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자쿠가 우울한 날
오늘은 드물게 쿠루루기 스자쿠가 우울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 같아서 를르슈의 침실에 들린 스자쿠는 옷을 벗는둥 마는둥 하더니 기어이 침대 위에 드러누워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 먼저 씻고 와? 를르슈가 물었지만 스자쿠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면 그냥 잘래? 대꾸하지 않는 스자쿠에게 를르슈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두 번째 선택지를 주었다.
바쁜 와중에도 스자쿠를 보살피는 것에 대해서 진심인 를르슈를 옆에 두고, 스자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모처럼 맞이하는 두 사람의 휴일에 반색을 하고 달려들어서 서로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을 텐데도, 오늘따라 영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 왜 이러지, 하고 스자쿠가 혼자서 곱씹고 있을 때였다. 를르슈는 스자쿠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걸터 앉아서 그의 머리를 제 무릎 위로 올려두었다. 소위 말하는 무릎 베개다. 스자쿠가 이따금 를르슈에게 요구하며, 를르슈는 어딘가 부끄러운 그 자세가 싫다면서 거절하는 무릎 베개. 스자쿠는 올려다보는 를르슈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또 문제야, 너.”
“요즘 딱히 문제되는 건 없지만…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가라앉네.”
“나를 앞에 두고서?”
“나도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해….”
스자쿠는 자신의 이마를 덮는 앞머리를 살살 넘겨주는 를르슈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그러면 눈두덩이를 간지럽히는 를르슈의 시원한 손끝이 느껴졌다.
메이드 허무슈 초안
열어둔 문 밖에서는 걸레를 빠는 듯한 찰박찰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창틀 먼지를 닦는 날이었던가? 쿠루루기 스자쿠는 읽고 있던 서류에 가볍게 서명하면서 다음 번 장을 보러 갈 때 사야 할 그림책 같은 것을 메모지에 적어두었다. 왕자와 공주는 이제 너무 진부하니까 다른 이야기… 고양이 같은 게 나오는 그림책이 를르슈 정서에 좋을 지도. 스자쿠가 어렸을 때 유행했을 어린이 동화책 전집 같은 것을 살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와장창, 하며 철제 대야가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쾅, 하고 무언가 쏟아지는 둔탁한 소리도 들렸다. 메모지와 서류를 빠르게 책상 구석에 갈무리한 스자쿠는 소리가 들리는 세탁실로 향해 뛰쳐나갔다.
“괜찮아, 를르슈?!”
분명 방금 전까지 얌전하게 걸레를 빨고 있었을 를르슈가 철제 대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무너진 몸 위에는 온갖 세제들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투명한 비눗방울이 동동 떠다니고 있는 것에 스자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어떻게 하면 걸레를 빨다가… 세탁실 선반을 무너뜨리는 거지?’
스자쿠는 를르슈의 머리를 덮고 있는 대야를 내려놓고, 걸레 빤 물로 질척해진 를르슈의 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지만, 보라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져 있는 것을 봐서 어지간히 놀란 듯 싶었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를 다독거렸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좀 놀랐을 뿐이잖아. 응, 괜찮아, 괜찮아.”
“…~!”
“응, 뭐가 있었어?”
를르슈는 조심스럽게 세탁실 밖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 근처에서는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렇지, 를르슈는 나비를 좋아했지. 스자쿠는 를르슈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비 보고 싶었어? 가까이에서?”
“…!”
“그래, 나중에 나비 인형을 사다줄게. 나비가 나오는 그림책이랑.”
“…….”
“이제 좀 괜찮아졌어?”
를르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진정이 된 를르슈는 스자쿠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더러운 물에 젖어 척척해진 치맛자락에서는 물이 튀었다. 스자쿠는 어어, 하며 를르슈를 붙들었다. 왜 놔주지 않냐는 듯이 쳐다보는 를르슈의 시선에 스자쿠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뭐, 바로 청소해도 되긴 하는데…. 그전에 목욕부터 하는 게 좋겠어, 를르슈.”
“……?”
“안 좋은 냄새가 나잖아.”
“…!”
스자쿠는 를르슈가 넘어지지 않도록 일어나도록 잡아두었던 품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를르슈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치맛자락 끄트머리를 보다가, 제 오른쪽 옷소매를 코에 묻으며 냄새를 맡았다. 썩 상쾌하지 않은 냄새가 나는 것에 를르슈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스자쿠가 웃으면서 ‘거 봐, 내가 안 좋은 냄새 난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것에 를르슈는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를르슈를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에 스자쿠는 저도 구정물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욕실로 가볼까? 를르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스자쿠의 손을 잡은 를르슈는 치맛자락을 엉성하게 쥐고서 천천히 걸었다. 걸레 빤 물이 복도에 똑똑 떨어져 자국을 남기는 것이 영 불만스러운지, 를르슈가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것에, 스자쿠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를르슈를 욕실까지 데리고 갔다. 나중에 같이 청소하면 되니까, 라고 스자쿠가 대답해주면 를르슈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고딩 아내 를르슈와 그의 애인 스자쿠
오늘은 연인인 스자쿠의 교토 출장이 끝나는 날이었다. 를르슈는 주머니 안에 넣어둔, 언젠가 놀이공원에 갔던 기념으로 산 키링을 걸어둔 스자쿠가 혼자 살고 있는 집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빨리 만나고 싶다. 아직도 수업이 한참 남아있는 고등학생 신분은 고달팠다. 나 출장 간 사이에 학교 빼먹으면 안 돼. 스자쿠는 나흘 전에 그렇게 단단히 일러두고 갔기 때문에, 를르슈는 오랜만에 연인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머릿속으로는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학교를 마치고, 저녁으로 먹을 것들을 장을 봐서 스자쿠네 집에 들어가고, 돌아온 스자쿠를 맛있는 요리들과 함께 맞이하는 것이다. 완벽하군. 그럼 오늘 저녁은 뭐로 할까? 스자쿠가 좋아하는 햄버그가 좋으려나. 그럼 고기도 사고, 야채도 적당히. 를르슈는 장 볼 거리를 노트 한 구석에 메모로 끄적이면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수업이 끝나고, 지하철을 타고서 스자쿠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향한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노트 한 구석을 찢어서 만든 메모지를 들고서 마트를 돌아다니며 살 것들을 장바구니에 알차게 담았다. 타임세일을 하는 것도 놓치지 않고서 골라서 예상보다 더 돈을 쓰긴 했지만, 스자쿠는 다 먹어줄 테니까. 를르슈는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서 도보 10분 거리의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는 이틀 전에도 와서 한 번 청소했기에 딱히 더러워진 곳은 없었다. 스자쿠를 못 만나는 외로움은 컸다. 영상통화를 한다거나 메시지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었다. 그럴 때면 스자쿠의 아파트에 왔다. 마음 같아서는 스자쿠의 아파트에서 자고 가고 싶었지만, 여동생 나나리가 걱정할 것을 생각하면 를르슈는 아쉬운대로 이렇게 오고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외로움도 오늘로 끝이다. 스자쿠가 돌아오고 나면 를르슈는 잔뜩 응석을 부릴 예정이었다.
장 본 것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모자랐던 조미료들도 채워넣었다. 교복 자켓을 옷걸이에 적당히 걸어두고, 앞치마를 두르고서 를르슈는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스자쿠가 돌아왔을 때에 따끈따끈한 음식들을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 여유롭게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소스를 졸이고 있을 때 스자쿠한테 연락이 왔다.
[이제 도쿄에 왔어]
[를르슈는 우리집?]
맞아, 널 기다리고 있어… 라고 를르슈는 솔직하게 답장했다. 그러자 빨리 만나고 싶네, 하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를르슈는 조심히 오라고 말했다. 이제 마무리에 집중할까, 할 때에 스자쿠한테서 전화가 왔다. 를르슈는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곧 만날 거지만 목소리 듣고 싶어서.’
‘뭐 만들어?‘
”햄버그랑 샐러드, 그리고 밥이랑….“
’와, 맛있겠다.‘
”오는 데 얼마나 걸려?“
’글쎄, 한 30분 걸릴 거 같은데.‘
도스케베엣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스자루루
“네 섹스는 너무 변태적이야, 스자쿠.”
“변태적…이라고?”
“그래.”
“너 진짜 변태가 뭔지 몰라서 그래?”
섹스에 대해서 좀처럼 말하지 않는 를르슈가 기껏 용기내서 한 말에, 스자쿠는 바로 받아치면서 를르슈를 몰아세웠다. 아니 아직 섹스 하기도 전인데 대체 왜 그런 데서 분위기 깨는데? 스자쿠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어가자, 를르슈는 자신이 분위기를 깼다는 말에 울컥했다. 내가 그런 눈치 없는 짓을 했다고?!
“네가 변태라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잖아!”
“나의 어느 부분이 변태인데? 난 이해가 안 돼.”
“내가 싫어하는 거만 하고!”
“뭐가 싫었는데?”
“…하, 핥는 거!”
“뭘? 참고로 내 입으로 네 몸 안 핥은 곳이 없는데 이제 와서…!”
스자쿠는 를르슈의 옷을 벗겨버릴 기세로 다가왔다. 그의 엄청난 기세에 놀란 를르슈가 당황하면서 뒤로 물러서자, 스자쿠는 쳇, 하고 혀를 찼다.
“를르슈가 그렇게 구니까 내가 강간하는 거 같잖아.”
“반성하고는 있어?!”
“반성할 게 뭐가 있어!”
“그런 점이 변태 같다는 거야!”
“어디가?!”
섹스피스톨즈 au 스자루루
고양이랑 강아지랑 자면 어떻게 돼?
를르슈 람페르지는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물어보는 패기 넘치는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랑 강아지랑 자면 어떻게 되냐니, 그런 게 되겠냐고. 그런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이 저와 눈앞의 강아지에 대해서 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를르슈는 말을 삼켰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붉어진 뺨으로 저를 바라보는 를르슈를 만족스럽게 쳐다본 강아지는 키득거렸다.
“뭐든지 다 알 거 같았는데, 그건 모르는구나. 를르슈.”
“그런 소리 할 거면 나 집에 갈 거야.”
“아, 알았어. 그런 이야기 안 할게.”
“귀나 넣어.”
“이게 귀엽다며?”
“남의 혼현 보는 취미 없어!”
혼현을 드러내는 것은 알몸 상태나 다름 없다는 건 일본이나 브리타니아나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눈앞의 강아지— 쿠루루기 스자쿠는 계속해서 귀만 덜렁 내놓고 있었다. 아마 예전에 를르슈가 그 강아지 귀를 귀여워하며 쓰다듬었던 것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이제 를르슈도, 스자쿠도 어리지 않은데 그런 짓이 통할 리가 없었다.
스자쿠는 ‘흐음, 그래?’ 라고 하면서 머리 위로 납작하게 누워있던 강아지 귀를 감춰버렸다. 를르슈는 그것이 뭔가 아쉬웠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강아지 귀가 사라진 스자쿠는 아무렇지도 않게 를르슈를 빤히 쳐다보았다.
를르슈가 속으로 강아지, 라고는 하지만 그는 늑대다. 고양이 경종인 를르슈를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는 늑대인 스자쿠를 무서워 해야 마땅하지만, 스자쿠가 편하게 대해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스자쿠가 늑대 치고는 귀여운 편에 속해서 그런 것인지, 아무튼 를르슈가 스자쿠를 무서워할 일이 없었다.
“를르슈, 오늘도 ‘그거’ 할까?”
“싫어, 이제 안 해.”
“왜?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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