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수님 커미션 *
Fall in Love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기 때문에 그의 총명함은 모든 황족의 시선을 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어머니인 마리안느 비 브리타니아가 나이트 오브 라운즈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 가문은 여타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의 가십거리가 되기 쉬웠는데, 를르슈 황자의 영민함은 더 좋은 소잿거리가 되었다.
쉴 새도 없이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를르슈 황자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닫고 지냈으며,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아리에스의 이궁에 틀어박혀 지냈다. 마리안느 황비는 바깥 일이 바쁜 황비였기 때문에 아리에스에 붙어있을 수 없었기에, 그런 황자를 돌볼 수 없었다.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운 황자는 그런 어머니의 사정을 이해한다면서 홀로 있기를 자처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다섯 살의 를르슈가 아리에스에서 홀로 있었던 날이었다. 혼자 마리안느의 서재에 틀어박혀서 아랫것들을 한 명도 두지 않은 채로 공부를 하고 있었던 황자는 납치를 당했다. 납치범이 비 가문의 대를 끊어버리겠다는 심산이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겠지만, 그것으로 풀릴 분이 아니었는지 를르슈 황자는 험한 꼴을 당했다.
범인은 옛 귀족 중에 한 명이었으며, 마리안느 황비의 활약 때문에 귀족 작위를 빼앗긴 남작이었다. 그는 를르슈 황자를 욕보여서 마리안느에게 사과를 받아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마리안느는 자기 혈육에 대해서 크게 애달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거기서 죽는다면, 그게 거기까지인 운명인 거지.’
납치범의 전화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납치범은 어린 아이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최음제를 들이부은 참이었고, 를르슈 황자는 그 약에 대한 쇼크로 기절과 깨어남을 반복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지 않는구나, 라고 를르슈 황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브리타니아는 비겁한 수에 응하지 않으며, 또한 약자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힘없이 납치를 당한 를르슈가 사라진다면 사라지는 게 맞는 이치인 세계였다.
납치범은 괜한 짓을 했다면서 를르슈 황자를 어느 뒷골목에 팔아버릴 생각이었으나, 그때 때마침 가니메데로 쳐들어온 마리안느에 의해서 목숨이 끊어졌다. 그때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내 아이의 운명마저 바꾸는 여자니까.’ 정도가 될 것이다.
브리타니아 황실에서는 황족 납치 사건은 소소하게 늘 존재했던 해프닝이었다. 를르슈 황자라고 더 특별하게 다루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안느가 직접 납치범을 처단했다는 점에서 좀 화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아마 를르슈 황자 본인 인생에서도 그 납치 사건은 소소한 해프닝에 불과할 것이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는 그렇게 생각하며 읽고 있던 파일을 덮었다.
“정—말, 스자쿠는 진짜 성실하다니까.”
“성실한 게 아니라 기본이잖아. 호위 대상을 제대로 알아야지 어떻게 호위를 할 건지 알 수 있고.”
“뭐,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황실 기록물 보관고까지 들리진 않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스자쿠가 날을 세워 물으면, 지노는 히죽 웃으면서 스자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갑자기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감에 스자쿠는 무겁다며 그의 팔을 치워냈다. 거의 내동댕이 쳐지다시피한 지노는 스자쿠의 모습에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어깨에 힘 좀 풀라고 하고 싶은 거지.”
“그렇게 긴장하지도 않았어.”
“에이, 방금 전에 보니까 완전 굳었던데. 나중에 마사지라도 같이 받으러 갈래?”
“그럴 시간 없어. 이제 곧 아리에스로 가야하니까.”
스자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쿠루루기 경!’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에스로 향하는 차가 도착했다고 알리는 말이었다. 지노는 스자쿠에게 배웅을 해주겠다면서 그를 따라왔다.
“그래도 아리에스의 황자님을 잘 도와드리면 스자쿠의 인생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아리에스의 황자님을 돕는다고 뭐가 편해져?”
“그야 모르지. 하지만 를르슈 전하께서 굳이 스자쿠를 고른 이유가 있겠지? 그게 바로 스자쿠의 셀링 포인트!”
“그런 건 필요없어.”
스자쿠가 준비된 차에 몸을 싣고 나면 지노가 ‘딱딱한 표정은 푸는 게 좋을 거야!’라며 괜한 소리를 했다. 인사를 마친 스자쿠가 창문을 올리고 출발하라고 알리면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 황궁 안에서도 제법 변두리에 위치한 아리에스 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공을 올리는데 한시가 바쁜 상황에서 일개 황자의 호위를 위해서 차출되는 인력이 자신이라니. 그것을 생각하니 더욱 굳어가는 표정에 스자쿠는 찡그린 미간을 꾹꾹 눌렀다. 뭐, 랜슬롯도 한동안 정비를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때마침 휴식이 필요할 때이기도 했으니까.
이번 스자쿠가 맡은 임무는 를르슈 황자의 유로 브리타니아까지의 여행길에 따르는 호위였다. 유로 브리타니아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무대이기도 했으니 낯선 곳도 아니었다. 늘상 가던 곳에 황자 한 명을 더 데려가는 것, 그리고 그 황자가 가는 길만 호위하면 되는 것이 스자쿠의 간단한 임무였다. 간단한 임무. 그렇다면 아무나 데려가도 좋을 텐데. 왜 하필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인 자신이? 스자쿠는 귀찮음이 앞섰다.
“나이트 오브 세븐, 아리에스 궁에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
스자쿠는 열리는 문에 따라서 차에서 내렸다. 내리면 아리에스 궁의 호위대장이라는 제레미아라는 남자가 반겨주었다. 정중한 말투, 친절한 태도, 그러나 눈빛에서는 스자쿠를 신뢰할 수 없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제레미아의 분위기에 스자쿠는 쓴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 귀족이구나. 귀족들이 흔히 보이는 듯한 브리타니아인 외의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어디에서나 비슷한 듯 싶었다.
“를르슈 전하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안내해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런 귀족 출신 호위대장이 애지중지 감싸는 황자라… 그것도 한 번 납치 경험이 있었으니 얼마나 귀하게 컸을지, 그리고 스자쿠를 얼마나 하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대가 되었다. 뭐, 그쪽에서 지명한 건 이쪽이니까 싫다고 하면 바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제레미아는 아리에스에 들어가서 제일 첫 번째 보이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곳이 응접실인 듯 싶었다. 스자쿠는 문앞에 서서 세 번 노크했다. 안에서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는 제레미아를 힐끔 쳐다보고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것이 나이트 오브 세븐과 주어진 설정 자체부터 피곤한 를르슈 황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가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 전하를 뵙습니다.”
스자쿠는 무릎을 꿇고 정석대로의 인사를 올렸다. 눈앞의 황자는 이전 황실 기록 보관고에서 보았던 파일 속의 얼굴보다 더욱 성장한 모습이었다. 하얀 피부, 검은색 머리카락, 날카로운 보라색 안광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듯 스자쿠를 보는 표정은 미간이 찡그려진 채였다.
를르슈 황자가 일어나 소파에 마주 앉으라고 하는 말에 스자쿠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서류로 봤을 때 사진에서는 좀 더 귀여웠는데.”
“…네?”
“자네 말이야. 좀 더 귀여운 얼굴로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를르슈 황자의 말에 스자쿠는 어색하게라도 웃어보여야 할지, 아니면 그냥 이 상태로 못 들은 척을 해야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나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 귀여워서 뽑은 거란 말이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를르슈 황자의 발언에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황제폐하의 명을 받고 진행된 임무였지만 정작 당사자인 를르슈 황자가 이렇게 싫어하면 스자쿠는 빠지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사유가 좀 우스울 뿐이었다. ‘귀엽지 않아서’ 임무 제외라니. 귀여워서 임무 완료보다는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 귀여운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고르시면 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자네 이상으로 귀여운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본 적이 없어서. 뭐, 사진이랑 달라도 이 정도 오차는 허용 범위 안이다.”
그러나 를르슈 황자는 실컷 귀엽지 않다고 말해놓은 주제에 스자쿠를 호위로써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귀여운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원했다면 아냐 같은 여자애가 낫지 않았을까. 스자쿠는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것을 꾹 억누르고서 자리에 앉았다.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아본 거 같던데.”
“아, 네. 알고 계셨군요.”
“황족 정보 공개 요청에 대한 알림이 오게 되어 있거든. 나이트 오브 세븐은 귀엽진 않아도 성실한 편이군. 호위 대상의 과거 기록까지 살펴보다니.”
“…….”
귀엽지 않다는 말에 크게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복해서 들으니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자쿠는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전하께서 작성해주신 호위 작전 개요를 읽어보았습니다. 앞으로 사흘 뒤, 황족 전용 기차를 타고서 유로 브리타니아로 향한다는 일정은 꽤 긴데 괜찮으실까요?”
“모처럼 아리에스 밖을 나가는 기회이니 길게 자리를 비워도 될 거 같다. 일정에는 무리가 없어. 어차피 크게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위치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그럼 전하의 호위에 만전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따로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을까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 황자는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로 스자쿠를 바라보았다.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 앞에서 말을 망설이는 듯한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은 드물어서, 스자쿠는 말 없이 그 시선을 받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이 마주치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를르슈 황자는 입가를 가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남자가 싫어.”
그 말 한 마디를 하고 나서 를르슈 황자는 입가를 가린 손을 치웠다. 정말 남자가 싫은지, 그의 입술은 괜한 말을 내 뱉은 것에 대한 후회로 비뚤어져 있었다.
스자쿠는 그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남자가 싫다, 남자가 싫다… 그럼 지금 를르슈 황자의 앞에 있는 스자쿠는 남자가 아닌 건가? 아니면 남자인 스자쿠가 싫다고 지금 이야기하는 건가? 귀엽지 않아서 싫고, 남자라서 싫고, 그러면서도 호위로 부리겠다는 이야기는 또 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고쳐보려고 노력 중이야. 그래서 이번에 호위를 부탁할 나이트 오브 라운즈도 일부러 남자를 고른 거였다. 나름 타협해서 귀여운 쪽을 고르긴 했지만.”
“예전에 있었던 납치 사건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그 영향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원래부터 그냥 남자가 싫었어.”
“예?”
“잘난척 하기 좋아하고, 주제에 맞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굴고,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세상 불합리한 처사는 모두 당한 것마냥 혼자서 억울해지는 사람은 대체로 남자더라고. 그래서 남자가 싫어.”
“…….”
“뭐, 나이트 오브 세븐이 무조건 그런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은 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안 그럴 거라는 생각도 안 해. 아무튼 피차 큰 기대는 하고 있지는 않는다고 해도 서로 기대를 져버릴 일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군.”
“……아아, 네. 그럼 전하께서 남자로부터 최대한 멀리 할 수 있도록 호위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해서 모든 호위 인원을 여자로 대체하지는 마. 여자에 미친 호색한이라고 소문이 나는 것도 싫으니까.”
정말 바라는 것도 많다. 스자쿠는 이 를르슈 황자가 상상 이상으로 피곤한 황자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올 때 제레미아 경께서 안내를 해주셨는데… 그 분은 데려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머니께서 곧 돌아오시는데 아리에스의 호위대장을 데리고 갈 순 없는 노릇이지.”
아들을 위해서 가니메데에 타서 적진에 처들어간 그 황비에게 호위가 필요할까, 라는 불경한 생각을 한 스자쿠는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그러시군요, 하고 스자쿠가 겨우 대답하면 를르슈는 잠시 스자쿠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은 피곤해서 그런데, 내일 다시 이야기를 해도 될까?”
“내일 말입니까?”
“그래. 내일.”
“그럼 내일 전하께서 편하신 시간에 연락을 주시면 바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알겠다.”
아리에스의 황자가 차 한 잔 내어주지 않은 독대가 끝났다. 하지만 그것이 아쉬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피곤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나은 해방감이 느껴졌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문 밖으로 나오면,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레미아가 아리에스의 정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제레미아는 스자쿠와 를르슈 황자와의 대화가 궁금한 듯 싶었지만 스자쿠에게 필요한 말 이상으로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차라리 그게 나은 것 일지도.
차에 탄 스자쿠는 아리에스가 멀어질수록, 내쉬는 한숨이 더욱 무거워졌다. 골치 아픈 일을 떠맡게 된 기분이었다.
* * *
를르슈 황자가 유로 브리타니아로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어제 했던 를르슈 황자와의 약속을 기다리던 스자쿠는 오전 내내 오지 않는 연락에 답답해 하며 아예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별관에 들렀다. 먼저 와 있던 지노는 스자쿠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내 어깨에 턱, 하고 걸리는 지노의 팔. 스자쿠는 그것을 밀어내는 것조차 귀찮았다.
“스자쿠, 인상 좀 펴. 어째 어제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보여?”
“그래? 그럼 팔 좀 치워.”
“팔 치우면 웃을 거야?”
“아쉽게도 난 남자 보고 웃는 사람은 아니라서.”
차갑네, 하고 지노는 팔을 떼어냈다. 스자쿠는 남아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면 벌써 오후 2시였다. 점심을 먹고도, 오후 티 타임을 가져도 한참이 지났을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 를르슈 황자는 연락조차 없었다.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의 나이트 오브 세븐을 괄시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앞으로 일주일 가량을 붙어있어야 하는 를르슈 황자마저도 그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스자쿠는 앞길이 막막했다.
“근데 진짜 어제보다 표정 안 좋아, 스자쿠.”
“…기다리고 있는 연락이 안 오니까.”
“네가 연락을 기다려? 어떤 여자인지 궁금한 걸. 어디야, 어디 집안 아가씨야?”
“여자가 아니라 남자. 집안은 비 브리타니아… 어제 뵈었던 를르슈 황자전하야.”
“아, 어제 열심히 알아봤던 그 황자전하군. 어제는 어땠길래?”
지노의 물음에 스자쿠는 어제 있었던 대화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을 떠올리려고 했다. 귀엽지 않다, 남자가 싫다, 피곤하다. 전부 부정적인 말들 뿐이라서 무언가를 지노에게 말을 꺼내 놓아도 불경죄로 잡혀가지 않을까 싶었다. 스자쿠는 대답하는 것 대신에 입술을 꾹 깨물고서 또 나오려는 한숨만 삼킬 뿐이었다.
“별로 좋지 않았나 봐.”
“난 그냥 호위 임무만 하면 돼. 좋고 나쁘고 할 게 없으니까… 그래,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구나. 그래서 스자쿠의 셀링 포인트가 뭐였대?”
“알 거 없어.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지노?”
“난 오히려 스자쿠가 그렇게 무관심한 게 신기해. 그 황자전하는 뭔가, 좀, 베일에 싸여있다고 해야 하나, 되게 궁금하잖아. 우리 또래인데도 사교계에는 데뷔하지도 않았고.”
“황족의 사정이 따로 있겠지….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아.”
“그래서 유로 브리타니아에는 왜 가시는 거래?”
지노의 마지막 질문에 스자쿠는 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스자쿠? 듣고 있어? 지노가 계속해서 재촉했지만, 스자쿠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를르슈 황자의 유로 브리타니아 여행의 이유에 대해서 알아본 적이 없었다. 그저 본국에서의 틀어박힌 황궁 생활이 지겨워 그런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노는 대답 없는 스자쿠를 보면서 키득거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스자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요즘 메이드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영화가 있거든? 스자쿠처럼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사귀었다 헤어지면 서로 죽여버릴 거라고 하더라.”
“죽여버린다고? 죽어버린다는 게 아니라?”
“요즘은 죽여버린대.”
“끔찍하네.”
“스자쿠도 그런 로맨스를 시작하나 했더니 상대가 황자전하라니까 아쉽네.”
“별 게 다 아쉽구나, 지노.”
“뭐어, 연애는 몇 살을 먹어도 즐거운 이야기니까!”
지노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면서 스자쿠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분침이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이고, 휴대폰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서류 업무를 보던 지노도 퇴근하고, 황궁의 사람들이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도 를르슈 황자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스자쿠는 제대로 바람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를르슈 황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귀엽지 않은 데다가 남자인 스자쿠… 그 를르슈 황자가 싫어할 만한 요소가 가득한 스자쿠이지만, 그런 스자쿠를 호위로 지명한 것은 를르슈 황자 아니었던가?
“어이가 없어서.”
스자쿠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망토를 걸치면서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웃겨.”
장장 오늘 하루 중 20시간 40분 대기 끝에 연락 한 번 없는 이 웃기는 황자전하를 어떻게 하면 좋으냔 말이다. 혼잣말을 하던 스자쿠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겠다고 부하에게 말했다. 부하가 돌아가는 차편을 준비하는 사이, 아무도 없는 별관의 안쪽을 살피던 스자쿠는 거울에 비친 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중얼거렸다.
“귀엽지 않아서 어쩌라고.”
스스로 말해 놓고도 스자쿠는 정말 어쩌자는 건지 싶었다. 귀엽지 않은 걸 어떻게 귀엽게 보이냔 말이다. 내가 귀엽지 않은 게 내 문제인가? 그게 바람 맞을 이유인가? 답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늘어놓다가, 스자쿠는 차가 도착했다는 부하의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궁을 떠났다. 혹시나 연락이 올까 싶어서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지만, 를르슈 황자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 * *
를르슈 황자가 유로 브리타니아로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스자쿠는 오늘도 를르슈 황자의 연락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하루 전날이니 스자쿠 쪽에서 연락을 해야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후자의 선택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귀엽지도 않은 데다가 남자인 스자쿠가 그 황자전하에게 함부로 연락을 했다가 더 괜한 미운털이 박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망설이게 되었다. 이제 와서 스자쿠를 미워하는 사람이 한둘 더 늘어난다고 해서 스자쿠 인생의 난이도가 극악으로 치닫는 것도 아니지만, 쉽게 갈 수만 있다면 스자쿠도 쉽게 가고 싶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 황자전하는 쉽게 협조해 줄 것 같지가 않아서 곤란했다.
곤란함, 난처함, 귀찮음, 피곤함… 귀엽지 않은 건 그 황자전하도 마찬가지다. 스자쿠가 속으로 를르슈 황자의 욕을 조용히 읊고 있을 때였다.
[어제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 괜찮다면 오늘 오후 3시에 아리에스로 와줄 수 있을까? 쿠루루기 경의 일정이 바쁘다면 거절해도 괜찮다.]
‘미안하다’라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황족이 몇이나 될까. 스자쿠는 오전 9시 28분, 자신의 휴대폰에 도착한 메시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오후 3시까지 아리에스로 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머리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음에도, 어제까지 바람 맞았던 비참함에 대해서 생각하면 스자쿠는 답장하는 것을 미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밀고 당길 때가 아니다. 스자쿠는 휴대폰을 붙잡고서 오후 3시까지 가겠다고 답장했다. 를르슈 황자로부터는 간결한 메시지가 왔다. ‘알았다’라고. 정말 귀엽지 못한 답장이었다.
스자쿠는 일상적으로 보는 업무들을 하고, 를르슈 황자가 있는 아리에스로 향하기 위해서 오후 2시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아리에스로 향하는 차를 타는 중에, 스자쿠는 그 황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가득했지만, 흩어지는 풍경 사이로 어차피 물어봐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다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어제는 왜 연락을 주시지 않았나요?
그건 두 사람이 처음 한 약속이었는데. 어째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따지고 드는 것 같아서 스자쿠는 이 질문을 이 호위임무가 끝날 때까지 꺼내지 않도록 주의하기로 결심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을 태운 차는 빠르고 미끄럽게 나아갔으며, 스자쿠는 아리에스에 별 탈 없이 도착했다.
아리에스에 도착하면 선객이 있었다. 황족 전용 자동차가 앞서 있었다. 내리는 사람은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였다. 코넬리아 리 브리타니아의 하나 뿐인 여동생이자, 귀족 출신 어머니 황비를 두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권력을 등에 업었지만 자애로운 성품으로 언니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스자쿠는 몇번 파티장에서 그녀를 만나보았지만, 그때마다 그녀의 스스럼 없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서 알 수 없는 은근한 감동과, 그에 기저한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리에스에 볼 일이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스자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차를 타느라 구겨졌던 드레스 자락을 고치면서 내리는 유페미아는 뒤따라 오는 나이트 오브 세븐의 자동차를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스자쿠가 차에서 내렸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차에서 내리는 스자쿠를 알아본 유페미아는 웃으면서 다가왔다.
“스자쿠, 오랜만이에요. 아리에스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네요.”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가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 황녀전하를 뵙습니다.”
“그런 딱딱한 인사는 괜찮아요. 후후, 를르슈 때문에 온 건 가요?”
“아, 네. 맞습니다. 유페미아 전하도 를르슈 전하와 약속이 있으신건가요?”
“네. 를르슈가 아리에스를 길게 떠나는 건 처음이라서, 응원과 격려를 더할 겸. 나나리의 안부도 물어보고 싶고.”
‘나나리’는 누구일까.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먼저 앞서 가는 유페미아의 뒤를 따라갔다. 아리에스의 호위대장인 제레미아가 유페이마와 스자쿠를 알아보고서 인사를 했다. 를르슈 전하께서는 살롱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응접실이 아닌 살롱인가보다. 스자쿠는 알겠다며 신이 나서 익숙한 듯 제레미아를 좇아 아리에스의 살롱으로 향하는 유페미아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보다 더 안쪽에 있는 살롱 덕분에 아리에스의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 아리에스는 황궁치고는 간결한 디자인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보다 더 화려한 장식이 놓여져도 이상하지 않을 구석구석이 채워지지 않고 비워져 있으며,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멋을 더하는 부분은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 이 곳에 사는 황족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리에스의 살롱에 도착하면 를르슈 황자가 테이블 위에 달콤한 디저트와 홍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와 시선이 마주하고 나서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를르슈가 ‘됐어!’라고 말하는 것에 어정쩡한 인사를 올리고 말았다.
“나이트 오브 세븐, 쿠루루기 스자쿠가….”
“아니, 그런 인사는 됐어. 별로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고 그런 인사는 매번 할 필요 없어.”
“그래도 황족이신 전하께—.”
“내가 싫다고.”
를르슈 황자는 미간을 좁히면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날이 선 그 시선에 스자쿠는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는 걸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정말, 이 황자는 이상했다. 보통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 나이트 오브 라운즈에게 어떻게든 아첨받고 싶어하거나, 혹은 대놓고 멸시하는 것이 당연한 황족일 텐데도. 물론 모든 황족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당장 눈앞의 유페미아만 해도 달랐으니까.— 스자쿠는 저에게 차 한 잔 내주지 않았던 를르슈 황자와의 첫만남을 생각하면, 지금의 테이블 앞에 놓인 각양각색의 디저트들을 보고 있으면 못 만났던 하루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런 스자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를르슈 황자는 디저트를 보며 기대하는 유페미아를 자리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자, 유피, 아리에스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나이트 오브 세븐도 어제는 미안했어.”
“어제? 어제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유페미아의 말에 를르슈 황자는 어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스자쿠의 앞에 놓인 찻잔에 다홍색 찻물을 부어주며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자쿠의 눈치를 보듯이.
“내가… 약속을 어겼거든. 어제 보자고 했는데.”
“아,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으셨겠지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장 20시간 40분 대기를 했던 사람 치고는 꽤나 정중한 말투였다고, 스자쿠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를르슈 황자가 자신을 바람 맞힌 일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대신 물어봐줬으면 좋을 텐데, 라는 마음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를르슈가 약속을 어기다니 드문 일이네요.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별 일은 아니야. 잠깐 열이 났을 뿐.”
“긴장했군요, 를르슈!”
“…….”
“근데 무슨 느낌인지는 알아요, 저도 브리타니아 본국을 처음 떠났을 때에 너무 설레서 잠이 안 왔거든요! 약간 소풍 가기 전날의 설렘 때문인거잖아요?”
“뭐, 비슷하긴 하지만….”
“후후, 있잖아요, 스자쿠. 를르슈는 이번 여행이 브리타니아 본국을 떠나는 첫 여행이에요. 설레서 열까지 날 정도라고 하니까 너무 귀엽지 않아요? 뭐랄까, 제가 여행 선배로써 더 가르쳐주고 싶은 기분이에요.”
“아아… 네.”
열이 났다는 말에 스자쿠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지금은 처음 보았을 때의 얼굴 그대로지만, 무너진 컨디션 상태로 스자쿠와의 약속을 강행한 것이라면. 스자쿠는 입맛이 썼다. 저도 모르게 그의 걱정을 하게 되었다.
“를르슈 전하, 무리하고 계신 건 아니시죠?”
“아니야.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깐 열이 나. 원래 그런 체질이야. 걱정할 건 없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를르슈 황자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눈앞의 유페미아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를르슈 혼자서 브리타니아를 떠난다고 했을 때에는 걱정이 많았는데, 스자쿠가 함께 간다면 괜찮을 거 같아요!”
“무슨 걱정이 필요해? 그냥 기차를 타고 오고가면 되는 간단한 여행을.”
“그 간단한 여행길도 나나리가 유학하고 반 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하는 주제에. 를르슈는 정말 허세를 잘 부려요. 아, 근데 두 사람은 어디서 만난 거예요? 를르슈는 좀처럼 아리에스 밖을 나가지 않아서 스자쿠가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을 텐데.”
스자쿠는 그녀의 말에 ‘서류상 귀여워서 뽑혔다’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를르슈는 쉼없이 떠들고 궁금해하는 유페미아의 반응에 성실하게 답해주었다.
“어머니가 나이트 오브 라운즈였던 기회를 빌린 거지. 나이트 오브 세븐의 호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아깝잖아.”
“그렇긴 해요. 스자쿠의 에스코트는 정중하고 섬세하거든요.”
“…응. 아, 그나저나 나이트 오브 세븐.”
“네, 를르슈 전하.”
“유피랑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다. 원래대로라면 따로 따로 부를 생각이었지만, 내가 어제 열이 나고… 또 내일 바로 출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어.”
“아, 그런 점은 괜찮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군.”
“무슨 말씀을요.”
그럼 업무적인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자쿠는 유페미아와 를르슈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유피는 나나리한테 전해주고 싶은 게 있다며?”
“아, 맞아. 요즘 팬드래곤에서 유행하는 드레스랑 구두를 준비했어요! 유로 브리타니아랑 분위기가 달라서 조금 재미있지 않을까 해서. 따로 포장까지 맡겨뒀으니까 그냥 전해만 줘요.”
“알았어. 나나리도 기뻐하겠군.”
나나리, 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스자쿠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그 이름의 주인공을 상상했다. 를르슈 황자는 그 나나리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생애 첫 여행을 시도하는 듯 했고, 그만큼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니 가족이나 연인 쯤 되려나. 스자쿠는 그런 생각을 흘려보내며 적당한 온도로 식은 홍차를 들이켰다.
“…맛있어.”
“그쵸? 를르슈가 내린 홍차는 특별해요! 떫지도 않고, 찻잎의 맛도 느껴지고, 향도 좋아요. 항상 준비해주는 디저트랑도 잘 어울려서 일품이라니까요!”
“유피, 그만해. 부끄러우니까.”
“아니에요, 스자쿠한테 좀 더 자랑하고 싶어요.”
“아니, 됐다니까.”
“스자쿠한테 를르슈의 좋은 점을 더 알려주고 싶어요. 두 사람, 친구가 되면 좋을 거 같아요!”
친구, 라는 단어를 천진난만하게 늘어놓는 유페미아의 말에 나이트 오브 세븐과 를르슈 황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이후로는 유페미아가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끌고, 를르슈 황자와 스자쿠가 가끔씩 대답하면서 티 타임이 이어졌다. 스자쿠는 이 를르슈 황자가 왜 유페미아와 같이 이 티 타임을 준비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으나, 그가 정성껏 내려준 홍차, 직접 만들었다는 디저트들로 모처럼 맛있는 대접을 받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티 타임은 한 시간 가량 흘렀다. 유페미아가 준비한 ‘나나리’를 위한 선물이 궁금하다는 를르슈의 말에 유페미아가 그 선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스자쿠와 를르슈 황자는 단 둘이 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 속에서 스자쿠는 약간 부드러워진 분위기의 황자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 ‘나나리’라고 하시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응? 나나리를 몰라?”
“네? 네. 그렇습니다. 황족의 정보는 열람해도 알아둘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럼 나이트 오브 세븐은 이제까지 나나리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고 대답한 거야?”
“뭐… 연인이라도 되시는…—.”
“그럴 리가 있나! 나나리는 내 여동생이다!”
어딘가 볼이 붉어진 를르슈 황자는 스자쿠를 노려보았다. 나나리에 대해서 불경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런 험악한 망상을 바탕으로 나와 나나리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정말 수치스럽군. 를르슈가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는 말에 스자쿠는 그의 역린을 건드린 기분이었다.
“그, 변명을 해보자면… 나나리 황녀전하께서는 성인이 아니신 것 같은데, 공식석상에서 활동한 바가 없으면 가까운 황족이 아닌 이상 아무리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고 해도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전하.”
“……그렇군. 아무튼 이번 여행은 나나리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고, 어떠한 이벤트도 기대하지 않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를르슈는 명심하겠다는 스자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그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며 입을 열었다.
“유피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지?”
“아, 코넬리아 황녀전하께서 주최하신 전승 축하연에 참석했다가 유페미아 전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원래 친한가?”
“글쎄요, 저는 어떻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유페미아 전하께서 저를 대하시는 때에 어려움이 없으신 것 같아 다행이긴 합니다.”
“유피는 누구에게나 다정하니까.”
“…….”
“너도 유피 같은 황족을 호위하고 싶겠지?”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유페미아 전하를 존경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황족 호위 업무에서 호오를 가리는 편은 아니라서요.”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뜻을 읽을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스자쿠를 사진만큼 귀엽지 않다고 했으면서, 스자쿠를 호위로 두겠다고 선언하던 때의 그 얼굴이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그런 귀엽지 못한 황자전하다. 그러나 그런 스자쿠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이, 를르슈 황자는 한술 더 띄워서 입을 열었다.
“정말 귀엽지 못한 대답이야, 나이트 오브 세븐. 그럴 때에는 유피여도 괜찮다, 라고 대답하는 거야.”
“…저는 를르슈 전하여도 나쁘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만.”
“그래? 나도 나쁘지 않아, 나이트 오브 세븐.”
를르슈 황자는 전혀 귀엽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스자쿠를 보는 시선은 그와의 첫 만남때보다 더 누그러워져 있었다. 어딘가 부드럽다 못해 녹아들 것 같은 시선, 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겠지.
때마침 유페미아가 다가와서 나나리에게 줄 선물을 들고 나타났다. 를르슈 황자는 그녀의 선물에 아주 만족스러워 하면서 이 옷을 입은 나나리의 사진을 찍어서 보낼게, 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스자쿠에게 귀엽지 않다고 말했던 것과 어딘가 달라서, 스자쿠는 그것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세 사람의 아리에스 티 파티는 업무가 끝난 코넬리아가 유페미아를 부른 것으로 끝이 났다. 유페미아가 먼저 돌아가고, 스자쿠가 다음에 대기한 차를 탈 무렵에 배웅을 하던 를르슈 황자가 다가왔다.
“내일부터 또 잘 부탁해. 쿠루루기 경.”
를르슈 황자의 얼굴이 또 붉다, 라고 인식하게 되는 말투였다. 지고 있는 석양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얼굴이 붉어져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를르슈 황자가 부끄러워할 대목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자쿠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말을 마쳤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자신을 ‘쿠루루기 경’이라고 부른 를르슈 황자가 얼마나 용기 냈음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이야기였지만, 지금으로서는 택도 없는 이야기였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스자쿠는 오늘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는 것에 조금 걱정을 안고 있었다. 때마침 를르슈 황자가 [메일로 나의 여행 일정을 보냈다. 확인 바란다.]라고 메시지를 넣어주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막무가내로 구시는 분은 아니구나, 하면서 스자쿠는 그를 호위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귀엽지 않더라도 뭐 어때. 스자쿠는 여행 일정 내내 한 시간도 빠지지 않는 나나리라는 이름을 보며 약간 질렸지만, 이것도 를르슈 황자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를르슈 황자가 유로 브리타니아로 떠나는 당일이었다.
를르슈 황자는 평소와 비슷하지만 보다 간결해진 옷차림으로 스자쿠의 앞에 나타났다. 비공식적 방문이기 때문에 를르슈 황자의 행차는 간소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정적인 분위기도 예상치 못했던 지라 스자쿠는 당황한 속내를 감추면서 를르슈의 옆자리에 섰다. 잘 옮기던 발걸음을 멈춘 를르슈 황자는 어딘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이 2박 3일동안 타고 갈 기차를 쳐다보았다. 그의 안 좋아보이는 안색에 스자쿠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어딘가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리에스를 떠나시는 게 걱정되시나요?”
“……그렇다고 말하면, 너무 없어보이려나.”
“괜찮습니다. 전하의 곁을 제가 항상 보필하고 있을 테니까요. 나름대로 군공도 쌓아올렸고요. 또 귀빈을 에스코트 하는 것에는 자신 있습니다.”
스자쿠는 답지 않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를르슈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스자쿠의 말을 듣던 를르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스코트를 많이 해봤나봐?”
“이래 보여도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서요.”
“…그거 참 안심이 되는데.”
“칭찬이시죠?”
“아닌 거 같아?”
“……맞으시겠죠, 뭐. 그럼 들어갈까요? 소개해드려야 할 곳이 많습니다.”
를르슈의 말에 더 이상 신경쓰는 것은 어딘가 난감해서, 스자쿠는 황족 전용 기차를 소개하겠다는 이유로 그를 끌고 들어섰다. 를르슈는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천천히 자신이 머물 곳을 확인했다. 식당칸부터 시작해서 세세하게 소개한 스자쿠는 그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달라고 말했다.
“기차는 두 번 정도 멈출 것이고, 그때마다 전하의 안전과 보안을 위해서 만전을 다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그리고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그러니까 언제든지 널 부르라는 건 이해했다…… 쿠루루기 경. 정말 부담이 없는 건가? 너의 업무에, 그, 나를 신경 쓰는 게 방해가 된다거나.”
“그럴 리가요. 저의 일은 이제부터 전하의 호위입니다. 전하를 신경 쓰는 게 하루 일과가 되는 겁니다.”
“…….”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그거 참….’이라 입을 연 채로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또 어딘가 귀엽지 못한 부분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자쿠는 이제 곧 기차가 출발한다는 방송에 를르슈를 그의 객실까지 안내했다.
“홍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아니, 괜찮다. 이제 혼자 있고 싶어.”
“알겠습니다.”
를르슈 황자는 가지고 온 짐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독서라도 할 모양인 듯 싶었다. 스자쿠는 를르슈 황자가 있는 객실 밖으로 나섰고, 문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서 그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떨어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혼자가 된 스자쿠에게 를르슈 황자와 관련된 모든 호위 업무들에 대한 전반적인 확인 업무가 몰아쳤다. 스자쿠는 일일이 대답하고 지시를 내렸다. 문 너머에 있을 를르슈 황자가 이 번잡스러움을 안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필요한 내용이니 어쩔 수 없다며 불만을 삼켰다.
출발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빠르게 움직이는 기차의 창문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스자쿠는 스스로의 얼굴을 살피면서, 자신이 어딘가 들떠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들뜬 기분이지. 스자쿠는 를르슈 황자가 있는 문 너머를 살폈다. 문 너머는 고요했고,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만 덜컹거리며 울릴 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싶어지는 충동을 억누르며, 스자쿠는 그의 문가에 서있었다.
* * *
문제는 이튿날 발생했다. 기차 안에서 식사를 나르는 사람 중 한 명이 스자쿠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그녀는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라고 말하며 스자쿠에게 말했다.
“를르슈 전하께서 식사를 전혀 드시지 않습니다. 어제 출발부터 한 끼도 안 드셨어요.”
지금은 출발하고 나서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흘렀다. 거의 네 끼니를 거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스자쿠는 의아함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물도 안 드시는 거 같았어요.”
“아, 그것도 설마 어제부터 계속?”
“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이트 오브 세븐?”
“…….”
를르슈 황자는 멀미를 이유로 식당칸에서 먹는 것을 거절하고 모든 음식을 객실에서 받는 것으로 하고 있었다. 그의 식사 시간에도 호위를 소홀히 할 수 없어 스자쿠는 를르슈의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결과가 한 끼니도 안 먹었다는 것이라니. 스자쿠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스자쿠가 지키고 있다고 해도 그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서 음식도, 물도 입에 대지 않은 것이었다.
“우선 가벼운 간식거리라도 준비해주겠어? 내가 전하께 가져다드릴 테니.”
“예스, 마이 로드.”
그렇게 스자쿠는 를르슈의 객실 앞에서 샌드위치와 냉침하여 시원하게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밀크 티 한 잔을 들고 서있었다. 문을 세 번 노크하여 허락을 구하면, 를르슈 황자가 잠긴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를르슈 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고작 하루를 굶었을 뿐이니 크게 달라진 곳은 없었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스트레스로 누적된 피로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쿠루루기 경?”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지?”
“전하께서… 식사를 안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멀미 때문이야.”
“그렇다고 물까지 안 드시는 건.”
“멀미 때문이라고 했잖아. 어차피 내일이면 도착하잖아. 그때 가서 먹으면 돼. 이삼 일 굶었다고 쓰러질 정도로 허약하진 않아.”
스자쿠는 를르슈 황자의 앞에서 가지고 온 밀크 티와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책을 읽고 있던 를르슈 황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제가 여기서 먹을 테니, 전하께서는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뭐?”
“저는 걱정이 되거든요, 전하. 전하께서 아리에스 밖을 나오시는 건 처음이고, 아리에스 밖의 음식을 드시는 것도 겁이 나셔서 안 드시는 건지 걱정이 됩니다.”
“그럴 리가…….”
“없다면 한 입만 드셔주세요. 밀크 티든, 샌드위치든.”
“…….”
스자쿠가 내미는 샌드위치 반쪽에 를르슈 황자는 머뭇거리며 그것을 받았다. 그렇지만 입에 대지는 않았다. 멀미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책도 잘 읽고 있으며, 목욕을 하거나 다른 업무를 보는 데에도 지장이 없었다. 그는 암살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스자쿠는 남은 샌드위치 반쪽을 한 입 베어물었다. 와삭하고 씹히는 야채의 상큼함이나 햄의 짭조름한 맛이 베어나서 좋았다. 소스도 풍미가 훌륭했다. 일개 간식으로 만들어진 샌드위치라고 하기에는 역시 황족이 먹을 것은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스자쿠가 우물우물 씹고 있는 것에 를르슈 황자는 그것을 빤히 보더니, 자신이 들고 있던 샌드위치 반쪽을 스자쿠에게 내밀었다.
“바꿔서 드실래요?”
“…응, 이거 하나는 다 못 먹을 거 같으니까.”
어딘가 피해나갈 구멍을 찾아서 변명까지 덧붙이는 이 황자전하는 의외로 겁쟁이다. 스자쿠는 자신이 먹던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기 시작하는 황자전하를 바라보았다. 맛있어, 라고 중얼거리는 를르슈의 모습에 스자쿠가 ‘그렇죠?’라고 말하면서 밀크 티의 한 모금도 마셨다. 그럼 이번엔 스자쿠가 마신 것을 를르슈가 바로 입을 대고 마셨다. 밀크 티도 마음에 들었는지, 를르슈 황자는 샌드위치 반쪽과 밀크 티의 반 잔을 다 마셨다.
“더 드실래요? 배가 많이 고프실 거 같은데.”
“……가, 같이.”
“네?’
“같이, 먹어주면… 먹을게.”
스자쿠는 그렇게 해서 를르슈 황자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를르슈 황자는 경계심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스자쿠가 먹었던 음식만 먹었다. 스자쿠가 입을 대지 않은 음식은 먹지도 않았다. 그와 한 접시, 한 포크, 한 나이프, 한 스푼을 나눠쓰면서 스자쿠는 를르슈 황자를 먹이는 데 열중했다.
첫 식사 때에는 그는 샌드위치와 밀크 티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스자쿠에게 계속 한 입씩 먹으라고 종용했다. 스자쿠는 ‘왜요?’라고 짓궃게 물어보지 않았다. 이 황자전하에게는 불행한 과거가 있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니, 그렇게 싫어하는 남자에게, 귀엽지 않은 남자에게 음식을 먹여가며 자신의 살 방도를 찾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났다.
‘꽤 귀엽잖아.’
스자쿠는 자신이 먹었던 초콜릿의 반쪽을 천천히 녹여먹는 를르슈 황자를 바라보았다. 이거 맛있네, 라고 말하는 를르슈 황자의 감상에 스자쿠는 다른 초콜릿 한 알을 한 입만 씹어먹고, 를르슈에게 남은 한 입을 내밀었다. 를르슈 황자는 거리낌 없이 받아먹었다.
“내가 생각보다 귀찮지?”
“…네?”
를르슈 황자는 초콜릿이 손끝에 녹아있는 것을 핥아먹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유피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경계심만 많아서. 너를 번거롭게 하고 있잖아.”
“뭐, 이 정도면 양호한 편입니다. 보통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의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이렇게까지 믿어주시진 않거든요.”
“믿어준다고?”
“네. 전하께서는 제가 주시는 것은 그래도 드셔주잖아요. 저를 정말 믿지 않으셨다면, 아마 지금쯤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서 병원에 계시겠지만요.”
“…그래도 이런 내가 귀찮거나, 밉거나, 싫거나.”
“그러진 않은데, 아니,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귀엽지 않다’…정도 입니다.”
“…….”
“저도 사진보다는 덜 귀여웠다면서요?”
스자쿠는 마지막 초콜릿 한 알을 베어물고 를르슈 황자에게 내밀었다. 를르슈 황자는 무언가 울컥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스자쿠가 내민 초콜릿 반쪽을 받아물었다.
“다만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전하께서 나나리 전하를 만나실 때에 저 없이 아무것도 못 드신다면, 나나리 전하께서 걱정하실 것 같거든요.”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나리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지. 나는 지금의 상황을 고쳐낼 거다.”
“그러신가요?”
“…그때까지 다만, 너의 도움이 필요할 뿐이야.”
를르슈 황자는 초콜릿이 더 없냐며 손을 흔들었다. 스자쿠는 이 단 것을 좋아하는 황자전하를 위해서 억지로 먹어야 하는 초콜릿이 달아서 싫었지만, 기꺼이 그를 위해서 초콜릿을 가지러 가기로 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식당칸에서 초콜릿을 가지러 왔다는 이야기에, 처음에 를르슈 황자의 단식을 알렸던 여자가 웃으면서 초콜릿을 꺼내주었다.
“전하께서는 잘 드시는군요. 걱정이 많으셨는데 다행입니다, 나이트 오브 세븐.”
“전하께는 모두가 걱정했다고 말씀드리도록 하지.”
“아뇨, 저는 나이트 오브 세븐이 걱정한 것을 이야기한 거예요. 한 시름 덜으셔서 다행이에요, 진짜.”
스자쿠는 초콜릿을 받고 를르슈 황자의 객실로 돌아가면서 그 말을 곱씹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 걱정한 것이라니, 나는 그를 그렇게 걱정한 적이 없는데. 스자쿠는 상자 안에서 흔들리는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서 통통 튀는 초콜릿을 바라보다가, 이내 하나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무지막지하게 달고, 달아서, 머리가 찡하게 아파올 정도였다. 속도 너무 달아서 쓰리기만 한 초콜릿을 좋아하는 를르슈 황자. 그러나 그 황자를 위해서 초콜릿을 먹는 것은 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스자쿠는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설 뿐이었다. 를르슈 황자가 눈을 빛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기분, 썩 나쁘지 않았다.
* * *
사흘에 걸친 기차 여행은 유로 브리타니아에 닿는 것으로 끝이 났다.
스자쿠와 를르슈 황자는 한 입씩 베어먹은 식사만큼 친해졌다. 스자쿠는 를르슈 황자가 자신의 여동생을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나나리 전하는 어떤 분이신가요, 라고 물어보면 그는 조심스럽게 항상 들고 다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를르슈의 여동생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작은 소녀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었다. 심지가 굳어 보이는 눈빛이라던가, 다정다감하게 웃고 있는 미소라던가.
“내가 좀처럼 아리에스 밖을 나가지 않으니까… 자기가 직접 이 세상을 알아보겠다면서 유학을 갔어.”
“당차시네요. 를르슈 전하를 깊게 생각하시는 분이군요.”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나나리 핑계를 대고서 이렇게 나온 거지. 뭐, 덕분에… 쿠루루기 경을 만났으니까.”
이번 여행은 좋았다, 라고 를르슈 황자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그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에 스자쿠는 어딘가 아쉬웠다. 좀 더 환하게, 꽃이 피듯 웃어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를르슈 황자의 그런 웃음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나나리!”
“오라버니! 정말 오셨군요!”
황족 전용 기차가 유로 브리타니아의 종착역에 도착하면, 미리 준비하고 있던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의 마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를르슈의 사진으로 몇번이고 봤을 그 작은 공주를 실물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를르슈에게 뛰어가 안기는 나나리의 모습에, 를르슈 황자는 정말 크게 웃었다. 화려한 미모를 감추지 않으며, 꽃이 피듯이.
‘좋은 거지만, 뭐랄까… 재미 없네.’
스자쿠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나리 황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유페미아에게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두 분은 친구이시죠? 벌써 여행을 같이 하시다니, 부러워요. 저도 아직 오라버니와 여행을 해본 적 없는데.”
“친구라니, 쿠루루기 경에게 실례야. 나나리.”
스자쿠와의 친구라는 관계를 거절하는 를르슈 황자의 말에, 스자쿠는 고개를 저었다. 가슴 속 어디선가 천불이 이는 듯 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친구도 좋죠.’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친구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를르슈 황자는 그제서야 스자쿠에게도 꽃이 피는 듯한 그 미소를 돌려주었다.
를르슈 황자의 여행 일정은 단순했다. 유로 브리타니아에서 유학 중인 여동생 공주, 나나리 비 브리타니아가 머무는 학교에서 사흘 동안 머물고, 나흘 째에는 돌아가는 것이었다. 스자쿠는 도착하자마자 먹는 저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리에스 밖에서의 첫 식사는 스자쿠가 먹은 것만 하는 를르슈 황자는, 이번에도 자신을 의지해줄 것인가. 여동생 앞에서도 스자쿠의 한 입을 베어문 자국을 기다릴 를르슈 황자를 떠올리며 솔직하게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를르슈 황자는 저녁 만찬 자리에서 초대해준 사람들에게 대한 감사 인사를 나누면서, 완벽한 황자로서의 매너를 보였다. 황자의 방문을 축하하는 박수소리가 끝나고 나서 자리에 앉아 천천히 식사를 시작하는 를르슈의 모습을 스자쿠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포크를 들고, 나이프로 자르며, 스자쿠를 쳐다보는 기색 없이 한 입씩 식사를 해치워나가는 를르슈 황자는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스자쿠는 그런 점이 어딘가 아쉬웠다.
를르슈 황자는 친구라고 했으면서도 나나리의 곁을 계속해서 따라다녔고, 나나리는 자신의 성장을 자랑하듯 보여주며 제 오라버니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을 기대했다. 스자쿠는 그 두 사람을 지키면서, 어딘가 재미없고, 아쉽고, 속상했다. 나나리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야, 스자쿠는 그제서야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은 이전과 어딘가 달라진 것이라고.
* * *
“오라버니를 위한 파티를 열었어요! 같이 즐겨요!”
를르슈는 제 손을 잡고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듯 달리는 여동생에게 끌려가 파티 회장에 서게 되었다. 사교계 데뷔도 아직인 를르슈에게 이런 자리는 어색할 뿐이었다. 를르슈 황자가 왔다는 것은 비공식적인 방문이지만, 학교에서는 꽤나 영예로운 일이라고 보고 있는지 파티까지 흔쾌히 열어준 듯 싶었다.
여동생과 처음으로 스텝을 맞추어 춤을 추는 를르슈 황자는, 처음은 어설프게 굴다가도 이내 황자로서의 체면을 살리며 우아하게 녹아들었다. 학생들은 를르슈 황자와 나나리 황녀의 댄스에 박수를 치기도 하면서, 를르슈 황자와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싶어 줄을 서기도 했었다. 스자쿠가 호위의 문제로 를르슈의 댄스 파트너는 나나리 말고는 할 수 없다고 못을 박기 전까지 모두가 꿈을 꾸듯이, 를르슈 황자의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그런가. 그래도 춤 정도는 괜찮지 않나? 쿠루루기 경도 있고.”
“만일을 위해서입니다, 전하.”
스자쿠가 줄을 선 무리들을 해체시키는 것에 나나리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했다. 댄스 정도는 괜찮을 텐데요! 를르슈는 그런 나나리를 달래기 위해서 춤 한 곡을 다시 청했다. 나나리는 거절하지 않고서 를르슈와 함께 댄스 홀을 누볐다.
반짝반짝 빛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스자쿠는 달콤한 초콜릿을 한 가득 씹어 먹은 듯한 쓰라린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하고 를르슈 황자를 응시했다. 를르슈 황자는 웃는 얼굴을 감추지 않으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스자쿠는 댄스가 끝난 후의 를르슈에게 가져다 줄 샴페인을 들고서 서 있었다. 자신의 몫까지 두 잔 분을 들고 있으면 댄스가 끝난 를르슈가 다가와서 스자쿠에게 샴페인을 받아들었다.
“평생 출 댄스는 다 춘 거 같아.”
“나나리 전하께서는 아직 부족해보이시는데요.”
“친구들이랑 추겠다는데… 그정돈 괜찮지?”
“생각해보니… 댄스 정도는 괜찮겠지요. 전하도 다른 분들과 춤을 추고 싶으신가요?”
“말했지, 방금 전에 평생 출 댄스는 다 춘 것 같다고.”
를르슈는 스자쿠가 내민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맛이 좋다면서 잔 째로 비웠다. 천천히 드세요, 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뒤에서 누군가가 스자쿠를 불렀다. 쿠루루기 경, 하는 목소리에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면 나나리 또래의 소녀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스자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저, 저기, 나이트 오브 세븐과 춤을 추고 싶은데요…!”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임무 중이라서요.”
“하, 한 곡도 안 되나요?”
거의 울 것 같은 소녀의 모습에 뒤에 있던 를르슈가 그녀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한 곡 정도는 괜찮잖아. 를르슈가 지원사격까지 해주자 소녀는 다시 의기소침해진 얼굴을 지우고서 스자쿠에게 제발, 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부탁했다.
“소녀의 꿈을 무너뜨리는 건 기사 실격이다, 쿠루루기 경.”
“안 됩니다, 전하의 곁에 있겠습니다.”
“친구의 부탁이라면?”
“…네?”
“친구로써 부탁하마. 나를 축하해주는 파티에 한 곡 추는 네 모습이 보고 싶어.”
스자쿠는 를르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로써, 라는 말로 겨우 억눌러진 감정이었다. 소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천천히 스텝을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시선은 소녀에게 맞춘 듯 하면서도 를르슈를 호위하는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나이트 오브 라운즈와 춤을 추다니, 꿈만 같아요.”
“아아, 네….”
“나이트 오브 세븐은… 어, 으아!”
스자쿠에게 말을 걸던 소녀는 발을 젚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순식간에 엉망이 된 대열 속에서 스자쿠는 그녀를 감싸고 대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사이에 를르슈의 궤적을 놓쳤다는 것에 혀를 차며 스자쿠는 그녀의 발목을 대강 살폈다. 약간 접지른 것일 뿐, 익숙하지 않은 구두를 신고서 춤을 췄으니 그럴 지도 모르겠다고 대충 언급해주면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럼 전 전하 곁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레이디, 좋은 시간을.”
소녀를 얼레벌레 돌려보내고 스자쿠는 를르슈가 서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는 바텐더에게서 무슨 잔을 받고서 또 맛이 좋다며 한 입에 털어먹는 듯 싶었다. 무슨 술인 줄 알고 저게…! 황족 전용 기차에서 겨우 식사를 했던 것이 거짓말 같게도 를르슈 황자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스자쿠는 를르슈 황자의 곁으로 갔다. 다가가면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독한 술을 마신 듯 싶었다. 를르슈 황자는 약간의 멍해진 시선이었다. 스자쿠는 그에게 잔을 달라고 했다.
“무슨 술인 줄 알고 그렇게 마구 드셨나요?”
“맛… 있었으니까. 그리고, 쿠루루기 경, 춤 잘 추던데.”
“나이트 오브 라운즈로써의 체면을 위한 것이죠.”
스자쿠는 를르슈 황자의 잔을 빼앗아 들었다. 술 냄새에 가려진 독이라도 들어있다면 위험하니까, 라는 생각에 한 짓이었다. 스자쿠가 그 잔에 코를 박고서 냄새를 맡았을 무렵에, 를르슈 황자는 몸을 휘청거리다가 스자쿠에게 기대듯 쓰러질 뻔했다. 겨우 받아든 스자쿠가 아니었다면 그는 홀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 황자를 단단히 붙들고서, 그리고 코끝에 스쳤던 짙은 장미향이 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이상했다. 샴페인 한 잔과 독한 위스키 한 잔으로 뻗어버릴 수가 있나. 하지만 스자쿠의 품에 기댄 를르슈 황자의 호흡이 심상치 않았다. 더운 숨을 몰아쉬면서, 가슴팍이 답답한지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를르슈 황자의 모습에 스자쿠는 혀를 찼다.
—최음제다. 이건 즉효성 최음제였다.
를르슈가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허리를 내어주고, 스자쿠는 나나리를 살폈다. 나나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못하고 가는 것은 를르슈로서는 아쉬운 일이겠지만, 스자쿠에게는 한시가 바쁜 일이었다. 이제 최음제의 효과는 금방 일어날 것이다. 스자쿠는 를르슈를 거의 끌어안다 시피하며 연회장 구석으로 빠져나와, 를르슈가 이 학교 내에서 머물고 있는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어, 어디 가는 거야…?”
를르슈가 불안한 듯이 침대에 뉘여지면서 묻는 것에, 스자쿠는 짧게 ‘전하의 방입니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급했다. 스자쿠는 급한대로 마약성 물질의 해독제를 준비하라고 호위 부대에게 일렀다. 거칠게 전화를 끊고 5분도 채 되지 않아서 주사기 두 개가 들어있는 키트를 받은 스자쿠는 침대 위에서 헐떡거리는 를르슈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를르슈는 무언가를 들고 협탁 위에 내려놓는 스자쿠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 난 거야? 더듬거리며 말하는 를르슈의 말투에 스자쿠는 자신의 실수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깟 춤 한 번에 를르슈 황자가 이렇게 당할 줄 알았을까. 스자쿠는 자신과 춤을 춘 그 소녀가 어쩌면 한 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하께서는 지금 최음제를 드셨어요. 제가 잠깐 춤을 추러 간 사이에요.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이런 일이 없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내, 내가 지금.”
“최음제를 드신 거예요. 지금.”
“…나나리는?”
“나나리 전하께서는 안전하십니다. 아마 를르슈 전하를 노리고서 행한 일이겠지요. 급한대로 부작용은 있더라도 즉효성 해독제를 준비하겠습니다. 주사를 놓을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지금 옷을 벗어주세요.”
“알, 알약으로….”
스자쿠는 이 와중에 알약을 찾는 를르슈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주사제가 제일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자 를르슈는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사는… 싫어. 무섭단 말이야.”
“전하.”
“제발, 부탁이니까. 그냥, 알약으로….”
“지금 드신 최음제는 알약으로는 해독이 어렵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
“시, 싫어, 무서워.”
를르슈가 침대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에 스자쿠는 그의 패닉 상태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서운 건 없어요, 라고 달래주고 싶었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옷자락을 끌어내면서 형광등 조명 아래에서 그의 하얀 피부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주사를 어떻게든 놔야한다는 생각에서 허겁지겁 벗기고 있었지만 를르슈의 반항은 거세졌다.
“싫어, 싫어! 아, 안 할래, 안 하고 싶어요. 싫어요, 그런 거, 싫어!”
“전하…!”
“아, 싫어, 뜨거운 거, 계속, 계속, 하으…!”
“괜찮아질 겁니다. 무서운 건 없어요.”
“시, 싫, 싫어요. 누가 좀, 도와줘. 싫어!”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를르슈는 상체가 다 발가벗겨지자 몸을 동그랗게 말 뿐이었다. 스자쿠는 자신이 맨 첫날 읽었던 서류를 떠올렸다.
—를르슈 황자는 어렸을 때 험한 꼴을 당했다.
어린 아이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최음제가 들이부어졌고, 그 최음제의 여파로 를르슈 황자는 성적인 쾌락과 관련된 모든 것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팽팽할 정도로 피부에 와닿는 것에 스자쿠는 를르슈를 어떻게든 달래야겠다는 생각의 그의 팔을 뻗게 해 잡아 끌었다. 갑자기 꽉 붙들린 팔뚝에 를르슈는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보랏빛의 시선에는 초점이 맞지 않았고, 하얀 피부에는 스자쿠가 억지로 붙들어서 만든 멍 자국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최음제 때문에 몸이 더 뜨거워지는 것에 를르슈는 스자쿠에게서 벗어나려고 더욱 더 발버둥을 쳤다. 무서워, 싫어, 아파, 하고 우는 를르슈의 입에서는 울음과 신음이 섞여 나왔다.
“무섭지 않아요, 전하.”
“싫어, 싫어… 이제 그만, 집에, 집에 가고 싶어…. 아리에스에 돌아가고 싶어…!”
“전하, 저를 보세요, 금방 편하게 해드릴 테니까.”
“싫어! 주사, 주사 놓지 마, 아, 싫어! 살려줘, 살려줘, 자, 잘못 했어요, 그만, 그만…!”
를르슈가 손을 내치면서 스자쿠의 손에 들려 있던 주사 하나가 바늘째로 꺾여서 바닥으로 나뒹굴게 되었다. 혹시 몰라 들어있는 여분의 주사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 약의 양은 절반 밖에 되지 않아 약효가 제대로 돌 지가 의문이었다.
스자쿠는 허우적거리는 를르슈의 두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한 손에 쥐어지는 두 팔이 그가 가뜩이나 마른 몸으로 있는 힘껏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몸의 진동을 겨우 억누른 채로 스자쿠는 를르슈의 턱을 붙들었다. 과호흡이 오기 시작하여 패닉이 더욱 짙어지는 를르슈의 기색에 스자쿠는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호흡을 할 수 있도록 숨을 불어넣고, 가끔씩은 혀를 섞고 핥았다. 덜덜 떨리는 혀끝은 살짝 부어있었고, 피맛이 났다. 그는 공포심에 혀까지 씹은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스자쿠는 키스 사이 사이마다 괜찮다고 토닥여주면서 서서히 힘이 빠지는 를르슈의 팔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스자쿠의 키스에 를르슈의 혀는 맥없이 딸려나오면서 그가 핥아올리는 대로 움직였다. 하아, 으, 으응, 으윽…. 스자쿠의 노력 끝에 를르슈의 눈물과 조금의 피로 짠 맛이 나는 키스로 호흡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스자쿠는 아래로 깔아 뭉갠 를르슈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골반 아래로, 허벅지로, 그리고 페니스를 감싸고 있는 속옷 안쪽을 만졌다.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하는 를르슈의 페니스는 약물에 의해 억지로 사정된 것이 느껴졌다. 괴롭겠네요, 라고 스자쿠가 말해도 를르슈는 그저 혀를 내민 채로 헥헥거릴 뿐이었다.
“전하, 저를 보세요.”
몇번이나 했던 말에, 를르슈는 희미한 시선으로 스자쿠를 쳐다보았다.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쾌락도, 절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에 지친 듯이, 홀린 듯이 쳐다보는 시선 속에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페니스를 천천히 쥐고서 흔들기 시작했다. 찌걱찌걱하는 소리가 손끝에서 울리면서, 를르슈는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 무서워. 아파, 아픈 거, 싫어, 잘못, 했어요. 잘못, 했으니까. 용서, 해, 주세요.”
“그런 게 아니에요. 전하, 잠시만….”
“흐으으, 무, 무서워요….”
페니스를 천천히 쥐고 흔들면서 느껴지는 사정욕구에, 를르슈는 기분이 좋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주의를 돌리면서 주사를 놓을 수 있지? 스자쿠는 시들었으면서도 삐질삐질 정액을 토해내는 를르슈의 페니스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서워하는 걸 달래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 최음제 약효를 해독하지 않으면 약물 쇼크가 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스자쿠는 다시 한 번 를르슈의 입술에 키스했다. 방금 전의 입안을 핥는 자극에 를르슈의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던 것을 떠올렸다. 전하, 전하, 하고 조용히 속삭여주면 를르슈가 혀를 섞으면서도 호흡을 따라가지 못해 느슨해진 움직임으로 타액을 겨우 삼켰다.
어디서 어떻게 그가 당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몸을 함부로 더듬는 것은 무리였다. 키스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허리를 쓰다듬으면 를르슈는 풀어진 팔로 스자쿠를 살짝 끌어안고서 훌쩍거렸다.
그가 조금이라도 기절을 한다면 좋을 텐데. 그럼 주사를 놓고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될 텐데. 하지만 를르슈의 생존본능인 것일까, 그는 기절하지도 않았다. 스자쿠를 보는 눈은 약 기운에 몽롱하게 취해있었지만, 입술 끝에서는 계속해서 싫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사를 놓는다면 금방이라도 다시 발광할 것이 분명했다.
섹스를 위한 최음제를 해독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해독제. 다른 하나는 최음제의 목적 그대로 섹스이다. 스자쿠는 전자에 대해서 손을 뻗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이제 후자 밖에 방법이 없어. 스자쿠는 를르슈의 바지를 벗기고, 속옷을 내려버렸다. 알몸으로 발발 떠는 황자전하는 자신이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르고서 스자쿠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요. 불가항력이에요. 전하께서 주사가 싫다고 하셨잖아요.”
스자쿠는 를르슈를 보고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를 파고 들었다. 붉게 달아오른 몸 구석구석을 다 확인했고, 그리고 구멍마저도 발갛게 물든 것에 스자쿠는 혀를 차며 그 구멍을 타액에 적신 손끝으로 풀기 시작했다.
“…으, 응, 거기, 만지면.”
“기분 좋아요.”
“아니야, 싫어, 이상, 해. 싫어.”
“기분 좋은 거예요. 괜찮아, 나를 믿어.”
“흐응, 기, 기분… 이, 상해.”
“좋은 거예요.”
“기분, 조, 좋아…?”
“응, 기분 좋은 거야. 그래, 후, 두 개까지는 그럭저럭이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이완된 몸이 부드럽게 벌어지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애널을 천천히 넓혀가며, 를르슈가 느낄 수 있는 안쪽까지 손가락을 쑤셔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 두 개를 타액으로 적셔가며 푸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여기에는 적당한 윤활제도 없었다. 스자쿠는 어쩔 수 없다고 또 다시 생각하며, 를르슈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기 시작했다.
타액을 혀끝으로 직접 펴발라 천천히 풀어주기 시작하면 를르슈의 몸은 더욱 녹아가기 시작했다. 손가락 세 개를 삼키고도 찢어지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풀었다 조이는 힘이 탄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느끼고 있는 걸까. 를르슈의 애널을 혀로 문지르면서, 스자쿠는 손가락을 더욱 깊숙하게 묻고 찔렀다. 손가락이 닿을 수있는 한계까지 찔러도 를르슈는 이상하다며 훌쩍거렸다.
뒤로 사정하기에는 더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 스자쿠는 어쩔 수 없이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벗긴 바지 사이로 튀어나온, 발기한 페니스의 쿠퍼액을 펴바르면서, 투명한 타액으로 젖어 구멍을 뻐끔거리는 를르슈의 애널에 자신의 페니스를 갖다대었다.
“흐, 으응! 윽, 으응, 으, 아, 우으으…!”
“기분 좋은 거예요. 그렇지, 계속, 힘 풀고….”
“아니, 아니야아…! 배, 배가, 이상해.”
“기분 좋은 거야.”
“흑, 흐응, 이상, 해, 이상, 하니까, 그만, 빼…!”
스자쿠는 애널 끝에 천천히 귀두를 밀어 넣었다. 가장 조이는 부분을 뚫고 지나가면서, 금방이라도 사정하고 싶은 느낌을 겨우 억누르며 를르슈의 안을 밀기 시작했다. 뱃속이 이상하다고 를르슈가 다리를 버둥거리면 그의 다리를 붙들어 놓고서 허리를 깊숙하게 밀어넣었다.
하으으으… 으, 으응, 이, 이상, 해, 배, 아파아. 를르슈가 훌쩍거리면서 또 숨을 헐떡이려고 하는 것에 스자쿠는 그에게 한 차례 더 키스를 했다. 혀 내밀고, 침 삼켜요. 스자쿠의 하는 말에 를르슈는 꿀꺽거리면서 스자쿠가 퍼붓는 타액을 삼키며 혀를 내밀고 게걸스럽게 혀를 엮었다. 츄웁, 츕, 하고 혀가 섞이고 아래에서는 뻐근한 고통과 함께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뜨거운 페니스의 느낌에 를르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하, 전하, 전하. 스자쿠가 그렇게 부를 때면 를르슈는 울먹거리면서 머리를 감쌌다. 이상해, 이상해, 아파, 싫어, 뜨거워, 뜨거운 거, 무서워, 아프니까, 계속해서, 뭔가, 나올 거 같고. 를르슈의 울음소리 사이로 터지는 말들에 스자쿠는 그의 안쪽까지 페니스를 박아넣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스자쿠가 페니스로 내벽을 확 긁듯이 푹푹 찔러대기 시작하면 를르슈는 아랫도리를 감싸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거, 또 와, 또 이상해져, 몸, 뜨거운 거, 계속, 계속…! 를르슈의 우는 소리에 스자쿠는 그가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여기가 뜨겁고, 이상해져요? 꾸욱꾸욱, 내벽을 누르면서 허리를 돌리면 를르슈가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싫어, 미안, 자, 잘 못, 했, 했어요. 흐으, 이상해, 이상해, 아! 아앙…! 를르슈가 질질 싸기 시작하는 페니스를 감추려고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기분 좋은 거야. 자, 전하, 를르슈 전하.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흐응, 응! 아, 무서워, 또, 또 뜨거워, 뜨거워어….”
“전하, 저예요. 스자쿠. 쿠루루기 스자쿠. 기분 좋은 거 하는 거예요, 우리.”
“기, 기분, 조, 좋지 않아.”
“아니에요. 더 좋아질 거야, 후우… 키스할까요?”
그가 느끼는 깊숙한 곳에 있는 성감대를 쿡쿡 찌르면서, 스자쿠가 키스하려고 입술을 가까이하자 를르슈는 머뭇거리더니 혀를 내밀었다. 키스하면 기분 좋아지죠, 하고 스자쿠가 물어보면 를르슈는 눈물로 젖은 눈을 감아버렸다.
기분 좋아지는 거예요. 따라해요, 기분 좋아진다, 고. 기분이 좋은 거야. 섹스는, 저랑 하는 섹스는 기분이 좋아요. 알겠어요, 전하? 저랑, 쿠루루기 스자쿠랑 하는 섹스는, 기분이 좋은 거예요.
“기, 기분이, 좋, 은, 섹스….”
“응, 그래요. 잘했어요. 후, 조금만 더 해봐요.”
“섹스, 기분, 좋, 아…. 응, 기분 좋아, 아앙, 아, 으! 으응! 배, 배에, 계속, 계속 들어와아….”
“계속해요.”
“모, 모르, 겠, 어. 아, 으읏…!”
“알잖아요, 기분 좋은 거.”
“기, 분이, 좋, 아….”
“그래, 그거예요.”
스자쿠는 를르슈의 페니스가 우뚝 솟아서 정액을 조금씩 흘리고 있는 것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스자쿠의 아랫배를 부벼오는 를르슈의 페니스는 이제 어느 정도 성감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그럼 사정도 할 수 있을 거고, 약물도 빠져나갈 것이다. 다만 그래도 이 상황이 계속 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스자쿠는 를르슈의 골반을 잡고서 퍽퍽 쳐올리면서 스스로 몽롱해지는 머리를 겨우 흔들어 털어댔다. 자기도 모르게 녹아들 것 같은 이 황자전하와의 섹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이건 응급처치고,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어떠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기분이 좋다. 뜻하지 않게 를르슈 황자와의 속궁합이 좋다는 것을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벌떡 솟은 것은 를르슈의 페니스 뿐만이 아니었다. 팽팽하게 솟아오른 가슴팍의 긴장 때문에 붉어진 유두까지 빳빳해진 게 보여서, 스자쿠가 그 가슴을 주물러주자, 를르슈는 훌쩍거리면서 몸을 튕겼다. 아, 여기는 괜찮다는 건가. 피하지 않고 때리지도 않는 를르슈의 반응에 스자쿠는 키스 하듯이 유두 근처를 천천히 물고 빨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숨결이 느껴지는 가슴팍에 를르슈는 허리를 튕겨가면서 한 차례 사정하기 시작했다.
“전하, 잘 했어요. 기분 좋았구나.”
“응, 으응….”
“더 많이 해요, 그러면 나아질 거니까….”
스자쿠는 자신의 사정 또한 머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엉덩이를 더욱 벌리게 한 뒤, 고환이 부딪치고 척척한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게 치닫고 나면 를르슈의 허리가 튀어오르면서 그의 몸이 잘게 진동했다. 그의 페니스 끝에서는 새어나오던 정액이 또 졸졸 흐르고 있었다. 스자쿠가 부딪히는 힘을 강하게 할수록, 를르슈는 사정하며 신음했다.
“무서운 거, 아니죠? 좋죠?”
“으아, 앙, 흐으, 계속, 나와, 나오는, 게, 싫, 싫어….”
“좋은 거죠. 잘하고 있어요, 그래, 계속해요.”
골반과 엉덩이가 퍽퍽 맞물리는 소리에 스자쿠는 자신 또한 최음제에 취한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런 거 같다고 하면, 나도 대책이 없지. 스자쿠는 를르슈의 애널에서 한 차례 페니스를 귀두 끝만 물려 놓고 빼낸 뒤, 거칠게 밀어넣었다. 페니스가 들어박히는 느낌에 를르슈가 가눌 수 없는 팔다리를 침대 시트에 부벼댔다. 히익, 으, 으으응…! 를르슈의 소리가 먹먹하게 물려들어가는 끝과 동시에 스자쿠의 사정이 이루어졌다.
스자쿠 또한, 나도 꽤 쌓였었지, 하는 느낌은 정액이 평소보다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스자쿠의 것이 팽창하며 안에서 정액을 쏘아대는 느낌에 를르슈가 덜덜 떨면서 엉덩이를, 그리고 온몸을 조여댔다. 히익, 히익, 하는 소리는 를르슈의 애널에서 스자쿠의 것을 빼냈을 때 겨우 잦아들었다.
어느새 거칠어진 스자쿠의 숨소리는 를르슈에게 키스함으로써 원래의 템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혀끼리 뒤섞이며, 타액을 받아먹는 를르슈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면, 스자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협탁 위에 펼쳐두었던 여분의 주사기 한 대를 찾았다. 를르슈가 정신없이 자신의 혀를 부비면서 타액을 쪽쪽 빨아들이는 것에 기특해하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사이에, 그의 허벅지에 주사를 꽂아버렸다. 를르슈의 다리는 들어차는 약물의 느낌에 이상한지 움직이려고 했으나. 단단히 붙들고 있는 덕에 해독제는 끝까지 들어갔다.
“잘했어요, 잘 참았어. 이제 괜찮아요.”
“하, 하아, 뭐, 뭘… 한, 거야.”
“기분 좋은 것도 이제 끝날 거예요. 고생했어요.”
주사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고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애널과 테스티클 사이에 자신의 페니스를 문질렀다. 하, 더하고 싶다. 더 섹스하고 싶어. 좀 더 섹스하고 싶어. 황자전하랑, 를르슈 전하랑, 더 섹스해서, 안에다가…. 그렇게 생각한 스자쿠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속이 좋지 않은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를르슈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 입을 맞추었다.
를르슈의 눈빛은 방금 전과 다르게 시선이 맞았고, 또렷해졌다. 이제부터는 정말 응급처치의 방향도 아니고, 를르슈가 원치 않으면 강간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자쿠는 를르슈의 애널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좋지 않은 건데, 옳지 않은 건데, 룰에서 벗어난 것인데도.
“이제, 그만해도, 되, 잖아.”
“기분 좋은 거, 싫었어요?”
“…으읏, 그만, 만져.”
“안은 아직도 조이는데.”
무어라 말하고 싶어하는 를르슈의 혀를 꽂아넣고, 다시 엮고 섞으면서 젖꼭지를 만져주면 를르슈의 애널이 한차례 조여들었다. 뻐끔거리는 구멍의 주위를 손가락으로 들이밀고 안에 들어찬 정액을 펴바르듯 찌걱거리고, 스자쿠는 를르슈의 귓바퀴를 천천히 핥으면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하의 안, 기분 좋아서… 계속, 더 하고 싶어져요.”
“하읏…!”
“전하, 허락해 주세요.”
“…응, 우으, 귀, 그만, 아아!”
스자쿠는 를르슈의 애널에 페니스 끝을 맞추면서 다시 한 번 그에게 허락을 구했다. 전하, 기분 좋은 섹스, 계속 해요. 네? 스자쿠의 간청에 를르슈는 정액으로 다 젖어버린 아랫도리를 감추면서 시선을 피했다. 해독제는 효과를 보고 있는지, 를르슈는 이제 이성을 되찾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수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애널 끝에 발기한 페니스의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것에 를르슈는 피하고 있던 시선을 스자쿠에게 향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를르슈… 라고 불러줘.”
“네?”
“전하, 는 싫으니까. 이제, 이런 일 하는 건, 내가, 전하여서가 아니라… 를르슈니까, 해줬으면… 좋겠어.”
“……하.”
스자쿠는 대답 대신에 를르슈의 애널에 페니스를 끝까지 처박았다. 불어난 정액으로 찌익거리는 소리가 아래에서 들리고, 침대의 스프링이 삐걱이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를르슈는 뱃속을 가득 밀고 들어오면서 기분 좋은 곳을 한껏 쳐올리는 스자쿠의 페니스에 다리 끝을 바짝 세웠다. 아, 아아! 앙! 스, 스자쿠, 스자쿠! 스자, 쿠! 이제는 신음 사이로 싫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말 대신에 스자쿠의 이름이 섞여들었다.
—전하여서 안는 게 아니라, 를르슈니까 해준다, 라.
스자쿠는 허리를 움직이면서 를르슈의 페니스를 만지기 시작했다. 정액투성이에 벌벌 떨고 있는 구멍 끝이 안쓰러우면서도, 손가락 끝으로 그 작은 요도구를 만져주면 벌름거리면서 사정하고 싶어하는 그 페니스를 탁탁 소리내어 흔들기 시작했다. 를르슈의 길게 절정에 이르는 목소리와 함께 스자쿠가 두 번째 사정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스자쿠는 를르슈를 끌어안고서 그의 몸을 깊숙하게 탐하게 시작했다.
“이제, 안에다, 할게, 를르슈…!”
“아, 으, 으응, 우으으…!”
“를르슈도, 기분 좋아지면, 좋겠어…!”
그 말에 를르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신의 안에서 또 다시 이루어지는 스자쿠의 사정을 받아냈다. 스자쿠의 손에 감싸인 페니스 끝에서도 정액이 또 다시 터져나왔다. 흐으응, 으아, 아! 를르슈의 뱃속을 가득 채운 정액이 막아두었던 페니스 끝을 꺼내면 꿀럭거리며 흘러내렸다. 정액으로 범벅이 된 를르슈의 페니스와 애널을 바라보던 스자쿠는 를르슈가 흔들거리는 손짓을 하며 자신을 부르는 것에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갔다.
“스자쿠, 키스, 기분 좋은, 키스… 해줘.”
귀여운 말을 속삭이는 를르슈에게, 스자쿠는 기꺼이 입을 맞춰주었다. 품 안 가득 끌어안겨지는 체온은 뜨겁고, 맞닿는 숨결은 따끈하고 눅눅했다. 스자쿠는 를르슈에게 한참을 키스를 하고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술과 턱을 닦아주었다. 를르슈는 이제는 색욕에 취한 눈으로 스자쿠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미소를 지었다.
를르슈의 미소 짓는 그 얼굴에 스자쿠는 다시 한 번 그의 안에 페니스를 들이박았다. 를르슈의 목소리가 다 쉬어서 나오지 못할 때까지, 정액이 아닌 투명한 물줄기가 를르슈의 페니스에서 터져 나오고, 헐떡거리는 를르슈가 스자쿠를 힘 없는 팔로 밀어내며 이제 싫다고 할 때까지, 그리고 싫어하는 를르슈를 달래가며 하다가 기어이 기절시키기 전까지 얼마 머지 않은 이야기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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