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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페미아의 기사 스자쿠(10살 연상) X 황자 를르슈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주군은 한 명 뿐이라는 걸, 를르슈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키스를 받을 수 있는 손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를르슈가 목숨처럼 아끼는 나나리도 아니라는 것. 세상의 더러움 같은 것에도 꺼리지 않고 기꺼이 손을 내미는 유페미아만이 그 입술에 닿을 수 있다는 것.
어린 황자는 그림의 한 폭 같은 기사와 공주를 본 그날 밤, 오랜만에 죽은 어머니의 꿈을 꾸었다.
그전부터 를르슈의 꿈에 나오는 어머니는 대부분 마지막의 비참한 모습이 전부였다. 피투성이가 된 몸, 혹은 관에 누워있는 창백한 시체. 기다렸다는 듯이 내렸던 비와 비를 핑계로 오지 않은 조문객들. 를르슈는 직접 우산을 들고 나나리가 젖지 않게 그녀의 등 뒤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평소라면 스자쿠를 불렀을 것이지만, 그때 스자쿠는 에리어11에서의 테러 진압에 바빴다.
과연 그랬을까.
진흙이 질척거리는 흙바닥에 빗방울이 내리 꽂혔다. 에리어11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한 코넬리아는 장례식이 끝나고 사흘 후에야 연락이 왔고, 그리고 사흘 후에 스자쿠가 돌아왔다.
마리안느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일개 군인은 곧 누군가의 기사가 된다고 했다. 일곱 살의 를르슈가 부딪힌 것은 절망이었다. 스자쿠는 리 가문의 아직 기사가 없는 황녀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누군지 안다. 얼마나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인지도 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강인하게 굳을 줄도 아는 그녀를 알고 있다.
그래서 미워하게 되면, 자기 자신만 추악해진다는 걸 를르슈는 알고 있었다.
스자쿠의 기사 서임식에서, 를르슈는 오랜만에 어머니의 꿈을 꾸었다.
그때처럼 비참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건 너무 오래된 나머지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마리안느 님, 나나리 전하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를르슈 전하랑 숨바꼭질을 하시던 중이었다는데 정원 밖을 나가신 거 같아요. 나나리가 그렇게 멀리 나갈 리가 없는데? 정원의 큰 나무 뒤를 밟으면서 아마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지도 모르지. 나나리가 좋아하는 그림책이 있는 놀이방에 가보는 게 어떨까, 스자쿠 군. 그렇지만 함부로 들어가면…. 를르슈, 스자쿠가 놀이방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주렴. 저는 어머니랑 같이 있고 싶은데요. 훌륭한 기사는 좋은 주군을 만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 를르슈는 좋은 주군이 되어야 하니까 어머니의 부탁 정도는 들어주겠지? 그리고 나나리랑 숨바꼭질을 하던 건 를르슈였잖아.
전하, 안아드릴까요? 아니면 업어드릴까요? 됐어, 그런 거 물어볼 시간에 빨리 나나리를 찾고 돌아가자. 나나리도 정말, 건물 안으로 들어가다니 비겁해. 그럼 나나리 전하께 그러지 말라고 하셔야겠네요. 근데 괜찮아. 나나리는 숨바꼭질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았어. 오히려 훌륭하게 숨은거야. 정말 전하께서는 나나리 전하에 대해 싫은 소리를 못하시네요. 싫은 소리? 좋은 주군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아도,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거야. 나도 내 훈련의 본질에 벗어나지 않았어.
투명한 화병에 물이 일렁이는 그림자가 지는 복도, 꽂혀있는 한 송이의 장미.
어제까지는 두 송이였는데, 나머지 한 송이는 어디간걸까요? 시들어서 버린 게 아닐까? 아쉬웠어? 음…. 그러네요. 아쉽습니다. 어제 하루였지만 이 복도를 오고 가면서 그 두 송이의 장미에게 정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나나리, 나나리가 한 송이를 가져갔구나. 스자쿠가 그 꽃을 찾고 있었어.
오라버니, 이 장미는 향기가 좋아요. 스자쿠 씨한테 드리고 싶어요. 내일은 에리어11로 첫 출정이라고 했으니, 멀리 있어도 아리에스의 장미를 보면서 힘을 내라고….
햇빛이 누그러뜨린 보라색의 장미는 깊은 향기를 은은하게 뿜어냈다. 마치 기사장을 들고 있는 것 같다고, 일곱 살의 를르슈는 열 일곱살의 스자쿠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영광입니다. 시들어도 예쁘게 말려서 꼭 가지고 다니겠습니다. 스자쿠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그는 이제 유페미아의 기사가 됐다.
그의 키스를 받는 손은 내 손이 아니다.
그에게 기사장을 건네는 손은 내 손이 아니다.
그에게 칼로 호를 긋는 손은 내 손이 아니다.
어차피 내 손에 들어왔던 적도 없다. 나는 어머니를 잃으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아리에스의 빛도, 쿠루루기 스자쿠도.
스자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시들어가던 보라색 장미가 아니라, 하얀 날개를 펼친 기사장이라는 것을 인지한 이후로, 어머니의 시체가 나타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보다 더 끔찍한 꿈을 꾼다. 유페미아의 기사가 된 스자쿠를 본다.
…쿠루루기 스자쿠, 그대는 여기서 기사의 맹세를 하고, 브리타니아의 기사로써 싸울 것을 다짐하는가?
대답하지 마. 대꾸도 하지 마.
너에게는 장미를 준 나나리가 있는데.
너를 그 자리까지 올라갈 기회를 만든 내 어머니가 있었는데.
…Yes, Your Highness.
꿈은 쉽게 깰 수가 없다. 유페미아에게 굽힌 무릎을 스자쿠가 일어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오늘도 그 꿈, 끔찍한 악몽에서 를르슈는 눈을 떴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에리어11의 부총독으로 떠난 유페미아와 그의 기사는 오늘도 안녕할 것이다. 를르슈는 새벽의 선뜩함에 이를 악물었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도 미식거리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이제 를르슈는 기사가 되었던 스자쿠와 같은 열일곱이 되었다. 뛰어난 두뇌와 화려한 외모로 사람을 농락하는 아리에스의 황자는 더러운 소문이 돌기는 하지만,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은 술에 취해, 절반은 일에 빠져서. 그의 형제들 중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슈나이젤이 를르슈에게 물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뭘 하고 싶은 건지.
이 술을 다 마시면, 이거보다 더 정신을 잃을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
쾌락을 바라고 하는건가, 슈나이젤이 물었다. 를르슈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정신을 잃을 고통을, 지금의 역치를 뛰어넘는 고통을 위해서. 당신은 어머니를 잃어본 적도 없고, 기사를 빼앗겼던 적도 없으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체스를 두던 슈나이젤은 마지막의 체크메이트를 외쳤다.
에리어11에서는 리플레인이라는 마약이 유행이더군.
아아, 그렇습니까?
대부분 그 약을 통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는데, 를르슈에게 그러고 싶은 때가 있을 거 같아.
를르슈는 검은 나이트의 갈기를 손끝으로 쓸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에서 현실로 돌아온다면, 그 추억도 이제 악몽이 될 테니…. 그러고 싶은 때는 꿈에서도 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슈나이젤이 떠난 체스판을 를르슈는 노려보다가, 술을 마셨다. 마시고 마시면서, 오늘은 그 꿈이 반복될까, 차라리 어머니를 보는게 좋은걸까, 고민을 하며 나른해지는 몸을 느끼다가 수마에 빠졌다. 죽은 어머니가 상냥하게 웃고 있는 꿈. 나나리를 찾으러 갔을 때의 포근했던 오후. 유페미아의 기사가 되어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던 스자쿠.
그 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 그 꿈에서 쉽게 깨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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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3 06:16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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