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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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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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화롭다면 평화롭고, 단조롭다면 단조로운 어느때의 일상이었다. 쿠루루기 스자쿠는 점심식사 후 몰려오는 식곤증을 내쫓기 위해서 휴게실 자판기 앞에 서있던 참이었다. 커피를 마셔야지, 아니 커피를 마시면 또 저녁에 잠을 못 자잖아. 홍차를 마실까, 아니 홍차도 카페인 많잖아.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홀로 서 있던 스자쿠의 옆에 어떤 남자가 섰다. 그 남자는 우울한 표정으로, 세상이 끝나버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스자쿠의 이름을 불렀다.
“스자쿠….”
“으악?! 지노! 뭐하는 거야, 그렇게 우중충하게 서 있고!”
“나 고민이 있어.”
“고민이 있어보여, 그 상태로 고민이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일이야.”
스자쿠는 결국 이온음료 하나를 골랐다.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어? 지노는 캔커피를 뽑으면서 중얼거렸다. 저렇게 심란해보이는데 이야기를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스자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은 휴게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지노와 카렌이 키스 한 번 해보지 못한 채로 미적지근한 연애 관계를 유지해왔던 과거는 청산하고, 스자쿠와 를르슈의 도움으로 극적인 전개로 나아갔다는 것은 벌써 1년 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상큼하고 발랄한 커플이 되었으며, 나름의 진전이 있는 듯 싶었다. 스자쿠와 를르슈는 어설프게 서로를 엿보고 있던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뭐, 알아서 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스자쿠와 를르슈는 본인들 인생이 급한 편이라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드물었다.
캔 음료를 서로 한 모금씩 마시고 나서 입을 연 것은 지노였다.
“카렌이랑 결혼하고 싶어.”
“응? 하면 되잖아.”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말하면 되잖아.”
“어떻게 말하면 되는데?”
“결혼해달라고 말해.”
“그냥?”
“뭐… 반지나 꽃다발 같은 게 있으면 좀 좋을 것 같기도 해. 그림이 좀 예쁘게 나온달까….”
“스자쿠, 반지나 꽃다발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작에 끝났을 거야. 난, 그런… 그런 걸로 카렌에게 청혼하고 싶지 않아.”
“무슨 소리야, 청혼의 기본 중에 기본인데.”
스자쿠는 지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그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아무튼 결혼하겠다는 마음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는 거잖아? 사실 그런 상태면 청혼은 형식적인 거지. 대충 구색만 맞추고 했다는 거에 의의를 둬.”
그러자 지노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게 문제야, 그게 문제라고, 스자쿠! 지노는 스자쿠 앞에서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카렌은 나랑 결혼할 마음이 있을까?”
“…응? 이미 이야기 된 거 아니야?”
“청혼이라는 건… 프로포즈라는 건… 애당초 진짜로 결혼해달라고 하는 행위 아니었어? 서로… 암묵적으로 결혼하겠다는 분위기에서 하는 형식적인 절차였다는 게…… 믿기지 않아.”
“오, 그건 되게 근본적인 질문이네.”
청혼을 일종의 형식적인 관습으로 여기고 있는 요즘 세태와 다르게, 지노는 정말로 청혼을 청혼답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잡혀있는 듯 했다. 스자쿠는 약간 불안함을 느꼈다. 아, 여기서 휘말리면 진짜 피곤해질 거 같은데. 를르슈와 결혼한지 5년차, 를르슈의 눈치 빠름을 반의 반도 못 따라가고 있긴 하지만 스자쿠에게도 눈치라는 것이 생긴 덕이었다.
“스자쿠는 선배한테 어떻게 청혼했어?”
“글쎄…….”
그러게, 우리는 어떻게 결혼했더라? 스자쿠가 회상에 잠기려고 할 때였다.
“거기서 둘이 뭐해?”
“아, 를르슈.”
“선배.”
바늘 가는데 실이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를르슈는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스자쿠는 ‘점심 먹고 나서 1시간 만에 보는 건가?’하는 소리를 여유롭게 하고 있었다. 를르슈는 하품을 하면서 졸린 김에 나왔다고 했다. 나도 그런데, 우리는 역시 천생연분인가봐! 잔뜩 신이 난 스자쿠의 말에 를르슈는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아, 별 이야기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무슨 이야기였지?”
“스자쿠는 정말 선배의 이야기가 아니면 정말 관심이 없구나.”
“스자쿠가 저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지노. 네가 말해줘. 고민이 있다면 나도 도울 테니까.”
“저 고민 있어보여요?”
“그런 얼굴로 고민이 없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심각한 문제인데.”
방금 전의 스자쿠가 했던 말을 반복하는 를르슈의 모습에 지노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 관리가 정말 안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노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카렌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이제 사귄지도 제법 되었고.”
“하면 되잖아.”
“근데 어떻게 해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말하면 되잖아.”
“어떻게 말하면 되는데요?”
“결혼해달라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방금 전의 대화가 다시 반복된다. 지노는 도움이 안되는 이 한 쌍의 부부가 어떻게 결혼했는지 궁금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부분이 맞으니까 결혼한 건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결혼했어요?”
“뭐… 어떻게 했더라.”
“아, 이 부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를르슈가 온 거야. 를르슈, 우리 어떻게 했지?”
기억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스자쿠와 다르게 바로 대답할 수 있었을 것 같았던 를르슈조차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때…가 프로포즈였나? 아니, 그 이전인가? 뭐지…? 언제지? 를르슈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에 스자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그렇게 프로포즈를 자주 했어?”
“어, 맞아. 너는 입만 열면 결혼하자고 했어서.”
“그랬던가….”
“사귀는 초반에도 ‘결혼하면 이렇게 하자!’ 같은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결혼하기 전부터 결혼하는 건 당연한 것처럼 세뇌 당했던 거 같아.”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지노가 아연실색했다.
“세뇌요? 사귀는 사이에?”
“그래서 집안에서 슬슬 결혼하라는 말에 그냥 했지.”
“프로포즈는요?”
“그게 문제인 거 같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를르슈는 프로포즈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게 썩 아쉬워보이진 않았다. 그건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물어보면 를르슈는 스자쿠의 허리를 감싸면서 환하게 웃었다.
“스자쿠와 함께하는 매 순간순간이 프로포즈 같았으니까 별로 아쉽지도 않아.”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되게 재수없네요.”
“도움이 못 되서 미안, 지노. 근데 를르슈가 했던 말 되게 감동적이지 않아? 나 조금 울 거 같아.”
“여기서 울어도 달래주는 건 침대 위야, 스자쿠.”
“아이 참, 를르슈도…. 여기는 회사인데.”
“뭐, 어때.”
정말 하나도,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대화가 이어지는 것에 지노는 다 마신 캔커피를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그리고 그날 지노의 업무 상태는 엉망이었다. 급한 일들이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퇴근하기 15분 전, 지노는 인터넷 검색창에 꽃다발과 프로포즈 링을 검색하면서 심란한 속을 달래려고 했다. 그런데 꽃다발도, 반지도, 카렌이 원하지 않을 때 들이밀면 그거야말로 괴롭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을 거 같고. 분위기를 타서 결혼하자고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아니, 애초에 카렌은 나랑 결혼하고 싶어해?
지노는 스자쿠와 를르슈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스며든 두 사람의 결혼한 미래가 부럽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어야 했을까. 지노와 카렌 모두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닦달하는 편은 아니었다. 서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로만 집안에 알렸을 뿐이고, 그 사람과 빨리 가정을 이루라고 조급하게 구는 집안이 아니었다. 집에서 조금 닦달했다면 카렌과의 결혼 이야기가 쉽게 나왔을까…? 아니, 나는 카렌의 의사가 중요한거지, 누군가에게 휩쓸리면서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닌데.
지노가 번민하고 있을 때, 10층 위의 기획경영부에서도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있었다. 코우즈키 카렌은 심란한 표정으로 마우스 휠을 굴리고 있었다. 결혼정보회사의 광고가 무작위로 뜨는 것에 X표시를 꾹꾹 눌러주고 나면, 약 올리기라도 하듯이 웨딩박람회에 대한 광고가 마지막에 떴다.
“웨딩박람회 가고 싶지, 나도 가고 싶다고. 근데 같이 갈 사람이 없다고.”
카렌은 중얼거리면서 창을 다 끄고 컴퓨터까지 꺼버렸다. 어차피 퇴근할 시간이었다. 요새 휴대폰에도 결혼 관련 광고가 많이 뜨는 것을 보면 카렌은 자신이 어지간히 결혼에 대한 검색을 많이 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배려가 깊은 지노와의 연애는 시간이 흐를수록 좋아지고 편해지는 건 당연해졌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다음 단계란 무엇인가. 바로 결혼이었다. 지노와 결혼하고 싶지만, 지노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지노는 카렌보다 더 어리니까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을 수도 있고, 카렌과의 관계를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카렌은 우울해졌다. 결혼하고 싶은 건 나뿐인건가.
카렌은 여자로부터의 청혼, 소위 말하는 역 프로포즈에 대해서 자주 알아보았지만 그런 케이스는 드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애초에 여자로부터의 청혼은 결혼이 이미 결혼이 예정된 사람들끼리의 가벼운 보여주기식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SNS 속의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서 성공한 프로포즈 후기를 올리는 것을 본 카렌은 죽은 눈으로 피드를 내려버렸다.
아무튼 6시가 되었다. 가방을 챙기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배들을 따라서 자신도 엘리베이터에 줄을 선 카렌은 퇴근길에 만날 지노를 생각했다. 그래, 지노는 아직 어리니까 결혼 생각이 없을 수도 있어. 그걸 내가 초조하게 다그칠 일은 아닌 거야. 카렌은 결혼에 대한 생각을 비우려고 애를 썼다.
“오, 카렌. 오랜만이네.”
그러나 퇴근길에서 마주한 것은 지노가 아닌 스자쿠였다. 늘상 같이 퇴근하던 를르슈는 어디로 갔는지 스자쿠는 혼자였다.
“그러게. 를르슈는 어디 가고 왜 혼자야?”
“가끔은 를르슈도 혼자 있고 싶대서.”
“거짓말 하지 마.”
“맞아, 거짓말이야. 를르슈는 야근한대서 나 먼저 가려고. 오늘은 내가 를르슈한테 ‘밥부터? 목욕부터? 아니면 나?’를 시전하는 날인거지.”
“그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해.”
그 사이에 카렌에게는 지노한테서 연락이 왔다. 5분 정도 늦겠다는 이야기였다. 뭐 5분 정도야. 카렌은 OK 이모티콘을 보냈다. 성실한 지노는 고맙다고 대답을 남겼다. 스자쿠는 바로 나가지 않는 카렌을 보면서 물었다.
“지노도 늦는대?”
“응. 한 5분 정도?”
“그럼 올 때까지 내가 같이 기다려줄게.”
“아냐, 너 갈 길 가. 옆에 있으면 속 터지는 소리나 할 거 같아서 그냥 빨리 가주는 게 고마울 거 같아.”
“에이,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카렌 혼자 있으면 분명 달라붙는 사람들 생겨서 지노도 불안해 할 거야.”
“아니, 그런 거 필요없고, 안 고맙다고.”
“괜찮아, 카렌. 우리 사이잖아!”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카렌의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스자쿠는 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카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카렌, 생각보다 기운이 없네. 무슨 고민 있어?”
“뭐? 고민 같은 건 없어.”
“흐음…. 너무 감추려고 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의지해 봐.”
“너 사람 말 좀 들어라. 고민이 없는데 무슨 의지를….”
“지노는 고민이 있으면 바로 바로 말하는 편이던데. 사랑하면 닮는다잖아, 닮아보도록 해봐.”
그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지노가 고민이 있으면 바로 말하는 편이라고? 카렌은 지노의 고민 상담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있기야 했겠지만 그런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카렌, 오늘 저녁은 파스타 먹을까, 아니면 쌀국수 먹을까?— 와 같은 저녁 메뉴 선정에 관한 고민 정도가 지노와 카렌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진지한 고민 상담 같은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지노가 무슨 고민이 있대?”
“응, 의외지만 있더라고. 미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던데.”
예를 들면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결혼 같은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스자쿠의 술술 나오는 말은 사실인 듯 싶었다.
“걔가 무슨 미래에 대한 고민이…….”
“미안, 카렌! 기다렸지!”
“아, 지노.”
양반은 못되는 지노가 나타났다. 카렌은 스자쿠에게 더 물어보려고 했던 입을 다물면서 아무렇지 않게 씩 웃으며 지노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그나저나 너 딱 5분 만에 왔네. 응, 카렌이 오래 기다리는 게 싫어서. 지노의 다정한 말에 카렌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녹아가는 것을 느꼈다.
귀여운 커플이 만나고 있는 것을 본 스자쿠는 괜히 자신의 어깨가 으쓱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두 사람을 나와 를르슈가 엮어준거라고? 정말 뿌듯하다! 스자쿠의 흐뭇한 미소에 지노와 카렌은 어딘가 꺼림칙한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스자쿠는 여기서 뭐해?”
“지노가 오기 전까지 카렌의 기사 역할을 한 셈이지. 난 아무한테나 이러지 않으니까 감사히 여기도록 해.”
“스자쿠가 카렌의 기사라니… 그거 참 고마운데, 이제 가도 돼.”
“너무하네, 지노. 오늘 고민도 열심히 들어줬잖아.”
“사실 하나도 도움 안 되서 하나도 안 고마웠어.”
“아무래도 카렌은 배은망덕한 지노랑 사귀는 걸 다시 고려하는 게 좋겠어.”
스자쿠의 장난스러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스자쿠는 제2주차장 쪽으로 향하며 갈 길을 갔다. 스자쿠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지노와 카렌도 지노의 차가 있는 제1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지노는 먼저 카렌이 탈 수 있게 조수석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괜찮아? 이제 문 닫을게. 지노는 이 차에 탈 때마다 매번 카렌에게 괜찮냐고 물으면서 문을 정중하게 닫아준다. 깔끔하게 정리되고 부드러운 향기가 맴도는 차 안은 지노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운전석에 지노가 앉고 나면, 카렌은 퇴근길의 라디오DJ가 될 준비를 마쳤다. 카렌의 휴대폰은 익숙하게 지노의 차에 블루투스 연결이 되어있었다. 이것은 서로 사귀는 동안에 정해진 역할과 루틴이었다.
오늘의 선곡은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의 선율이 매력적인 노래였다. 카렌은 요즘 릴스에서 유행하는 곡이라며 코멘트를 덧붙였다. 지노도 자주 들어본 노래였다. 서로 귀에 익은 구간이 나오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지만 뒷부분의 멜로디는 알지 못해서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하자, 지노와 카렌은 서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도로 위의 자동차는 거침없이 나아가기도 하면서 때로는 꽉 막힌 정체구간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카렌의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는 다리 하나를 건너야만 했는데, 그때마다 정체가 극심했다. 그러나 지노는 이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막혀서 카렌과 오래 있고 싶다는 불순한 생각까지도 했다.
노래 선곡의 레파토리가 떨어진 것인지, 카렌은 잠시 휴대폰을 잡고서 고전하는 듯 싶었다. 집중하는 카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노는 어느새 카렌과 시선이 맞았다. 카렌은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지노에게 말을 걸었다.
“지노, 요즘 무슨 고민 있어?”
“응? 고민?”
“방금 전에 스자쿠가 너 요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해서. 되게 심각하다고.”
“으음…?”
지노는 애매한 소리를 내며 대답을 꺼려했다. 미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카렌과의 결혼할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카렌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서 마음대로 진행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사안을 섣불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한테는 말 안 해주고, 스자쿠한테는 말하는 건 좀 섭섭해.”
“아,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냥…….”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남자끼리 할 만한 이야기였어.”
“……설마 야한 이야기?”
“아냐, 아냐, 그런 이야기는 진짜 아니야.”
“그럼 뭔데?”
“음…… 딱히 스자쿠한테만 이야기 한 것도 아니야. 선배한테도 물어봤고.”
“를르슈한테도? 그럼 왜 나한테만 이야기 안 해?”
지노는 자기 무덤을 파버린 기분이었다. 때마침 정체가 끝난 구간의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왔고, 지노는 운전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카렌은 잠깐만, 이라고 말하면서 운전하는 지노의 모습에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이 코너를 돌고 나면 카렌의 집이었고, 지노는 카렌을 집앞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지노의 고민에 대해 추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지노한테는 나는 의지가 안 되나봐?”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스자쿠랑 를르슈한테는 말할 수 있고, 나한테는 말 못 해주고.”
“…그렇다고 하기보다는.”
“그럼 뭔데?”
카렌의 재촉하는 말에 지노는 더 이상 피할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말하는 게 맞는 거야? 난 지금 꽃다발도, 반지도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카렌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채로 그런 걸 준비하는 것도 그렇잖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카렌은 아무말 없이 눈만 굴리고 있는 지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됐어. 남자들끼리 잘 해먹어. 아예 그냥 셋이서 같이 살지 그래? 카렌의 마지막 말에 지노는 고개를 저으며 금방이라도 내릴 것 같은 카렌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 내가 왜… 셋이서 같이 살아야 돼? 카렌이 있는데.”
“그럼 왜 나한테는 이야기 안 해주는데!”
“그건….”
“그건?”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그러니까 그게 뭔데!”
말 안 해주면 이젠 됐다고! 카렌은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뛰쳐나갔다. 지노는 시동도 끄지 않은 채로 카렌을 뒤쫓아 따라나왔다. 카렌, 잠깐만, 카렌…. 그러나 진심으로 달려나가는 카렌을 붙잡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카렌이 집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을 습관처럼 확인한 지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로 돌아온 지노는 이 상황을 만든 사람을 탓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겁하고 옹졸한 생각이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지노는 스자쿠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자쿠는 꽤 오래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아니, 전화를 받은 것은 스자쿠가 아니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유부남에게 전화를 건 저의가 뭐지?’
“저기요, 선배. 아직 7시거든요?”
‘우린 이미 야심한 시각이야.’
“그런 건 안 궁금해요. 저 지금 되게 심각하거든요?”
‘스자쿠, 지노가 심각하대. (뭐? 지노가 왜 또 심각해?) 몰라, 카렌이랑 싸웠나보지. (그럼 둘이서 해결할 문제지 왜 나한테 전화했대?) 네가 뭔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내가 뭘?)’
“맞아요, 스자쿠 잘못이에요. 스자쿠가 잘못해서 지금 카렌이랑 싸웠다고요! 스자쿠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네 잘못이라는데? (나 진짜 잘못한 거 없는데) 받아봐 (기다려, 옷 좀 입고.)’
‘전화 바꿨어. 지노, 내가 진짜 잘못한 거야? 너네 잘 사귀는 중이잖아. 결혼도 할 거잖아.’
“아니라고!”
지노는 차에서 소리를 버럭 지르는 자신이 어지간히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노의 고함에 스자쿠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뭐야, 둘이 결혼 안 해?’
“그걸 모른다고! 스자쿠, 세상 모두가 너와 선배처럼 자연스럽게 결혼하지 않아!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합의 하에 진행한다고! 난 지금 그 합의를 못 봤어! 카렌한테 갑자기 청혼할 순 없잖아! 당황해서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할거야?!”
‘오… 그건 되게 안타까운 일이다.’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지!”
‘몹시 힘들 거 같아.’
“젠장, 선배를 바꿔!”
지노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스자쿠와의 통화를 멈추기로 했다. 전화를 바꾼 를르슈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스자쿠가 원래 그렇잖아….’ 같은 말을 했다. 스자쿠에 대한 변명을 들어줄 생각도 없던 지노는 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노의 발악에 전화 너머의 스자쿠와 를르슈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카렌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하, 하면 되잖아.’
“어떻게 말하냐고요!”
‘말하면 되지 않을까?’
“꽃다발도, 반지도, 뭣도 없는데 그냥 가서 결혼해달라고 빌어요?! 꼴사납게?!”
‘꼴사나울 게 뭐가 있어? 중요한 건 기합이다.’
를르슈는 언젠가 지노에게 해주었던 말을 되풀이했다. 중요한 건 기합이다. 중요한 건 기합이다. 그 말을 되뇌던 지노는 질끈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그래, 중요한 건 기합이야. 꽃다발, 반지, 선물,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 기합인 거야.
“알겠어요.”
‘그럼 전화 끊어도 돼? 지금 좀 급해서.’
“네, 그러세요.”
지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는 를르슈에게 매정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 세상은 기합으로 돌아가는 거야. 중요한 건 기합이야. 머릿속은 오로지 기합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결혼도 기합도 전부 다 한끗 차이인 거야. 지노는 이제 청혼을 하러 가는 것인지 기합을 넣으러 가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카렌이 사는 집 앞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간 지노는 초인종을 눌렀다. 와라, 카렌! 나와라, 카렌! 너한테 오늘 난 기합을 다해서 결혼하자고 할 거야! 중요한 건 기합, 확실하게 찍어누르는 거야! 지노 바인베르그! 남자의 기합을 보여주는 거야!
“누구세요?”
그러나 세수를 막 마치고 나온 모양인지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나오는 카렌의 모습에 지노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어떡하지? 중요한 건 뭐였더라? 기합? 결혼? 기합? 결혼? 물기에 젖은 카렌 되게 청순해서 마음에 드는데 중요한 건 뭐였더라? 뭐였지? 뭐였더라?
“뭐야, 지노잖아. 무슨 일이야? 아, 혹시 이제서야 말할 마음이 들었어?”
지노는 기합과 결혼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반복되는 두 글자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더 혼란스러운 건 화장을 지워서 더 어려보이는 카렌의 귀여운 얼굴이었다. 물론 맨 얼굴은 자주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앳되어 보이는 카렌은 지노의 심장에 좋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숨도 잘 안 쉬어지고 심장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노는 어느 순간 하늘이 핑그르르 돈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라, 어라, 몸이 왜 이러지. 시야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자마자 지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카렌은 다짜고짜 찾아와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푹, 하고 고꾸라지는 거구의 지노를 겨우 받아냈다. 뭐야, 뭐야, 왜 갑자기 쓰러져?! 내가 뭐 했어?! 뭐 했냐고! 지노, 정신 차려, 지노, 지노! 지노! 카렌은 지노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가까스로 그의 뺨을 두들기며 깨워보려고 애를 썼다. 아, 이게 아니지. 구급차, 구급차를 불러야 돼…. 카렌이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서 휴대폰을 찾으려고 할 때였다.
“중…요한 건… 중요한 건, 기합이랬어.”
“지노! 정신이 들어? 너 갑자기 쓰러져서.”
중요한 건 기합, 이라는 말을 몇번 중얼거리던 지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쓰러졌다가 갑자기 일어났다가 그래도 되는 거야?! 카렌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노를 바라보았다. 지노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카렌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지노는 기도하는 자세를 갖추었다. 하늘에 계신… 누구였더라, 부처님 아버지였던가? 아무튼 카렌과 결혼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갑자기 기도를 올리는 지노를 보고서 카렌은 이제 지노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카렌!”
“왜, 왜 그러는 거야, 무섭게!”
“나랑 결혼해줘!!!!!”
“싫어!!!!”
기도를 마치자마자 결혼해달라는 지노의 말에 카렌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뭐야, 뭐냐고, 이게 뭐야!! 너 미친 거 아니야? 머리가 이상해진 게 분명해!! 카렌의 이어지는 말에 지노는 자신의 야심찬 프로포즈가 이렇게 무참히 꺾여버린 것에 허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각오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역시 구급차를 불러야겠어!! 카렌은 재빠르게 휴대폰을 찾아서 구급차를 부르는 동안, 지노는 진짜로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 내내 카렌을 위한 프로포즈 생각만으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고민한 덕분에,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 때문이었다. 구급차는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와서 쓰러진 지노를 들처업고 나갔다. 카렌은 보호자로 따라나서면서 들것에 실린 지노의 옆에 앉아있었다.
“카렌….”
“정신이 들어?”
지노는 자신이 어디에 누워있냐고 물었다. 구급차야. 너 지금 병원으로 갈 거야. 카렌의 말에 지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나 구급차에 탔다고? 왜? 너 쓰러졌었어. 이상한 소리도 하고. 무슨 소리를 했는데?
“중요한 건 기합이라고 하더니 갑자기 결혼하자고 했잖아, 너.”
“그래? 그래서 카렌은.”
“무슨 소리야? 난 싫어…. 정신이나 차리고 말을 해.”
“싫다고?”
“어.”
지노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하지만 구급차에 탄 이상 혀를 깨물어도 살려낼 의인들을 알고 있기에 그냥 얌전히 숨만 쉬기로 했다. 카렌은 얌전히 누워만 있는 지노의 모습을 보더니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웃는거야. 카렌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던 지노는 카렌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에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난 네가 좋아, 지노. 그래서 걱정이 돼.”
“…….”
“그런데 헛소리 할 정도로 아픈 줄은 몰랐어.”
“헛소리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중요한 건, 기합.
지노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카렌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상황은 불리했다. 스트레스로 쓰러져누워 구급차까지 탄 주제에 이런 모습은 꼴사납지만. 아무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전하고 싶었다.
“나랑 결혼해줘, 카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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