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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a판 스자루루 - 도시락

DOZI 2025.12.14 07:23 read.64 /

쿠루루기 스자쿠는 를르슈 람페르지가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남학생들에게는 동경의 대상, 여학생들에게는 백마 탄 왕자님 정도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 타고난 카리스마 같은 것은 를르슈의 타고난 기질이었다. 어렸을 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브리타니아인이라고 소외받기 쉬웠던 그 체질도, 브리타니아인 사이에서는 쉬이 사랑받기 쉬운 체질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7년 만의 재회를 통해 를르슈는 조금 거칠어진 말투와 다소 과격해진 행동 같은 것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래도 를르슈는 를르슈였다. 스자쿠는 그의 위치가 브리타니아의 황자에서 보통 학생으로의 삶으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를르슈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은 강해졌다.

그가 아무리 주변에서 사랑받고, 동경으로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하더라도, 스자쿠에게는 여전히 지켜줘야 할 단 한 명의 친구로 존재하고 있었다.

 

“를르슈 또 고백 받으러 갔다며?”

“아아, 그래서 늦는구나.”

“뭐야, 스자쿠는 모르고 있었어?”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 잘 안 해주니까.”

 

학생회 남자애들끼리 곧 있을 행사 때 사러 갈 물건들을 고르자고 한 것은 를르슈였다. 오늘따라 한가한 군의 업무에 감사하며, 스자쿠는 그 쇼핑 나들이에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모이자고 한 를르슈 본인이 늦어버려서, 쇼핑은 예정보다 30분 늦게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30분이나 지각한 를르슈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는 얼굴로 미안 미안, 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뻔뻔한 얼굴이었다.

스자쿠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리발이 먼저 선수쳐서 를르슈에게 퍼부었다. 부회장님은 인기가 많으셔서 아주 바쁘신가봐? 를르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말했다. 아무래도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니 연말이니 하면서 다들 마음이 급해지나봐. 스자쿠는 헤에, 하고 타인의 고백을 ‘마음이 급해진다’라고 운운하는 를르슈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리발이 를르슈의 등을 때리면서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런 급해지는 일반인의 마음을 부회장님은 알 턱이 없지! 그러자 를르슈는 자기도 일반인이라고 대답했다. 스자쿠도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를르슈는 군인도, 황자도,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이니까.

쇼핑에서 산 것들은 학생회 인원수 만큼 크리스마스 때 입을 산타 복장과 순록 복장을 잔뜩 사서 박스 세 개에 나눠서 들어야만 했다. 스자쿠는 가장 가벼운 박스를 를르슈에게 맡겼다. 를르슈는 그런 처사에 불복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리발이 기숙사 점호 시간에 늦겠다고 호들갑을 떨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듯 했다.

학생회실에 물품들을 갖다놓고, 리발은 기숙사로 향했다. 스자쿠와 를르슈만 학생회실에 남아서 남은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네, 를르슈. 나나리가 기다리겠어.”

“오늘 나나리는 사요코 씨랑 병원에 가는 날이라 괜찮아. 그나저나 스자쿠, 너는 오늘 괜찮은 거야? 군에서 부른다거나….”

“아, 오늘은 괜찮아. 그래서 쇼핑도 다녀온 거고.”

“덕분에 살았어. 짐이 제법 됐잖아.”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

 

스자쿠는 시계를 보면서 슬슬 돌아갈까, 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군의 호출이 없었으니 한참이나 여유로운 시간이긴 했었다. 시계를 살피는 스자쿠를 바라보던 를르슈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나랑 단 둘이 밥 먹는 건 좀 그럴까?”

“뭐? 왜 그렇게 생각해? 를르슈랑 나 사이잖아.”

“…너 예전에는, 학교에서는 모르는 척 하자고 말한 주제에.”

“아하하,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뭐랄까, 친구잖아, 우리.”

 

스자쿠는 자신이 애매하게 얼버무린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런 것을 눈치챘는지, 를르슈는 불만인 것처럼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하지만 를르슈에게 그런 것들까지 신경쓰이게 하고 싶진 않아서, 스자쿠는 클럽하우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오늘은 를르슈가 저녁밥을 해주는 거야? 스자쿠의 들뜬 목소리에 를르슈는 노기를 누그러뜨렸다. 그래, 먹고 싶은 게 있어? 스자쿠의 리퀘스트를 받아주겠다는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좋아, 나, 를르슈가 해주는 밥은 언제든 맛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스자쿠의 대답을 듣던 를르슈는 어딘가 또 불만인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의식한 이후부터는 스자쿠는 를르슈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를르슈가 모처럼 만들어주는 저녁에 대해서 적절한 메뉴를 떠올려야만 했을까. 하지만 를르슈는 세실 씨처럼 괴상망측한 메뉴를 만들진 않으니까 믿고 맡길 수 있어서…. 스자쿠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를르슈를 시선으로 좇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뭐라도 도와줄까, 를르슈?”

“아니, 괜찮…은데 너 요리 할 수 있어?”

“이래 보여도 칼질은 잘해.”

“의외네.”

“나름 먹고 살기 위한 기술이었달까.”

 

요리를 배운 것은 교토6가로부터 쫓겨나고, 교토6가의 머나먼 지인이라고 알려진 어떤 여자의 밑에서 지냈을 때였다. 스자쿠는 그런 사실을 굳이 를르슈에게 알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를르슈는 어딘가 결벽하기 때문에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자쿠가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지만 를르슈는 괜찮다면서 스자쿠를 식탁에서 기다리게 만들었다. 나나리와 사요코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인데도, 혼자서 그 식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꽤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오로지 를르슈의 식사를 기다리고, 를르슈와의 대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딘가 스자쿠를 궁지에 몰린 기분이 들게 했다. 를르슈는 어렸을 적부터 마음이 통하는, 지켜줘야 할 친구인데 말이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를르슈의 소리를 들으면서 스자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식탁에 앉아 있는 기분은 여러모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피부로 와닿게 하는 시간인 것 같았다. 스자쿠 자신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이제껏 눈을 가리고 감춰왔던 진실을 알아버리는 기분이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저기, 를르슈. 미안한데 군에서 연락이 와서 말이야.”

“뭐? 이제 다 됐는데.”

“미안, 늦었으니까 가볼게. 저녁 맛있게 먹고, 나나리한테도 안부 전해줘.”

“스자쿠!”

“미안!”

 

를르슈를 홀로 내버려두고서 스자쿠는 도망쳤다.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부엌, 따뜻한 온기가 맴도는 식탁,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서 스자쿠는 도망쳤다. 군의 연락 따위는 없었지만 핑계는 좋았다. 이런 식으로 를르슈와 자신의 사이에 거짓말을 늘려가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스자쿠는 를르슈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방금 깨달았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이제 와서 한다고 하더라도, 를르슈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으로써 스자쿠는 이미 실격 처리 된 것이다. 나나리도 분명 알고 있겠지. 를르슈는 진작에 눈치 챘을지도.

 

나는 아버지를 죽이고, 나라를 배신하고, 모두를 배신하고….

그렇지만 그것은 누구를 위한 배신이었을까?

나 자신?

 

스자쿠가 그런 고민에 사로 잡혀서 군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저녁은 훌쩍 넘겼다. 내일도 학교에 가야한다는 생각은 스자쿠의 숨통을 무겁게 눌러왔다.

다음날 학교에서, 를르슈는 스자쿠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스자쿠가 놀라서 묻자, 를르슈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도시락. 어제 먹다가 남은 걸 담은 것 뿐이지만.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도시락을 왜 싸줬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난.

 

“어제 네가 많이 먹을 거 같아서 많이 만들었는데… 가버렸으니까.”

“아침으로 먹으면 됐잖아.”

“아침으로 먹어도 남았단 말이다. 아니면 내 도시락이 먹기 싫은가, 스자쿠?”

“그건… 그건 아니지만.”

 

스자쿠와 를르슈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학생회 멤버들이 말을 보탰다. 뭐 어때, 스자쿠. 를르슈 요리는 맛있으니까 도시락도 분명 맛있을 거야. 리발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셜리가 응응, 하고 루루는 가사실습 때 정말 요리를 잘하거든, 하고 말을 덧붙였다. 스자쿠는 피할 구석이 없어서 결국 그 도시락을 받고 말았다.

스자쿠는 를르슈의 도시락을 천천히 먹었다. 육즙이 부드럽게 베어 있는 고기나, 아삭아삭한 식감이 살아 있는 샐러드나, 바삭한 튀김, 간단하게 손이 가는 샌드위치 같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저녁의 메뉴로는 나올만한 것이 아니었다. 를르슈는 아마 오늘 아침부터 이것을 만들었을 것이다. 

스자쿠는 맛있냐고 물어보는 를르슈에게 맛있다고 대답했다. 이걸 왜 만들어서 나에게 주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스자쿠가 마지막 샐러드까지 다 먹어치우는 것을 본 를르슈는 흡족한 듯이 스자쿠에게 이제 빈 도시락통을 돌려달라고 했다. 먹어달라고 한 건 내 마음대로였으니까, 설거지도 내가 할게. 를르슈의 말에 스자쿠는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서 도시락통을 돌려주었다.

를르슈는 어딘가, 상처 받은 얼굴을 한 거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