하러 온 거구나, 를르슈.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거야. 너도 결국 샤를이랑 다를 바가 없구나. 아니, 오히려 청출어람이라고 해야 할까? 샤를은 나한테 사후통보를 하더라도 자기한테 나쁠 짓은 안했어.”

“…….”

“그래서 내가 할머니 된다고 기뻐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왜 그렇게 애가 생각이 짧은 거니, 를르슈. 어려서 그런 거야? 혼자서도 잘한다고 해주니까 이번에도 잘한 거라고 생각했어?”

“…저는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

를르슈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의 긴장을 말하는 것 같아서, 스자쿠는 자신이 엄호라도 해야할 기분에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마리안느는 그런 스자쿠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이 고작 그거였니? 아기를 방패 삼아서 반대하는 사람들한테 싫은 소리 피해 듣는 게 방법이야? 쿠루루기 스자쿠 군이라고 했지? 너도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니? 갑자기 를르슈가 임신하고, 그러면 어른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 너네 둘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었니? 너까지?”

“어머님, 어머님 눈에는 아직 저희가 부족해보이겠지만….”

“아직 부족해보인다고? 앞으로도 계속 부족할 거야! 애초에 너네 아기 키우는 법은 알고 있니? 아기 키울 각오는 되어 있는 거야?”

“…….”

“안되겠어. 스자쿠 군 아버지랑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겠구나. 그쪽에서도 이 사실을 모를 거 아니야? 를르슈, 너는 내가 만만해보이니까 나를 제일 먼저 만나러 왔겠지. 하지만 엄마가 쉽게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마리안느는 겨우 숨을 고르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아이를 방임주의로 키웠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를르슈는 굳어있고, 마리안느와 를르슈 사이의 험악한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스자쿠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고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스자쿠는 자신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선을 보았던 장소에서 를르슈의 가족과 상견례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를 자리를 만들게 되었다. 아니, 상견례로 만들어야지. 를르슈와 잡은 손에 힘을 더하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마리안느에게 호되게 혼난 오후, 스자쿠는 를르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지쳐서 쓰러져 자는 를르슈를 재우고서 베란다로 몰래 빠져나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바빴으며, 비서가 대신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그 말에 스자쿠는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저 결혼했어요. 얼마 후에는 아이도 태어나요. 아버지도 이제 아셔야 할 거 같아서요. 전해주세요. 내일 어디든 좋으니까 이야기 좀 하고 싶다고. 잠시 숨을 멈춘 비서는 침착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30분 있다가 아버지로부터 맞선을 보았던 그때의 호텔을 예약해두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오늘, 스자쿠는 어제 입었던 정장 대신에 평소에 입는 청바지와 남색 스웨터를 입었다. 어제처럼 갖춰 입어봤자, 어른들 앞에서는 눈속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긴장한 스자쿠와 를르슈는 호텔 직원이 안내해주는대로 따라서 같이 들어오는 마리안느 람페르지와 쿠루루기 겐부를 쳐다보았다.

겐부와 마리안느는 서로를 마주보며 앉아있는 스자쿠와 를르슈를 보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각자의 자식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를르슈 람페르지의 어머니 되는 마리안느 람페르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쿠루루기 겐부 씨.”

“아아, 네. 쿠루루기 스자쿠 아버지 되는 쿠루루기 겐부입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한건지, 아니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폭풍전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문했던 식사는 자리에 모두가 앉자 바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스자쿠와 를르슈는 죄인이 된 느낌으로 식사를 시작하는 부모님들을 따라서 겨우 입에 음식을 욱여넣었다. 여기 맛있네요, 라고 마리안느가 말하자 겐부가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들 소리 없이 식사를 이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한 명이 체해도 이상하지 않을 즈음에 이야기를 꺼낸 것은 마리안느였다.

“이제 슬슬 상황을 이렇게 만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싶은데요.”

마리안느는 어디 한 번 말을 꺼내보라는 듯이 스자쿠와 를르슈를 바라보았다. 어제의 냉랭했던 분위기가 떠올라서 를르슈는 답지 않게 말을 꺼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런 를르슈를 알고 있다는 듯이 스자쿠가 입을 열었다.

“전부 다 제 잘못입니다. 를르슈랑 아기에게는 죄가 없어요. 제가 애매하게 굴어서, 아버지한테 제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룰에서 벗어난 방식이라고 해도 저희 둘만 괜찮다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잘못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스자쿠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리안느, 그리고 를르슈에게 고개를 숙였다.

“너한테도 미안해, 를르슈.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미안, 몸도 힘들 텐데.”

를르슈는 눈물이 고이려는 눈을 부릅떴다. 이 상황을 만든 것은 전적으로 를르슈라고 생각했다. 사과해야하는 건 를르슈 자신이었음에도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스자쿠라는 현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이라는 말은…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앞으로를 이야기하는 거지, 스자쿠?”

가장 조용하게 있던 겐부가 입을 열었다. 스자쿠는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제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전 를르슈랑 함께 있을 때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정했습니다. 아버지가 반대하셔도, 아버지가 또 제 맞선을 준비하셔도, 저는 를르슈와 세이류를 위해서 살아갈 거니까 어떻게든 셋이서 잘 살아보겠습니다.”

“세이류?”

“저희 아기 이름입니다.”

잠깐의 정적은 찰나가 아닌 영원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겐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자쿠만 잠깐 따라오도록. 겐부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섰다. 를르슈가 자리에서 같이 나가려고 하자 마리안느가 말렸다. 왜, 라는 눈으로 를르슈가 초조하게 굴자, 마리안느는 두 사람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스자쿠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를르슈는 걱정이 되었다.

를르슈와 마리안느를 남겨두고서 스자쿠와 겐부는 호텔의 구석진 곳까지 걸어갔다.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 구석에는 흡연실이 있었다. 겐부는 흡연실 안으로 들어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스자쿠는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를 처음 보았다. 담배 연기가 희뿌옇게 흩어지고, 겐부가 입을 열었다. 

“맞선 보라고 해서 멋대로 결혼하고, 애까지 가진다는 게 네 방식 답진 않구나.”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지 않을 거잖아요.”

“그것도 맞지. 아주 정확해.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번 일을 키운 건 그 를르슈 군이겠지.”

“를르슈가 아니었으면 저도 이런 일 못해요.”

“세이류, 이름은 예쁘군.”

“…….”

“아이는 어떻게 키울 거고,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대책은? 하다못해 그 세이류가 태어나면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를르슈 군네 집에서 셋이서 크는 건 무리겠지.”

겐부는 어쩌면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스자쿠는 생각했다.

“스자쿠 네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다. 너에게 주었던 내 나름대로 지금까지의 자유에 대해서 잃을 각오를 했겠지?”

“…….”

“앞으로는 교토6가를 위해서 일을 하는 거다. 너도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아기를 낳고 학교를 졸업하거든,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라.”

겐부는 스자쿠의 선택을 눈감아 주는 대신에, 그의 미래를 완전히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게 만들려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다운 방식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자쿠는 쓴웃음을 지었다. 등가교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며 알겠다고 말했다. 겐부는 비장한 각오로 말하는 아들을 보며 담뱃재를 비벼 끄며 말했다.

“너희 셋이서 살만한 집을 구해주마. 대신 이자까지 쳐서 갚도록 해.”

“…네?”

겐부는 일이 생겼으니 이제 가보겠다는 말로 대화를 끝냈다. 마리안느 씨와 를르슈 군에게는 사정이 생겨 먼저 간다고 전해주도록 하거라. 먼저 흡연실을 나가는 겐부는 저 멀리서 따라붙는 비서가 준비한 차를 타고 사라졌다. 어느새 로비로 나왔는 를르슈와 마리안느가 홀로 남은 스자쿠를 반겨주었다.

“아버님은…?”

를르슈가 불안한 눈으로 스자쿠를 살피며 물었다. 스자쿠는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자신의 애매모호한 성격은 어디서 왔나 싶었더니 아버지로부터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니 대가니 그런 식으로 말은 했어도 집까지 구해주는 아버지의 속내를 알 듯 말 듯 했다.

“…뭐, 괜찮았어. 아무 일도 없었고. 그냥 일이 바쁘셔서 먼저 가보셔야 한다고 그랬어.”

“정말?”

“응. 아, 추울 텐데… 어머님도 추우시죠? 디저트가 아직이니까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할까요?”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스자쿠가 말하는 것에, 마리안느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어머님이라는 말은 좀 낯간지러우니까, 그냥 마리안느 씨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호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는 계속 될 것 같았지만, 마리안느는 자기 짐만 챙기고서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머니? 마리안느 씨? 두 사람이 어째서 나가냐고 물어보듯 부르면, 마리안느는 이제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오면서 겐부 씨랑 이야기는 끝났어. 두 녀석 중 한 명이 이실직고 할 때까지 가만 안 둘 생각이었는데… 뭐, 생각보다 일이 잘 돌아갔네. 한 명이라도 우리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말했으면 정말 끝장 났을 거야.”

마리안느는 살벌한 말을 웃으면서 늘어놓았다. 그럼 스자쿠 군, 를르슈를 잘 부탁해. 를르슈도 스자쿠 군을 너무 괴롭히진 말고. 당부의 말까지 잊지 않고서 마리안느는 사라졌다.

어딘가 어제보다 더 평화로운 결말인데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의 볼을 꼬집어줄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계산을 하려고 나가면 마리안느가 계산을 끝냈다고 종업원이 말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 * *

 

스자쿠와 를르슈는 겐부가 마련해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다. 대학가에서는 조금 멀어졌지만, 조용하고 한적하며 큰 병원이나 마트가 가까워서 입지가 좋은 주택이었다. 이런 위치의 집에서 살려면 얼마나 벌어야 할까, 라는 생각에 스자쿠와 를르슈는 등골이 오싹했다. 스자쿠는 열심히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겐부의 말대로 교토6가의 스메라기 그룹에서 일하게 된 스자쿠는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었다. 학교 졸업이 아직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과정은 아니었지만, 곧 태어날 세이류에게 든든한 아빠가 되기 위해서라면 더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욕심도 들기도 했다. 자랑스러운 남편이 되기 위해서라면 더 벌어야겠다는 의무감도 들었다. 이것이 가장의 무게, 라고 생각하면 스자쿠는 힘을 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임신한 를르슈는 먹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평소라면 끌리지 않았을 피자나 튀김 같은 것이 먹고 싶어졌다. 몸에 좋지도 않은데 왜 자꾸 먹고 싶은 거지. 스자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스자쿠는 ‘전부 다 맛있는거네’와 같은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전부 다 맛있어도 나랑 아기한테는 안 좋은 거잖아, 라고 하면 스자쿠는 먹고 싶은 것을 못 먹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 안 좋지 않냐며 의외로 정론적인 대답을 했다.

“그리고 를르슈는 평소에 많이 안 먹었는데, 지금은 아기까지 두 사람 몫을 먹어야 하잖아. 두 배 세 배로 먹어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힘입어 를르슈는 참지 않고 많이 먹었다. 가장 많이 먹은 것은 햄버그 스테이크였다. 를르슈는 느끼할 정도로 소스를 진하게 졸이고 치즈도 얹어먹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밥까지 한 그릇을 더하며 먹는 자신을 보면서 신기할 지경이었다. 스자쿠도 많이 먹고, 많이 자며, 많이 움직이고 싶어하는 를르슈를 보면서 신기해했다.

“뱃속의 아기가 나를 닮은 걸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너를 똑 닮은 애가 나올 거 같아.”

“난 를르슈 닮으면 좋을 거 같은데. 아니, 사실 아무래도 좋아. 건강하게 나와주기만 한다면.”

“건강이 제일이긴 하지.”

이제 배가 제법 둥글게 나온 를르슈는 힘겨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먹었다. 마리안느가 사다주는 망고도, 겐부가 구해온 소고기와 대하도, 나나리가 맛있다고 주문해준 딸기도, 또 스자쿠가 매일 매일 사다주는 푸딩도 전부 다 먹어치웠다.

나 왜 이렇게 많이 먹지? 를르슈는 딸기크림푸딩을 먹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푸딩 가게의 전단지를 보니까 말차크림푸딩도 있다길래 그것도 먹고 싶어졌다. 먹는 와중에도 먹는 걸 또 생각하는 것은 를르슈답지 않았다. 정말 스자쿠의 아기를 가지긴 했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끌어안고서 끙, 하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앞에 놓인 낮은 테이블 구석에 놓인 달력의 8월 31일을 펼쳐보았다. 세이류 만나는 날, 이라고 를르슈의 단정한 글씨로 적혀 있는 줄 아래에는 스자쿠의 글씨로 또박또박하게 ‘건강하게 만나자!’라고 적혀있었다. 이건 언제 또 적었대.

를르슈는 피식 웃으면서 둥글게 올라온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아빠가 무슨 맛 푸딩을 가지고 돌아올까, 세이류? 뱃속의 세이류에게 말을 거는 것은 거의 습관이 되었다. 스자쿠가 하도 를르슈의 아랫배에 대고 수다를 떨어대는 것에 익숙해지도 못해 옮아버린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닮아버린 서로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 * *

 

쿠루루기 스자쿠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날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8월 30일이었다. 그날은 를르슈의 출산예정일 전날이었다. 8월 30일과 8월 31일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스자쿠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남성 임신이 보편화되면서도 매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두 가지였다. 인체에 임시 자궁기관을 삽입하여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남성 임신 가능 수술은, 원래 없는 기관이었던 임시 자궁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서 도중에 유산을 하는 경우가 첫 번째로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두 번째는 출산이었다. 질을 통한 여성의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나는 남성 임신의 출산은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구했다.

임신 기간 내내 를르슈는 잘 먹고 잘 지낸 덕분에 체력은 오히려 임신 전보다 좋아진 것 같았다. 그래서 스자쿠는 8월 30일 저녁,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우는 를르슈를 마주했을 때의 충격이 상당했다. 하얗게 질린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배가 아프다고 소리도 크게 못내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를르슈를 보자마자 스자쿠는 그를 들처업고서 바로 근처 병원으로 내달렸다.

지난 10개월 동안 별 탈 없이 지내왔던 임시 자궁이 출산예정일 하루 전날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의사는 말했다. 바로 제왕절개에 들어가겠다는 의사의 말에 스자쿠는 무슨 정신으로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안색이 더 안 좋아진 를르슈와 마주하면서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세이류 먼저 생각해, 스자쿠.”

“뭐?”

“세이류한테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어. 난 아무래도 좋으니까.”

“를르슈…!”

“만에 하나 나랑 세이류 둘 다 위험해지면.”

“그런 말 하지 마.”

“세이류가 먼저야, 알겠지?”

“를르슈!”

그것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를르슈의 마지막 말이었다. 스자쿠는 수술 중이라는 글자에 불이 들어오는 것에,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아파하는 를르슈는 처음 보았다. 힘들다는 수준으로 아파하는 게 아니었다. 신음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는 를르슈를 보면서 스자쿠는 처음으로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 괴로움에 스자쿠는 이를 악물었다. 만에 하나 를르슈랑 세이류 둘 다 위험해진다면, 나는, 나는…! 당연히 답은 정해져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뜻을 배신하고 를르슈를 고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를르슈에게 평생 미움을 사더라도 살아있는 를르슈와 함께하는 내일이 필요했다.

미안해, 세이류. 이런 아빠라서. 너를 사랑하지만, 나는 를르슈가 있어야 돼.

를르슈 없이 세이류만을 사랑하며 살아갈 자신조차 없는 겁쟁이인 자신이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진 것은 비참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 혐오와 연민에 빠져들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스자쿠는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빌고 싶어졌다. 누구든 좋았다. 를르슈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를르슈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다.

 

* * * 

 

마리안느의 보라색 람보르기니가 골목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것을 본 세이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효도하기 힘들다. 지난 밤 내내 할머니의 수다와 함께 쏟아지는 아빠와 아버지의 알고 싶지 않은 과거까지 들었더니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면 또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을 아빠와 아버지를 생각하면 적당히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부모님이 사이가 좋은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초연해지자는 마음으로 다잡으려고 노력하는 자신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면 꽃이라도 피어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부드러운 분위기의 아빠와 아버지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세이류가 들어가자마자 아버지가 서재에서 뛰쳐나와서 코트를 챙겨들고서 ‘세이류, 나가자!’ 하고서 세이류를 끌고 나왔다. 어? 나 지금 들어왔는데, 라고 세이류가 멍청하게 말하고 있으면 아버지는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린 채로 말했다.

“그래? 그럼 다시 들어갈래? 스자쿠랑 있고 싶어?”

아, 이거 무슨 일이 있었군. 세이류는 눈치껏 움직이기로 했다. 아버지와 손을 잡고서 집밖으로 다시 나왔다. 운전을 잘 하지 않는 아버지는 차를 끌고 나서는 대신에 세이류를 데리고 전철역까지 걸어갔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서 세이류와 잡은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전철에 올라탄 채로, 세이류는 아버지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순순히 따라오는 자신의 딸을 한 번 돌아보고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러게, 라고 말했다.

“세이류는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나는 집에 가고 싶지, 라는 말을 억누르면서 세이류는 아버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라고 말했다. 제 눈치를 살피면서 원하는 대답만 골라하는 세이류를 보면서,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놀이공원 갈까?”

“그건 좀… 아버지가 피곤하지 않을까?”

“그러면 영화 볼래?”

“지금 딱히 보고 싶은 건 없는데.”

“쇼핑이라도 할까?”

“…장이라도 보는 건 어때?”

오랜만에 아버지가 해주는 햄버그 스테이크 먹고 싶다아—라고 말하는 세이류의 모습에 를르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딸이 먹고 싶다는데 못해줄 건 없지. 그럼 장도 보고 쇼핑할 겸 백화점 갈래? 아버지의 목소리에서는 어딘가 활기가 돌았다. 세이류는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번화가에 있는 백화점까지 향하면서, 아버지는 휴대폰으로 장 볼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홍차도 떨어졌고, 커피도 샀으면 좋겠고…. 아버지의 손가락 끝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본 세이류는 이때다 싶어서 아빠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아빠, 아버지랑 싸웠어?’

그러자 아빠로부터 바로 답장이 왔다.

‘를르슈가 그렇게 말해?’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럼 싸운 거도 아닌가보네.’

‘대체 둘이 왜 그러는 거야T.T 나 피곤해.’

‘미안해, 세이류.’

사과하는 아빠의 메시지를 보고서 세이류는 으, 하고 혀를 찼다. 대체 또 뭐가 문제야, 이 바보 아빠들. 전철은 금방 내려야 할 역으로 향했고, 세이류와 를르슈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매와 같은 눈으로 세이류는 갖고 싶다고 했던 디자인의 옷의 마감이 이상하다느니, 재질이 좋지 않다느니, 어깨 선이 어정쩡하다는 이야기는 등으로 6번이나 세이류의 구매를 기각시켰다.

“나 아버지랑 쇼핑 안 해.”

기껏 아버지 기분 풀어주려고 쇼핑 길에 나선 건데, 6번이나 기각 당한 세이류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버렸다. 불퉁하게 볼을 부풀리며 말하는 세이류의 모습에 를르슈는 자신이 심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세이류를 달래기 위해서 디저트 카페에 들어갔다. 내가 무슨 단 거만 먹으면 기분 나아지는 줄 알아? 난 푸딩 파르페. 세이류의 단순한 모습에 를르슈는 웃으면서 푸딩 파르페를 두 개 주문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빠랑 싸웠어? 참고로 아빠랑 안 싸웠다고 거짓말 하려면 제대로 해.”

“안 싸웠… 진 않아. 그렇다고 해서 싸운 것도 아니야.”

아예 애매한 대답을 하면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세이류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제대로 말하라고. 세이류의 다그침에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면서 푸딩 파르페의 한 스푼을 떠먹었다.

 

* * *

 

계속해서 생각해왔던 일이지만, 를르슈는 스자쿠와 함께 둘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를르슈는 복잡한 집안 사정이지만, 그래도 많은 수의 형제자매들과 자랐기 때문에 외로울 틈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인생의 첫 번째 보물이었던 나나리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형제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만약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적어도 두 명은 낳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세이류를 처음 낳았을 때 난산이었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스자쿠는 둘째를 갖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는 것 같았다. 를르슈는 둘째를 가지고 싶고 세이류의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고, 스자쿠와의 또 다른 보물을 낳아주고 싶었지만 아기란 를르슈의 자유의지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부부 간의 원만한 대화와 충분한 준비 끝에 아이를 낳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세이류를 낳았을 때 알았다. 를르슈는 원만한 대화는 모르겠지만 충분한 준비는 끝마쳤다고 생각했다. 세이류는 벌써 중학생이고(내년이면 고등학생이 된다.) 를르슈가 체력적으로 지치기 전에 둘째를 낳아서 단란한 네 가족을 꾸리고 싶었다. 

사실 욕심을 더 내자면 셋째까지 낳아서 자동차 뒷자리를 가득 채우고 싶었지만, 셋째 이야기를 하면 스자쿠는 기절할지도 모른다. 우선 둘째부터가 두 사람 사이에서 금기시 되고 있는 주제였기 때문에 셋째 이야기는 아직 먼 미래라고 생각했다.

최근 를르슈는 체력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척이나 안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둘째 생각은 더욱 절실해졌다. 오늘은 이야기를 해볼까, 마음을 먹더라도 ‘지금이 제일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스자쿠의 분위기 때문에 늘 말하기가 어려웠다. 세이류랑 를르슈만 있으면 난 최강이야, 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도 둘째 생각을 완전히 버리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다.

스자쿠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은 를르슈의 첫 출산. 스자쿠에게는 미안하지만 를르슈는 그 트라우마는 극복해나가야 할 문제이며, 또한 인간사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만에 하나 를르슈가 스자쿠를 두고 죽는 일이 생기더라도 스자쿠는 세이류를 위해서라도 똑바로 살아야 하는 남자였다. 또 반대로 스자쿠가 를르슈를 두고 죽더라도 를르슈는 그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남자였다. 죽음으로 인한 서로의 상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를르슈의 지론이었다.

때는 세이류와 마리안느를 호텔에 데려다주고, 두 사람은 교외 드라이브를 마치고서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서로 단둘 뿐인 밤을 기대하면서 흥분이 고조되어 있을 때, 신발을 벗고 현관 앞에서 가볍게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충만해지는 기분을 틈타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말했다.

“우리 둘째 가지는 거 어때?”

“뭐?”

스자쿠는 입술을 떼어내고 자기 남편을 바라보았다. 흥분과 기대로 들떠있는 를르슈의 눈에서는 더 이상의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보였다.

둘째 이야기는 스자쿠의 안에서는 이제 끝난 이야기였다. 이전부터 를르슈가 둘째를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스자쿠는 계속해서 싫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스자쿠와 타협하는 를르슈를 알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끈질기다고 할 정도로 를르슈는 포기할 줄 몰랐다.

“네가 걱정하는 부분은 알아. 무서워 하는 것도 알겠고. 근데 그럴수록 더 큰 행복을 놓치게 될 거야.”

“난 더 큰 행복을 바라지 않아, 를르슈. 왜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만족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원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원했음 하는 거고.”

를르슈가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임신 가능 수술을 받고서 사후통보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스자쿠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를르슈도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고, 스자쿠도 를르슈를 믿는 부분이었다.

키스와 앞으로의 밤에 대한 열기로 달아올랐던 분위는 차게 식어갔다.

“나는 세이류한테 우리 둘 중 한 명이 없어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둘째가 있어야 할 이유도 있는 게 아니잖아.”

스자쿠는 왜 이렇게 되었지, 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까지고 살아있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 스자쿠, 너나 나나 둘 중 한 명이 먼저 죽어도, 우리는 세이류의 부모니까 세이류를 계속해서 잘 키워나가야 돼. 서로를 잃는다는 슬픔에 아무것도 못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알아, 그러니까 일부러 그 슬픔을 각오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게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답답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왜 그렇게 둘째에 집착하는 거야?”

난 너랑 세이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스자쿠는 더 이상의 것을 탐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있으면 좋겠지. 북적이는 가족들,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떤 아이가 태어나도 사랑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누군가를 잃어야 한다면 스자쿠는 반대였다.

를르슈는 반대의 뜻을 강하게 비치는 스자쿠의 손을 잡은 채로 중얼거렸다.

“세이류가 혼자 남겨질 때, 얼마나 외롭겠어.”

“세이류 핑계 대지 말고.”

“핑계가 아니야, 난 진짜 걱정되는 거야.”

“세이류가 어떻게 혼자야? 우리가 있고, 나나리도 있고, 또 나아가서는 네 많은 형제들이 있는데 어떻게 혼자가 될 수 있겠어?”

“그런 가족들이랑은 다른 거야. 형제는 그만큼 의지할 수 있어.”

“아니, 나도 혼자 컸잖아? 형제는 없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의지할 수 있어. 아니면 를르슈 눈에는 내가 외로워보여?”

“…….”

“대체 이 이야기를 언제까지 해야하는지 모르겠어. 네 둘째 욕심 때문에 난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이렇게 좋은 날 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해야하는지, 스자쿠는 솔직히 짜증이 치밀었다. 반면 를르슈는 완고한 스자쿠 때문에 화가 났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강하게 반대할 줄은 몰라서, 이제 어지간하면 꺾여주길 바라는 것은 서로의 욕심이었나 싶었다.

를르슈는 코트를 거칠게 벗고서 거실 소파에 내던져두고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서 제멋대로 구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도 더 말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를르슈가 내던진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스자쿠는 들려오는 를르슈의 샤워 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보통의 결혼기념일이었다면 앞으로의 밤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서 지금을 즐겁게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스자쿠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깊어지는 우울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를르슈는 씻고 나왔고, 스자쿠에게 너도 씻으라며 화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의 달콤한 분위기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자쿠가 씻으러 들어가고, 를르슈는 깔끔해진 거실을 보고서 겁쟁이 스자쿠에 대해서 생각했다.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언젠가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을 텐데. 그정도의 각오도 없이 세이류를 어떻게 키우겠다는 거야? 아빠가 됐으면 강해질 생각을 해야지, 잃을 것에 급급해서 더 약해지면 어떡하냐고.

하지만 그런 스자쿠의 마음도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를르슈는 더 이상 그를 탓하지 않으려고 했다. 스자쿠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를르슈는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잘 준비를 마친 스자쿠가 불 끌게, 라고 말하자 를르슈는 대답 대신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이내 불이 꺼지고, 두 사람의 침실에서는 등을 맞대고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이제 잠이 들었을까, 할 무렵이었다. 

“를르슈, 자?”

“……아니.”

“안아봐도 돼?”

를르슈는 조심스럽게 묻는 스자쿠의 말에 몸을 돌렸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가 스자쿠도 저에게 몸을 돌리고 있다는 걸 알게 했다. 평소처럼 서로를 끌어안으며,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제 화해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를르슈는 스자쿠의 부드러운 체향을 들이키면서 숨을 골랐다. 를르슈가 호흡하는 소리에 스자쿠는 그의 허리를 감싸쥔 팔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오늘 이 말 안 해서 계속 마음에 걸렸어.”

“나도. 너랑 결혼하길 잘 한 거 같아.”

“……응.”

부부는 서로의 체온을 끌어안으면서, 어딘가 울고 싶은 기분으로 서로에게 매달렸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고 탓하고 싶다가도, 품 안의 온기가 그 분노를 수그러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 어설픈 화해법은 얼마 가지 못한다는 것을 서로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다음날 아침, 스자쿠와 를르슈는 ‘평소대로’의 아침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하지만 어제의 폭탄을 꺼내든 것이 를르슈였다면 오늘의 그 역할은 스자쿠가 되는 것 같았다. 스자쿠는 오늘 아침 이후로 이제 두 번 다시 이 이야기에 대한 화제를 꺼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둘째 이야기는 앞으로는 안했으면 좋겠어. 이거로 너랑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노력의 방향성은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제대로 박혀들었다. 를르슈는 아침을 먹다말고 하는 이야기에 어제 겨우 꺼트린 분노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네가 뭔데 그걸 해라 마라야? 나는 내가 원하는 걸 말도 못해?”

“네 남편이니까 그럴 자격 있지. 나야말로 원치 않는 일에 대해서 언제까지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배려해야 해?”

“배려? 너 지금 배려한다는 게 이거야?”

어느 한쪽도 굽힐 생각이 없는 대화는 아침에 피크를 찍었다. 를르슈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서 서재에 틀어 박혔고, 스자쿠는 텔레비전의 소리를 켜두고서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세이류가 돌아온 것이었다. 

 

* * * 

 

“그건 아버지가 잘못했네.”

“뭐? 너 이제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그치만 아빠는 싫다고 하고 아버지만 계속 밀어붙이는 이야기잖아.”

“너까지 스자쿠 편이야?”

“아빠 편 아버지 편 가르자는 이야기가 아니잖아. 난 아버지가 동생을 왜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어.”

세이류는 바닥을 드러낸 푸딩 파르페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난 지금도 좋아, 동생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아빠 심정도 알 거 같으니까. 세이류가 알겠다고 말하는 점에서 를르슈는 섭섭함을 느꼈다.

“아빠가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니까 그런 거잖아.”

“나도 너네 아빠 많이 좋아해.”

“아빠한테 직접 말해, 나한테 하지 말고.”

“어제도 말했어.”

“그런 건 안 궁금해.”

세이류는 질색 팔색을 하면서 말했다. 대체 왜 부모의 애정행각은 견딜 수 없는 것일까. 를르슈도 푸딩 파르페의 마지막 한 스푼을 떠먹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한 걸까. 어딘가 의기소침해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세이류는 마음이 약해졌다.

“아버지는 아빠를 사랑하는만큼 나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또 내가 할 말이 없긴 하지. 이건 그냥 부부 사이의 문제잖아.”

“그렇지. 휴, 내가 대체 딸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알고 있으면 됐어. 아, 알려준 대가로 오늘 저녁은 햄버그 스테이크 해줘.”

“또 먹고 싶은 건?”

“음… 푸딩 먹었으니까, 이젠 딸기?”

“딸기, 접수 완료.”

카페의 계산을 마치고, 지하의 식품 매장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발걸음을 따라서 세이류도 함께 걸었다. 아버지는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스자쿠,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세이류는 귀를 쫑긋 세우며 아버지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장 볼 건데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으음… 응, 알겠어. 애매하긴 하지만 기분은 햄버그라는 거네. 아, 쇼핑하러 백화점 왔거든. 응, 맞아, 거기. 살 게 많은 건 아닌데, 응, 올 거야? 와주면 고맙고.”

“아빠 올 거래?”

“그런가봐. 그럼 30분 있다가 봐. 응, 알았어. 나도 사랑해.”

“으악.”

전화를 마치는 와중에도 화해의 사랑고백을 하는 아버지와 아빠의 모습에 세이류는 참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를르슈는 소리없이 웃으면서 세이류의 어깨를 감쌌다. 옆에서 통화하는데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 를르슈의 일부러 묻는 질문에 세이류는 아버지의 짓궂음을 느꼈다. 일부러 그랬잖아, 으, 둘이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저를 끼고서 그러진 마시죠. 세이류의 말에 를르슈는 더욱 크게 웃었다.

“사랑의 결실이 그러면 쓰나.”

“아, 진짜 아빠 같아. 아버지랑 아빠 점점 닮아가.”

“그건 뭔가 욕 같은데.”

“사랑하는 사람이랑 닮는다는 걸 욕이라고 하는 건 또 무슨 심보야, 아버지 진짜 이상해.”

“너는 스자쿠 닮았다고 하면 기분 좋아?”

“상관 없지. 난 아빠랑 아버지 딸이잖아. 닮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한참동안이나 세이류와 를르슈가 장을 보고 나오면 때마침 스자쿠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도착했는데 어디 있어? 부드럽다 못해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아빠의 목소리에 세이류는 정말 너무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겠다고 한 지하 주차장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면 아빠랑 아버지의 열렬한 포옹이 있었다. 세이류도 안아줄게, 하고 아빠가 팔을 벌리는 것에 세이류는 질린 눈으로 쳐다보며 엉거주춤 안기는 수밖에 없었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하고서 스자쿠가 자동차 트렁크에 세이류와 를르슈가 사놓은 짐들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너 좋아하는 거 사다 보니까. 를르슈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한술 더 뜨는 것은 스자쿠였다. 내가 좋아하는 건 를르슈인데.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류는 절실하게 집으로 돌아가 자기 방에서 노래를 실컷 틀어놓고서 숙면을 취하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쌩쌩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아빠와 아버지가 막히지 않아서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세이류는 부드럽게 움직이는 자동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밤 내내 할머니와의 수다, 낮에는 아버지와의 쇼핑 데이트, 저녁에는 가족끼리의 단란한 식사를 위해서라면 지금 잠깐 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뒷좌석에서 졸기 시작하는 세이류를 보고서, 스자쿠와 를르슈는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빨간 신호에 멈춘 틈을 타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싸우게 되고, 그때마다의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로 함께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뜨거워지는 아빠와 아버지 사이의 분위기 속에서 세이류는 감았던 눈을 뜨고서 한숨을 쉬었다. 

“저기요, 이제 초록불이거든요? 뽀뽀 그만 하시고 갈 길 가세요.”

“뭐야, 세이류 자는 거 아니었어?”

“안 자고 있었어도 뽀뽀 했을 거면서!”

“나중에 아빠가 세이류도 뽀뽀해줄게.”

“필요없어!”

“아니면 아버지가 해줄까?”

“됐네요!”

세 사람의 대화는 곧 웃음소리로 이어졌다. 환하게 비치는 햇살,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하는 주말의 오후. 더 이상의 더할 것 없는 완벽한 일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할 정도였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우리들의 집으로. 맛있는 햄버그 스테이크와 달콤한 푸딩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Stand By Me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