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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y2nd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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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사랑

DOZI 2026.02.21 03:33 read.96 /

 를르슈의 업무 중에 드문 손님이 찾아왔다. 평소라면 마리안느 옆에 있어야할 C.C.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를르슈는 노크 조차 없이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렸다.

 

 “프라이버시라는 말이 왜 있는 지 알아?”

 “동정소년이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세상 참 많이 변했군.”

 “동정이니 뭐니 말하는 것에 수치심을 못 느껴?”

 “수치심은 네가 느끼고 있나보네.”

 

 대체 말로 이길 수가 없다.

 를르슈는 어머니의 최측근인 C.C.에게 말대꾸는 할 수 있을 지언정 개길 수는 없었다. 능수능란하게 를르슈를 능욕한 C.C.는 안쪽 주머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사관학교의 인장이 찍혀있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차린 를르슈는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리에스 궁의 를르슈에게 오는 우편물은 제레미아가 일차적으로 한 번 검열하고 있었다. 재상 보좌인 를르슈의 살인적인 업무량을 덜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명분으로 제레미아가 멋대로 처분하고 있는 편지가 있었다. 바로 쿠루루기 스자쿠에게 오는 편지였다.

 냉정하시고 이지적인 전하께서 왜 그 녀석에게만 그렇게 너그러우신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같은 황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브리타니아인도 아닌 외국인에게! 한 번 제레미아에게 화를 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섭섭함을 토로하는 제레미아에게 오히려 위로를 해버리고 말았다. 제레미아 경 덕분에 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어서 고맙고…감정적인 소모를 덜어주는 것에 항상 감사하다고 생각해. 그럼 이 제레미아의 방식을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열렬한 외침에 뭐라고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스자쿠에게 오는 편지는 아예 봉투부터 볼 수가 없었다.

 

 “쿠루루기 스자쿠가 너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던데.”

 “그게 사정이….”

 “답장은 없지만 또 너의 신변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에 거의 차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헤어졌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편지를 흔들면서 C.C.는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나한테 를르슈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면서 울었다고 하면 믿을거야?”

 

 이 마녀가…! 를르슈는 표정을 굳혔다. 어렸을 적부터 를르슈를 가까이 봐온 C.C.는 그의 변화에 오히려 조소했다. 놀려먹는 것도 그만해야지. C.C.는 를르슈의 책상 위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마리안느의 행사 때문에 사관학교에 들린거야. 쿠루루기 스자쿠는 아주 잘하고 있더군. 출신에 대해서 말이 많을지는 몰라도, 마리안느의 지원과 스스로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황족을 보좌할 기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남의 칭찬에는 인색한 C.C.의 입에서 나오는 말 치고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를르슈는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곱게 접혀 있는 편지지를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C.C.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겨우 진정했다.

 

 “지금 안 읽어?”

 “당장 안 나가?”

 “야박하네, 를르슈.”

 

 빈틈없이 받아치는 를르슈의 반격에 C.C.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왔다. 힘내, 황자전하. 뭐 얼마나 힘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를르슈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나가는 C.C.의 뒷모습에 혀를 찼다. 그녀가 완전히 궁에서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를르슈는 편지를 읽었다.

 

 

[를르슈에게.

 

 이게 마지막 편지가 될거라고 생각하니까 좀처럼 잘 써지지 않네.

 잘 지내고 있어? 답장이 없어서 걱정돼.

 혹시 몰라서 코넬리아 황녀전하께 아리에스 궁에 무슨 일이 있냐고 따로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별 일은 없다고 해서 안심은 하고 있지만, 그것과 너의 답장이 없는 건 별개니까 불안해.

 내일 마리안느 님이 행사에 오신다길래 실례가 안된다면 너에게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야. 가족을 아끼는 를르슈라면 어머니가 주신 편지가 아무리 내가 쓴 거라고 해도 한 번쯤은 읽어주지 않을까?

 

 점잖게 쓰려고 했는데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억울해서 말이 잘 안 나와.

 를르슈는 너무해! 내가 사관학교까지 와서 군인이 된 이유가 너 때문인 걸 알면서! 전화는 마음대로 못하지만 편지는 맨날 답장해준다고 약속했잖아!

 미워 미워 미워 미워! 

 황실모독죄로 날 잡아가던가!

 이제 를르슈 같은 거 몰라!

 훈련도 얼마나 힘들고 텃세 때문에 짜증나 죽겠는데 를르슈가 답장까지 안해주니까 견디기 힘들어! 이러다가 탈영할지도 몰라…. 를르슈 만나러 아리에스 궁에 쳐들어가서 를르슈를 납치하고 일본과 브리타니아의 관계를 끝장내버릴 지도 몰라. 

 망할 브리키 놈들!!!!!!! 를르슈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네!!!! 나를 갖고 놀았어!!!!

 

 솔직히 참을 만큼 참았어. 전화라도 줘야하는 거 아니야?

 를르슈라면 전화 한 통 정도 할 수 있잖아.

 혹시 몰라서 내일 마리안느 님과 같이 올 줄 알았는데 귀빈 명단에 를르슈 이름도 안 적혀 있어서 진짜로 울었어. (그래도 서프라이즈 파티 하듯이 나를 만나러 와주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도 해보고 있고….)

 내일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못 보면 편지라도 읽어줬으면 좋겠다. 

 

 나는 내일 나이트 오브 라운즈가 될 거 같아.

 를르슈의 기사가 되고 싶으니까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를르슈의 임명장을 약식으로라도 받지 않으면 안 된대.

 를르슈한테 몇 번이고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 결국 라운즈에 들어가겠지….

 살다 살다 를르슈네 아버지께 충성을 약속하게 될 줄이야. 장인어른과 사위의 관계가 되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주인과 기사가 되었을까.

 내 몸은 비록 너의 아버지와 있겠지만 마음만큼은 를르슈 옆에 있을게.

 

 잘 지내.]

 

 그 편지를 읽은 이후, 를르슈가 3일 동안 식음을 전페하고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하여 나이트 오브 세븐(쿠루루기 스자쿠)은 해임되었다. 덕분에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는 세기의 사랑을 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