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루루기 스자쿠는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안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속해있었다. 그는 나이트 오브 세븐으로서 나이트 오브 라운즈의 한 자리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대외적으로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의 기사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유페미아의 언니가 되는 황녀, 코넬리아 리 브리타니아가 그간 쌓아온 공적을 앞세워서 스자쿠를 유페미아의 기사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페미아 또한 만약 스자쿠가 허락한다면 자신의 기사가 되어달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두 황녀의 간곡한 부탁 끝에 스자쿠는 다음주부터 자신의 고향이었던 옛 일본, 지금의 에리어11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스자쿠는 간소하게 싼 트렁크 가방을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면 근 7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나이트 오브 원이 되어서 일본을 돌려받겠다는 의지는 여전했지만, 이제 곧 에리어11의 총독과 부총독이 될 ‘리’ 가의 자매들을 돕는다는 선택지도 나빠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이라는 멍에는 스자쿠를 꽤나 오랫동안 괴롭혀 왔고, 나이트 오브 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매번 새롭게 진창으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유페미아의 기사가 되어서 상냥한 그녀가 만드는 일본에 기대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게 된 것에 방아쇠를 당긴 것은 코넬리아였다.
코넬리아는 아직 기사가 없는 유페미아의 호위를 위해서 나이트 오브 세븐을 빌리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순혈 브리타니아인에 대한 강박이 심한 코넬리아가 명예 브리타니아인 출신인 스자쿠를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원하는 것에 스자쿠 본인도 놀랐다. 코넬리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댔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유페미아가 스자쿠를 기사로 맞이함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도 유피를 호위하면서 느껴봐. 네가 원하는 것이 어디에 더 가까운지 체감해보라는 말이야.’
코넬리아의 말에 스자쿠는 저울질을 하듯이 에리어11행 비행기를 탔다. 황족 전용 비행기를 타고서 유페미아의 옆을 지키는 것은 기분이 묘했다. 이런 식으로 고향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 * *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가 에리어11의 부총독으로서 참여하는 첫 번째 공무는 다름 아닌 애쉬포드 학원의 축제 참석이었다. 애쉬포드 학원은 일본이 에리어11이 되고 난 이후로 생긴 브리타니아인을 위한 학원으로,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짧은 역사 속에서도 정통 브리타니아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교육기관이라고 했다. 황족이 다닐 수 있는 시스템과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에리어 내의 학교였다. 에리어11에서 나름의 정통성을 자랑하는 학원이니 새로 부임한 총독과 부총독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유페미아는 평소보다 간소한 드레스 차림으로, 스자쿠는 평소와 같이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복 차림으로 애쉬포드 학원에 들어섰다.
애쉬포드 학원은 한창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황족 전용 차량이 지나가도 다들 크게 동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저도 스자쿠도 사실 저기서 놀고 있어야 할 학생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후후, 재미없게 귀빈석에만 있어야 하는 게 아쉽네요.”
유페미아는 아직 나이로는 학생에 가까웠지만, 그녀의 타고난 핏줄 때문에 모라토리엄의 시간은 쉽게 끝나버렸다. 그녀는 그것이 꽤나 아쉬운 모양이었다. 차를 타고 교내를 소개 받으며 이동하는 중간 중간 사이로 창문 밖을 보면서, 유페미아는 부럽다는 듯이 학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자쿠는 유페미아가 어떻게 불리는지 알고 있었다. 허울 뿐인 부총독. 그것이 유페미아가 모르는 유페미아의 별명이었다. 하지만 배려심이 넘치는 그녀가 그런 분위기를 못 읽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눈치도 빠른 유페미아는 자신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에 대해서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속 편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네 번째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 유페미아의 행동이 반복되었을 때, 스자쿠는 잠시 차를 멈춰달라고 했다. 어째서, 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유페미아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스자쿠 또한 허투루 나이트 오브 세븐의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부총독님께서 계속 차로 이동하시는 게 불편하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잠시 걷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그렇지만 나이트 오브 세븐, 이 학원은 부지가 꽤 넓어서…….”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잠깐 여기서 멈춰주세요.”
“그래도… 곧 행사가 진행될 텐데.”
“너무 늦어지면 스자쿠가 절 안고 대기실까지 달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부총독님까지….”
사람이 그나마 드문 곳에서 내린 스자쿠와 유페미아는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유페미아는 오랜만에 교정을 걷는다며 즐거워했다. 차를 뒤로 한 채, 보이는 아무 건물이나 향하면서 유페미아는 떠들기 시작했다.
“스자쿠는 학교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글쎄… 그냥 그랬죠.”
“왜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을 것 같은데, 그럼 은근히 동경하게 되잖아요.”
“운동은 했지만 공부는… 썩 잘하진 않았어요. 동경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축제 같은 건요? 학예회나 발표회 같은 것 정도는 했을 거 아녜요?”
“기억에 남는 게 없네요.”
“……흐음.”
유페미아는 한껏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스자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유페미아의 다짜고짜 이어지는 동정과 연민에 스자쿠는 네, 그렇네요, 라고 대꾸하고 말아버렸다. 영혼이라고는 전혀 없는 스자쿠의 대꾸에 유페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가 명합니다, 스자쿠는 이 학교의 축제를 즐기고 오세요!”
“네? 그렇지만 전하의 호위는요?”
“아, 그러네요. 그럼 절 귀빈 대기실까지 데려다주고… 그래요, 축제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 3가지를 먹어보고 그 감상을 준비할 것, 그리고 학생들이 하는 전시회와 발표회를 통틀어 3개를 볼 것, 마지막으로 판매하는 기념품 3개를 사서 그걸 왜 샀는지 이유까지 저에게 알려주세요!”
“……안 됩니다.”
“제 명령에는 불복한다는 건가요?”
“전하께서 위험해지시면 어쩌려고요?”
“제 GPS 위치 추적기, 스자쿠가 갖고 있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오늘은 코우 언니가 보내준 인력으로도 충분히 차고도 넘쳐요. 스자쿠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제 기사가 되면 그건 저의 수치입니다! 그러니까 제 명령에 따르세요!”
스자쿠는 그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황녀는 상냥하고 다정하지만, 이렇게 제멋대로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배려하는 마음에서 올라오는 귀여운 애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스자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유페미아의 어깨에 자신의 파란 망토를 걸어주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적어도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유페미아 전하.”
“왜요? 아, 망토는 눈에 띄니까?”
“그게 아니라……방탄 방검 소재라서 만에 하나의 경우에도 전하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겁니다.”
“그럴 일 없대도요.”
유페미아를 귀빈 대기실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유페미아는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1. 축제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 3가지를 먹어보고 그 감상을 준비할 것
2. 학생들이 하는 전시회와 발표회를 통틀어 3개 볼 것 (이것도 감상평을 준비할 것)
3. 판매하는 기념품 3개를 사서 왜 샀는지 이유까지 보고할 것
유페미아의 이야기를 들은 코넬리아의 기사 길포드(그 또한 유페미아의 호위 임무에 차출된 듯 했다.)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또한 유페미아를 말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믿고 다녀오라고 할 뿐이었다.
그렇게 스자쿠는 애쉬포드 학원에 혼자 떠돌게 되었다.
* * *
“우와, 그 옷 신기하네. 어떤 코스튬이야? 브리타니아 복식치고는 너무 화려한데? 되게 나이트 오브 라운즈 같다!”
“아아…….”
“그나저나 이 핫도그 진짜 맛있어! 원한다면 와사비도 넣어줄게!”
“와사비는 됐어. 기본 소스로만 부탁해.”
스자쿠는 노점상의 세 번째 음식 핫도그를 해치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들은 스자쿠를 어떤 코스프레를 한 사람으로 보고 있는 듯 했다. 아직 나이트 오브 세븐은 전쟁터에서 군공을 올렸을 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인지도가 없는 듯 했다.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검은 애쉬포드 학원 남자 교복 사이로 눈에 띄는 하얀색 나이트 오브 라운즈 정복이 시선을 끌었다.
끼고 있던 인터컴에서는 유페미아에게 어떠한 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늦출 순 없었다. 스자쿠는 10분 안에 벌써 타코야끼와 야끼소바 빵, 핫도그를 해치웠다. 음식의 맛은 미묘했다. 일본식 소스를 브리타니아식대로 마구잡이로 뿌려댄 모양에 밸런스가 엉망이었다.
하지만 모조리 다 먹어치운 스자쿠는 이제 두 번째 미션이었던 전시회와 발표회를 보러 가기 위해서 자리를 옮겼다. 건물의 위치는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나, 학생들이 직접 생활하는 공간에 들어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세한 내용은 놓치고 있었다. 스자쿠는 발길이 닿는대로 아무 건물이나 들어갔다.
첫 번째로 애쉬포드 학원 방송부의 음악감상회에 들어갔다. 에리어11의 전통 노래였던 것도 간간히 틀기도 하는 것 같았고, 브리타니아 본국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주로 트는 듯 했다. 스자쿠는 구석에서 그들이 틀어주는 노래를 조용히 들었다.
나오기 전에는 방송부에서 파는 ‘브리타니아 팝 HOT 100’ 플레이리스트가 담긴 USB를 기념품 삼아 사서 나왔다. 나름대로 얌전하고 조용히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스자쿠가 떠난 빈 자리에서 학생들이 수군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라, 뭔가 나이트 오브 라운즈 같은 옷 입은 사람 있지 않았어?”
“그 흰색 옷? 엄청 눈에 띄더라.”
“표정은 엄청 안 좋아서 무슨 일 난 줄 알았다니까.”
두 번째는 애쉬포드 학원 사진부의 사진전시회였다. 부 활동을 하는 것을 필수로 하는 애쉬포드 학원의 교풍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지각색의 학생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아름다운 풍경도 있었고, 서로를 장난스럽게 찍어준 샷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추억이 없는 스자쿠는 건조한 표정으로 빠르게 훑고 나왔다. 기념품으로는 필름케이스 키링 하나를 샀다.
세 번째로 들린 교실에서는 누군가가 스자쿠를 보고서 크게 외쳤다. 아마도 밀리터리 매니아로 보이는 한 학생이 스자쿠의 얼굴을 알아보고 만 것이었다.
“나이트 오브 세븐이다!! EU 전선에서 활약했던 나이트 오브 세븐이다!!”
나이트 오브 세븐?! 진짜? 왜? 아, 설마 오늘 황족 호위 때문에? 그렇다면 황족은 어디 있어? 어떤 전하가 오신 거야?
“진짜 나이트 오브 세븐이에요? 우와, 진짜로?”
“사진 한 번만 찍어주세요!”
“싸인도 해주세요!”
“방금 전에 야끼소바 빵 3초컷 하셨죠, 왜 그러셨어요?’
“타코야끼도 혼자서 20알 드시던데 왜요?!”
“나이트 오브 세븐!”
스자쿠는 세 번째 교실이 ‘밀리터리 오브 브리타니아’라는 동아리라는 걸 알고서 방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스자쿠의 발걸음을 일반 학생들이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세 번째는 포기하고, 세 번째 기념품도 포기하자. 스자쿠가 그렇게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을 무렵에는 어느 한적한 교정에 도착하게 되었다.
“부회장님, 밀리터리 부에서 나이트 오브 세븐이 왔대요.”
“아무래도 밀리터리 부에서 정신 나간 코스프레를 한 거 같은데.”
“에이, 왜 안 믿어주세요? 그래서 엄청 난리 났대요.”
“맞아요, 부회장님도 가서 같이 싸인 받아요!”
“안 돼, 여기서 할 일이 많아.”
“여기서 무슨 할 일이 있어요?”
“그럼 ‘세계 제일 거대 피자 만들기’의 재료 조달을 위한 가니메데 시범운전 대신 해줄래?”
네에? 그거 아직도 하는 거예요? 그래, 아쉽게도 아직도 하고 있다. 부회장님 불-쌍-해!
여학생 너댓명이 한 남학생을 둘러싸고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둘러쌓인 남학생은 이런 것에 익숙한지 여학생들에게 적당히 대화를 넘기고 있었다.
스자쿠는 앉으려고 했던 벤치 뒤 나무에 몸을 숨기면서 그 학생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잠깐 휴식이 필요했다.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소년소녀들 사이에서 잠깐의 휴식은 이제 절실할 지경이었다.
“가니메데 운전해줄 거 아니면 다들 돌아가서 미레이 회장님이나 도와.”
“싫어요오~ 부회장님 같이 놀아요!”
“놀 새가 없다니까.”
“땡땡이 자주 치면서, 이럴 때만 성실해!”
“그래, 그래. 이거라도 해야지.”
그리고 남학생은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콰앙, 하는 엄청난 굉음을 냈다. 밖에서 기다리던 여학생들은 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갔다. 나무 뒤에 있던 스자쿠는 곧 잠잠해지는 분위기를 보고서는 겨우 벤치에 앉을 수 있었다. 그 남학생도 자기 할 일을 하러 간 모양인 듯 싶었다.
그럼 이제야 휴식이군…. 여기서 3분 정도 쉬었다가 유페미아 전하 곁으로 돌아가야겠다.
스자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진짜 나이트 오브 라운즈잖아…….”
“!!”
그 남학생이었다. 스자쿠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로 물러섰다. 남학생은 갑작스럽게 태세를 갖추는 스자쿠를 보고서 아, 아뇨, 라고 말을 더듬었다. 스자쿠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밀리터리 부의 코스프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죄송합니다.”
“…….”
“듣기로는 사람들이 엄청 찾아다닌다고 제보가 돌아다니던데, 그런 분이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엄청 찾는다고? 그건 좀 싫은데.”
“그럼 저랑 같이 도망가실래요? 전 지금부터 할 일 다 했으니 도망칠 예정이거든요. 아, 위험한 곳은 아니고 그냥 적당히 시간 때우기나 하려고요.”
“……부탁하지.”
스자쿠를 안내한 남학생은 자기가 들어갔던 창고의 문을 카드키로 열어주었다. 여기는 잠금이 있어서 아무나 막 못 들어오거든요. 저도 머리 식히고 싶을 때 자주 와요. 스자쿠는 밀가루 포대가 잔뜩 쌓여있는 창고를 보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계 제일 거대 피자 만들기 프로젝트’라고 아세요? 애쉬포드 학원에서 매년 주최하고 있는 건데 도전하는 정도가 매번 달라져요.”
남학생은 밀가루 포대를 대충 세어보기 시작했다.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오케이. 제빵부 애들이 빼돌리진 않았군. 남학생은 ‘적당히 시간 때우기’를 한다고 해놓고서 제법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창고에 굴러다니는 접이식 의자를 펼쳐서 앉았다. 한숨을 푹 내쉬는 스자쿠에게 남학생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눈치가 빠른 듯 했다. 혼자만의 휴식이 필요한 스자쿠를 배려하고 있었다.
스자쿠는 어두컴컴한 곳에서도 희미한 빛을 따라서 열심히 움직이는 남학생을 보았다. 아, 여기 위험하다. 남학생은 중얼거리면서 묵직해보이는 밀가루 포대를 혼자서 옮기려고 낑낑거렸다. 하지만 포대는 들릴 생각도 없어보이는 듯 했다. 가늘어보이는 남학생의 갸냘픈 힘으로는 택도 없어 보였다.
“도와줄까?”
“네? 아뇨, 이 정도는 혼자서….”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여기에 놔주세요.”
스자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밀가루 포대를 옮기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니 방금 전까지 인파와 소음 속에서 시달렸던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남학생은 스자쿠를 부려먹는 것에 처음에는 난처해 하더니, 나중에는 ‘여기 각도 비뚤어졌어요’라고 대답할 정도가 되었다. 스자쿠는 그의 태세 전환에 웃음이 나왔다.
“왜 웃으세요?”
“아니, 웃겨서.”
“뭐가요?”
“그냥.”
“……그쪽, 나이트 오브 라운즈인데 이상한 건 아시죠?”
“알아.”
스자쿠가 알고 있다고 하는 말에 이번엔 남학생이 웃어버렸다. 후후, 그게 뭐예요. 남학생은 창고 바닥을 뒤지더니 작은 생수 묶음을 찾아내, 그 중 한 통을 스자쿠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일 하셨으니까 수분 보충 하셔야죠. 스자쿠는 그가 내미는 생수통을 따놓기만 할 뿐, 마시진 않았다. 목이 마른 것도 아니었고, 또 밖에서 함부로 마시는 것도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나이트 오브 라운즈 맞네요. 제가 뭘 줄 줄 알고서 안 드시는 거죠?”
“뭐… 그런 이유도 있긴 한데.”
“근데 오늘 타코야끼 20알에 야끼소바 빵 3초 컷 하셨다는데 그건 왜 그러신 거예요?”
“그건…사정이 있어.”
“그러면서 제가 준 물은 못 마시겠다?”
“너 좀, 성격이 나쁘구나?”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는 이유로 동갑일 지도 모르는 학생한테 반말하는 것도 성격 좋진 않아요.”
“……몇 살이야, 너?”
“18살.”
스자쿠와 동갑이었다.
스자쿠는 까놓은 생수통의 뚜껑을 따서 물을 마셨다. 맛은 평범했다. 스자쿠가 물을 마시는 것을 본 남학생은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마시라는 건 아니었는데. 진짜 뭘 줬을 줄 알고.”
“……성격이 많이 나쁘구나.”
“평범한 물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래. …나도 18살이야.”
스자쿠는 오랜만에 자기 나이를 말해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이를 먹어감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자쿠의 나이를 들은 남학생은 눈을 휘며 웃었다. 그 눈웃음에 스자쿠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어딘가 고장이 나는 기분이었다.
“반말이라도 하라는 거 같잖아요.”
“반말 해도 돼.”
“……나이트 오브 라운즈를 상대로?”
남학생은 망설였고, 스자쿠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민하는 듯 하던 남학생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난 를르슈. 를르슈 람페르지야.”
“…쿠루루기 스자쿠. 나이트 오브 세븐이기도 해.”
“나이트 오브 세븐? 그 EU 전선에서?”
“대충 맞아.”
“대충 맞아는 무슨, 엄청나게 맞겠지.”
를르슈는 스자쿠와 가까운 곳에 접이식 의자를 펼쳐서 앉았다.
를르슈는 여기서 뭐하는 거야? 무슨 부회장이라고 하는 거 같은데. 그러자 를르슈가 턱을 감싸며 웃었다. 그냥 학생들 놀이지. 딱히 하는 건 없어. 거대 피자 만들기 위해서 가니메데라는 KMF에 타야하는데, 그걸 연습하려고 잠깐 나온 거야. 피자 만들기에 KMF를 쓴다고? 스자쿠가 놀라며 묻자, 를르슈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쟁용 무기를 이런 놀이에 쓰는 건 나이트 오브 라운즈 눈에는 같잖아 보이겠지? 스자쿠는 그렇다는 말도,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짧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를르슈에게는 여동생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동생이 몸이 불편해. 얼른 낫게 해주고 싶어. 단호한 의지로 말하는 를르슈에게는 그런 꿈이 있었다. 여동생 이름은 뭐야? 스자쿠가 물어보자, 를르슈는 나나리, 라고 대답했다. 나나리? 귀여운 이름이네. 스자쿠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를르슈는 어딘가 울 것 같이 웃어버렸다.
이제 시간은 어느 정도 흘렀고, 인터컴에서는 길포드가 스자쿠를 호출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자쿠는 삐빅거리는 소리를 꺼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야 해.”
“그렇구나.”
“를르슈가 날 데려다 줄래? 나 대강당 쪽으로 가는 길 잘 모르거든.”
“하하, 그럼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운명대로 온 거지.”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창고 문을 열면서 키득거렸다. 땡땡이도 끝났으니까 이제 가야지. 스자쿠와 를르슈는 빛이 쏟아지는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하늘은 이상하리만큼 어두웠고, 밝았던 빛은 지기 시작했다. 비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이 낮아진 하늘은 금새 한두방울 떨구기 시작하더니, 이내 스자쿠와 를르슈를 흠뻑 적실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 있던 데로 돌아가는 게 빠른가?”
“아니, 여기서부터는 대강당이 더 가까워! 조금만 더 걸어!”
우왕좌왕하는 끝에, 대강당 건물이 겨우 보이기 시작하면 빗방울도 멈추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를르슈는 입고 있던 셔츠가 엉망으로 달라붙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스자쿠는 스콜처럼 쏟아진 하늘이 또 귀신같이 맑아지는 것에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손수건까지 다 젖었어…….”
를르슈는 주머니 속의 손수건을 꽉 쥐어 짜면서 중얼거렸다. 스자쿠는 하얀 셔츠 차림의 를르슈가 안에 이너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몸과 가느다란 선이 훤히 비치는 꼴을 하면서도 를르슈는 부끄러움 하나 없이 당당했다.
보는 사람은 어딘가 부끄러워질 만큼,
‘야하다….’
부끄러워질 만큼 야한 몸을 하고 있으면서. 를르슈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스자쿠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를르슈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를르슈는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스자쿠에게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가봐야지, 나이트 오브 세븐님.”
“……응.”
“그 사이에 감기라도 걸린 거야? 왜 그렇게 멍해?”
“아니야, 그런 거.”
“…그래.”
“그럼, 고마웠어. 를르슈.”
스자쿠는 멍해진 머리로 를르슈에게 손을 흔들었다. 를르슈는 풀숲 사이로 솜씨 좋게 사라졌다. 대강당 건물의 저 멀리서 스자쿠를 알아본 부하가 쫓아왔다. 나이트 오브 세븐! 왜 이렇게 다 젖으셨습니까? 이런, 곧 있으면 유페미아 전하의 연설이 시작될 예정인데……—스자쿠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고 밀어대는 손길들 속에서도 를르슈를 떠올렸다.
옷을 갈아입기만 하면 되는데. 를르슈의 셔츠 너머로 비치던 하얗던 몸, 가느다란 선, 반짝이던 입술 같은 것을 생각하면 스자쿠는 아래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발기는 순식간이었고, 스자쿠가 손을 대고 문지르기 시작하면 사정하고자 하는 욕구는 금방 정낭을 치고 올라왔다. 탁탁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자쿠는 오랜만에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반찬은 를르슈였다. 오늘 처음 만난 남학생. 남자를 상대로, 그것도 오늘 처음 본 상대를 상대로. 를르슈가 그만큼 취향이었던 걸까. 스자쿠는 그 낮은 목소리로 ‘나이트 오브 세븐님’이라고 말하던 를르슈를 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은근히 비꼬기도 잘하는 것 같은 그 얼굴을 무너뜨리고 쾌락 속에서 엉엉 울게 만들어서 굴복시키고 싶어졌다.
손수건으로 튀어오르는 정액을 감싸면서 사정한 스자쿠는 휴지통에 그것들을 쳐박고서 눈을 감았다. 상상 속에서는 를르슈가 자신의 페니스를 빨아주고 있었다. 발간 입술로 삼키는 페니스는 턱없이 모자랄 것 같았다. 하아, 한 번 더 뺄까……. 스자쿠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트 오브 세븐! 유페미아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제서야 음몽 속을 헤매던 스자쿠는 정신을 차렸다.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으면서도, 스스로의 행태에 어이가 없었다. 처음 본 남자를 상대로 발정이라니. 요즘 섹스를 너무 안 해서 미쳐버린 걸까. 하지만 너무 좋았어. 자위였는데도 기분 좋았어.
진짜 섹스하면 기분 좋겠지? 스자쿠는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이 애쉬포드 학원 안에서 를르슈를 다시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진짜 섹스를 한 번 해보면 알게 되겠지.
하지만 무엇을 알게 될까? 스자쿠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만 모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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