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은 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를르슈가 차에서 내려야하는 순간에는 짧게 느껴졌다. 그 시간동안 스자쿠와 단둘이 있어본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무언가 말을 해야하는 것이 좋았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어딘가 화난 기색의 스자쿠를 옆에 두고서 태연하게 말을 걸 정도로 를르슈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줄곧 침묵으로 이어질 것 같았는데도,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 앞에서 스자쿠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우울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라앉아있었다.
“그때… 뵈었던 어머니 친구 분이랑은 파티에 같이 오시는 게 아니었군요.”
C.C. 이야기가 왜 나오지?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사교계에서 어머니의 출신으로 욕 먹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기상천외한 C.C.의 행동으로 안 먹어도 될 욕을 얻어먹는 것은 사절이었다. C.C.는 얼굴은 훌륭했지만 성질머리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쓰레기였다. 적어도 를르슈에게는.
“사실 를르슈 전하는 오늘 파티에 참석할 생각이 없으시다고… 클로비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럴 생각이었지. 슈나이젤 형님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를르슈의 대답에 스자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스자쿠를 뒤돌아보면서 를르슈는 그를 쳐다보았다.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를르슈를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즘 계속 아리에스에서만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왜?”
“계속 그분과 계셨나요?”
“……그분?”
“전하의 어머니 친구분과 계속 같이 있으셨냐구요.”
를르슈는 그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그 말은 사실이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스자쿠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알겠다고 말했다. 무엇을? 를르슈가 의아해하자, 스자쿠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일 뿐이었다.
“아닙니다, 전하께 제가 괜히 실례되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주제 넘은 발언에 대해서 용서해주십시오.”
딱딱한 말투로 대답하는 스자쿠의 모습에서는 용서를 구한다고 하기보다는 정 반대의 감정이 느껴졌다. 를르슈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싶다가도, 어느새 도착한 연회장의 문앞이며, 그리고 를르슈의 초대장을 확인하기 위해 나타난 사람들 앞에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세 발자국 뒤에 있는 스자쿠의 시선이 차갑게 느껴졌다. 를르슈가 무언가 잘못 말했을까. 스스로의 행동을 곱씹어보던 를르슈는 이내 머릿속을 비우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끝난 짝사랑이다. 쓸데 없는 곳에 의미 부여를 했다가 다시 상처받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파티 중간에 입장한 를르슈의 등장에, 파티의 호스트인 클로비스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를르슈가 슈나이젤의 대리로 왔다는 말에 수군대던 귀족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지겹지도 않지. 그런 무리들에게 를르슈는 피곤함을 느끼면서 오늘의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어머, 나이트 오브 세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스자쿠에게 아는척을 하면서 말을 거는 마담 르메르를 만나기 전까지는, 를르슈는 나름대로 평온한 상태였다. 마담 르메르는 스자쿠를 보고서 정말 반가운 듯, 꽃이 피는 듯한 미소를 흩뿌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스자쿠 또한 그녀를 보고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담 르메르….”
“이런 자리가 좀 낯설어서 그런가, 나이트 오브 세븐을 만나니까 한결 안심이 되지 뭐예요.”
스자쿠가 그녀가 내민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서 를르슈는 속이 울렁거렸다. 레이디에게 베푸는 인사일 뿐인데. 스자쿠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낌새가 보이자 를르슈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를르슈가 한걸음씩 멀어지는 모습에 스자쿠가 당황하며 그를 불렀다. 를르슈 전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지만 를르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를르슈는 스자쿠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파티장의 끝인 발코니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스자쿠가 보이지 않는 곳에 시선을 두기 위해서 파티장의 구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자연스럽게 스자쿠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었다. 이쪽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는 걸까. 아니면 벌써 마담 르메르와 함께? 마지막 결론에 다다르자 를르슈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들고 있던 샴페인을 들이켰다. 한 잔을 다 비우자마자 다음 잔을 찾기 위해서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그렇게 빨리 마시면 쉽게 취합니다, 전하.”
“…스자쿠.”
파티장에서 찾을 수 없었던 스자쿠는 를르슈의 뒤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를르슈의 앞을 가로막은 스자쿠는 어두운 낯빛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누굴 찾고 계셨나요?”
거짓말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추궁하듯 물어보는 스자쿠의 모습에 를르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굴 찾고 있다고 하기도 전에 장본인인 찾아와서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딱히 찾던 사람이 있는 건 아니야.”
“살펴보고 계셨잖아요.”
“……너를 찾고 있었던 거야.”
를르슈는 솔직하게 말했다.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잠시 얼굴을 굳혔다. 이런 말도 싫은가.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정말로 볼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 했다.
“마담 르메르를 찾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마담 르메르? 그녀야말로 너와 함께 있지 않았나?”
“그렇습니다만… 전하를 에스코트하는 일이 우선이라서요.”
를르슈를 호위하는 것에 만전을 다하겠다던 예전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 싶었다. 이런 곳에서까지도 성실한 녀석. 나는 너한테 밉보일 짓 밖에 하지 않았는데. 를르슈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차피 오늘은 를르슈가 슈나이젤의 대리인으로 왔기 때문에 더 특별히 신경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담 르메르가 되었건 누가 되었건, 스자쿠와 함께 어울릴 여자들이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을 이 파티에 를르슈는 방해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를르슈는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면서 스자쿠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벌써 돌아가시나요?”
“슈나이젤 형님도 이쯤 인사했으면 돌아갔을 거야. 애초에 미술관 개관 파티에 황족은 클로비스 형님 한 명으로 충분해.”
“…….”
“내가 머물 곳으로 안내를 부탁하지, 스자쿠.”
“Yes, Your Highness.”
발코니에서 다시 파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마담 르메르가 있을 것 같아서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을 힐끔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스자쿠와 약속한 곳에 따로 먼저 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를르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피해망상도 이 정도면 병이다.
차를 타고 미술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황족들이 머무는 호텔이 나왔다. 황족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를르슈가 머물 방까지 안내하는 스자쿠는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필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럼 이제 스자쿠와 오늘 밤으로 인사를 마치면 된다. 를르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돌아가는 호위는 아리에스의 인물들로 부탁하면 되고, 나이트 오브 세븐도 바쁜 일이 금방 생길 테니 —예를 들면 마담 르메르라던가— 오늘로 안녕을 고하는게 맞았다.
“스자쿠, 그동안 고마웠어. 돌아가는 차편은 내가 아리에스에 연락을 해둘 테니, 너는 더 즐기다 가도 좋아.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써 바빴으니 이 정도 치하는 해줘야 브리타니아 황실에 대한 불만도 줄겠지?”
“네? 가는 길도 제가 모시겠습니다.”
“괜찮아. 신경쓰지 않아도 돼.”
“전하를 걱정하는 겁니다.”
“걱정할 거 없어.”
“…이제 정말, 저는 전하를 모르겠어요.”
를르슈는 스자쿠의 마지막 말에 몸을 굳혔다. 움츠러 드는 몸에 힘을 싣어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영원히 모르면 돼. 알 필요 없고.”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무슨 말을… 어차피 넌 바쁠 테니까.”
“영원히 안 볼 것처럼 말씀하시잖아요.”
“그게 너한테 좋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됐어, 난 피곤하니까 들어갈 거야.”
“전하, 전 아직 드릴 말씀이.”
스자쿠가 말하거나 말거나, 를르슈는 카드키를 열고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를르슈의 팔을 붙잡은 스자쿠가 필사적인 얼굴로 그를 막아세웠다. 전하, 하고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를르슈 전하는 저를 좋아하시죠?”
지금 이 순간, 제일 피하고 싶은 질문에 를르슈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는 표정일 것이다. 그러나 스자쿠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파티에도, 전장에도, 저를 만나려고 계속 오신 거잖아요. 저에 대해서 알고 싶으니까 오신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럴 리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어요. 전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실 테니, 그냥 저에 대한 호기심의 연장선일 거라고. 그런데, 아니에요. 전하께서는 절 좋아하시잖아요.”
“…….”
“거짓말 하지 마세요. 도망치지도 마세요. 전하 답지 않습니다.”
“……거짓말도, 도망도 치지 않았어.”
“그럼 왜 앞으로 안 보겠다고 말씀하세요?”
“그런 말 한 마디도 한 적 없어.”
“그런 뉘앙스였어요.”
“그건 네 추측일 뿐이다.”
“뭐가 제 추측이죠? 전하가 저를 좋아하시는 거요? 아니면 앞으로 안 보겠다고 하신 거요?”
“둘 다! 애초에 이런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죠.”
스자쿠는 를르슈의 손에 들린 카드키를 빼앗아서 호텔의 방문을 열었다. 야경이 아름다운 호텔의 뷰를 구경하며 지친 마음을 달랠 심산이었던 것과 다르게, 그 야경의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스자쿠의 두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게 된 를르슈는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스자쿠가 문을 잠그고 를르슈를 거실의 소파까지 데려가려고 할 때, 를르슈는 있는 힘껏 허세를 부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 들어왔습니다.”
“안전은 네가 제일 위협하고 있잖아!”
“이야기를 피하지 마세요, 전하. 절 좋아하시잖아요.”
“안 좋아해!”
“좋아하시잖아요, 제 알몸을 보고 싶으실 정도로. 코피까지 쏟으셨으면서.”
“아니야! 그건, 그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한 와중에도 절 보고 싶으신 거죠?”
“아니라니까!”
“처음에는 마담 르메르를 견제하려고 이 파티에 오시려고 했고요.”
“너…!”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를르슈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스자쿠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늘어놓은 것치고는, 를르슈의 반응을 살피는데 급급해보였다. 여유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두 남자의 말싸움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서로 붉어진 얼굴을 노려보면서 이 부끄러운 상황에 어떤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역력한 두 남자 중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를르슈였다.
“만약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한들,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데?”
“네…?”
“너는 여자랑도 잘 놀아봤으니 이번엔 남자가 궁금해져서 호기심에 나를 만나보려고 하는 거 같은데…. 생각보다 재미없을 걸? 난 남자라서 임신도 못하고, 너에게 그렇게 큰 쾌락을 주지도 못할 거야. 얼굴 좀 반반한 남자일 뿐 너에게 어떤 메리트도 주지 못해. 업무에서나, 침대에서나. 어느 쪽이든.”
“무슨 소리를.”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으로 모두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내가 앞서 보인 모든 행동들이 너에게 그런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나 또한 한때의 치기이자 호기심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의 모든 무례한 행동을 잊어줄 테니 이제 나가보도록 해.”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난 진심이고, 진지해.”
를르슈의 마지막 말에 스자쿠는 손을 들었다. 설마, 하는 생각과 동시에 를르슈는 스자쿠의 왼손으로 뺨을 얻어맞았다. 따귀 한 대에 휘청거리는 를르슈를 붙잡은 스자쿠는 무릎을 꿇었다.
“이번이야말로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
“전하께서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더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을 모욕하시는 건 상관 없지만, 저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는 건 싫습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스자쿠의 모습은 간절해보였다. 를르슈는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았다. 화가 난다거나, 수치스럽다거나, 부끄럽다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를르슈의 안에서 쏟아졌다. 그것은 이제 틀어막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넘쳐나고 있어서, 가지고 있는 모든 패들이 쓸모가 없다는 게 느껴졌다.
“전하께 감히 말씀 드립니다. 전하가 저를 좋아하신다고 말하면, 사실 어떤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전하를 좋아하는 제 마음도 같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변하는 것이 없을 거라고 말했으면서, 스자쿠의 고백을 듣자마자 를르슈는 무언가가 크게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전하를 좋아하는 제 마음, 전하를 좋아하는 제 마음, 전하를… 좋아하는… 제 마음. 그 단어의 나열에 를르슈는 얻어맞은 곳이 뺨 한 군데가 아니라 온몸을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해지세요, 를르슈 전하. 저를 좋아한다고 인정하세요.”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여달라고 말하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를르슈의 손이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것에, 스자쿠는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다시 한 번 제발, 이라고 부탁했다.
이제 모든 패는 쓸모 없어졌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모든 조건을 해제시켰다. 체크메이트의 순간에 놓인 를르슈의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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